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첫사랑은 끝났다 (합본)


#1

 

 

 

어두워진 하늘 덕분에 창문에 비친 풍경은 바깥의 상황보다 안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대변해 주었다. 쑥대밭 되기 일보 직전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안의 상태는 난장판이었다.

 

웨이브를 넣어 풍성해진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깔끔하게 꽉 묶은 민영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전신이 비친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그녀는 블랙과 화이트의 굵은 실이 한데 어우러진 트위드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민영은 한참을 가만히 있더니 뭔가 부족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무룩한 얼굴로 거울에 비친 자신을 요리조리 확인한 뒤,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어떠냐고 물었다. 그녀의 시선에 꽂힌 건 하늘색 블라우스에 검은 정장 바지 차림의 여자였다.

 

두 사람이 있는 곳은 민영의 옷방이었다. 그곳은 민영이 허물 벗듯 벗어놓은 옷들 때문에 바닥이며, 어디 가릴 것 없이 이미 포화상태였다. 주방에서 가지고 온 의자에 앉아있는 수영의 눈은 지칠 대로 지쳐 보였다. 이미 같은 질문을 수없이 받았는지 끄덕거리는 고개로 보이는 동공이 살짝 풀려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민영을 방치하고 놔두면 밤샐 때까지 집 안에 있는 모든 옷을 꺼내 놓으며 결정장애를 앓을 게 분명했다. 수영은 이 뫼비우스의 띠같이 계속 같은 곳을 맴도는 현실에서 나갈 수 없을 거라는 게 여실히 느껴지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민영이 서 있는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민영의 앞까지 온 수영은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네가 거적때기를 입고 나가든 명품을 휘두르고 나가든 아무런 문제가 안 돼. 왜냐. 걔한테 겉치레는 그리 중요하지 않거든. 네 과거를 돌아봐봐. 네가 아무거나 주워 입고 갔을 때 걔가 너한테 불평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어?”

 

민영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민영도 알고 있다. 그와 과거에 데이트했을 때 내 꼴이 어땠는지. 모자를 푹 누르고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나가도 좋아했고, 예쁘게 꾸며도 그의 반응은 늘 한결같았다. 똑같이 웃어줬고 똑같이 행동했다.

 

거봐. 걔는 그냥 네 자체가 좋은 거야. 분명 너 보면 눈에서 꿀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달려 올 거야.”

 

옷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혹시나 오랜만에 보는 자신을 보고 마음이 식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아려왔다. 울상을 짓는 민영의 모습에 수영은 민영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두드렸다.

 

이상한 망상 같은 거 펼치고 있는 거 아니지?”

 

망상이 아니라 현실 자각 중이야.”

 

수영이 한숨을 쉬며 아까 앉아있던 자리로 다시 돌아갔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시간 버릴 바에는 그냥 자는 게 어떨까? 내일 일찍 나가야 한다며.”

 

하아, 그렇긴 한데 이 상태로는 죽어도 잠이 안 올 거 같아서 그래. 안 되겠다. 조금만 더 찾아볼래.”

 

각성한 사람처럼 민영은 후다닥 다시 옷장에 착 달라붙어 걸려있는 옷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말릴 수 없다는 걸 예감한 수영은 비장함마저 감도는 얼굴로 옷장을 헤집는 그녀의 행동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렇게 잘 보이고 싶어?”

 

당연하지.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이왕이면 예뻐 보이고 싶잖아. 하아, 이것도 영.”

 

민영은 옷을 꺼내 몸에 대보고 한참을 고민하다 미련 없이 바닥으로 던지기를 무한 반복 중이었다.

 

걔도 참 문제야. 오면 온다고 좀 일찍 알려주면 안 돼? 왜 급하게 알려줘서는.”

 

방 안에 옷으로 산을 만들 지경이 되자 수영이 푸념하듯 한소리를 했지만, 민영은 오히려 그를 감싸주느라 바빴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뭐. 거기다 대고 왜 미리 말도 없이 오냐고 하기 그렇잖아.”

 

난 네 편에서 서서 말하고 있는데 넌 지금 네 남친 편들어 주는 거야?”

 

아니. . 말이 그렇다는 거지. 편까지야.”

 

수영이 뾰로통한 얼굴로 따지자 놀란 눈으로 우물쭈물하는 민영의 모습에 그녀는 더 놀리고 싶어졌다. 수영은 과장되게 손뼉까지 치며 참사랑이라고 축하를 해주었다. 그녀의 오버스러운 행동에 괜히 뻘쭘해진 민영은 손을 허공에 휘두르며 그만 놀리라고 그녀를 나무랐다. 더 했다가는 그녀의 매운 손바닥이 등에 꽂힐 거 같은 예감에 수영은 바로 놀리는 것을 중지했다.

 

그래도 미리 언제 올지 알았다면 적어도 이런 사달은 안 났겠지. 뭣하면 주말에 쇼핑이라도 했을 거 아니야.”

 

수영의 말에 민영의 고개가 빠르게 벽에 걸린 시계 쪽으로 향해졌다. 그녀의 눈빛을 읽은 수영은 그녀의 입에서 질문이 나오기도 전에 답을 해줬다.

 

당연히 오늘은 영업 끝났지. 시간이 몇 시인데.”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일찍 문 닫고 갔다 올 걸. 바보 같기는.”

 

힘없이 한숨을 내뱉으며 옷장을 뒤지는 민영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수영의 입에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게 그렇게 자책까지 할 일이야? 내가 괜한 말을 꺼냈네.”

 

가방에서 울리는 진동 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가방으로 향했다. 수영이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자 그녀의 남편이 민영의 집 앞에 도착했다는 문자였다.

 

벌써 왔대?”

 

. 생각보다 일이 일찍 끝났네?”

 

남편이 야근한다는 말에 수영은 민영의 부탁을 들어주러 퇴근 후 바로 민영의 집으로 온 것이었다. 일 끝나고 바로 와서 피곤했는지 수영은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여기서 오랜만에 자고 가고 가면 좋았는데.”

 

종종 민영의 집에 모여 밤새 수다를 떨었던 게 떠오른 민영은 아쉽다는 얼굴로 수영이 나갈 채비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영이 한쪽 구석에 벗어둔 정장 상의와 코트를 입고 핸드백을 어깨에 멘 채 혀를 짧게 내밀고 민영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어쩔 수 없네. 나 데리러 일부러 왔는데 매정하게 가라고 할 수 없잖아?”

 

할 수 없지. 오늘 일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와 줘서 고마워.”

 

민영은 그녀의 허리를 잡고 등 뒤에 매달린 상태로 현관문까지 같이 걸어갔다.

 

별말씀을. 옷은 인제 그만 꺼내고 얼른 쉬어. 그러다 내일 못 일어난다.”

 

. 알겠어. 조심히 가.”

 

현관문까지 나와 손을 흔들고는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안으로 들어온 민영은 방 안 가득 어지럽힌 옷가지들을 보고 한숨을 푹 쉬고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얼굴로 다시 옷장에 달라붙어 옷들을 하나씩 들추기 시작했다. 결국 자정이 넘어서까지 뭘 입을지 마지막까지 고민하다 최종 선택을 마치고 잠든 민영은 수영의 예언대로 결국 늦잠을 자버리고 말았다.

 

미쳤어. 진짜.”

 

머리를 대충 말리고 미리 준비해 놓은 옷으로 갈아입은 민영은 현관문을 박차고 나와 예약해 놓은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기사님, 죄송한데 빨리 부탁드려요.”

 

다급한 그녀의 말투에 선한 인상의 택시 기사가 백미러로 민영과 눈을 맞추며 빙긋 웃음을 지었다.

 

누구 만나러 가나 보네요.”

 

티가 나나 싶어 민영은 입고 있는 옷을 한번 내려다봤다.

 

티가 나요?”

 

좋은 사람 만나러 가는가, 얼굴에서 광채가 나네.”

 

하하. . 아주 소중한 사람이 오늘 귀국하거든요.”

 

민영은 미소를 지은 채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은 되지 않았다. 비행기에 타자마자 잠이 드는 그였기에 공항에 들어서자마자 핸드폰을 꺼놓는 게 습관이란 걸 아는 민영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이 빠듯해 초조한 마음이 자리 잡긴 했지만, 그와의 오랜만의 만남이 더 그녀를 자극했다. 설레는 마음이 겉으로 분출되는지 자꾸 입꼬리가 위로 솟구쳤다. 혼자 앉아 히죽대기 민망해진 민영은 황급히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내려올 줄 모르는 입꼬리를 내리려 애쓰며 괜히 먼 곳을 응시했다.

 

예상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주신 기사님께 감사 인사를 하고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민영은 곧바로 공항 안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거의 나올 시간이 된 것을 확인한 그녀의 마음은 극에 달했다. 마중 나온 사람들 틈에 섞여 민영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딱 맞춰 도착했는지 사람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민영은 목을 빼꼼 내밀며 그 많은 사람 틈에서 그의 얼굴을 애타게 찾았지만, 어디에서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옆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비우고 다른 사람들로 채워질 때까지 그녀는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

 

해가 주변을 붉게 수놓으며 아직 어둠에서 깨지 못한 푸르스름한 하늘을 물리치고, 누구보다 먼저 새파란 하늘에 높게 솟아올랐던 게, 제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자취를 감추고 사라져 버릴 때까지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받지 않는 그의 핸드폰에 음성 메시지를 남겼지만, 그의 연락은 사흘이 지난 지금까지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안 받으면 바로 비행기 표를 끊을 거라는 음성 메시지를 남기자 장난처럼 그의 핸드폰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민영은 받자마자 왜 이렇게 통화가 안 되냐고 따졌지만, 상대방의 목소리는 그녀의 기대와 달리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혹시 초원이니?”

 

익숙한 목소리에 민영이 묻자 조그마한 소리로 맞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직접 대면한 적은 없지만 이따금 시우가 다리를 놔줘서 통화를 한 덕분인지 그녀와 스스럼없이 언니 동생 사이로 가까워졌다.

 

시우 좀 바꿔 줄래?”

 

오빠는 언니 곁으로 갈 수 없어.”

 

그녀의 입에서 나온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민영이 헛웃음을 지으며 핸드폰을 고쳐 잡았다. 그런 말을 할 그녀가 아니었기에 민영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시우 옆에 있지? 장난 그만 치고 시우 바꿔줘.”

 

있어도 못 바꿔줘.”

 

그게 무슨 소리야. 당장 거기로 가기 전에 얼른 시우 바꿔.”

 

오지 마. 괜한 시간 낭비야. 언니가 와도 오빠는 언니를 만나줄 수 없어.”

윤초원!”

 

민영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초원은 담담한 목소리로 그녀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오빠는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워. 그게 언니를 위하는 길이야.”

 

헛소리 그만하고 당장 주소, 문자로 보내. 지금 바로 출발할 테니까.”

 

민영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옷방으로 들어가 구석에 박혀있는 캐리어에 손을 뻗다가 그녀의 입에서 나온 쓸쓸한 미안해.”라는 한마디에 흠칫 몸을 굳혔다.

 

오빠는 잊고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아. 난 언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여보세, 여보세요! 초원아!”

 

어느새 통화는 끊겼고, 다시 걸었을 때는 그의 핸드폰 전원이 꺼져있다는 말만 들려왔다.

 

민영은 털썩 바닥에 앉아 핸드폰을 바닥에 툭 떨구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더니 돌연 벌떡 일어나 캐리어를 꺼내 짐을 싸기 시작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마구잡이로 집어넣다 말고 민영은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정작 짐을 싼다고 해도 그가 있는 낯선 땅에서 그의 흔적을 찾을 방법이 없었다. 먼 곳까지 가 공부하고 있는 그를 방해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수백 번 참으며 일부러 찾아가지 않았던 게 후회가 되었다. 앉은 자리 앞에 눈물 자국에 뚝뚝 떨어지더니 민영은 흐느끼는 소리가 방 안에 가득 울렸다.

 

***

 

민영은 발주할 품목을 정리하다가 시계를 바라보고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어딘가로 급히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당사자는 바쁜지 통 연락이 되지 않았다. 혹시 못 들었을 수도 있겠다 싶어 다시 한번 더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전화 연결은 되지 않았다. 그녀는 뜻 모를 한숨을 쉬고는 핸드폰을 도로 내려놓고 마저 하던 일을 했다.

 

십 분이 지나서야 올려둔 핸드폰이 진동 소리를 내었다. 발신인은 민영이 아까 전화했던 인물이었다. 핸드폰을 손에 쥐고 선 목을 가다듬고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민영은 최대한 얌전한 목소리로 그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 역시 자신의 성격이 이렇지 않다는 걸 알지만 그와 연애하면서 어느새 이런 모습으로 정착되었다.

 

죄송해요. 바빠서 전화 오는지 몰랐어요. 무슨 일이에요?”

 

사귄 지 6개월이 넘어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어색한 기류가 흘렸다. 아직도 둘은 격식을 차리는 사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민영은 무슨 일이냐고 묻는 그의 말에 나오려는 한숨을 집어삼켰다.

 

. 오늘 그, 드레스 보기로 했었거든요.”

 

핸드폰 너머로 남자의 짧은 탄식이 들려왔다. 그의 짤막한 숨소리로 그녀는 그가 자신과의 약속을 잊었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미안해요. 어쩌죠? 일이 아직 남아서요.”

 

보통의 예비부부였다면 화를 내는 게 정상인 일이겠지만 민영은 달랐다. 중요한 일을 어떻게 잊을 수 있냐고 따지고, 소리치지 않았다. 언성을 높여가며 말다툼하면서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도 않았고 괜한 분란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기에 그녀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자연스레 그 일을 넘어갔다.

할 수 없죠. 괜찮아요.”

 

그녀의 말에 남자의 목소리가 밝아지는 게 확연하게 느껴졌다. 조심히 갔다 오라는 그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통화는 끊어졌다. 민영은 마치 누가 시켜서 억지로 통화를 한 것처럼 온몸에 진이 빠진 듯 핸드폰을 툭 내려놓고 양손으로 얼굴을 위아래로 쓸어내렸다.

 

이 결혼이 과연 옳은 길인가 하는 의구심은 결혼 약속을 잡은 이후 매일 그녀를 짓눌러왔다. 그녀의 엄마 미경은 점점 야위어 가는 딸이 걱정돼 안쓰러운 얼굴로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라며 그녀를 다독여 주었다. 하루하루를 의욕 따위 없이 죽은 듯 살아가는 자신을 근심 어린 얼굴로 바라보는 엄마한테 미안해진 민영은 결국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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