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는 우리 아들과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더니.”

암호랑이의 말을 듣고 내 경솔한 행동의 모순을 깨달아버렸다. 나는 그녀에게 우리 둘이 절대 그렇고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해명을 하고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보란 듯이 그녀의 아들에게로 달려가 꼭 달라붙는 모습을 보여준 셈이었다. 

“어머니, 그게 무슨?”

“미안하구나, 우리 아들. 여기 사랑스러운 아가씨에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어봤단다. 우리 아드님께 연인이 생겼다고 소문이 자자해서 말이다.”

“아.”

“그런데 아가씨가 단호하게 부정하지 뭐니. 너와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고, 그 어떤 감정도 없다고.”

“…….”

악덕은 대답하지 않았다.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공작부인을 잠깐 보고는 나를 응시할 따름이었다. 그는 내 말에 긍정을 하지도, 공작부인이 하고 있는 오해를 풀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제 아들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나직이 내려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아드님은 어떻게 설명할거니?”

어머니인 공작부인의 질문에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는 악덕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탱하기 힘들어 살짝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어지러운 것은 홀의 휘황찬란한 조명이 뜨겁고 눈부신 탓이었고 요 한 달간의 무리한 다이어트로 어지러워진 탓이라고 스스로를 되뇌었지만 요동치는 심장의 고동을 억누르기엔 무리였다. 악덕의, 헤이른의 표정은 겉으로 보기엔 굳어 있을 뿐이었지만……. 내가 평소 알고 보아왔던 눈빛이 아니었다.

어느샌가 따듯해진 손의 온기.

집으로 돌려보내주겠다는 약속.

나에게만은 하지 않을 것 같았던 그의 사과.

모르는 눈으로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장신구들과 옷.

그에게 내가 가진 여자로써의 이용가치가 떨어졌노라고 생각한 순간들.

내 손과 얼굴과 머리를 쓰다듬을지언정 가벼운 키스조차도 하지 않기 시작한 나날.

‘가족’이 되었으면 한다는,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

짙은 남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한 눈동자가 일렁였다. 헤이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내 얼굴은 일그러졌다. 그의 눈동자에 담긴 분노와 슬픔이 내가 오해한 감정이기를 바랐다. 헤이른이 나 때문에 짜증이 날 일은 있어도 화를 낼 이유는 없어야 했다. 헤이른이 나 때문에 어이없어 할 일은 있어도 슬퍼할 이유는 없었다. 그가 내게 묘하게 친절해진 이유는 그동안의 오해에 대한 죄책감에서 발로한 보상 대신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믿었다. 그렇게 믿어야만 했다.

나는 헤이른을 좋아해서는 안 되었다. 나는 그의 감정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를 끝까지 믿어주고 지탱해주며 기운을 북돋아줄 사람들은 피가 섞이지 않은 양녀에게도 한결같은 사랑을 보내준 내 가족뿐이었다. 다른 존재가 나타나면 쉽사리 마음이 떠날 수 있는 타인에게 기댈 수는 없었다. 

그린 듯한 외모, 훤칠한 키와 탄탄한 몸, 농밀한 키스, 세하라에게 보여주는 다정한 일면, 뛰어난 머리와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신분. 거짓말처럼 모든 조건을 갖추고 나타난 그에게 끌릴 뻔했다. 잠깐 드러낸 온기에 넘어갈 뻔했던 나를 다잡았다. 순간 그의 품이 내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꿈꿨던 나를, 동화 속 신데렐라와 현실은 다르다며 스스로를 비웃었다. 나는 몇 번이나 버림받았으니까.

얼굴도 모르는 친부모에게서, 달콤한 사랑을 속삭였던 옛 남친에게서, 그리고 내 세계에게서. 

집으로, 내게 남은 유일한 가족에게로 돌아가야만 하는 나는 헤이른을 좋아해서는 안 되었고 그가 나를 좋아할 리 없다는 현실에 실망하면서도 안심했다. 그래, 헤이른이 나를 좋아할 리 없어. 그랬는데……. 저 눈빛의 의미는…….

“렐이 이야기한 그대로입니다, 어머니.”

헤이른이 웃으며 공작부인에게 대답했다.

“어머. 그러면 정말 아무 관계가 아니니?”

“네. 렐, 가린 아이리넬은 세라의 손님일 뿐입니다. 세라가 수행을 떠나 있는 동안 제가 불편한 점이 없도록 대신 돕고 있을 뿐이고요.”

“흐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