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이 많이 젖었어요. 그래서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아요. 택시를 탔는데 여기까지는 올라갈 수 없다는 걸 잊어버렸어요. 그래서…… 나는…… 우산을 챙기지 못했어요.”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안 된다고 손을 내 젓는 미정을 강제로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현준은 물을 온 몸에서 떨어뜨리고 있는 미정에게 수건을 건네주었다. 그는 그녀의 손에 들린 가방이 여행용이라는 것을 보았다. 왜 그런 가방을 들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미정이 수건으로 대강 물기를 닦아내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옷을 갈아입는 게 나을 것 같아. 일단 이거라도 입을래? 내가 나가 있을 테니까 갈아입어.”

그녀의 옷이 몸에 달라붙자 몸매가 다 드러나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지나치게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미정에게 자신의 티셔츠를 건네주고 나서 이불도 깔아 놓았다. 현준은 방에서 나오다 희미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손바닥 자국이 있는 것을 보았다. 분명 누군가 뺨을 때렸고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아직도 그 여파로 얼굴의 한 면이 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그의 눈에 분노가 너울거렸지만 내색하지 않고 방에서 나왔다. 누군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사람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하늘이 뚫린 것처럼 내리는 비를 보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 비가 자신의 뜨거운 심장도 식혀주기를 바랬다.

미정이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자 현준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티셔츠를 짧은 원피스처럼 입고 있는 바람에 늘씬한 몸매와 다리가 다 드러났다. 그는 최대한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애쓰며 방안으로 들어갔다. 

“춥지 않아?”

현준이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좀 앉아서 이불을 덮어. 그럼 곧 따뜻해질 거야.”

현준은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래도 그녀가 덜덜 떨자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미정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그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미안해, 하지만 이렇게 해야 빨리 체온이 올라갈 거야.”

현준은 미정을 안자 그녀만의 독특한 내음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녀의 달콤한 향내가 코를 간질였다. 현준은 코너로 몰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미정은 그의 품에서 보호받고 있는 느낌에 감정이 벅차올랐다. 결국 댐이 무너지듯이 한꺼번에 설움이 복받쳐 오자 미정은 울고 말았다. 

그는 많은 것을 묻고 싶었고 동시에 아무런 말도 묻고 싶지 않기도 했다. 들어서는 안 될 그럴 말이라면 더욱더 듣고 싶지 않았다. 현준은 그녀의 뺨에 흘러내린 눈물을 손가락으로 하나 하나 닦아 주었다. 그녀를 위로해줄 생각이었지만 결국 그의 입술이 눈물을 따라서 내려갔다. 그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며 그녀의 얼굴에 머무르자 미정은 더욱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는 미정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강하게 끌어안았다.

지금 이 순간 미정은 자신이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의 품안에서라면 언제든지 행복할거라고 생각하며 미정은 그의 키스를 머금었다.

현준은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머리로는 생각했지만 그의 몸은 다른 반응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서 입술을 떼고 미정의 눈을 보았다. 맑고 투명한 눈동자. 그는 그녀가 맑고 투명한 눈동자를 늘 간직하고 있기를 바랬다. 이제 그는 그녀를 원하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참거나 기다리기 싫었다. 그녀를 자신만의 여자로 만들고 싶었다. 그로 인해 활짝 피어나기를 바라는 건 너무 큰 욕심이고 어쩌면 지나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그녀의 마음은 모르지만 오늘, 현준은 용기를 내서 고백하기로 결정했다.

“미정아.”

“네?”

“사랑해.”

미정은 그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그녀가 원했던 말이었다. 그에게서 듣지 못할 것이라고 미련을 버렸던 단어였다. 미정은 그를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현준 씨 사랑해요.”

미정이 대답하자 현준은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던 두 사람은 나란히 벽에 기대어 앉아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행복한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

“집에......”

미정은 그에게 근심을 주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그에게만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미정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생각하다가 한 가지 사실만 말하기로 결정했다.

“큰아버지가 결혼을 강요해서 집에서 나왔어요. 갈 데가 따로 생각나지 않아서……”

그녀의 말은 비수가 되어 그의 심장에 정확하게 꽂혔다.

“뭐? 결혼?”

“처음 보는 사람인데…… 그냥 그렇게 되었어요. 정략적인 결혼이죠.”

현준은 그녀의 대답에 한숨이 나왔다. 그는 주먹을 쥐고서 자신이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가늠해보았다. 

“제기랄.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군.”

“아뇨. 아주 많아요. 이렇게 내 옆에 있어 주면 되요.”

“옆에?”

현준은 미정이 하는 말을 되물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줄 수 없는 남자의 심정이 어떤지 알 것 같았다. 다만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했고 옆에 있어만 달라는 말에 그는 용기를 얻었다. 그는 미정이 입은 티셔츠가 흘러내려 어깨가 보이자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미정은 나지막이 신음소리를 냈고 현준은 그녀의 반응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를 살며시 눕혔다. 그리고 자신의 셔츠를 벗어버렸다. 미정은 그가 윗도리를 벗자 약간 겁이 났다. 그러나 현준은 미정이 다른 생각을 하기 전에 입을 막았고 천천히 그녀의 몸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미정은 처음으로 열에 들뜬 소리를 냈다. 현준은 방의 불을 껐고 그들은 그렇게 밤을 함께 보냈다.

두 사람이 깨어난 건 새벽녘이 되어서였다. 현준은 일어나 미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보는 눈길에 미정이 슬며시 눈을 떴다. 현준의 얼굴을 보자 어젯밤에 일어난 일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고 미정은 얼굴을 붉히며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괜찮아. 아주 예뻐.”

미정의 얼굴에 홍조가 생겼다. 그는 해맑은 미소의 그녀가 좋았다. 미정은 서둘러 옷을 입었고 현준은 뒤돌아 앉아 그녀가 옷을 입고 있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생각은 어제의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서로가 처음이라 어색했지만 곧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저…… 다 입었어요. 그리고 이것……”

미정의 말에 현준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는 그녀가 열쇠고리를 건네자 의아한 얼굴을 했다. 직접 수를 놓은 열쇠고리였다. 미정은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하며 표정을 관찰했다. 갑자기 현준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늘 가지고 다닐게.”

미정은 그의 대답에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만의 여자가 된 미정을 보며 현준은 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대문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정은 겁을 집어 먹은 채 그의 뒤에 몸을 숨겼다. 방문이 벌컥 열리고 네다섯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본능적으로 미정을 데리러 온 사람임을 직감했다. 

“이거 아주 자상한 남자시구먼. 그러면 여자가 기어오르는데 그건 모르나 보군.”

현준은 허스키한 음성으로 말하는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 남자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얼굴이 드러나지는 않았다. 현준은 그의 뒤에 서 있던 서너 명의 남자들 손에 의해 밖으로 끌려 나왔다.

“뭐야? 당신들?”

현준이 뭐라고 말하려 하자 그들은 일제히 약속이라도 한 듯 마당에 그를 내동댕이친 뒤 각목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거침없이 현준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미정이 그런 현준의 모습을 보고 비명을 질러댔다. 

“안 돼요! 아악.”

그러자 그녀의 옆으로 체유가 다가와 날이 선 음성으로 협박했다.

“더 소리를 지르라고. 그럼 저 자식은 그날로 제삿날이 될 거야. 내 말대로 하면 목숨은 부지하게 해주지. 그리고 네가 행여 라도 다른 행동을 하면 그날로 저 자식 인생은 끝이야. 알아들었어?”

미정은 체유의 말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믿을 수가 없었지만 지금 맞고 있는 현준의 모습을 보니 체유는 그를 그렇게 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미정의 눈에서 눈물이 차올랐다. 

‘울면 안 돼. 내가 울면 내 눈물로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지금 절대로 울면 안 돼.’

“그만해요. 제발. 그만해요. 내가 만나지 않을게요. 내가 포기할게요. 그러니 그 사람은 내버려둬요. 제발.”

미정이 흐느끼고 있었고 현준은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주 먼 곳에서 들리는 음성이었다.

‘울고 있다. 그녀가 울고 있다. 대체 그녀는 어디에 있는 거지?’

현준은 말을 하려고 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음성은 목에서 걸려 나오지 않았고 말을 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소리 없는 몸짓만 나올 뿐이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 누군가 다시 일격을 가했고 그는 점점 정신이 아득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가 간신히 눈을 떴을 때 미정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울고 있는 그녀가 갑자기 쓰러지자 선글라스를 낀 사내가 그녀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현준은 자꾸 눈꺼풀이 내려오자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비는 그치고 시간은 꽤 많이 지났는지 아침 햇살이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가 쓰러져 있는 마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조차 없었다. 현준은 미정이 그들에게 끌려간 것을 기억해 냈고 그건 일어날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기도 했지만 여전히 누워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지만 꿈이 아닌 현실임이 명백하게 드러나자 무기력한 자신이 너무나 비참하게 느껴졌다. 현준은 성한 팔로 자신의 몸을 지탱하며 일어나려고 했지만 일어날 수가 없자 그녀를 잃은 분노와 육체의 고통으로 인해 한꺼번에 고통스런 비명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바닥에 누운 채 파란 물이 쏟아질 것 같은 하늘에 대고 기어이 소리를 내질렀다. 그렇게 외치고 싶었던 소리가 나왔다.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그녀에게 대답도 해주지 못했는데 지금은 메아리로 돌아올 정도로 크게 울부짖을 수 있었다.

“미정아!”

그는 온 세상에 대고 소리를 지른 다음, 입술에서 피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고서 결심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