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내가 가르친 대로 부르는 게 좋을 거다. 사람들 보는 앞에서 입술 뺏기고 싶지 않으면…….”

“네?”

“오늘 밤뿐만이 아니라, 내일도 모레도 앞으로도 쭉 ‘헤이른’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장소를 불문하고 네게 키스하겠다는 뜻이다, 바보 렐.”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대, 대체 왜?”

놈이 환하게 웃었다. 나른한 기운을 풍기는 욕실 안이 확 밝아졌다. 미소에 이끌려 지금 우리가 어떤 자세로 있는지, 알몸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같은 욕조 안에 있다는 현실도 잊어버렸다. 푸른빛이 돌기 시작한 까만 눈동자에 사로잡히고 내 어깨와 허리를 감싸는 뜨거운 품에 이중으로 잡혀버렸다. 비웃음도 아니요, 화가 났다는 차가운 미소도 아니요, 눈치를 보게 만드는 서늘하게 상냥한 눈웃음도 아닌 ‘누군가’가 사랑스럽기 그지없다는 감정을 담뿍 담은 환한 미소였다.

난 이런 미소를 본 적이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눈앞에 있는 그, 헤이른이 이런 미소를 계산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만들어내는 모습을 본 적이 분명히 있었다. 그때가 언제인가 하면…… 헤이른의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손을 흔들면서 달려오는 세하라와 힌메를 두 팔 벌려 맞이할 때.

“서, 선배…….”

왜? 그들이 없는 장소에서, 나와 단둘이 있는 장소에서, 왜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아이리넬, 류휘. 어떤 이름을 선택하든 상관없다.”

“어……?”

“사랑한다. 너라는 사람 자체를 사랑해.”

“네……?”

“내일 당장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상관없다. 지금 이 순간에는 내 옆에 있으니까…….”

“…….”

“내 고백에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내 마음을 받아들일 필요도 없어. 넌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행동하면 돼.”

“그, 그…….”

“처음에는 네가 누구를 바라보든 누구를 원하든 집에 돌아갈 때까지 네 곁을 말없이 지킬 생각이었는데.”

충격적인 발언에 정말로 바보가 된 것처럼 말을 하지 못하고 어버버거리고 있는 내 모습을 웃으며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던 헤이른의 손길이 우뚝 멈췄다. 입가에…… 남자 주제에 요염한 미소가 달렸다. 사람을 정신없게 만들 요량인지 충격에서 미처 헤어 나오지도 못한 나를 배려하지 않고 분위기를 급변시킨 그는 말을 마저 이었다.

“가만히 보고 있었더니 어느 한 사람에게만 정을 줄 생각은 아닌 것 같아서 말이다. 곧 떠날 곳이라 여겨서인지…….”

“그건 오해라……!”

“문제는 다른 사람이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렐, 네게 한해서라면 끊임없이 오해를 하게 되니 말이다. 그래도 참으려 했지. 네 마음의 방향을 억지로 틀 생각은 없었으니까. 나를 싫어하고 원망한다면 그 상태로도 만족하겠다고 생각했다.”

“…….”

“넌 이 세계에 남을 생각은 없어 보였고 나도 널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그런데 네가 다른 사람의 고백을 받아들이고 직후에 사라졌지. 너를 찾아 헤매는 동안 결심했다.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사람의 품에서 웃는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수 있으리라 여긴 내 어리석음을 후회했고, 작별의 인사도 없이 너를 보낼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 해도 맹세대로 네가 집에 돌아가는 길은 찾겠다. 그러나 렐…….”

“……네.”

“납치된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후회하고 결심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내 마음을 고백했어야 했다는 생각을 했다. 네 대답은 차치하고서라도. 언젠가 떠날 너지만 나는 똑같은 후회를 하고 싶지는 않다. 너를 좋아한다. 네가 바란다면 내 마음을 접고 보내주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을 만큼…… 사랑한다.”

“…….”

“동시에 속으로 맹세했던, 원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보내줄 수 있다는 결심 또한 내 위선임을 인정했다.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눈치 채지 못하는 너를 위해 솔직하게 말하지. 그 눈에 오롯이 담기는 사람은 나였으면 한다, 아이리넬. 떠나는 그날까지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옆에만 있었으면 한다.”

“저, 저기…….”

“대답해. 길을 떠나는 그날까지 내 곁에만 있겠다고. 나를 바라보겠다고.”

“선배를 싫어하고 원망한다 해도……?”

“아무런 감정을 가지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시, 싫어하는 사람 옆에 있을 수는 없다 한다면?”

욕실을 후끈하게 달구고 있는 수증기 탓일까, 아찔했다.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에 농밀함이 더해진다. 상당히 상식적이고도 당연한 질문이었는데도 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왠지 해서는 안 될 질문을 한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즉, 그의 성질을 건드리는 종류의 질문이 아니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위험해지는 부류의…….

“그대가 착각하고 있는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 그대? 저기요? 악덕아?

“내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내 곁에 있기 싫다는 대답을 해도 된다고 허락하지는 않았다.”

“……잠깐?”

“그리고 렐? 선배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강한 힘에 의해 끌어당겨졌다. 앞으로 몸의 중심이 기울어지면서 바닥을 짚으려고 하다 내 앞에 버티고 있는 분이 아까 옷을 벗어젖히신, 상체 탈의의 대마왕이라는 절망적인 현실을 깨닫고 다급히 지탱할 위치를 바꾸려다 미끄러져버렸다. 이대로 거품이 가득한 물속에 얼굴을 박아야 하는 것인가, 눈을 꽉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