불가능한 연애

#제1화. 날카로운 그 노래의 추억

컴컴한 실내 안에서 하얗고 눈부신 조명은 오직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진한 생화 향기가 가득하고, 여기저기에 설치된 크리스털들은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잠시 숨죽인 듯 고요히 반짝이고 있었다. 홍해를 가르듯 야무진 기세로 쭉 뻗은 버진 로드 양옆엔 하객들이 가득 차 있었다. 모두가 이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말소리를 죽였고, 영상을 촬영하려는 핸드폰 불빛이 여기저기서 반짝였다.

이소는 숨을 들이마신 후, 혼주석을 슬쩍 곁눈질했다. 부모님의 표정은 대견함과 감격함, 홀가분함이 뒤섞인 것 같았다. 그것을 보는 이소의 마음도 자랑스러움으로 가득 찼다. 드디어, 라는 생각에 다시 한번 행복감이 가슴 가득 밀려들었다.

오늘은 이소 자신의 결혼식이다. 자신과 평생을 함께할 수 있다면 노예가 돼도 좋다는 충성맹세와 엄청 비싸진 않지만 평소 눈여겨봐 두었던 다이아몬드 반지를 내밀며 청혼한 그와 다사다난했던 연애사의 종지부를 찍는 날이다.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 뭔가 자랑스러워진 그녀는 한 번 더 어깨를 내리고 가슴을 쭈욱 폈다.

축가를 부르기로 한 사람은 남편인 주성의 절친이었다. 연애 시절 자주 어울려 놀았기에 익숙했던 그는 이소와 주성의 앞에 서서 마이크를 쥐고 있었다. 평소의 장난기 가득한 모습과는 다르게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은 경직된 표정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이소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모두가 숨죽인 그때, 축가의 전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음속 가장 깊은 곳까지 설렘으로 물들게 하는 듯한 전주였다. 잊을 수 없는 그 노래의 전주.

행복감에 올라갔던 이소의 입꼬리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설마….

안 돼.

전주가 진행됨에 따라, 축가는 점점 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노래였다.

죽을 때까지 다신 듣고 싶지 않았던 그 노래.

이소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온갖 생각들을 하나씩 헤아려 보고 있었다. 아직 노래는 시작하지 않았다. 전주 중이다. 가서 마이크를 빼앗아 버린다면…. 이 축가를 중지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저것 생각할 틈이 없었다. 이제 곧 노래가 시작될 것이다. 그 후의 일이 어떻게 될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 축가를 시작하려는 주성의 친구에게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주성과 잡고 있던 손이 느슨해짐을 느꼈다.

이소가 주성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는 자랑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곤 친구에게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객석에서는 환성이 터져 나왔다.

“너는 모르겠지마안 사실은 나 너를 사랑하고 있었어.”

그리고 이윽고, 주성의 입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서프라이즈였다. 친구가 부를 것처럼 했지만, 사실 축가를 준비한 사람은 주성이었던 것이다. 하객석은 로맨티스트라느니, 멋지다느니, 부럽다느니, 하는 말들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소의 굳은 표정을 긴장감과 놀라움으로 해석했는지, 노래를 부르는 주성의 얼굴은 자랑스러움으로 가득 찼다. 눈을 내리감고 고개를 휘저으며 자신만의 노래에 취해 있었다.

이소의 귀에 더 이상 그 노래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는 가슴 앞에서 부케를 잡고 있던 손을 아래로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식장 안엔 클라이맥스를 노래하는 주성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

“야!”

미간을 찡그린 채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던 이소가 고개를 들었다.

“어, 왔어?”

이소는 노트북을 닫고 옆으로 치우며 말했다. 세정의 손에는 커피 잔을 담은 쟁반이 들려 있었다. 이소는 동그란 눈을 크게 뜨며 세정에게 말했다.

“뭐야, 벌써 사 왔어? 같이 주문하자니까.”

“아냐. 내가 사고 싶어서 그랬어. 늦기도 했고.”

이소의 말에 세정은 테이블에 쟁반을 올려놓으며 멋쩍은 듯 씩 웃었다. 그 쟁반이 테이블에 채 닿기도 전에, 이소는 그 위의 황토색 액체가 담긴 잔을 얼른 집어 벌컥벌컥 마셨다. 커피의 쌉싸름함과 바닐라 시럽이 섞인 우유의 달콤함이 완벽하게 어우러져 뇌를 자극하자, 순식간에 이소의 기분이 두둥실 떠올랐다. 이소는 기분 좋은 소름을 느끼며 몸을 살짝 떨었다.

“하아, 살 것 같다.”

이소는 아이스 바닐라 라테를 한 모금 더 마시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봄 세정이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아바라 없었음 하이소는 진작 죽었을 거야. 그렇지?”

“말도 마…. 하, 이제 단것 좀 줄여야 하는데.”

말과는 달리 계속 커피를 들이켜는 이소를 보며 세정도 자기 몫의 아메리카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잘 다녀왔어?”

그제야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물어보는 이소의 눈을 피하며, 세정은 볼멘소리로 아니, 라고 대답했다.

“안 갔어?”

세정은 이소와 눈을 맞추며 커피 잔을 들었다.

“당연히 안 가지. 그 재수 없는 자리를 내가 왜 가니?”

“그래도 동기잖아.”

“동기는 개뿔이. 그런 새끼는 이제 상종 안 해.”

세정은 눈을 홉뜨며 커피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이정한 말로는, 사람들 별로 안 왔다더라. 그나마 온 사람들도 뒤에서는 다 수군대면서 욕하는 것 같았대. 당연하지. 그 뻔뻔한 연놈들. 그냥 조용히 혼인 신고나 할 것이지, 결혼식까지 올릴 건 뭐야. 진짜 양심도 없는 놈. 다들 그랬대, 오래 못 갈 거라고.”

“난 이제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그래.”

이소의 만류에도 세정은 악담을 계속했다.

“끼리끼리 만났지 뭐야. 그년도 제정신은 아니야.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만난 것도 그렇고. 조강지처 한 번 배신한 남자가 두 번은 못 할까 봐? 얘기 듣자 하니 살아온 과정 자체가 너랑은 비교 불가더라. 그 나이에 이직을 한 대여섯 번은 한 모양이던데 그게 다 남자 문제 때문이었다나 봐. 빚다 만 꽈배기처럼 생겨 가지곤 그런 얼굴을 좋아하는 얼빠진 놈들이 정주성 말고도 또 있었나 봐.”

세정은 입까지 가져간 커피를 마시는 것도 잊은 채 침을 튀겨 가며 울분을 토했다.

“야, 됐어. 그런 애들 얘기해 봤자 네 입만 더러워져. 커피나 마시자.”

이소는 커피잔을 든 세정의 손을 다시 입가로 가져다주며 말했다. 세정은 커피를 마시면서 잠시 숨을 골랐다.

이소와 주성의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주성의 외도가 그 원인이었다. 결혼만 해주면 노예가 돼도 좋다던 주성의 말이 이소를 얻기 위한 성의 없는 고백이었음이 드러나는 데까진 1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주성의 인내심은 딱 반년까지였다. 반년이 지나자 주성은 항상 새벽이 되어야 집에 들어왔다. 잦은 팀 회식이 그 원인이었다. 요즘 신혼이라서 회식일 때도 주성만 칼퇴를 시켜 주고 있는데, 아기는 아직이냐는 주성네 팀 부장의 저속한 농담을 듣기 전까지, 이소는 그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주성은 이소의 사내 인간관계가 넓지 않다는 점을 이용해, 같은 회사임에도 대담하게 이소를 속여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부터 이소의 생활은 지옥이었다. 부정한 생활을 들키자, 주성은 오히려 이혼을 요구했다. ‘나는 네가 나보다 훨씬 나은 인간인 줄 알고 결혼했다. 그런데 같이 살아보니 생각보다 별로다.’라는 말을 하며.

이소의 부모님은 지방에서 살고 계셨다. 타지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딸을 항상 걱정하시다가, 이제야 든든한 배필을 만나게 되었다며 안심하시는 부모님께 이런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전할 순 없었다. 이소는 어떻게든 주성의 마음을 돌려 보려 애썼다.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기에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하고 끙끙 앓던 이소에게 힘이 되어 주었던 것은 주성의 어머니, 즉 이소의 시어머니였다. 그녀는 아들을 제대로 키우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해하며, 어떻게든 주성의 마음을 돌려놓겠다고 약속했었다. 시어머니의 말을 믿고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며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던 주성을 참은 대가는 이혼 소송 서류였다.

사내 부부의 이혼 소송 소식은 회사 사람들에게 좋은 안줏거리였다. 그리고 활발하게 생활하며 회사 내 인맥을 많이 넓혀 놓았던 주성과는 달리 친한 사람이 별로 없었던 이소에게 그것은 너무 큰 형벌이었다. 어떻게든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 드리지 않고자 버텼지만, 결국 그녀는 이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주성과 함께 살던 집에서 자취 집으로 다시 이사하던 날, 아무렇지 않은 듯 ‘야, 새집으로 오니까 너무 좋다. 아늑하고.’라고 말하며 함께 짐 정리를 해주는 엄마의 등을 안고 이소는 엉엉 울었다. ‘엄마 미안해….’ 하고 말하며 자신의 등을 파고드는 그녀를, 이소의 엄마는 차마 마주 안아 주지 못하고 등 돌린 그대로 같이 울었다.

뻔뻔하게 계속 회사에 다니던 주성과는 달리, 이소는 회사를 나왔다. 지금 나가면 너 정말 정주성한테 지는 거라며 붙잡는 세정의 말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디를 돌아다녀도 자기 얘기를 하는 것만 같았고, 심지어는 회사가 아닌 곳에서도 두 사람 이상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정신과에서 공황 장애 진단을 받은 이소는 살기 위해선 이 회사를 나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 주성이 불륜녀와 만남을 이어 가다 기어코 재혼을 한 것이었다. 한 회사에서 결혼을 두 번 한 것이다. 어차피 회사에 이소가 없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니, 이소가 있었어도 그런 선택을 했을 거라고, 그 새낀 그런 놈이라고 세정은 말했다. 세정은 이소와 나이는 같았지만 1년 늦게 입사해 이소보다 후배였고, 주성과는 동기였다. 입사하자마자 이소의 직속 후배로 들어갔던 세정은 괄괄하고 덜렁거리는 자신을 살뜰하게 챙겨 주며 실수도 참을성 있게 보듬어 주는 이소를 좋아하게 되었고, 둘은 서로의 동기들보다 더 친하게 지냈었다.

애초에 세정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던 주성을 그리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이소의 선택이기도 했고 결혼하면 좀 나아지겠지 하는 마음에 결혼을 축하해 줬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세정은 주성을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정도로 싫어했고, 주성도 이소와는 달리 괄괄한 세정을 항상 무서워했다.

하지만 둘은 아직 같은 회사에 다니는 동기였기 때문에 동기 모임 등에서 마주쳐야 하는 일들이 많았고, 그때마다 으르렁대는 세정을 진정시켜 주는 건 정한이었다. 정한은 세정과 대학교 때부터 친구였고, 주성과도 친했으나 회사 밖에선 절대 어울리지 않는 바른 생활 사나이에 가까웠다. 그는 세정, 주성 둘 다와 친했으나 세정과 친한 이소나 주성 사이에서 늘 중립의 입장을 지켰다.

“야, 그러고 보니, 너는 아직 누구 없어?”

그간의 일을 생각하던 이소의 귀를 세정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있긴 누가 있어.”

이소는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회사 나간 뒤로 미모가 아주 물이 올랐는데 이참에 부자 한 명 확 낚아채. 보란 듯이 초호화 결혼식 하자고.”

세정이 목소리를 높였다.

“야, 됐어. 나 이제 그런 거 관심 없어. 너나 이정한이랑 잘해 봐.”

이소가 일침을 놓듯 말했다.

“거기서 이정한이 왜 나와? 야, 말했지. 나 그놈이랑 완전 상극이라고. 내가 그놈만 아니었으면 정주성 사지를 찢고도 남았어. 맨날 선비같이 굴면서 말리는 그놈만 아니었어도 내가….”

콧방귀를 뀌며 험악한 기세로 말하던 세정이 점점 굳어 가는 이소의 표정을 보고 말꼬리를 흐렸다.

“야, 나가자.”

이소는 갑자기 가방을 챙기며 말했다.

“야, 뭔 소리야. 이제 커피 나왔는데. 가긴 어딜 가.”

“여기 재수 없어. 가자니까.”

“갑자기 왜 그….”

신경질적으로 일어나려는 이소를 말리던 세정이 잠시 멈추더니, 피식 웃었다.

“나 참. 야, 됐어. 앉아.”

세정은 일어나 카운터로 가서 뭐라 뭐라 말하더니 다시 돌아왔다.

그 순간, 카페 안의 음악이 바뀌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이소는 마법이 풀린 듯 진정하며 다시 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야, 너 너무 과민한 거 아냐?”

“과민하긴. 내 인생을 망친 게 바로 그 노래야. 죽을 때까지 듣고 싶지 않은 노래라고.”

이소는 중얼거리며 다시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