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둠이 깔린 세상이 고요히 잠든 가운데 인희와 현섭의 방만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성난 짐승이 서로 으르렁대는 날 선 목소리가 간간이 밖으로 새어 나왔다.

“나도 몰랐어. 그 여자가 아이를 낳고 키우고 있었는지 나도 몰랐다고. 결코 널 속인 게 아냐.”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적어도 결혼 전에 임신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 아냐!”

인희는 앙칼지게 현섭을 노려보았다.

“지우자고 했어. 실수였으니까. 돈도 줬고. 그 여자도 그렇게 하기로 했는데…… 날 속인 거야.”

“넌 날 속인 거고.”

죄책감과 미안함에 현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인희야…… 널 위해서였어.”

“다른 여자랑 몸을 섞고 싶었으면 애초에 나랑 결혼은 하지 말았어야지!”

“사랑하는데 어떻게 결혼을 안 해? 단순히 실수였어. 딱 한 번이었다고. 정말이야. 그래서 지우라고 한 거야. 그럼 과거도 지워질 테니까.”

“그래. 첫 번째는 실수였다고 치자! 그럼 두 번째는 뭐야? 둘째가 네 살이라고 했지? 우리 연서가 여섯 살이니까, 연서가 두 살이었을 때 그 애가 태어났다는 건데, 결혼하고 나서도 꾸준히 그 여자를 만났다는 거잖아. 그건 뭐냐고?”

현섭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쿵쾅대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솔직하게 찬찬히 사연을 얘기하려 노력했다.

“처음에 그 여자의 연락을 받고 집에 찾아갔어. 내 어릴 적 얼굴을 빼닮은 아이가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걸어와서 안기더라고.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어. 이제 와서 어쩌라는 거냐고, 미친놈처럼 길길이 날뛰고 살림살이도 부수고 손찌검도 해봤어. 오지 말아야지, 안 보고 살아야지 하면서도 내 아이만은 끊을 수 없었어. 그리고 둘째는…… 연서가 태어나고 넌 날 엄청 외롭게 만들었어.”

“뭐라고?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아예 두 집 살림을 하기로 결정을 한 거야? 우리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 하나 남았다고 내가 우스워 보이니? 이 뻔뻔한 자식!”

인희는 분노를 담아 현섭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 벌겋게 물든 현섭의 뺨 근육이 실룩였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현섭을 향해 인희는 다시 한 번 더 오른손을 올렸다. 현섭이 내려치려는 인희의 손목을 꽉 잡아 그러쥐었다.

“한 번만 더 부탁할게. 내 아이들 받아 줘. 이 집에서 연서와 한 남매처럼 살게 해줘. 그럼 다신 그 여자는 안 볼게. 첫째는 한세준 아홉 살이고, 막내는 한화영 네 살이야. 생활이 어려워져서 이제 그 아이들이 갈 데가 없어.”

“미친놈! 어림도 없어. 이거 놔!”

현섭은 괴로워하는 인희의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나머지 왼팔마저 잡아 올렸다. 가녀린 인희의 몸이 현섭의 힘에 이리저리 휘둘렸다. 현섭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인희를 침대 위로 던지듯이 밀쳤다.

“내 인생이 이렇게 된 데에는 네 잘못도 있어!”

인희는 손목을 문지르며 무슨 소리냐며 의아한 얼굴로 현섭을 쳐다보았다.

“김종구!”

인희의 표정이 굳어졌다. 현섭이 빈정거렸다.

“너한텐 항상 김종구가 옆에 있잖아. 결혼 전에도 후에도 여전히 지금도.”

“종구는 그냥 대학 친구야. 나는 물론이고 너하고도.”

“남녀 사이에 친구라고? 과연 그럴까? 종구 자식, 널 이성으로 좋아했어. 우리 결혼 소식 듣고 술 처마시고 나한테 와서 행패 부린 녀석이라고. 넌 그런 녀석이랑 지금도 연락하며 지내고 있고.”

“그건 과거 일이야. 지금은 정말 순수한 친구 사이고. 종구도 결혼했고 아들도 둘이나 있어.”

“그렇다고 종구한테 너에 대한 감정이 없어진 건 아닐 거야. 남자는 남자가 잘 알아. 종구가 널 보는 눈빛이 남다른 거, 넌 모르지?”

인희는 대꾸할 가치가 없다는 듯 시선을 피한 채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난 너처럼 부정한 짓은 저지르지 않았어. 지금 얻다 대고 네 잘못을 나한테 뒤집어씌우려는 거야?”

현섭은 인희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을 켜고 잠금을 푼 뒤 통화 내역을 열었다.

“이거 봐. 그 자식하고 통화한 내역이 나보다 많잖아. 문자 내역은 또 어떻고.”

현섭이 직접 보라며 인희 앞으로 핸드폰을 던졌다. 밀려오는 두통에 인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현섭이 다가가 인희 뒤에 앉았다.

“꼭 육체적 관계를 맺어야 부정이 되는 거 아냐. 너와 종구 사이, 이것도 부정이라고.”

인희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쳤다. 현섭이 인희의 어깨를 잡아 강제로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너한테는 차갑고 냉정한 면이 있어. 함부로 다가갈 수 없게 만드는 철벽같은 거. 난 그런 너를 많이 좋아했고. 지금도 많이 좋아해.”

현섭이 살살 달래듯이 손등으로 인희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올이 가는 생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기고 도톰한 입술을 엄지로 지그시 눌렀다. 그러곤 예측할 사이도 없이 입을 맞추었다.

“뭐 하는 짓이야?”

“난 우리 아이들이 부모 없이 부족하게 사는 꼴 못 봐.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난 연서한테만이야.”

점점 뒤로 물러나는 인희의 몸을 현섭이 다가가 덮쳤다.

“당연히 우리 연서도 아빠 없는 아이로 자라게 하면 안 되지. 그러니까 너와 내가 부모로서 함께해야 한단 말이야. 이해가 가?”

현섭은 다시 키스를 시도했다. 요리조리 피하던 인희는 힘에 부쳐 이내 포기하고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그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깊은 사랑에 빠졌던 시절을 생각하며.

성욕이 차오른 현섭은 그녀에게서 입을 떼지 않은 채 블라우스의 앞 단추를 뜯어 벌리고 브래지어의 끈을 풀어 블라우스와 동시에 어깨 아래로 내렸다. 그녀의 살갗은 여전히 하얗고 부드러웠다. 아이를 낳았음에도 그녀의 젖가슴은 농익은 복숭아처럼 발그레하고 매끄럽고 유혹적이었다. 그의 페니스는 바지를 뚫고 나올 정도로 크게 부풀어 있었다. 그는 바지와 트렁크를 벗어 버리고 인희의 치맛단을 골반 위로 올려 팬티를 끌어 내렸다. 은밀한 여체 사이를 손바닥으로 쓸어 올렸다.

인희는 천장을 바라보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만해. 현섭아, 그만!”

인희가 몸부림치며 소리쳤다. 현섭이 움직임을 멈추고 가슴에 묻었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인희는 치맛단을 내리고 다리를 모아 앉았다. 헝클어진 블라우스를 추슬러 가슴을 가렸다. 몸정을 나눈다고 한들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인희는 이미 준비해 두었던 말을 꺼냈다.

“이혼해.”

“뭐?”

“그게 최선이야. 위자료도, 배상도 필요 없어. 그냥 너만 내 집에서 나가 줘. 연서는 법원에서 결정하는 대로 만나게 해줄게.”

“아니. 아니지, 아니지…… 이혼이라니 말도 안 돼.”

현섭이 가까이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고 비웃었다. 그는 인희의 머리칼을 한쪽으로 모아 세게 잡아 쥐었다.

“이혼은 절대 못 해.”

“지금 상황이 웃겨?”

“아니, 너야말로 상황 파악을 잘못하고 있는 거 같아.”

“한현섭!”

“날 그렇게 부르지 마. 난 이 집의 가장이고, 네 남편이고, 연서 아빠야.”

“…….”

인희는 가슴을 들썩거리며 경멸이 담긴 눈동자로 현섭을 쳐다보았다. 그의 손이 인희의 턱 선을 따라 움직이다 목덜미를 잡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러곤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말했다.

“네가 잘 모르는 것 같아서 말해 주는데…….”

“뭘?”

“너도 한번 느껴 봐.”

“대체 뭘?”

“내가 그 여자와 내 아이들을 데리고 이 집에 들어오는 날에, 너와 종구, 둘이서 시시덕거리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는 내 기분이 어떤지 한번 느껴 보라고. 얼마나 마음이 쓰리고 질투심에 열이 나는지.”

인희는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제대로 알아차릴 수 없었다.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되자, 배신감에 치가 떨리고 잔인함에 살이 떨렸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제정신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릴…….”

인희는 분에 겨워 현섭의 왼쪽 뺨을 쳤다. 다시 오른쪽 뺨을 치고 다시 또 왼쪽 뺨을 치려고 했을 때, 현섭이 손으로 막으며 몸에 힘을 실어 인희의 몸을 내리눌렀다. 저항하는 인희의 양쪽 손목을 잡아 누르고서 아프게 맞은 만큼 제멋대로 입술을 탐했다.

인희는 점차 몸에서 힘이 빠졌다. 동시에 슬퍼졌다. 사랑했던 남자가 야만인처럼 변해서 마음이 아팠다. 무엇보다 그런 사람이 딸의 아빠여서 딸에게 미안했다.

뜨겁고 단단한 그의 페니스가 인희의 몸을 뚫고 들어왔다. 현섭은 신음을 내뱉으며 거칠게 몸을 흔들었다. 인희는 입술을 꽉 물고 이불을 잡으며 소리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현섭은 인희가 참도록 놔두지 않았다. 부부로 산 지 7년. 그는 그녀의 온몸 구석구석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엉덩이를 잡고 더 깊이 들어가자 인희는 몸을 떨며 신음했다. 엉덩이와 골반을 잡고 오랫동안 자신의 쾌락 속에 그녀를 가두었다.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소유욕이 그를 지배했다.

욕정을 풀고 나서야 현섭은 인희의 몸에서 떨어졌다. 잠시 숨을 고른 뒤 등을 돌리고 누운 인희의 몸을 팔을 뻗어 안았다. 그러곤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 여잔 오래 머물지 않을 거야. 단 며칠간만이야.”

“날 모욕하는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연서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종구와 친하게 지내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난 결코 널 모욕한 적 없어. 그 여자를 집에 들여서 네 기분이 어땠는지 느껴 보라고? 네 죄를 어떻게든 정당화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내 생각엔 변함이 없어. 이혼해.”

인희는 냉정하게 일어나 샤워실로 들어갔다. 쏟아지는 물줄기에 몸에 묻은 현섭의 체취와 타액과 정액을 모두 씻어냈다.

*

천둥 벼락이 치고 세찬 비가 쏟아지는 밤이었다. 딸아이 방에서 자고 있던 인희는 옆자리에 허전함을 느끼고 잠에서 깼다. 역시 품 안에서 곤히 자고 있던 딸이 없었다.

“연서야?”

인희는 몸을 일으키며 어두운 방을 눈으로 훑었다. 연이어 치는 천둥 벼락에 빛이 번쩍번쩍했다.

‘이 밤에 얘가 어디 갔을까.’

연서가 보이지 않자 불안해진 인희는 연서를 찾으러 곧장 방문을 나섰다. 복도를 걸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섰다. 한때 자신의 방이었던 침실 문을 보며 입술에 힘을 주었다. 남녀가 몸을 섞고 있는 낯 뜨거운 교성이 문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인희는 아래 층으로 내려가지도 못하고 방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바닥에 발이 붙은 듯이 서 있었다.

잠시 뒤 침실 문이 열리고 여자가 나왔다. 커다란 젖가슴과 아랫도리를 드러낸 채 두 팔에 붉은색 실크 가운만을 걸치고서 모습을 드러냈다. 인희는 가소로운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어머, 있는 줄 몰랐네요.”

애령은 보란 듯이 인희를 향해 몸을 돌려서 팔에 걸친 가운을 어깨 위로 올려 입고 느슨하게 끈을 묶었다. 목덜미와 앞가슴 곳곳에 생긴 붉은 자국이 앞섶 사이로 보였다. 막상 남편과 몸을 섞은 여자를 마주하자 인희는 가슴이 벌렁거리고 입술이 덜덜 떨렸다. 그럴수록 인희는 두 주먹을 더욱 꽉 쥐어 잡았다.

애령이 두 아이를 데리고 집에 들어온 건 약 보름 전이었다. 현섭은 밖에서 살림을 차리고 살았던 애령과 자신의 두 아이를 인희와 딸이 있는 집으로 기어이 데리고 들어왔다.

애령이라는 여자는 양쪽에 아들과 딸을 대동하고 뻔뻔하게 집 안으로 들어왔다. 여자의 뒤로 현섭이 여자와 아이들의 짐을 들여왔다. 인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자신의 다리를 안고 있는 연서의 어깨를 토닥이며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한쪽 구석에 서 있기만 했다.

인희와 연서는 안중에도 없이 애령은 제집처럼 집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위층에 방 두 개, 아래층에 방 두 개네. 겉에서 본 것과 다르게 안은 그리 크지 않네.”

“엄마, 내 방은 어디야?”

“음……, 우리 세준이는 아홉 살이니까 방을 혼자 써야겠지?”

“엄마, 나도 혼자 방 쓸래. 내 방도 줘.”

“우리 화영이는 아직 아기니까 좀 더 나중에, 알았지?”

애령이 아이들을 보고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인희에게 먼저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내가 애령이에요, 조애령. 그이한테 미리 얘기 들으셨죠?”

애령이 거실에서 폴짝폴짝 뛰고 있는 세준을 불렀다. 엄마의 부름에 세준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우리 아들이에요. 한세준. 아홉 살이죠.”

인희의 시선이 똘망똘망하게 생긴 세준에게로 내려갔다. 과연 현섭과 똑 닮은 외모였다. 인희는 뼛속 깊이 시린 아픔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알아요, 그 심정 어떤지. 현섭 씨가 인희 씨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나도 그랬으니까. 천박한 나와는 근본부터가 다른 고귀한 집안의 여자, 김인희. 현섭 씨가 그렇게 말하고 가버렸어요. 어찌나 서럽던지……. 하지만 우리 세준이 보면서 무작정 버텼어요. 내 심정을 하늘이 알아주었는지 현섭 씨는 결국 다시 돌아왔어요. 그리고 화영이가 태어났죠. 어때요? 이 정도면 나도 자격 있죠? 현섭 씨의 부인이라 할 만한 자격이요. 그래서 이제부터 안방은 제가 차지하려고 해요. 괜찮죠? 현섭 씨가 그러더라고요, 인희 씨는 너무 차갑다고. 남자 다루는 법을 잘 모르는 여자라고.”

애령이 현섭을 향해 눈을 흘기며 웃음을 터트렸다.

“엄마, 저 사람들 가라고 하면 안 돼?”

연서가 울상인 얼굴로 인희를 올려다보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