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를 잊지 말아요

세월이 흘러 빛이 바래도

나를 잊지 말아요

이 마음은 그대로니까

나를 잊지 말아요

기억이 흩어져 가도

나를 잊지 말아요

붉게 물든 이 마음 변함없으니

***

따사로운 봄날.

말쑥하게 차려입은 한 노인이 마을버스에서 내렸다.

노인은 심호흡을 했다. 조금 상기된 얼굴로 주택가를 걸어갔다. 걸음마다 가슴이 설레었다. 호흡마다 기쁨과 슬픔이 뒤엉켰다.

노인은 옛사랑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죽기 전에 꼭 한 번 만나고 싶은, 아니 꼭 만나야만 하는 그 사람을 50년 만에 찾아가는 길이었다.

얼마나 변했을까.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까. 알아볼 수는 있을까.

이윽고 노인의 걸음이 멈췄다.

평화로운 골목길은 햇살이 밝았다. 그리고 머리가 하얗게 센 한 여인이 집 앞의 계단에 앉아 있었다. 조그마한 아이들이 공을 차며 놀고 있는 그곳으로 세월의 바람이 불어갔다.

노인은 가슴이 아려왔다.

그 옛날의 봄바람에 벚꽃이 날리는데.

다정했던 그날의 연인이 웃으며 돌아봐줄 것만 같은데, 불어간 세월이 흩어진 곳엔 자신만큼 나이 든 사랑이 쓸쓸히 앉아 있었다.

노인은 마음이 물결쳤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 세월 앞에 멈춰 섰다.

여인이 쳐다봤다. 노인은 다감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에요.”

“…….”

“연희 씨… 나 알아보겠어요?”

여인은 자신처럼 하얀 머리에 주름진 남자를 바라보았다. 문득 놀라는 빛이 스쳤다.

“아….”

“누군지 알겠어요?”

여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지막이 대답했다.

“철수 씨….”

휘몰아 드는 봄빛이 그 옛날의 심정을 채색했다. 여인은 얼굴이 상기되다 이내 눈물 빛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이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쳐다봤지만 곧 재미난 공놀이를 이어갔다.

철수는 연희의 옆에 앉았다. 50년 만에 그녀를 돌아보니 추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목이 메었다. 회한이 넘실거렸다. 아니, 이 순간이 꿈만 같았다.

왜 이제야 만났을까. 왜 둘은 이별을 했을까. 야속한 그날의 이야기가 서러운 바람을 타고 불어왔다.

연희는 허공을 향해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난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철수는 젖어 드는 눈빛으로 말했다.

“잊다니요. 어떻게 잊겠어요. 난 정말 잊을 수가 없는데.”

“…….”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철수의 말에 연희는 가슴이 헝클어졌다. 되돌릴 수 없는 그날의 사랑이 아득하게 파도쳐 왔다. 눈앞이 부예졌다.

철수가 손을 내밀어 연희의 손을 잡았다.

“정말 미안해요.”

철수는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죽기 전에 꼭 다시 만나 정말 미안하다고… 정말….

***

철수와 연희는 26살에 만나 3년을 연애했다.

그리고 29살 봄에 철수네 집으로 연희가 첫 인사를 드리러 갔다.

푸른 잔디 마당은 넓었고 커다란 2층 저택은 한 눈에도 으리으리했다. 연희는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거실의 소파에 철수와 나란히 앉았다.

그런 연희를 철수의 부모님은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격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부유한 철수 네와 달리 연희는 작은 연립주택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외동딸로 자란 연희는 다니는 직장 외엔 내세울 것이 없었다. 단출한 연희의 조건에 철수 어머니는 말없이 시선을 거뒀다.

볼 것도 없다는 듯.

연희는 시드는 꽃처럼 고개를 숙였다.

철수만 당황하며 얼굴이 붉어졌다.

그로부터 1년여 간 부모님의 외면과 거부, 불안과 서글픔의 시간을 보낸 둘은 서른 살 봄에 다시 철수네 집 대문을 열었다. 푸르른 잔디 마당과 현관문을 지나 조마조마 거실로 올라섰다.

철수 어머니의 생일이었다.

생일 케이크를 들고 찾아온 연희를 그러나 철수의 부모님은 냉랭하게 대했다. 차마 박대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이런다 해도 바뀌는 건 없다고 시선 하나 주지 않았다.

철수가 홀로 애타 하며 반짝거렸다.

둘만의 사랑 이야기가 처량히 반짝거렸다.

결국 연희는 눈물을 떨어뜨리며 인사를 한 후 집을 나오고 말았다. 뒤따라 나온 철수가 손을 잡았지만 도리질을 하는 연희를 붙잡지 못했다.

“연희 씨….”

연희는 대문 밖에서 철수의 손을 놓았다.

울며 멀어지는 연희를 철수는 파도치는 눈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습이 파도 너머로 사라지자 철수는 설움에 휩싸여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부모님 앞에서 소리치며 울음을 터트렸다.

절절히 항의하고 두 손을 모아 애원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격이 맞지 않는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철수는 눈물을 뿌리며 마당으로 나와 벤치에 주저앉았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섧게 우는 연희의 모습에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미안해요….’

뜨거운 눈물은 봄날의 세상을 적시고 사랑은 너무나 아파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철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

막막한 이별의 시간이 흘렀다.

계절은 어느덧 늦가을에 이르러 있었다. 거리의 가로수는 스산한 낙엽들을 떨어뜨리고 석양은 도시의 풍경 위로 처연하게 붉었다.

차가운 공기에 옷깃을 여미는 행인들.

반짝이며 흘러가는 차도의 차량들.

회사를 퇴근한 연희는 힘없이 거리로 나섰다. 걸음마다 가슴에 담긴 물빛이 흔들렸다. 찰랑이는 그 물빛이 아렸다.

조용히 마음을 닫았다.

‘잊자.’

그렇게 걸어가던 연희의 모습이 멈춰 섰다. 오가는 사람들 속에 철수를 발견했다. 철수는 다가와 노을빛 어린 미소를 지었다. 눈물 난 그 미소가 둘 사이에 아롱졌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우리 조금만 기다려 봐요.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 결국 봄이 올 거예요. 약속할게요. 제가 정말 약속할게요.”

연희는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그만… 나 이제 그만 아파할래요.”

“연희 씨….”

“나 그만 아파하고 싶어요.”

사랑이 너무 아파 눈물로 밤을 지새워도 삶은 또 살아가야 했다. 아픈 아버지 앞에 눈물에 부은 얼굴을 더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다. 슬프지만, 가슴이 아프지만, 이별은 이제 어찌할 수 없었다.

“어머님 말씀이 맞아요. 사람은 다 자기에게 맞는 자리가 있어요. 맞지 않는 자리는 서로를 아프게 할 뿐이에요. 그러니까….”

“아니에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미안해요. 차라리 나하고 단둘이….”

연희는 도리질을 했다.

둘의 표정과 눈물 빛에 오가는 사람들이 쳐다보며 지나갔다. 연희는 차오르는 감정을 삼키고 한숨을 쉬었다.

“나 힘들어요. 정말 힘들어요. 그러니까 우리 여기서 이별을 해요. 우리는 여기까지… 여기까지.”

“연희 씨, 제발.”

철수가 손을 잡았지만 연희는 인연을 끊듯 손을 거두었다.

“잘 가세요. 언젠가 다시 만나면, 그때 다시 인사해요. 아프지 않게.”

떠나가는 연희에 철수는 눈물이 쏟아졌다. 갈 곳 잃은 격정이 온 가슴에 뜨거웠다. 방울방울 세상을 가렸다.

행인들이 당황하며 쳐다봤다.

무슨 일이 있기에 저리 슬피 우는 걸까.

길에서 홀로 우는 남자가 구슬프고도 처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