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갑자기 실내가 어두워졌다. 이어서 작은 무대 위에 은은한 조명이 비쳤고 사람들의 시선은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이윽고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오더니, 마이크를 앞에 두고 의자에 앉아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애써 의미를 두지는 않으려고 했다.

잘생겨 보이는 건 조명 탓일 거야.

아니, 적어도 이런 여대 앞 카페에서 노래해서 돈을 벌어 가려면 저 정도 곱상하게는 생겨야 여대생들 눈길이라도 끌 수 있을 테지.

노래? 어, 제법 잘하네?

하긴, 노래로 밥 벌어 먹고살려면 보통 사람들하고 비슷해서야 되겠어?

돈 받고 하는 일이니 이것도 따지자면 프론데……?

그런 식으로 그의 외모나 분위기, 감미로운 목소리와 노래 실력을 폄하하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노랫소리는 점점 더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그가 노래하는 동안 그 카페에는 오로지 그 남자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기타 연주만이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평소의 윤하답지 않은 것이었다.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따뜻하게 대하는 해맑고 순진한 여학생이었던 것이다. 그랬던 윤하가 유독 까다롭게 굴었다는 건 다름 아니라 이미 그 남자에게 마음이 가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 내보여서는 안 될뿐더러 스스로도 가라앉히려고 애써야 했다.

이런 데서 노래나 하고 다니는 무명 가수에게 빠진대서야 말이 되는가.

그것도 단짝 친구 민정이가 그리 좋다고 안달하는 사람을 말이다.

몇 주 전부터 민정은 이 사람 이야기를 했었다.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라이브 하는 남자를 보고 첫눈에 반해 단골이 되었노라고.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친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 진지하게 들어 주기는 했지만 속으론 코웃음을 쳤다.

카페에서 노래하는 가수 따위한테 빠져서 쫓아다닌단 말인가.

연예인들 따라다니는 날라리 여고생도 아니고 대학생씩이나 되어 가지고 이게 무슨 짓인가 하는 걱정 반 비웃음 반의 마음이 있었기에 민정이가 그동안 몇 번이나 이 카페에 가자고 졸라댔어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빠져나갔었다.

그런데 이번엔 옴짝달싹도 못 하게 되어 기어이 이 카페에 들어오게 되고 말았다.

민정이 계집애가 기어이 자기 생일 파티를 여기서 하려고 예약까지 다 해두었다는데 어쩌겠는가. 그래서 몇 달 만에 드디어 민정이의 왕자님을 얼굴이라도 보게 된 것이다.

 조명 아래 비친 그의 얼굴이 잘생겨 보였을 때도 그다지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아무렴 정상적인 눈을 가진 내 친구가 한눈에 반했다는데 못생겼을 리야 없지 않은가.

노래도 뭐, 잘하기는 한다만 돈 받고 무대에 서는 사람이 저 정도는 해야지 싶었다.

그런데, 그랬는데 웬일인지 듣고 있으려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눈물이라도 날 거 같은 묘한 기분이 된 것이다.

이런 것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다는 것일까.

색안경을 빼고 본다면 그 남자는 최근에 주변에서 본 그 누구보다 잘생겼고 노래도 엄청 잘하는 것처럼 들렸다. 무엇보다도 그 목소리에는 빠져들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카페 종업원이 그들의 테이블에 생일 케이크를 갖다주었다.

실내에 경쾌한 축하송이 울려 퍼지고 민정이 촛불을 불어서 끄자 폭죽이 터졌다.

한바탕의 축하와 박수 소리가 잦아들 무렵 무대에서 갑자기 말소리가 들렸다.

“생일을 맞이하신 분이 계시는군요. 축하드립니다. 제가 지금 끝나는 타임이라 이제 막 나가려고 했는데 도저히 그냥 갈 수가 없겠네요. 노래 한 곡 더 들려드리겠습니다.”

와아아 하는 함성과 박수갈채가 터졌다.

남자는 눈을 내리깔고 잠시 분위기를 잡더니 그윽한 목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어느 소녀에 관한 사랑 이야기였다.

윤하는 마치 저 남자가 자기를 보면서 노래 부르는 거 같다는 느낌을 받고 잠깐 황홀해졌지만 곧 그 착각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옆에서 민정이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기 때문이다.

“아아, 너무 감미롭지? 여기 열두 번도 더 왔는데, 저 오빠가 날 위해 노래 불러 준 적은 처음이야.”

그래, 그렇지. 민정이겠지, 아무래도.

그리 열심히 출석 도장을 찍어댔으면 최소한 얼굴은 기억을 하겠지.

게다가 생일이라니 노래 하나쯤 들려주고 싶었을 거야.

바보같이, 그런 걸 나한테 불러 준다고 착각하다니 이런 망신이 어디 있어.

혼자 착각했던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해져서 얼른 둘러댄다고 나온 말이라 뾰족해졌다.

“오빠는 무슨, 아저씨구만.”

“아니야, 그래도 그리 나이 많아 보이지는 않잖아?”

“글쎄, 모르지.”

왜 이렇게 삐딱해졌던 걸까.

나한테 불러 주는 거라고 착각했다가 혼자 망상에 빠졌던 게 창피해서?

아니야, 그냥 현실적이었을 뿐이야.

우리 나이에는 서너 살만 많아도 그냥 오빠보다는 아저씨라고 부르곤 하잖아.

영주 언니 남자 친구, 네 살 위인데도 우리가 따로 지칭할 때는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처럼 말이야. 그리고 저 정도면 충분히 아저씨 같네, 뭐.

괜히 심통이 나서 이제 막 노래를 마치고 일어나는 남자를 한번 째려보아 주었다.

키가 제법 크고 호리호리한 몸에 여자처럼 허리가 살짝 들어간 체형이라 뒤에서 한번 안아 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다가 문득 정신이 들어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머, 세상에,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그가 무대에서 퇴장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은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친구들은 한 10분 동안 그 남자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민정이 말고도 그 남자를 아는 애가 둘이나 더 있었던 것이다.

소연이란 친구는 그 남자가 여기 말고 어디에 나가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중에 귀에 확 들어오는 것은 이태원의 어느 나이트클럽이라는 소리였다.

“어머, 정말이니? 나이트에서 노래 부르는 거 보고 싶다. 여기보단 좀 더 대담할 거 아냐?”

“솔직히 좀 야하지.”

“저 남자가 야하다고? 얌전하게 생겼는데?”

“말도 마, 그곳 분위기가 워낙 그래서…….”

친구들 중에 제일 조숙한 편인 소연은 어느새 무리 중에서 제일 앞서가는 개척자가 되어 있었다. 나이트도 여러 번 가봤고, 그것도 학교 앞에서 미팅하고 춤추러 가고 하는 클럽이 아니라 본격적인 성인 나이트에 발을 들인 지도 꽤 오래였다.

하기야, 재수를 하고 들어왔으니 같은 2학년 중에서는 언니라고 할 만했다.

하여간 소연의 말 중에 압권이었던 건 그가 나이트에서 노래 부르는 모습이 야하고 퇴폐적이라는 것이었다.

대학교 2학년짜리 어린 여대생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꺅, 하고 비명을 지르고는 이다음에 그곳에 한번 가보자고 의기투합했다.

단지 윤하는 입을 꼭 다문 채 그저 친구들의 요란한 수다를 듣고만 있었다.

“윤하 넌 아직도 통금 시간이 10시니? 나이트 같은 건 구경도 못 했지?”

“아니야, 지난번에 한번 가봤어.”

“그래? 너희 아버지, 많이 풀어지셨구나?”

“아빠 출장 중이실 때.”

말해 놓고 민망해져서 살짝 얼굴을 붉히며 웃는 윤하는 마치 어린 소녀처럼 귀엽게 보였다.

탄탄한 기업체를 운영하는 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자란 외동딸 윤하는 그 안락한 그늘 밑에서 완벽한 보호를 받으며 비록 그것이 통제와 구속이라 할지라도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외박은 수학여행, 졸업여행, 학과 엠티를 제외하고는 꿈도 못 꿀 일이었고 그나마 엠티마저도 반대하시는 것을 교수님하고 통화까지 해서 겨우 허락하실 정도로 엄격하신 분이었지만 윤하 자신은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다행히 엄마하고는 친구 같아서 아버지가 해외 출장이라도 가시는 날에는 귀가 시간을 훌쩍 넘기기도 하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가질 수 있는 풍족한 환경이라 이만하면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자란 것이다.

아무래도 부모님의 영향이 절대적이어서 그런지 윤하 자신도 나이에 비해 보수적이고 고집스러운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런 터라 가끔은 친구들의 이야기가 다른 세상의 일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남자 친구 또한 아직은 없다.

미팅이나 소개팅을 아예 안 한 것은 아니지만 단 한 번도 애프터를 받아 준 적은 없었다.

부모님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녀 자신도 아직 남자 친구를 사귀기엔 이른 나이라고 단정 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던 그녀의 잔잔한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 것은 그 남자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애써 마음에 담아 두지는 않으려 했다.

윤하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시곗바늘이 9시에 가까워지자 친구들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난 이제 가봐야겠어.”

“벌써 9시야? 윤하 너도 참 대단하다, 아직까지도 10시 데드라인에 얽매여서 사니 말이야.”

“11시 정도로 미뤄 달라고 해봐. 이건 뭐 기숙사도 아니고…….”

 친구들의 와글거리는 불평에 윤하는 그저 미소로 대답하며 일어섰다. 그랬다가도 한번 휘둘러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누구 나랑 같이 나갈 사람 없어? 태워다 줄게.”

“아우, 됐어. 우리 소원은 네가 차 태워 주는 게 아니라 언제 한번쯤 차 없이 나와서 밤 12시 넘기도록 수다 떨면서 술이나 진탕 마셔 보는 거다, 얘.”

자기 차를 가지고 다니는 대학생이 흔치 않은 시절이었다. 아버지가 윤하에게 차를 사주신 까닭은 외동딸이 아침저녁 러시아워에 버스나 지하철에서 시달리지 않고 무엇보다도 이상한 놈 만나 봉변당하지 말고 안전하게 집에 오라고 사주신 것이었다.

윤하는 앙증맞은 빨간 소형차에 올라 차를 출발시키며 라디오를 틀었다.

우연인지 마침 음악 방송에선 아름다운 멜로디의 팝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윤하는 운전을 하면서 무심코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

노랫소리로 부드럽게 녹여 버린다니, 정말 섹시한 노래야.

언젠가 친구 누군가가 한 말을 되뇌던 윤하는 갑자기 아까의 그 남자를 생각해내고 기분이 묘해졌다.

그래, 그 남자, 인정하긴 싫지만 충분히 이 노래에 가까웠지.

그의 노랫소리가 부드럽게 나를…….

생각하다 말고 윤하는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를 이런 감정에 빠지게 하는 것은 그의 노랫소리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그의 눈빛이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여태까지 살면서 남자의 그런 눈빛은 처음 받아 보았다.

그 사람은 내게 관심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고객 관리 차원에서 카페에 온 모든 여학생에게 한 번씩은 그런 눈빛을 보내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평범한 눈빛이었던 것을 나 혼자 착각하는 걸까.

집에 도착해 자기 방으로 올라간 윤하는 레코드판들을 뒤적여 아까 그 여가수의 판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것을 전축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바늘을 그 노래에 맞추었다. 레코드판이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한동안 흥얼거리면서 따라 부르다가 욕실로 가서 씻고 나오니 노래는 한참 지나가서 다른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윤하는 다시 그 노래를 틀고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멍하니 따라 불렀다.

천장에 오늘 처음 본 그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타 치던 손, 나를 바라보던 눈빛, 미소 짓는 얼굴, 때때로 살짝 내리감은 눈, 무엇보다 그의 노랫소리.

정신없이 생각하다가 아차 싶어서 벌떡 일어나 음악을 중지시켰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좀 우스꽝스러웠던 것이다.

레코드판을 커버에 도로 넣고 오디오 장식장 안에 갖다 꽂아 놓은 뒤 고개까지 가로저었다.

난 그 남자에게 반하지 않았어.

절대로 그럴 리가 없지. 겨우 그 정도, 그따위 남자에게…….

자신에게 확신이라도 주려는 듯 일부러 더 폄하해서 그따위 남자라고 해버리고 나서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어차피 안 볼 사람인데 싶어서 맘을 편하게 가지기로 했다.

카페에서 노래하는 남자 따위라니, 우습지 뭐야.

윤하는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만으론 성에 안 차서 입 밖으로 내어 중얼거렸다.

부모님이 아신다면 얼마나 놀라고 실망하실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