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랑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아무리 동정이고 신의 소유였다손 쳐도 2천이 넘는 금액은 하룻밤 화대로는 얼토당토않았다. 더군다나 따라붙은 3백은 둘째 치고 8만 원은 구구절절한 사연이 숨어 있다는 암시였다. 천사가 숨기고 있는 그 사연이 궁금해졌다.
“하룻밤 화대치고는 상당히 비싸네.”
‘화대’라는 설랑의 자극적인 단어에 다니엘의 귓불이며 뺨, 그리고 목덜미까지 단숨에 화끈 달아올랐다. 설랑은 의도적으로 그런 그를 더 자극했다.
“동정이라고 프리미엄을 붙였다고 해도 이건 납득 불간데.”
부끄러움에 사라져 버렸던 다니엘의 입이 열렸다.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고, 그러니까…….”
모든 것을 다 꿰뚫어 볼 것 같은 설랑의 날카로운 눈빛에 알리바이가 없는 살인 용의자처럼 말을 더듬던 다니엘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실은 병원비가 필요해서…… 엄마, 아니 어머니께서 수술을 하셨…… 뇌수술이요.”
설랑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그의 긴장과 곤궁함을 알아보았다. 그저 손님이었을 뿐인 제 하소연을 들어주고 행복해지겠다는 약속을 지키라며 소주를 나눠 마셨을 때부터 간파했었다. 그가 붉고 뜨거운 저와는 달리 한없이 맑고 순수한 영혼임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2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선뜻 내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러니 2천만 원을 순순히 내놔라?”
“아, 아닙니다!”
필사적으로 저를 변호하는 용의자처럼 격하게 고개를 저은 다니엘이 더듬더듬 설명을 보탰다.
“그 일에 대해 돈을 달라는 것이 아, 아니고. 그러니까 자매님, 배려를 해 주시면 제가 무슨 일을 해서라도 꼭 갚겠습니다.”
설랑은 도통 세상 물정이라고는 모르는 그에게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무슨 일을 할 수 있죠?”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접시 닦는 것도 괜찮고 주차나 허드렛일도 자신 있습니다.”
수표책을 들고 책상을 돌아 나온 설랑은 그저 의례적인 타협의 여지에 금세 눈을 반짝이며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나열하는 보잘것없는 청년에게 관심의 화살을 꽂았다.
“뭐든?”
다니엘은 그저 매달릴 따름이었다.
“예. 뭐든 시켜만 주십시오.”
책상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걸친 설랑은 수표책에 사인을 하는 대신 다니엘에게 그의 이상이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신랄하게 꼬집었다.
“접시닦이 하루 일당이 5만 원이고 주차 요원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1천만 원쯤은 그쪽의 동정에 대한 프리미엄과 봉사료로 준다고 치고, 잔액은 1천 3백 8만 원. 무이자로 하죠. 수입이라고는 백 5십만 원에서 백 6십만 원이 전부일 텐데 앞으로 들어가야 할 병원비와 생활비로 쓰기도 부족한 돈이죠? 그럼 내 돈은?”
다니엘에게 은행 직원보다 더 딱 부러지게 계산을 해 준 다음 절망을 선언했다.
“회수 가능성이 전혀 없어요.”
설랑의 논리 정연한 설명에 다니엘의 얼굴을 붉혔던 핏기가 싹 사라져 버렸다.
‘끝났어.’
타협의 여지를 찾아볼 수 없는 설랑의 태도에 실망을 느끼기도 전에 부끄러움이 몰려들었다. 아무리 막다른 골목에 몰렸더라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지켰어야 했다. 석규의 말대로 신장을 팔아서라도 저를 버러지처럼 보고 있는 설랑 앞에 서서는 안 됐을 일이었다.
“죄송…….”
설랑은 노련한 사냥꾼이었다. 짓궂은 사내아이에게 치마를 걷어 올림당한 계집아이처럼 도망칠 것 같은 다니엘의 발목을 낚아챘다.
“뭐든지 가능하다고 했나요?”
암담함과 자괴감으로 시들었던 다니엘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예!”
군기가 바싹 들어간 답으로는 모자라 더 확실한 맹세를 들려주었다.
“뭐든지요. 뭐든 할 수 있습니다.”
설랑의 마음속에 사특한 기운이 솟아났다.
‘빼앗겠어.’
화흥을 소유하겠다는 목표를 세운 뒤로는 원래 기도라는 것을 하지 않았지만 어렸을 적엔 매일 밤 울며 기도했다. 엄마, 아빠가 저를 찾아오기를. 저를 할아버지에게서 구해 주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하지만 신은 제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부모님이 돌아온 것도 할아버지에게서 벗어난 것도 그들 모두가 타고난 명을 다한 후였다. 그 뒤로 기도를 잊고 있다 세원과 결혼이라는 것을 준비하며 저도 모르게 기도했었다. 태어날 아이에게는 저와 같은 아픔을 물려주지 않기를. 애초부터 세원을 맹목적으로 믿지는 않았기에 행복한 아내는 바라지도 않지만 허락된다면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신은 그런 저를 비웃기라도 하듯 파혼을 통해 사람들의 조롱거리로 전락시켰으니 신의 많고 많은 양 중에 한 마리를 훔치는 것이 무슨 죄가 되겠는가?
‘그 죄를 묻는다면 인간을 위해 자신의 목숨도 내놓은 신이 아니지.’
매번 손을 잡고 매달리는 저를 보란 듯이 절망과 치욕의 늪으로 떨어뜨려 버린 신을 한껏 조롱한 설랑은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갈취해 더럽히고 또 더럽히기로 결정했다.
“애인을 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