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커트! 한국 시리즈 7차전 9회 말 2아웃 주자 1, 2루 3 대 2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일의 마지막 공격에 4번 타자 송성훈 선수가 풀카운트 상황에서 12구째 커트를 해내고 있습니다. 정말 두 선수의 집중도가 무섭습니다.”

“공 하나의 두 팀의 운명이 달려있으니까요. 동점 주자 역전 주자까지 나가 있는 상태에서 아웃 하나면 경기 종료, 안타 하나면 이 경기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한일 팬들은 지금 두 손 모아 한일의 4번 타자 송성훈 선수에게 기적을, 산조 팬들은 두 손 모아 투수 윤석호 선수에게 기적을 바라고 있습니다.”

한국에 있는 구장에서 가장 많은 인원 3만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한국구장은 빈 좌석 없이 가득 찼지만 언제부터였을까, 응원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은 채 모든 사람의 시선은 마운드에 서 있는 투수와 타석에 나와 있는 타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10분 넘게 볼 14개째 커트를 하고 있습니다. 한국구장이 이렇게 조용할 수가 있을까요? 각 응원단의 응원도 중단이 되었는데요.”

“정말 무서울 정도로 조용하네요. 팬들도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투수 와인드업, 15번째 투구! 과연 이 경기는 여기서 끝날까요? 아니면 역전의 드라마를 쓸까요?”]

깡!

***

투수와 야수 10명으로 이루어진 두 팀이 9회씩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 가며 승패를 겨루는 구기 종목 야구. 투수가 서 있는 마운드에서 타자가 서있는 홈플레이트까지의 거리는 18.44m, 볼이 도달하는 시간 0.4초, 27개의 아웃카운트. 그 거리, 그 시간, 그 개수 안에서 찬스를 잡아 점수를 얻기 위해 서로를 속고 속이는 게임.

공놀이라고 말하기엔, 숫자로만 말하기엔 그 속엔 너무 많은 사람과 이야기, 인생 그리고 사랑이 담겨있다. 그래서 우리는 야구라 쓰고 낭만이라 부른다. 그리고 여기 4번 타자와 트레이너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

#1. 대타

[“8회 말, 한일이 3 대 2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7번을 이승호 선수로 바꾸면서 대타 작전을 꺼내는데요.”

“네, 아무래도 답답했던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것 같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대타 주자를 낸 감독의 의도를 이승호 선수가 결과로 만들어야 하거든요. 그게 대타죠. 번트로 주자를 득점권에 있는 2루로 진루시킨 상황에서 2루타 그러니까 장타 한 방을 노려 동점을 만들겠다는 겁니다. 이승호 선수는 성공해야 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는 바꾸지 않았을 상황보다 못한 상황으로 흘러가니까요.”

“초구. 초구를 노려 쳤습니다. 높게 멀리 뻗어간 타구 중견수, 중견수… 잡지 못합니다. 2루에 나가있던 주자는 어느새 3루를 지나 홈으로, 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승호는 선수는 2루까지 걸어서 들어갑니다. 스코어 3-3 동점을 만들어 냅니다!”

“대타 작전 성공하네요!”]

***

“채율아, 도착했니?”

“네, 선배. 정문 다 와 가요.”

“프론트 직원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출입증이랑 안내도 부탁해 놨어. 그리고 내 사무실에 가면 책상 위에 선수들 파일 있어. 도움이 될 거야.”

“네, 알겠어요. 수업은 어때요?”

“재밌어. 확실히 메이저리그여서 그런지 다르긴 하네.”

“그럼 다행이고요. 혹 도움이 필요하면 케빈한테 말하면 될 거예요. 저도 도움 많이 받았어요.”

“그래, 다시 한번 고맙다. 그리고 잠깐이지만 한일에 온 걸 환영한다.”

“네, 빈자리 잘 메워볼게요.”

“메우긴,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하고.”

“네, 저 들어가 볼게요. 연락드릴게요.”

“그래.”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짐만 호텔에 둔 채 바로 한국구장으로 온 채율이었다. 세계 최고의 규모와 시설을 자랑하는 메이저리그의 구장들을 보다가 10년 만에 찾은 한국구장은 그의 비해 시설과 외형이 세월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지만 왠지 모를 익숙함과 친숙함이 느껴졌다.

외관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정문으로 가는 동안 야구 경기가 없는 월요일 해 질 무렵 강남 한복판에 있음에도 도로에 차 소리만 들릴 뿐 모든 게 멈춘 듯 고요한 이곳에 있으니 이상하게 설레는 마음에 장시간 비행의 피로를 잊게 만들어 주었다.

3년 전 미국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한 채율은 그곳에서 한일에 수석 트레이너 지환과 처음 만났다. 참석한 인원 중 유일한 한국인이 두 사람은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가까워졌고 그 이후로도 서로 안부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지환이 채율에게로부터 연락을 받은 건 두 달 전이었다. 메이저리그 구단에 남아있을지, 다른 구단으로 갈지 아니면 프리랜서를 할지 고민하던 채율은 잠시 쉬기로 결정하면서 자신이 참석하기로 되어있던 연수를 빠지게 되었고, 그 자리에 지환을 추천하고 싶다 했다.

좋은 기회이긴 했지만 6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과 야구 시즌이 시작되기 직전에 갑작스레 연락을 받은 거라 지환은 고민이 되었다. 수석 트레이너의 부재는 구단과도 상의를 해야 하는 문제였다. 고민을 하고 있던 그때, 연수 받는 기간 동안이지만 구단이 괜찮다면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해 주겠다는 제안을 먼저 해왔다. 그녀에게도 짧지만 한국 구단과 일을 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다행히 구단에서 허락이 떨어져 6개월이지만 그렇게 채율이 한일 수석 트레이너 대행 자리로 오게 되었다.

프론트 직원을 따라 들어간 구장은 원형 경기장 모양을 따라 직원용 정문에서 오른쪽이 홈팀, 왼쪽은 어웨이팀 락커로 이어지는 복도가 나왔다. 오른쪽 복도를 따라가다 보면 첫 번째로 선수들 락커룸이 나왔다. 그리고 그 반대편엔 경기 중 선수들과 코칭 태스프들이 대기하는 더그아웃이 있었고 양 끝에 두 개의 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두 입구 사이에는 경기 중 간단하게 선수들이 마사지를 받을 수 있게끔 두 개의 간이 베드가 놓아져 있었고 라커룸과 더그아웃을 지나 복도를 계속 따라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짧은 통로가 나오고 그 끝에 샤워실과 실내 연습장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짧은 통로만큼 바로 옆이 트레이너 물품 실이었다. 조금 더 복도를 지나치면 바로 지환의 사무실이 나왔고 맞은편에는 2층으로 이어지는 비상계단이 있었다.

“내일은 우선 쉬시고 출근은 수요일부터 하시면 된다고 단장님이 말씀하셨고요. 단장님 실은 정문에서 바로 계단 따라 3층으로 올라가시면 돼요. 2층으로 올라가면 바로 다른 트레이너 선생님들 사무실, 웨이트실이에요.”

“네. 감사해요. 2층은 저 혼자 봐도 괜찮을 것 같아요.”

비상계단으로 올라가려 하자 여섯 시가 훌쩍 넘긴 시계를 보며 자신 때문에 퇴근하지 못한 프론트 직원에게 사무실, 물품실 키를 건네받으며 말했다. 프론트 직원이 가고 나서 혼자 남은 채율은 작은 창을 통해 먼저 지환의 사무실을 한번 보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한 사람이 사용하기 적당한 크기의 사무실이었다.

왼편에는 기다란 소파와 옆에 조그마한 냉장고가 그리고 그 앞에는 조그마한 유리로 된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바로 옆에는 ┌ 모양의 책상이 있었다. 그위엔 지환이 말한 두툼한 노란 파일 하나와 한일 야구모자가 가지런히 올려 있었다. 파일을 가방에 넣은 뒤 방을 나와 2층으로 향했고 천천히 둘러본 후 내려오는 길에 작고 일정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깡, 깡, 깡!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기자 더그아웃을 지나 경기장 안으로 향하게 했다.

일곱 시가 넘자 해는 이미 지고 없어졌다. 주변은 어두워졌고 그 어둠을 좌우 라이트가 밀어내 그라운드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마운드에 있는 피칭머신은 일정한 간격으로 볼을 뿜어냈고 타석엔 등번호 25가 적혀진 티셔츠를 입은 선수가 혼자서 타격 연습을 하고 있었다. 옆엔 볼 200개 정도가 들어가는 노란 박스 두 개가 이미 비어 있었다.

그 모습을 채율은 더그아웃 입구에 기댄 채 한참을 그곳에 서서 바라보았다. 홈 더그아웃을 등지는 좌타자인 그는 그녀의 존재를 모른 채 연습에 몰두했고 어느새 머신에서 볼이 나오지 않자 배트를 내려놓고 이마에 나는 땀을 어깨로 닦으며 한 개의 노란 박스를 끌며 외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25번.”

경기장을 빠져나와 다시 호텔로 돌아가는 택시 안 채율은 가방 안에 있는 파일을 꺼내 25번을 찾기 시작했다.

‘주장, 25번 송성훈, 타율 0.354….’

선수의 정보가 빽빽이 담긴 종이 맨 밑에는 조그마한 노란 포스트잇 하나가 붙여져 있었다.

‘루틴 : 시합 전 사무실 소파에 앉아있다 나감.’

노란 포스트잇은 미간을 찌푸리게 했다. 복도 맨 끝에 있는 지환의 사무실 앞에 2층으로 이어진 비상구 계단이 있지만 사람들은 더 가까운 정문 계단을 더 많이 이용할 것 같아 그녀는 내심 좋아했다. 관중들이 없는 야구장은 고요하지만 일주일에 6일 관중을 받는 이곳에서 잠시나마 고요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파일을 덮고 시트에 몸을 기대며 창밖에 건물들로 시선을 옮겼다. 10년 만에 들어온 한국은 그새 더 높은 건물들이 들어선 듯했다. 높은 건물들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들이 만들어낸 야경은 한국에서의 첫날밤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다.

구장에서 15분 정도 떨어진 호텔에서 내린 채율은 이곳에서 6개월 동안 지내기로 정했다. 야구장까지 택시로 움직일 수 있는 가까운 곳에 빨래며 음식이며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곳으로는 호텔만 한 곳이 없었다. 무엇보다 룸 안에 큰 창 너머 한국구장이 보인다는 점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룸으로 들어온 채율은 창 너머로 아직도 환하게 밝혀져 있는 한국구장을 바라보았다. 외야에 뿌려져 있는 공을 혼자 다 줍기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듯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야구장을 밝히는 불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탁상시계는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송성훈.”

수요일부터 출근이라 했지만 다음 날 오후 단장실에서 감독과 함께 미팅을 가졌다. 아직 시즌 초반이라 하지만 갑작스러운 수석 트레이너 빈자리로 어수선할 구단에 빠르게 적응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비공식적인 첫 출근에 그녀의 마음엔 짧지만 지환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과 한국에서 처음 일을 하게 된다는 설렘 상반되는 두 가지 감정이 공존했다.

“우리 수석 트레이너한테 좋은 기회를 줘서 고마워요. 그럼에도 지환이 없이 시즌을 치러야 한다는 문제 때문에 고사를 해야 하나 했는데 우리랑 이렇게 함께한다는 게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요.”

“아니에요. 저도 짧지만 한일에서 일을 할 기회가 주어져서 감사합니다.”

“우리 모자가 아주 잘 어울리는데요?”

지환의 선물인 한일 모자를 쓰고 온 그녀를 단장과 감독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덕담이 오고 가고 미팅을 마친 채율은 경기장 안으로 향했다. 시즌 초 평일이어서 그런지 1층은 관중들로 가득 찼지만 2층은 듬성듬성 있을 뿐 여유로웠다.

그녀는 2층 오른쪽 끝 앞에 자리를 잡아 앉았다. 경기가 시작하려면 30분 정도 남았다. 채율은 가방에서 지환이 준비한 선수 파일을 꺼내 하나둘씩 보기 시작했다. 내일이 공식적인 첫날이긴 했지만 미리 선수들도 익힐 겸 이제 한 팀으로 같이 갈 우리 팀과 빨리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었다.

국민의례와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곧이어 경기가 시작되었다. 홈팀의 선수가 타석에 설 때마다 그 선수의 파일을 펼쳐보며 읽어갔고 특히 메디컬 체크란에 적혀 있는 부분을 멀리서나마 두 눈으로 빠르게 같이 살펴 갈 때, 각 선수별 응원가가 불리자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메이저리그에서는 각 선수별 틀어지는 배경음악은 있어도 이렇게 팬들이 불러주는 응원가는 없었다. 새삼 한국에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 때쯤 갑자기 다른 선수들과는 확연히 다른 환호성과 함께 1층의 여기저기서 팬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대체 누가 나왔기에 사람들이 이리 환호하는지 궁금해하며 그라운드를 보자 유니폼에 숫자 25와 송성훈이라고 적힌 선수가 타석에 나오고 있었다.

홈팀 좌석에 앉은 채율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그의 뒷모습만 보였다. 전광판으로 시선을 옮기자 기록과 함께 사진이 함께 나타났는데 왜 다른 선수들과 응원 크기가 달랐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화질이 좋지 않은 전광판임에도 불구하고 잘생겼다. 한일의 4번 타자에 야구 선수치고 잘생긴 것이 아니라 잘생긴 사람이 야구까지 잘하니 팬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송성훈.”

‘2022 왼쪽 발목 비골근 탈구로 인한 신전 지대 손상 봉합수술, 3개월 시즌 아웃.’

발목에 굴곡진 부분에 위치한 힘줄을 지탱해 주는 신전 지대 손상은 운동선수들에게 자주 오는 부상 중 하나였다. 성훈의 메디컬 체크란을 유심히 읽다 보니 노란 포스트잇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당장 내일부터 시합 전에 사무실에 들를 것인가, 자리를 피해줘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자 저절로 미간이 다시 찌푸려졌다.

그때, 초구에 1-2간을 가르는 안타를 치고 1루에 진루한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