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 소개팅씩이나 한 사이

3년 전.

“강준희 씨 되십니까?”

누군가가 제 이름을 물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어쿠스틱 기타 연주를 가로막은 소리는, 분명 여자 목소리였다.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차분한 목소리.

준희는 감고 있던 눈을 떠 소리가 나는 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목소리에서 예상했듯 그곳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저와 눈이 마주치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얼굴을 붉혔다.

몹시 당황한 기색임에 틀림없었다.

저 역시 마찬가지.

“그런데요.”

준희는 애써 담담한 척 가볍게 응수했다. 그럼에도 여자의 입매는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정하윤이라고 합니다.”

여자는 엉거주춤하게 선 자세로 자기소개를 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를 처음 보는 정하윤.

내 기억 속에도 그녀는 없다.

“누구…….”

“저랑 소개팅할 거라는 연락받으셨죠?”

“소개팅?”

준희가 다소 언성을 높여 반문했다.

“강옥자 여사님 소개받고 왔는데.”

제 날 선 목소리에 주눅이 들었는지 하윤의 목소리는 점점 가늘어졌다.

강옥자 여사님이라면 내 고모인데.

고모가 나한테 선도 아니고 소개팅을 주선했다고? 그것도 사전에 연락 하나 없이? 아니, 절대 그럴 리 없다. 고모 성격이 얼마나 용의주도한데.

“저, 여기 앉아도 될까요.”

하윤이 맞은편 의자를 눈으로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 눈치를 은근 살피는 모양새를 보니 괜히 미안해졌다.

“그럼요.”

“실례하겠습니다.”

표정을 풀고 부드럽게 말하려는 제 노력 따위는 별 소용없는지 하윤은 여전히 풀 죽은 모습으로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저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안절부절못하고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준희는 몸을 뒤로 젖히고 팔짱을 낀 채 맞은편의 여자를 빠르게 스캔했다.

흠.

소개팅이라면 이제 이골이 났다. 언뜻 봐도 정하윤이라는 여자는 소개팅 상대인 저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저를 탐색하기는커녕 저와 눈이 마주치는 것조차 부담스러운지 자꾸만 시선을 피했다.

“뭐 드시겠어요? 제가 사드릴게요.”

“보다시피 전 이미 마시고 있어서. 뭐 마실래요?”

“따뜻한 카페라테요. 제가 사올게요.”

“앉아 있어요. 여기가 내 가게라.”

“네?”

처음 듣는 말인지 하윤이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몰랐단 말이지. 흠, 고모가 소개한 사람이니 당연히 그 정도는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뭐 말해 주지 않았을 수도 있지. 준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가 매니저 Y에게 따뜻한 카페라테 한 잔을 부탁한 뒤 자리로 돌아왔다.

“그럼 제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저가 자리에 앉자마자 하윤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어디 면접 보러 나왔나. 그녀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녀의 목소리엔 비장감이, 눈빛엔 결의가 다분했다.

“제 이름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정하윤입니다. 나이는 스물여섯, 하는 일은 꽃집을 운영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플로리스트?”

“그게, 규모가 크지 않은 소규모 꽃집이에요.”

하윤은 급격히 당황해하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규모 꽃집을 운영한다라.

글쎄. 준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여자의 분위기와 꽃집은 조금도 매치되지 않았다.

무심하고 이성적인 분위기라 수학 선생님이라면 모를까.

“꽃 말고 화분이나 허브 같은 것도 있습니까.”

“그럼요.”

“요즘엔 뭐가 잘 나갑니까.”

“초봄이라 모종은 미니수선화나 샤프란이 잘 나가고, 구근식물은 수선화나 히야신스가 잘 나가요.”

“흐음. 꽃을 많이 좋아하나 봐요, 직업으로 삼을 만큼.”

“네? 아, 네.”

“전공이 그쪽과 관련 있나 보죠?”

“어느 정도는요.”

하윤이 어색한 미소를 짓더니 또다시 제 시선을 피했다. 시선을 자꾸 피한다는 건 진실을 감추고 싶거나 자신 없을 때 나오는 행동 중 하나다. 그렇다면 그녀가 제게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뜻인데.

대체 그게 뭘까.

“정말로 강옥자 여사님 소개로 나온 겁니까.”

“물론입니다.”

“여사님과는 어떤 사이죠?”

“저의 이모 지인분이라고 들었어요. 자세한 건 저도 잘 모릅니다.”

“흐음.”

“며칠 전에 이모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오늘 강준희 씨와 소개팅하면 어떻겠냐고요. 좋은 분이니 한번 만나 보라고 권하시기에 그러겠다고 했어요. 아, 얼굴은 사진 보내주셔서 알아봤어요. 혹시 무슨 문제라도.”

“전혀요. 그런 거 없습니다.”

준희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 시각에 저가 여기 있는 걸 대체 어떻게 알고 왔는지 물어보려 했는데, 물기 서린 커다란 눈망울을 보고 있으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유는 글쎄, 잘 모르겠다.

괜히 목이 탔다. 그는 앞에 놓인 잔을 들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후 어색한 침묵이 잠깐 흘렀다. 때마침 Y가 따뜻한 카페라테 한 잔을 들고 와 하윤 앞에 놓아 주고 갔다.

“음. 여기 커피 맛이 참 좋네요.”

카페라테를 한 모금 마시더니 굳어 있던 하윤의 얼굴에 별안간 화색이 돌았다.

“그럴 겁니다. 원두가 워낙 고급이라.”

“그래서 여기 커피가격이 너무 비싸군요.”

“위치가 강남 한복판이기도 하고요.”

“맞아요.”

하윤은 제 말에 선뜻 수긍한 뒤 조심스럽게 웃었다. 그러곤 다시 잔을 들어 커피를 마셨다. 준희는 맞은편의 그녀를 잠자코 바라보았다.

눈이 크고 눈빛이 맑다. 피부가 희고 투명한 데다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단정하다. 무엇보다 치아가 상당히 가지런하다. 성정이 차분하고 다소 냉담해 보이지만 웃을 땐 몹시 화사하고 사랑스럽다. 외모만 놓고 본다면 제 취향에 딱 들어맞는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나름의 관찰 결과 준희는 그녀에게서 옥에 티를 발견했다.

처음엔 몰랐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하윤의 스타일은 좀처럼 납득할 수 없을 만큼 대단히 언밸런스했다. 화장은 거의 하지 않고 액세서리는 일절 하지 않았다. 신고 있는 검은색 단화는 낡고 값싼 티가 뚜렷이 났다. 반면 아이보리 컬러의 올봄 신상 샤* 트위드 재킷을 입고, 핑크 컬러의 디* 리미티드 에디션 레이디 백을 들고 있었다.

개인 취향이라 치부하고 말기엔 고개를 갸웃할 만큼 부적절한 조합이었다.

“잘 어울리네요.”

“뭐가요?”

“샤* 트위드 재킷.”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입고 있는 거.”

준희가 턱 끝으로 하윤이 입고 있는 재킷을 가리켰다. 하윤은 고개 숙여 자신의 가슴께를 쓱 훑어보더니 대단히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답을 가르쳐 줬는데도 그게 왜 정답인지 모르겠다는, 딱 그 표정이었다.

“디* 리미티드 에디션이네요. 한국에서 구하기 어려운 컬런데.”

“네?”

“거기 백.”

이번엔 눈으로 백을 가리키자 하윤도 백을 쳐다보았다. 이내 그녀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뭐라 대꾸해야 할지 도대체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패닉에 빠진 사람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저 역시 마찬가지.

보통의 여자라면 재킷의 가격과 백의 구입 경위에 대해 족히 반나절 동안은 입술이 부르트도록 입을 털게 분명하다. 그런데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자는 입을 털기는커녕 자신이 뭘 입고 있고 뭘 들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이게 말이 되나.

띠리리링.

그때 제 폰이 울렸다. 폰으로 손을 뻗으려는데, 하윤이 갑자기 제 손을 탁 잡아 멈춰 세웠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그녀에게 손이 잡힌 채 준희는 뜨악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윤은 겁먹은 얼굴을 하고 잡고 있던 제 손을 얼른 내려놓았다.

“제 손은 왜?”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윤은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때까지도 폰은 끈질기게 울렸다. 준희는 얼른 폰을 들어 발신인을 확인했다. ‘강옥자’ 이름 석 자가 매끈한 액정 위에서 저를 다급히 부르고 있었다.

고모의 전화면 뻔하다. 맞선녀, 아니 소개팅녀와 잘 만나고 있는지 확인, 아니 감시하기 위해서겠지.

준희는 진저리를 치며 전화를 받았다.

“네.”

[어떠냐.]

“뭐가요?”

[만나고 있는 여자 말이다.]

“잘 모르겠습니다.”

[엉큼한 놈. 목소리 들어 보니까 마음에 꽤나 드나 보구나.]

옥자의 목소리엔 흡족함이 다분했다.

“저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차라리 귀신을 속여. 내가 네놈을 몰라?]

“끊겠습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준희는 얼른 전화를 끊었다. 옥자와 한마디만 더 말을 섞었다가는 그대로 머릿속 퓨즈가 나갈 것 같았다. 그는 얕은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들었다.

“고모님이세요.”

“아, 네.”

하윤이 커다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녀의 얼굴 위로 안도와 불안과 긴장이 어지럽게 교차했다.

준희는 고개를 한쪽으로 조금 기울인 채 하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녀는 도대체 무엇에 안도하고 무엇을 불안해하며 무엇 때문에 긴장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당장의 제 관심을 끈 건 그녀의 복잡 난해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방금 전 하윤이 잡았던 제 오른손으로 슬그머니 시선을 옮겼다.

34년을 살아오면서 여자 손을 먼저 잡은 적은 있어도 여자한테 먼저 손을 잡힌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단히 놀랍고도 희한한 경험이었다. 물론 불쾌하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아무튼 하윤의 행동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전 그걸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하고.

준희는 정색을 하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나한테 할 말 있죠?”

“네,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저랑 같이 저녁 드실래요?”

미리 준비라도 해두었던지 하윤이 지체 없이 대답했다. 순간 준희는 제 귀를 의심했다.

갑자기 제 손을 잡은 이유를 물으려 했더니 대뜸 저녁을 같이 먹잔다. 대체 내가 뭘 들은 거지? 그 바람에 사고가 정지되어 대꾸할 말을 잃어버렸다.

“제가 사드릴게요. 뭐 좋아하세요?”

무응답을 오케이로 받아들인 건지, 하윤이 적극성을 보이며 다시 물었다. 저를 바라보는 크고 예쁜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그 눈빛에 홀려서일까. 이번엔 혀가 굳어 버려 이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럼 돈가스 드실래요? 마침 근처에 어마어마한 맛집이 있거든요. 지금 안 가면 엄청 줄 서야 하는데.”

이번엔 메뉴까지.

그런데 메뉴가 돈가스라고?

언제부턴가 상황은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하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제 옆으로 다가와 섰다.

설마 어서 가서 줄 서자는 의미는 아니겠지.

돈가스를 먹겠다는, 아니 하윤과 같이 저녁을 먹겠다는 대답도 아직 안 했다. 그런데 하윤은 저가 자신과 함께 저녁으로 돈가스를 먹을 거라 확신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뭘 근거로?

하아, 돌겠다.

이럴 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나.

저한테 돈가스를 사주겠다고 의지를 불태우는 여자는 처음이라.

이보다 더 난감한 일이 최근에 있었던가.

순간 느닷없이 등줄기를 타고 알싸한 전율이 흘러내렸다.

아무래도 뭔가에 단단히 홀린 것 같다.

이런 기이한 경험은 서른넷 인생에서 맹세코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