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재벌집 전남편이 내 매니저를 한다 (합본)

촬영장에 계속 컷이 외쳐졌다. 그건 감독의 목소리가 아녔다.

“태오 씨 왜 저러는 거야? 미치겠네.”

그건 오세희의 전남편, 우리나라 브랜드 평판 1위 기업인 AH 그룹의 부회장직을 그만두고 전 아내인 오세희의 매니저를 하는 차태오의 목소리였다.

“저 눈빛이 이상합니다.”

차태오는 오세희와 상대 배우 현이의 살이 닿기만 해도 눈빛만 마주치기만 해도 컷을 외치며 촬영을 방해하고 있었다.

세희는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왜 차태오를 자신의 매니저로 하겠다는 계약서를 쓴 걸까?

철커덩 소리와 함께 태오가 대문을 열고 나왔다. 그 육중한 대문은 태오 정도여야 열 수 있을 것 만같이 높고 컸다. 큰 키에 다부진 몸, 남성미가 느껴지는 이목구비에 알 수 없는 무덤덤한 표정까지 더해져 태오에게 아우라가 번져 나왔다.

“어떻게 된 일이죠?”

태오와는 결이 다르게 곱상하게 잘생긴 현이 세희를 부축하고 서 있었다.

“왜 제 부인을 그쪽이 안고 있는 겁니까?”

태오의 적대감이 느껴지는 말투에 김현이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저도 술에 취했다면 이런 일은 하고 있지 않았겠죠. 술자리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모두 다 이 지경이라서 제가 집으로 배달 중입니다.”

그사이 세희가 약간 정신을 차렸는지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태오를 바라보았다.

“어? 태오 씨. 내 남편. 차태오. 히. 잘생긴 우리 남편.”

태오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곤 세희를 현이에게서 넘겨받았다. 태오의 단단한 품속에 들어가자 안도감인 들었던 걸까? 순간 세희가 앙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힘들다. 힘들어. 나 힘든 거 알아? 차태오.”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태오가 현이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은 채 세희를 안고 그 육중한 문을 열고 다시 들어갔다.

***

머리가 무거웠다. 얼마 만에 술을 진탕 먹은 걸까? 이렇게 술을 마신 게 결혼하고 처음이었으니까…. 2년?

“물. 목말라.”

갑자기 목이 타는 듯했다. 목에서 촥 가라앉다 못해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가 세어 나왔다. 세희는 눈도 잘 못 뜬 채 주변을 손으로 더듬었다.

“물 좀 줘요.”

그 손에 차가운 유리잔이 쥐여 졌다. 세희는 별생각 없이 물컵을 받아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겨우 눈을 뜨고는 빈 물 잔을 아쉽다는 듯 바라보다 불현듯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꿈에 덜 깼나? 이 집에 내가 물 달라고 물주는 사람이 다 있네.”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피식하고 소리를 냈다. 그때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꿈 아닙니다. 일어난 걸 보았으니 전 이만 출근하는 편이 좋겠군요.”

세희는 감정이 하나 실리지 않은 것만 같은 그 건조한 목소리에 화들짝 정신 차렸다.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드니. 멀끔하게 차려입은 양복에 머리까지 깔끔하게 정돈된 남성이 보였다. 우리나라 제일이라는 AH 그룹 회장의 아들 차태오. 이 남자가 세희의 남편이었다.

“그러니까. 집이네요…?”

값비싼 가구들이지만 모던한 느낌이 드는 자신의 침실을 둘러보았다.

“다행이다.”

길에서 기어다니지 않아서, 길에서 퍼질러 자지 않아서, 라는 말은 태오에게 말할 수 없어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삭였다. 세희는 훅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취했어도 집까지 들어올 정신은 있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어제 제가 어떻게 들어왔어요?”

아무리 더듬어 보려고 해도 어제 일이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아 난감했다. 혹시 자신이 부렸을지 모를 주사에 슬슬 걱정되기도 했다. 태오와 단둘이 사는 것도 아니니까.

“아버지하고 어머니도 저 어제 술 마시고 집에 들어온 거 아시나요?”

시부모님이 알게 되면 큰일이었다. 특히 시어머니가 알게 되면 개지랄……. 아니,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대답 없이 태오가 등을 돌리고 나가려 하다가 다시 뒤돌아보았다.

“우리 이혼합시다.”

눈을 꿈뻑이며 자신이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생각해보았다. 술에 취해서 그런지 머리가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는 느낌이었다. 이혼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뭐요? 아. 술 취하면 말이 이상하게 들리나?”

“이혼하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잘못들은 아니라는 걸 확인시켜주듯 태오가 다시 그 말을 반복해서 말했다. 그제야 세희의 머리에 이혼이라는 말이 해석되어 들어왔다.

“이혼? 미친 거 아니야……?”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이혼 왜? 혹시 내가 술 마신 것 때문에? 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닐까? 술 한번 먹었다고 이혼을 하자고 하다니. 세희가 두 손으로 꼭 입을 틀어막고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태오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았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세희의 의사는 상관없다는 듯이 태오는 나직한 목소리라고 말을 이어 나갔다.

“한동안은 비밀로 하도록 하죠. 아무한테도 알려선 안 됩니다. 부모님께도 비밀로 하도록 해요.”

“그러니까…… 이혼이요?”

태오가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자신을 쳐다보는 세희를 그윽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평상시라면 그 눈에 한 번 반하고 두 번 반했겠지만, 뭔지 모를 개소리하는 이 순간에 속을 알 수 없는 그 눈빛이 두려워졌다.

“당연히…… 수락하겠지요?”

당연히라고? 어제 자신이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질렀나? 세희는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그때의 기억은 텅텅 비어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개진상 짓을 부렸다고 해도 한 번의 실수였을 텐데 이혼이라니 억울했다. 세희가 고민하는 틈에 태오가 딱하고 결론을 지었다.

“그럼 그렇게 알고 나가보겠습니다.”

태오가 잠시 세희를 보며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더니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그제야 세희는 숨을 몰아쉬었다.

“저 사람 뭐라고 하고 나간 거야? 이혼? 미친 거 아니야? 아침부터 내가 뭔 개소리를 들은 거야?”

잠결인지 꿈결인지 구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휘몰아친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려는 듯 자신의 뺨을 세게 때려보았다.

“아. 개 아파.”

때려도 너무 세게 때린 듯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당연히 꿈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뺨에 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꿈이 아니네. 오늘 왜 이래? 술 한번 먹었다고 이혼?”

세희는 고성이라고 지르고 싶었지만 이 집은 시부모님과 같이 사는 곳이었다. 조심해야 했다.

“아까. 태오 씨가 부모님께도 이혼하는 건 비밀이라고 했지?”

의문과 분노를 숨기고 침대 밖으로 나왔다. 상황이 어이는 없었지만 아침 준비를 해야 했다. 시어머니가 난리를 치는 꼴을 본다면 반쯤 날아간 멘탈의 나머지도 반쪽도 날아갈지 몰랐다. 집에서 살림하는 건 자신과 잘 맞지 않았다. 특히 정갈하게 음식을 차려낸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녔다.

‘그래도 이제 익숙해지려고 하는데…….’

입술을 꼭 깨물고 1층으로 내려갔다. 이혼은 이혼이고 시집살이는 시집살이였다.

내려가 보니 주방일 하는 실장님이 주방 일을 다 봤는지 행주질을 하고 있었다.

“식사 다 끝났나요?”

실장이 세희를 흘겨보았다. 그래도 제가 작은 사모님인데 저렇게 노려보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언젠가 저 아줌마를 잘라버리겠다고 세희는 다짐했다.

“네. 끝났습니다. 덕분에 저 혼자 다 했지만요.”

그리곤 휙 하고 식당 밖으로 나갔다. 뭐, 주방일 보는 사람에게까지 무시당하는 데 익숙해졌다. 무시? 까짓것 나도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언젠가 자신이 이 주방 정도는 시어머니처럼 호령할 날이 오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때를 각오하시라.

“모두 식사를 마친 모양이니 급한 일은 해결됐네.”

실장도 일을 다 봤는지 나가고 세희는 텅 빈 부엌 식탁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다시 천천히 태오의 말을 곱씹었다.

“이혼…….”

그런데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태오 씨 미친 거 아니야?”

“뭐? 누가 미쳐?”

세희가 화들짝 놀라 일어서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침인데도 풀 화장을 마친 모습의 시어머니였다. 자신은 아침에 일어나기도 힘든데 시어머니는 도대체 언제부터 일어난 것인지, 시어머니의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세희는 이 집의 집안일을 자신이 호령할 꿈이 조금씩 찌그러져 가는 걸 느꼈다.

“너 아침도 못 차린 주제에 앉아서 네 신랑 욕이나 하고 앉아 있니? 팔자가 좋구나?”

“그게 아니고 어머니…….”

왜 그렇게 말하게 됐는지 설명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태오가 이혼 건에 대해선 부모님에게까지 비밀로 하자고 했으니까. 망할. 비밀 같은 거 딱 질색인데.

“아닙니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네가 그랬지?”

아침부터 다짜고짜 뭘 자신이 그랬냐는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태오가 이혼은 비밀로 하자고 했으니 이혼은 아닐 테고 말이다.

“뭘요, 어머니?”

“네가 분가해서 살자고 내 아들 살살 꼬드긴 거 아니야?”

“분가…… 라고요?”

분가? 태오는 이혼하자고 했는데 어머니는 분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세희는 머릿속이 복잡해서 잠시 생각을 했다. 먼저 시어머니의 의중을 살펴야 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이 집에서 살면 밥 나와 청소해 줘 품위유지만 조금 하고 집안일 약간만 도우면 되는 거 아니야? 근데 기어코 나가서 살겠다는 건 내가 꼴 보기 싫은 거 아니냐?”

그 말은 정답입니다. 어머니. 시어머니가 랩하듯 쏟아낸 말들이 모두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긋지긋해도 그것 때문에 분가하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정확히 태오가 말한 건 분가가 아니다. 이혼이었다.

“오해세요. 어머니.”

“오해? 오늘 태오가 분가하겠다고 통보를 하고 나갔는데. 오해?”

“어머니. 저는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어제 술을 마셔서 그런지 어머니의 말소리가 뇌에 다트처럼 날아와 꽂히는 듯해 머리가 더 쪼개질 것 같았다. 세희가 검지와 엄지로 이마를 짚었다.

“지금 그 태도는 뭐니? 내 말이 골치가 아파?”

또 정답입니다. 어머니. 하지만 시집살이의 진수는 진실을 숨기는 것. 얼른 이마에서 손을 내렸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어제…….”

술 마신 걸 시어머니가 알고 있을까? 변명을 하려다가 세희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이래도 저래도 시어머니에게 들을 수 있는 칭찬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덜 혼날 수는 있을지 않을까? 그렇게 매일 혼나고도 세희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제가 머리가 아파서요.”

하지만 시어머니는 세희가 왼쪽으로 가도 오른쪽으로 가지 않는다고 화를 낼 것이고 다시 오른쪽으로 가도 왼쪽으로 가지 않는다고 화를 낼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든 구박을 할 것이다. 시어머니의 다트 같이 쏘아대는 목소리가 다시 쏟아져 나왔다.

“팔자 폈다. 팔자 폈어. 태오는 왜 너 같은 게 좋다고 해서. 우리 소진이 같은 집안 좋은 애 나 두고 연예인? 참나. 내가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리고 저 소리다. 결혼한 지 2년이 되어 가는데 아직도 태오와 자신은 결혼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그래도 오세희 대한민국을 쥐어 잡는 톱스타였다. 진짜 톱스타. 누구도 함부로 못 했던 톱스타. 세희는 잠시 그랬던 나날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찬란했던 과거는 없어졌고 현실은 자신 앞에 있었다.

“지금 당장 태오한테 전화해서 분가 안 하겠다고 말해.”

자신도 아침에 일어나 기습으로 이혼 통보받은 판이었다. 그 개소리 자신도 취소하고 싶었다. 이 상황에 누가 누굴 설득할 수 있을까? 세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혼 좀 막아달라고 시어머니에게 하소연하고 싶었다.

“왜? 너도 분가하고 싶어서 전화 못 하겠어?”

정말 전화라도 해서 취소해 볼까? 세희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어머니 분가 정도의 문제라면 저도 좋겠습니다. 하지만 태오 씨가 제겐 이혼하자고 했다고요.’

하지 못할 말을 속으로 삭이며 휴대폰을 쥔 손에 힘만 더 주었다.

“빨리 전화 안 하고 뭐 하니?”

버럭 소리 지르는 시어머니의 고함에 세희가 움찔했다. 이혼까지 하게 생겼는데 끝까지 시어머니는 자신에게 호통만 치시는구나 생각하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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