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이 다음 달부터 학교 복학하거든. 그래서 윤성이 집 때문에 순천 내려갈 거야. 모레, 내려갈 건데 시간 되면 전화할게. 일이 많아서 서울로 바로 올라가야 될 것 같지만.’
‘아, 그래? 그 녀석도 복학하는구나.’
‘응, 제대했으니까. 윤성이 좀 가끔씩 챙겨 줘. 너 사는 아파트에서 많이 안 멀어. 걔 혼자 살림은 잘 하긴 하지만.’
‘걔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걱정도 많다. 나이를 스물넷이나 먹었는데. 못 말리는 과잉보호, 여전하구나.’
이틀 전, 윤하와 통화했던 내용을 기억해 낸 나연이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윤하를 바라봤다. 눈이 반달로 휘어질 만큼 활짝 웃고 있는 윤하를 본 나연은 이건 뭔가 수상하다는 느낌을 즉각 받고 문을 닫으려 했다. 저 눈웃음은 분명 무언가를 부탁하기 위할 때 쓰는 웃음. 남들은 윤하의 환한 미소를 보고 웃는 모습이 정말 예쁘다, 라고 하지만 그녀를 모르니까 할 수 있는 말이다. 저 미소는 다 가식이다. 나연은 그녀를 십 년째 보아온 한 사람으로서 저 웃음의 진정한 의미를 안다. 뭔가 난처한 부탁을 할 때 짓는 미소. 저 미소를 짓고 있는 걸 보면, 뭔가를 부탁하러 온 게 틀림없었다.
“어머, 왜 문을 닫으려고 그래.”
윤하의 손이 더 빨랐다. 잽싸게 문고리를 잡은 윤하가 예의 그 미소를 지으며 나연을 바라보았다. 승자의 여유로움이 깃들어 있는 미소였다.
“또 무슨 부탁을 하려고 그러는 거야.”
“부탁? 부탁이라니…….”
“나 빙빙 돌려서 말하는 거, 제일 싫어하는 거 알지.”
“흐음.”
나연의 냉기 서린 말에 윤하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나 봤어……. 윤성이 옆에 트렁크 있는 거.”
이번에는 헉 하고 놀라는 윤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렇게 된 이상 그녀 앞에서 거짓말을 늘어놓을 수 없었다.
“맞아. 나 부탁 있어서 온 거야…….”
“들어와.”
이제야 순순히 인정하는 윤하를 보며 나연이 문을 활짝 열었다. 윤하의 뒤를 이어, 윤성이 나연을 지그시 쳐다보며 들어왔다. 그의 입꼬리에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넌, 변한 게 없구나.”
얼굴에는 미소를 담고 있지만 말투는 냉랭한 윤성에게 나연이 코웃음을 치며 아까부터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트렁크로 시선을 돌렸다. 집에 있어야 할 트렁크가 대체 왜 여기로 질질 끌려오는 걸까. 그의 커다란 트렁크를 보는 나연의 이맛살이 조금 구겨졌다.
“아휴. 더워.”
“아, 잠깐만. 에어컨을 꺼놨었어.”
손부채질 하는 윤하를 본 나연이 에어컨을 작동시켰다. 끈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금방 시원한 바람이 흘러나왔다.
“뭐, 마실래.”
“그냥 집에 있는 거 아무거나 줘.”
윤하가 소파에 털썩 앉으며, 윤성도 옆에 앉으라는 듯 자기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나연의 집을 한 번 스윽 둘러보고 있던 윤성이 윤하의 손짓에 소파로 가서 앉았다.
“너 좋은 데서 산다. 혼자 살기에는 큰 거 아냐, 방도 세 개나 되네. 누나가 계약했던 원룸하고는 역시 비교가 안 되는구나. 흐음.”
주방에서 주스를 따르던 나연이 윤성의 말에 주스를 따르다 말고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지금 계. 약. 한. 이 아니라 계. 약. 했. 던. 이라고 말했다. 현재 진행형이어야 할 계약이 과거형이 되어 버린 거면 계약한 집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단 말인가. 나연의 이맛살이 조금 전보다 더 좁혀졌다.
“너 지금 그게 무슨 뜻이야. 계약했던이라니, 계약한 집이 잘못되기라도 한 거야?”
잘못이라는 단어에 윤하의 시선 처리가 불안해지는 걸 나연은 보고야 말았다. 그래도 주스는 잔에 다 따른 나연이 오렌지 주스 세 잔이 놓인 쟁반을 들고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큰 보폭으로 다섯 걸음 만에 두 사람 앞으로 다가간 나연은 그들에게 주스 한 잔씩을 건네고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윤하야, 말해 봐. 집이 어떻게 된 거야?”
“아, 그게…….”
윤하는 주스를 한 모금 꼴깍 마시고 마른 목을 축인 뒤에 입을 열었다. 나연을 위에서 보고 있자니, 그녀의 두 눈이 오늘 따라 더 치켜뜬 것처럼 보인다.
“계약한 집이…… 이중 계약이 되서…….”
“뭐? 이중 계약?”
나연의 오른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눈썹이 꿈틀댄다는 건 그녀의 신경이 날카로워지기 직전이라는 뜻이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윤하가 윤성의 팔을 툭툭 쳤다. 네가 모든 사정을 얘기하라는 제스처였다.
“누나가 계약한 집이 이중 계약이 돼 버린 거야. 너도 알잖아. 누나가 가끔씩 나사 하나 풀린 짓 잘하는 거. 나이를 스물일곱 먹었는데도 집 계약 하나 제대로 못하고, 나도 난감하다.”
윤성의 설명은 아주 일목요연했다.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닌 것처럼, 너무 깔끔하게 말해서 순간 나연이 할 말을 잃었다. 집이 이중 계약이 돼서 다시 집을 구해야 하는 이 상황에 어디서 저런 느긋함이 나오는 걸까. 뭘 믿고 저렇게 느긋한 표정으로 앉아 있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너 나한테 무슨 부탁하려고 온 거야? 설마, 윤성이 얘 집 구할 때까지 여기 있게 해 달라, 이런 부탁하려고 온 거 아니지?”
윤하가 하고 싶었던 말을 콕 찍어서 한 나연을 보며 윤성이 픽 웃었다. 누가 십년지기 친구 아니랄까 봐, 하고 싶었던 말을 저렇게 잘도 맞추는지, 괜히 십년지기 친구가 아닌가 보다.
윤성이 혼자 소리 없이 웃고 있는 걸 본 나연이 그를 확 쏘아봤다. 느긋한 태도도 모자라 웃기까지?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게 자신이라는 걸 깨달은 나연이 두 사람을 매섭게 노려봤다. 그녀의 눈빛에 윤하는 움찔, 윤성은 코웃음, 반응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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