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얼마만의 한국인지…. 다시 돌아가기엔 늦었겠지? 하….”

내키지 않는 한국행으로 한숨이 저절로 나오는 하은은 10년 만에 돌아왔다.

불편해하는 눈길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구부정한 자세 그리고 점점 굽어지는 목선, 그녀는 점점 위장이 꼬일 것 같았다.

한국에 제 발로 온 것이 아니기에… 그다지 즐거운 입성은 아니었다.

10년 동안 하은은 미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돌아오고 싶지 않은 이곳에 발을 내디디고 있는 자신이 과도한 긴장감에 빠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제이콥… 제이콥…. 빌어먹을 제이콥,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고….”

혼자서 중얼거리면서 입국장을 빠져나왔다.

슈트의 멋진 남자가 하은에게 정중히 인사하며 다가왔다.

“엘리 하, 맞으시죠? 처음 뵙습니다. 뮤아 뷰티 대표님 비서실장 박재하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라비에벨의 엘리 하입니다.”

하은은 박 실장에게 악수를 먼저 청했다.

“밖에 차 대기시켜 뒀습니다. 가시죠.”

그들은 오후의 햇살이 눈이 부신 듯 눈살을 찌푸리면서 차에 올랐다.

하은은 미국에서 화장품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십년지기 절친이자 대표의 부름에 6개월 동안 파견을 나가 있었던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불려 와 대표는 엘리에게 부탁했다.

처음으로 한국과 컬래버레이션을 해보려고 한다면서 한국인인 하은에게 6개월의 한국 파견을 요청했다.

절대적으로 거절을 밝혔고, 제이콥 또한 하은이 한국에 가기를 원치 않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제이콥은 싫다는 하은을 강제적으로 한국을 보내 버렸다.

하은은 달리는 차 창밖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

뮤아 그룹에서 운영하는 호텔로 하은과 비서 실장이 들어섰다.

“오늘 피곤하실 테니, 푹 쉬시고, 내일 모시러 오겠습니다.”

“오늘 수고 많으셨어요. 박 실장님. 그리고 내일은 저 혼자 회사로 가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박 실장은 하은에게 머리를 한번 끄덕하며 인사를 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고 어깨를 으쓱대는 하은은 점점 의아해졌다.

뮤아 뷰티에서 콕 집어 하은의 파견을 원했기에 대표 제이콥은 그녀의 한국행을 단호하게 진행시켰고, 하은의 능력을 더 발휘하길 원했기에 그는 그녀를 응원했다.

뮤아 뷰티의 대표가 명확하지 않다는 소문이 있어서 걱정되긴 했지만, 한국의 대기업 뮤아 그룹 산하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 일을 진행했다.

하은은 대표를 믿었기 때문에 6개월간의 파견을 승낙한 것이었다.

한편, 하은이 의심스러워하는 시간 박 실장은 그녀와 헤어지자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하은 님을 호텔로 안내해 드렸습니다. 내일 회사로 직접 나오신다고 하십니다.”

“…알겠습니다. 박 실장님 수고했습니다.”

한참 후에야 답하는 그였다.

이미 미국 라비에벨과 한국 뮤아 뷰티는 두 달 전에 사업을 체결했고, 하은은 두 회사의 상품개발과 연구소에서 일을 진행하기 위해 파견된 상태였다.

파견 직원에게 이런 환대를 해주는 것 자체가 과하다고 생각했지만, 나쁜 의도는 없어 보여 감사할 따름이었다.

대표 제이콥에게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간단히 남기고, 하은은 제대로 먹지도 못한 상태였지만 지금은 밥보다 더 필요한 것이 수면이었다.

한국으로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에 몇 날 며칠 숙면하지 못했고, 비행기에서 긴장한 상태였기에 밥을 먹기에 버거워 거의 24시간 먹지도 잠을 자지도 못한 하은은 재빠르게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떨리고 걱정도 되었지만, 하은은 지각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호텔에서 일찍 나섰다.

아직 서툰 서울이지만, 호텔에서 먼 거리는 아니기에 버스를 타고 뮤아 뷰티로 향했다.

박 실장이 1층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어 조금은 안심이 되기도 했다.

아는 얼굴이 있다는 게 한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긴장했던 얼굴이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어제는 잘 주무셨나요? 시차가 있어서 힘드시지는 않으셨는지?”

아침 인사를 건네는 박 실장에게 하은은 여유로운 미소로 농담 삼아 한마디 건넸다.

“제가 여러 나라에 파견을 자주 다니다 보니 적응을 잘하는 편이에요. 어제 도착하자 곯아떨어져서 푹 자고 일어났습니다.”

“다행입니다. 잘 주무셨다니…. 우선, 오늘은 엘리 님이 근무하게 될 상품 개발팀과 연구소를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대표님을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으로 간 곳은 하은이 근무하게 될 상품 개발팀이었다.

“여긴 미국에서 파견 나온 엘리 하입니다. 이번 상품 개발에 도움을 주실 분입니다.”

박 실장이 먼저 팀원들에게 엘리를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6개월 동안 함께 시간을 보낼 엘리 하입니다. 많은 도움 부탁드리겠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상품 개발팀 팀장 하건우입니다. 두 달 전 미국 갔을 때 뵙지 못했는데, 한국분이 있으셨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네, 전 그때 프랑스에 파견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만나 뵙지 못했습니다.”

“그러셨군요. 우선 엘리 씨 자리는 저곳으로 마련해 두었습니다.”

개발팀 자리 배치는 좌석을 십자형으로 프로젝트 업무팀의 의사소통이 중요한 유형에 적합했다.

독립된 느낌을 주면서도 보안성이 뛰어나 협업과 의사소통이 원활하며 활발하게 이뤄질 것 같아 하은은 마음에 들었다.

나머지 팀원들과도 인사를 나누며 박 실장은 연구소를 방문해야 한다며 오늘은 인사만 하기 위해 왔으며, 출근은 다음 주부터라고 일렀다.

“다음 주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서로가 인사를 하고 팀을 나섰다.

하은은 분위기가 나쁘지 않아 일하기에 불편함은 덜하겠다고 안심했다.

“연구소는 다른 건물에 있습니다. 그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박 실장은 빠르게 연구소로 향했고, 조심스러웠으며 조금은 번거로운 연구소 입장이었다.

“안녕하세요, 소장님. 박 실장입니다. 하은 씨, 이분은 박경숙 연구소 소장님이십니다.”

연구 중인 소장을 소개하는 박 실장이 몸이 잔뜩 움츠렸고, 마음의 안정을 위해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엘리 하입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지만, 그녀는 열중하던 일이 있어서인지 별 반응이 없었다.

“소장님, 저번에 말씀드렸던 엘리 씨입니다.”

연구에 몰두하고 있던 박 소장은 상체를 멀찌감치 뒤로 젖히고는 시종일관 태연자약한 태도로 다소간의 선심성 질문을 던졌다.

“그래, 미국에서 왔다고? 파견? 얼마나?”

하얀 가운을 입고 검정 뿔테안경을 쓴 50대로 보이는 여자 소장이었다.

“네, 6개월 계약입니다.”

약간 기가 눌린 하은이 짧게 대답했다.

약간의 침묵이 깨지면서 박 소장은 난데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자네는 동물실험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가?”

화장품 업계에서 갑론을박으로 늘 논쟁거리가 되어 있는 문제이기도 했다.

잠시 머뭇거렸지만, 하은의 생각을 말했다.

“화장품 업계에서 동물 실험 반대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이미 검증된 원료를 이용하거나 동물 실험을 대체하는 실험법을 사용함으로써 개발 과정에서 동물 실험을 거치지 않는 ‘크루얼티 프리(cruelty free)’ 제품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동물 복지에 관심이 있는 소비자들에게 좋은 기업 이미지를 심어 주기 위해서 화장품 원료와 제품에 대한 동물 실험을 전면적으로 금하는 유럽 국가들에서 제품을 판매하기 위해서 필수 조건이 되고 있습니다. <예뻐지기 위해 널 다치게 할 수 없어>라는 화장품 회사의 광고 문구는 인간의 미를 증진한다는 목적이 동물 실험의 정당성을 충분히 보장해 주지 못하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네는 찬성인가? 반대인가?”

소장은 되물어 보지만, 하은은 생각이 많아졌다.

답을 기다리지 않고 박 소장은 말을 이었다.

“오후에는 연구소로 출근하는 건가?”

“네, 오전은 상품 개발팀과 회의도 있고, 팀원들과 상황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오후에는 엘리 씨가 연구소에 와서 소장님과 일을 진행하면 됩니다.”

박 실장이 우왕좌왕 설명을 해나갔다.

“그래. 다음 주에 보자고…. 가봐!”

박 소장님의 카리스마에 박 실장과 하은은 조금 주춤했다.

“다음 주 오후에 찾아뵙겠습니다. 소장님.”

하은과 박 실장은 인사와 동시에 돌아섰다.

한데, “아…. 엘리? 다음 주 오기 전에 과제를 하나 내줄까 하는데?” 박 소장은 무슨 심술을 부리는 것인지 막무가내였다.

“부담 갖지 마! 과제라기보단 당신 생각이 궁금하니깐…. 생각만 해오는 거야.”

잔잔한 미소를 띠며 말하는 박 소장이 두렵기 시작한 하은이었다.

“네, 어떤 과제일까요? 소장님?”

긴장한 하은은 묻는 동시에 박 실장을 바라보고는 당황스러워하는데, 그런 하은이 측은해 보이는 박 실장은 걱정스러운 마음만 졸였다.

“화장품 원료에 쓰이는 식물 재료 중 당신이 선호하는 다섯 가지 정도 생각해 와. 가봐.”

자기 말만 하고 연구에만 집중하는 박 소장을 바라보는 하은과 박 실장의 걸음에 힘이 빠졌다.

문을 나서는 박 실장과 하은은 긴장이 살짝 풀려서인지 밖을 나오자, 동시에 한숨을 그게 내쉬었다.

“박 소장님이 무뚝뚝한 편이지만, 이 업계에서는 알아주는 엘리트십니다. 저분을 영입하려고 저희 대표님께서 회사에서 무던히 노력했었습니다. 사실, 박 소장님 밑에서 일하는 연구원들이 힘들어하지만, 일로는 이분을 따를 분이 없다는 게 학계 정설입니다.”

베테랑의 박 실장도 꽤 난처한 상황이었는지 하은을 달래려는 느낌도 들었다.

“괜찮습니다. 저도 긴장하긴 했지만, 평생을 화장품 연구하신 분이시니 자부심도 대단하실 것 같아요.”

하은은 연구소에서의 파견 기간이 순탄치 않겠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은은 회사에 온 지 두 시간 정도 되었을 뿐인데, 벌써 기가 빨리는 기분이었다.

어제부터 제대로 식사하지 못했고, 긴장한 탓에 더 배가 고픈 상태였다.

또한 정신 차릴 만한 진한 커피 한잔이 절실한 그녀였다.

망설이다가 하은은 박 실장에게 말했다.

“실장님, 혹시 지금 대표님 만나러 가는 건가요?”

애절한 눈빛을 보내는 하은이 안타까워 보였는지, 박 실장은 분위기를 살폈다.

“아직 시간이 있을 듯합니다. 잠깐 쉬다가 가시겠습니까?”

박 실장은 하은의 마음을 헤아려 줬다.

“잠깐 커피 한잔하고 싶은데….”

“그럼 한 시간 뒤에 대표님 면담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박 실장은 하은에게 제안했다.

한 시간의 여유면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실 수 있는 시간이었다.

고개를 세차게 여러 번 끄덕이는 하은이 가엾어 보였다.

“제가 안내해 드릴까요? 아니면 혼자 다녀오시겠습니까?”

“바쁘실 텐데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몇 시까지 어디로 가면 될까요?”

“그럼 12시 30분에 로비에서 뵙겠습니다.”

한 시간의 여유가 생겨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고 긴장감이 하은의 온몸에 팽만했다.

왜 이렇게 긴장되고 초조한 느낌이 점점 커지는 건지 하은도 알 수 없었다.

어제 한국에 들어와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한 기억이 없어서일까?

예전에 먹었던 국밥이 생각났다.

하은은 부모님과 국밥을 자주 먹었었다.

아버지가 국밥 애호가였기에 맛있다는 국밥집을 어린 동생과 어머니 모두를 대동하고 외식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오늘은 외식이다.’를 외치면서 국밥 나들이를 다녔다.

한국에 와서 그런지 부모님 생각도 나고 국밥 생각이 절실했다.

국밥집을 찾기에 그다지 어렵지 않았고 회사가 즐비하다 보니 손쉽게 찾았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콩나물국밥집이었다.

어릴 때 어머니가 자주 만들어 주셨던 콩나물국밥을 생각하면서 씁쓸한 국밥을 먹을 수 있었다.

아직 점심시간 전이라 그런지 대기 없이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30분 정도 여유 시간이 있기도 하고 카페인이 절실히 필요하기도 커피 한잔해야 정신을 차리고 대표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뮤아 뷰티는 신생 계열사인 만큼 현재까지 뚜렷한 대표 화장품은 아직 없었다.

뮤아 그룹에서 2년 전 만든 뮤아 뷰티는 대표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소문으로 뮤아 권태현 회장의 딸 권지아를 대표로 내세웠다고 알려져 있었다.

색조 화장보다 기초화장품에 관심을 더하는 회사인 만큼 기본에 충실하겠다는 발표도 있었다.

권태현 회장은 아들 둘에 딸 하나인데, 큰아들이 사고로 비명횡사했다는 뉴스를 본 적 있던 하은은 지레짐작으로 후계자를 차남이나 장녀에게 위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했다.

권지아는 가끔 아버지 권태현과 매스컴에 노출이 되어 왔지만, 차남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권태현 회장이 차남을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가십거리는 늘 있기 마련이었다.

지금으로 봐서는 권지아가 유력한데, 하은이 알기에는 그녀는 30대 후반으로 알고 있었다.

생각의 늪에 빠져 커피를 마시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하은이 시계를 보다 12시 20분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는 박 실장과 서로 눈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로 향해 걸으면서 하은이 궁금한 것을 질문했다.

“권 대표님 어떤 분이세요? 처음 뵙는데…. 조금 떨리네요. 권지아 대표님 맞으시죠? 매스컴에서 봤을 때 미모가 상당히 아름다우시던데….”

박 실장은 긴장하면서 수다스러운 하은이 조금은 귀여워 보였다.

“권지아 님이 대표가 아니십니다.”

박 실장은 한마디 하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하은은 ‘그럼 대표가 누구지? 외부인을 영입했나? 뭐 상관없지만….’ 하며 혼자만의 생각에 잠기면서 걸어갔다.

대표실 대기실에 들어가니 더 긴장된 하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