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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나더러 선우겸 네 매니저가 되어달라고? 갑자기?”
하나의 보라색 빛이 감도는 새까만 눈동자가 깜빡였다.
“그래, 단하나 너. 이제 촬영도 끝났으니 우리 더 볼 일 없을 거 아니야. 그러니 지금 얘기해야지.”
그래, 뭐… 일하던 호텔 측에서 드라마 촬영 섭외가 왔다는 말은 들었다. 이것 때문에 요즈음에 윗선에서 얼마나 지시가 많았는데.
근데 여기서 친구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
그것도 주연 배우로….
***
“잘 아는 사람이 매니저 해주면 좋잖아. 편한 사이인 편이 낫지.”
선우겸의 말에 하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빤히 올려다봤다.
…제가 안 편합니다만.
선우겸이 현재 촬영중인, [자각몽].
그는 ‘띵작 탐지겸’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기에 그가 출연한다는 것부터 ‘보증된 스토리’라는 밈이 생겼다. 덕분에 동 시간대 드라마 중 가장 높은 시청률을 보유하고 있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솔직히 단하나는 알 바 아니었다.
영화고 드라마고 바빠서 잘 챙겨보지 않았다. 전에는 그렇게 찾아보던 메이킹 영상도, 제작발표회까지도 전부.
그렇게 현실에만 치여 살다 보니 제 앞에 수트를 빼입고 까리하게 서 있는 이 남자가 자신의 친구라는 것도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처음엔 못 알아봤어…. 이게 카메라 마사진가? 원래도 연영과 남주 1순위긴 했지만 꾸며놓으니 어나더 레벨이네.’
하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젠 더 이상 자신이 알던 그 선우겸이 아닌 것 같아서 더 거리감이 느껴졌다.
“흐음, 어디서 대체 뭘 하고 있나 궁금했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을 줄은 몰랐어. 연락도 안 받고 어느 날 학교에서도 사라지더니, 이렇게 다 만나네. 역시 세상이 좁아.”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우겸은 하나의 아픈 부분만 콕콕 찔러대며 말을 이어갔다. 하나는 겸의 말에 볼을 긁적였다.
“아하하, 그러게….”
하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목 주변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러고는 말을 급하게 돌렸다.
“근데 갑자기 매니저 일이라니 무슨 소리야? 난 그쪽이랑 연고도 없는데.”
“글쎄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난 너랑 같이 일했으면 좋겠고 넌 오늘 나한테 실수했으니까?”
선우겸은 그는 입가에 웃음을 띠며 하나가 별로 돌아보고 싶지 않던 아까의 일을 친히 회상시켜 줬다.
“로비 촬영씬 후에 하나 네가 내 옷에 케이터링 서비스를 쏟았고, 그로 인해 다음 촬영이 지연됐어. 그로 인해 촬영팀에 피해를 줬고, 난 오후에 있을 오늘 광고 촬영을 취소했지. 공인인 내 이미지와 평판이 얼마나 떨어졌을지….”
마치 회갈색 늑대를 닮은 외모에 쭉 뻗은 키, 나른한 웃음이 더해져 배부른 포식자를 의인화한다면 이런 느낌이리라 생각했다.
대학에 다닐 무렵의 ’과 동기 선우겸‘과 현재 ’톱스타 선우겸‘의 괴리는 분명했다.
머리에 뭐 바르는 걸 싫어해서 하늘하늘 날리던 잿빛에 가까운 머리카락은 왁스로 매만져진 쉼표 머리로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다. 과거와 달리 근육으로 인한 벌크업으로 덩치마저 커진 탓에 정말로 그냥 지나치면 못 알아볼 것이 분명했다. 얇은 쌍꺼풀이 눈꺼풀에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덮고 있는 눈동자는 과거와 달리 집요하고 탁해져 있었다. 그래서 하나도 처음에 촬영장에 온 겸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짓궂은 성격은 여전한 것 같았다. 놀리듯이 자신의 실수를 조목조목 따져 드는 그가 참으로 얄미울 지경이였으나 하나에게도 억울함은 있었다.
지배인이 촬영 스태프들에게 음료를 제공하라고 일렀고, 하나는 그걸 서빙하다가 미처 큰 키 때문에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선우겸이 자신과 부딪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 덕분에 일터에서 욕을 먹고 촬영 스태프들의 따가운 눈총도 받아야 했다. 양쪽으로 자신을 구박하던 순간이 떠올라 울컥 화가 치밀었다.
‘이 자식 뭐지…? 뭔가 재수 없어졌네.’
따져보면 양쪽에 책임이 있는 거라고 그 재수 없는 낯짝에 대고 외치고 싶었으나 하나는 꾹 참았다. 성격도 외모도 바뀌어 꼭 다른 사람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내 실력은 우주 최강, 뭐 이 지랄 하던 초딩같던 선우겸은 어딜 가고 뭐 이런 배우 병 말기 환자가….
아, 그래서 배우 병이 생긴 건가. 하긴 그때도 자기애가 있는 편이었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촬영팀과 배우들에게 모두 정중히 사과드렸고, 사후 처리도 최선을 다해 도왔어. 그리고 나 또한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야. 그렇지만 그 일로 사람을 협박하시는 건 좀 치사하네.”
“협박이라고 느꼈다면 미안해. 좀 장난친 것뿐이야.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 마음이라고 생각해 줘. 네가 너무 갑자기 학교 그만뒀잖아. 내 연락도 다 씹고.”
“아… 그 뒤로 정신없이 사느라. 연락 안 한 건 미안.”
“그래. 연락 끊고 이렇게 살고 있었네.”
웃음이 머금어진 겸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서늘함이 느껴졌다. 왠지 자신의 처지를 묘하게 비꼬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분위기가 좀… 변한 건가? 원래 얘가 이렇게 불편했었나….’
하나는 땀을 삐질 흘리며 자신을 쫒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음…, 어쨌든 매니저 제안은 거절할게. 이미 호텔에서 일한 지도 오래됐고, 연차가 쌓여서 내후년이면 월급도 오르거든. 그에 비해 매니저 일은 다시 신입부터 해야 하니 돈이 안 될 것 같아. 그리고 난 연예계에서 일하고 싶은 생각 없어.”
하나는 겸을 향해 고개 숙여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자 겸은 하나를 나른하게 내려다보며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마치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는 듯이.
“페이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맞춰주지, 뭐. 원래 스카우트는 연봉 협상부터 하거든. 인지도 최상위급인 나, 선우겸의 개인 매니저로 채용되는 거니까 거기에 플러스알파 될 거고.”
하나가 겸의 말에 움찔거리며 숙였던 고개를 들자, 그는 허리를 숙여 하나와 눈높이를 맞춘 채 느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내가 언제 연예계에서 일하라고 했던가?”
“뭐?”
“넌 그저 날 위해 일하면 되는 거야.”
겸은 나른하게 웃으며 하나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녀의 호텔 유니폼 뒷주머니에 있던 업무용 노트를 꺼냈다.
갑자기 다가온 그에 놀라 하나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겸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가슴팍 주머니에 소품으로 꽂혀있던 만년필을 꺼내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마음 바뀌면 연락해. 원하는 월급도 생각해 오고.”
그의 전화번호였다. 하나가 어버버하는 사이 예쁘게 반으로 접힌 종이와 그녀의 업무 노트는 그녀의 양손에 주어졌다.
물끄러미 제 손에 쥔 메모를 내려다보던 하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굳이 돈을 많이 줘가면서 자신을 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돈이면 제대로 된 매니저를 하나 뽑을 수 있을 테니까.
“…….”
하나는 선우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잿빛의 눈동자가 하나를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가에는 웃음이 서려 있었다.
“혹시 연민이야?”
하나가 선우겸에게 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글쎄… 내가 널 가엾게 여길 이유가 뭐가 있지?”
그러자 겸이 하나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가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보랏빛이 감도는 검은 머리카락이 찰랑였다. 느리고 집요한 손길이었다.
“네가 이 꼴을 하는 것도 네 선택인데.”
겸이 검지를 주욱 내리며 하나의 호텔 유니폼 위에 호선을 그어갔다. 그 손가락이 느리게 그녀의 가슴팍에 있는 금색 명찰에 도달하자, 그것을 살짝 당겼다. 호텔 천장의 조명이 비치며 하나의 이름이 번쩍였다.
“뭐…, 여기서 일하는 것보다야 익숙하겠지, 안 그래? 고향에 간 기분일 테니까.”
“…너 뭔가 되게 변했다.”
“하하, 너만 하겠어. 단하나.”
하나가 미간을 좁혔다. 서글서글하게 웃는 낯짝이 어딘가 모르게 꺼림칙했다. 동시에 수치심이 몰려왔다. 애초에 여기서 그를 마주친 것도 쪽팔렸다. 가능한 자신을 아는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고 살아가고 싶었는데.
하나가 명찰을 매만지는 그의 손을 손등으로 쳐내자, 그가 웃으며 순순히 손을 거뒀다.
“난 다음 스케줄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 하나야.”
그렇게 겸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호텔 로비 쪽 출구로 향했다. 그러더니 뒤를 돌아보며 하나를 향해 외쳤다.
“아, 그리고 영광으로 생각해. 그 번호 아는 사람 몇 없거든. 그때랑 달리 귀한 번호다? 내다버릴 생각 말고.”
하나는 멍하니 시야에서 사라지는 선우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가 적어준 메모를 내려다보았다.
선우겸
010-3411-XXXX
‘대체 뭐지….’
그가 지나간 자리의 호텔 로비는 며칠간 촬영 장비와 촬영 스태프, 배우들로 북적거리던 모습과 반대로 고요했다.
마치 폭풍이라도 지나간 것처럼.
***
“나왔어-.”
하나가 기력이 다 빠진채 너털거리는 걸음으로 집에 들어섰다.
손에는 관리비, 수도세를 비롯해 납부해야 할 고지서가 뭉텅이였다.
낡은 투룸에 들어서니 하나의 남동생, 단건우가 부엌에서 라면을 끓여 먹고 있었다.
“누나, 늦었네. 저녁은?”
“먹었어.”
“왜 이렇게 늦어? 연락도 안 받고.”
“아, 미안. 엄마 면회 때문에 무음으로 해놔서 몰랐네. 치료비도 수납할 겸 다녀왔어.”
엄마는 1년 전, 복통을 호소하며 병원에 갔다가 대장암 진단을 받았다. 얄궂게도 대장암은 초기에 증상이 없는 편이라 엄마 역시도 오래 방치가 되어있어서 수술과 항암치료를 병행하게 됐다. 물론 그동안 상태가 그다지 호전되지 않아서 의사의 진단에 따라 몇 개월의 항암치료를 더 진행하게 됐다.
’다른 건 그럭저럭 커버가 되는데, 치료비가 빡세네. 마이너스야, 마이너스…. 거기다 대출비랑 이자도 갚아야 하고.‘
엄마의 아픔보다 돈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스스로에게 진저리가 났다.
좌절할 힘조차 나지 않는 이 현실에 하나는 거실 벽에 기대어 지긋지긋한 고지서들을 삭삭 넘겼다.
그러다 문득 주머니에 넣어두고 잊고 있었던 선우겸의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꺼내 펼쳤다. 그때나 지금이나 참으로 정갈한 필기체였다.
하나는 그 종이에 적힌 숫자들을 권태로운 눈으로 바라봤다.
“단건우- 넌 졸업하면 뭐 할 거냐?”
하나의 질문에 부엌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당연히 취업이지. 누나 수고 좀 덜어주려면 최대한 빨리 취업하는 게 좋잖아. 근데 하, 군대 가야 해서.”
“네가 장학금 받고 학교 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수고 덜어주는 거야. 너 졸업할 때즈음이면 치료비도 안 들어가서 지금보단 낫겠지. 그딴 거 신경 쓰지 말고 네 꿈이 뭐냐고. 하고 싶은 거.”
“그럼 뭐 무조건 부자 아님?”
“그게 꿈이냐? 어휴, 말을 말자.”
단건우가 지금 22살이던가. 하나는 딱 저 나이에 배우 오디션을 포기했었다. 그리고 바로 취업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유목민처럼 떠돌아다니다가 어쩌다 보니 호텔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거였다.
‘정말 돈만 보고 흘러간 인생이군.’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아니, 아니다.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최선은 이것밖에 없다.
건우의 말에 하나는 벽에 머리를 툭 떨구며 달빛이 드리우는 창밖을 바라봤다.
“넌 그러지 마. 너는 돈 말고 하고 싶은 거 해. 단건우.”
하나는 눈을 내리깐 채 종이에 수 놓인 숫자들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돈이 인생의 방향성인 삶, 진짜 멋대가리 없거든….”
말끝을 흐리던 하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방에서 담배곽을 챙겨 현관으로 향했다.
“어디가?”
단건우의 물음에 하나는 담배 곽을 흔들어보이며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밖으로 나온 하나는 집 근처에 있는 뒷골목에 자리를 잡고 벽에 기댔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담배곽에 넣어둔 편의점 라이터에 불을 붙였다.
하아-.
담배 연기와 함께 단전에서 짙은 한숨이 뿜어져나왔다.
하나는 선우겸이 준 전화번호를 착잡한 얼굴로 내려다봤다. 잠시 후 그녀는 휴대폰에 쪽지 위에 적힌 번호를 화면에 눌러 담았다.
선우겸.
그래, 솔직하게 인정하자면 지금 자존심 부리는 게 맞다. 그가 자신을 알아채고 이름을 불렀을 때, 그리고 그가 ’선우겸‘임을 알았을 때, 반가움보다 박탈감이 먼저 들었다.
객관적으로 보나 논리적으로 보나 승낙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조건이다. 어차피 커리어니, 뭐니 그런 거 신경 쓰지도 않았으면서.
메뚜기 떼처럼 돈이 되는 곳으로 향하는 사람이었는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자존심을 세우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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