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길게 내려앉아 바닥에 끌리는 커튼은 무언가를 감추듯 비밀스럽고 위험한 기운을 내뿜는다.

커튼의 색과 무늬가 익숙했다.

체스터셔의 내 방, 그러니까 공작부인의 침실에 있는 침대에 달린 커튼과 동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잘한 무늬가 들어간 셔링과 레이스가 풍성하게 달린 것이 사랑스러운 커튼이었다.

그런데 왜 모든 것이 이다지도 달라 보일까?

그냥 느낌뿐만이 아니다.

나는 사방을 둘러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중요한 것은 느낌이 달라도 이곳을 침실이라고 인식한다는 것이었고, 그러므로 내가 해야 할 일은 여기가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걸 확인하는 것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게 꿈이라는 건 명백하게 알겠다.

괴이하다.

나는 살면서 한 번도 꿈을 꾸면서 이게 꿈이라고 자각한 적이 없었다.

보통은 기억나지 않거나 기억이 나도 꿈은 꿈일 뿐이었다.

사방을 둘러보다가 어느 한 곳에 시선이 머물렀다.

벽난로 위, 그러니까 늘 장식품으로 가득 찼던 자리에 이상한 것이 있었다.

흐릿하게 보이는 글자가 꼭 ‘셰스톤’이라고 쓰여 있는 것만 같다.

‘셰스톤’이라니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나는 내가 본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글자를 향해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때, 아무도 없으리라 여겼던 방 안에서 위압감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만나고 싶어 했다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 커튼 너머를 바라보았다.

침대인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기도 한,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모를 공간이었다.

커튼으로 반 이상이 가려져 있는데 쉽사리 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왜인지 알 수 없지만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다.

“제, 제가요…?”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려 나왔다.

긴장되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것 같을 때, 그 목소리가 다시 나를 향해 날아왔다.

“또 흑주술을 원하는 것인가?”

흑주술!

거칠어진 호흡에 속도가 붙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존재가 눈앞에 있다.

흑주술이라니!

일전에 보았던 저주 인형, 아팠던 몸, 갑자기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것까지.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일련의 사건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고개를 내려 내 양손을 바라보았다.

이건 메델리아 에센바흐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엘리사 레나르트고, 내 몸을 찾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시죠?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있나요? 내가 흑주술을 해달라 빌던가요?”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별안간 남자의 목소리가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몸이 덜덜 떨려온다.

심장은 터질 것 같고, 눈물까지 나올 것 같았다.

방 안이 공포로 가득 차 어느 순간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게 모든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왜곡된 공간 안에서 나는 분리된 존재인 듯 아무런 뒤틀림을 느낄 수 없었다.

어지럽고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웃음소리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멎는 동시에 우레 같은 목소리가 내 머리 위로 내려꽂혔다.

“원하는 것을 이루었으면 대가를 달게 받아야지! 그런데 그게 자네는 아니로구만!”

목소리는 다시 웃기 시작했다.

온 사방에서 뱀 비린내 같은 냄새가 난다.

나는 우우욱하고 헛구역질을 하며 비로소 영원할 것 같던 잠에서 깨어났다.

일어나 앉은 시야 안에 익숙한 공간이 보였다.

우리가 숨어든 요새 같은 곳이었다.

향도 며칠 새 익숙해졌는지 편안했다.

나는 안전하다.

그건 꿈이었다.

나는 그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을 모른다.

온몸이 땀에 젖어 옷이 축축했다.

내 곁에서 침대에 머리를 묻고 앉은 채로 잠든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불길하고 불안하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을 것만 같은 공포가 나를 휘어 감았다.

누가 내게 그건 헛꿈이었고 네게는 아무런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이 남자가 혹여나 나로 인해 다치거나 죽게 되면 어쩌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또다시 몰려오는 구역감에,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뛰어갔다.

다리에 힘이 풀릴 때까지 게워 내고 나서야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다.

내가 잃은 모든 걸 되찾고 싶다.

***

그로부터 몇 개월 전.

“잠시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아가씨. 금방 오실 겁니다.”

집사가 정중한 어투로 말했다.

그는 참 좋은 사람이다.

내가 귀족 아가씨 같은 차림새를 하고 있지 않은데도 나를 정중하게 대해주고 있지 않은가.

나는 원래도 그가 참 좋았다.

그럼에도 그를 모른 척해야 한다는 것과, 익숙한 집을 낯선 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가슴이 아팠다.

“예. 고맙습니다.”

고개를 작게 끄덕여 주니, 집사는 가볍게 목례한 뒤 응접실에서 사라졌다.

저택 내부는 기억 속의 모습과 비교해 달라진 것이 전혀 없었다.

녹색 컬러로 꾸며진 응접실은 방문한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다.

물론 그게 내게도 해당되지는 않는 모양이었지만.

“크음.”

그 순간,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윌리엄 에센바흐 공작이 문간에 몸을 기댄 채 이쪽을 빤히 바라보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여전했다.

기억 속의 그 모습 그대로 조금의 흐트러짐이 없다.

그런 생각이 지나고 나니, 어째서 그가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고작 가정교사를 뽑는 일이다.

당연히 안주인이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일에 윌리엄이 왜….’

생각에 잠긴 새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가 내게 다가오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면접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그의 발걸음 소리가 묵직하게 들려온다.

긴장으로 입안이 말랐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남편의 얼굴인데, 반가움보다는 왠지 모를 두려움, 불안감이 불쑥 고개를 먼저 들었다.

윌리엄이 맞은편에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앉아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가정교사에 지원한 분이 맞습니까?”

나는 부리나케 그를 따라 앉으며 답했다.

“예. 맞습니다. 엘리사 레나르트라고 합니다.”

윌리엄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나를 관찰하듯 훑었다.

긴장감에 심장이 두근거린다.

손에서 자꾸만 땀이 배어 나왔다.

자꾸만 그의 시선을 피해 떨어지려는 고개를 붙잡고 있는 것이 고역이다.

“….”

윌리엄은 계속해서 말이 없었다.

길어지는 정적에 숨이 막혔다.

면접을 보러 온 것이 아니었나.

나는 슬쩍 귓바퀴를 만지작거렸다.

긴장하거나 당황하면 나오는 습관 같은 것이었다.

“에센바흐 공작저에서는.”

나는 참지 못하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읊조리듯 물었다.

“인사권이 공작부인께 있지 않은가요?”

윌리엄의 눈이 휘둥그레지다가 이내 곧 찌푸려졌다.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구나.’

잠시 고민에 빠졌던 나는 순간 아차 싶어 그를 바라보았다.

‘아. 설마 질문이 너무 무례했나?’

나는 얼른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자세를 고쳐 앉으며 사과했다.

첫인상부터 망칠 수는 없지.

“질문이 너무 무례했군요. 용서하십시오.”

“질문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윌리엄은 무언가 망설이는 듯하다가 한숨과 함께 답했다.

“제가 되레 신경 쓰이게 만들었군요.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말실수를 했다면 응당 사과를 해야지요.”

다행이다.

기분이 상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말을 돌려 본격적인 주제를 꺼냈다.

“혹, 공자님의 가정교사가 되기 위한 자격조건이 있을까요?”

내 물음에 윌리엄이 평정을 되찾은 얼굴로 되물었다.

“교육과정을 어디까지 받으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못 배우고 자란 것처럼 보이시겠지만, 귀족 예법과 역사, 사교 예절을 배웠습니다. 공자님의 연식에는 그 정도로도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군요. 그런 뜻으로 드린 질문은 아니었는데 불쾌했다면 미안합니다. 빈센트는 지금 정신이 불안정하고 마음이 아픈 상황입니다. 그래도 그 아이를 가르치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쓰러지기 전까지만 해도 빈센트는 활기차고 밝은 아이였다.

‘아이가 아프다고…?’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이 맞나?

한껏 당황한 내 표정을 본 윌리엄의 얼굴이 혼란스러워 보였다.

빈센트가 당신 아이도 아닌데 대체 왜 그런 얼굴을 하냔 거겠지.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다.

그의 입장에선 당연히 어처구니가 없고 이해할 수 없겠지.

나도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걸.

“….”

나는 결국 고개를 푹 떨구었다.

엘리사는 빈센트의 엄마가 아니다.

그러니까 눈물을 흘리면 안 돼.

나는 두 손을 꼭 맞잡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공자님께서 올해 연식이 정확히 어떻게 되시나요?”

“…빈센트는 올해 다섯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기억 속에 빈센트는 육 개월 차에 접어든 네 살이었다.

지금이 여름이니 대략 반년이 조금 넘게 지난 셈이었다.

그간 아이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입술을 사리물어 눈물을 삼켜냈다.

‘진정해야 해.’

아이가 아프다면 엄마였던 내가 옆에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하다.

아이를 보듬어 주고 함께 있어 주고 싶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차례 한 후 고개를 들었다.

“마음의 문제는… 마음은 마음으로 낫는 법이지요. 제가 공자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꼭 곁에 있어 드리고 싶습니다, 각하.”

“….”

윌리엄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길어지는 침묵에 민망해져 시선을 피하려는데 그가 일순 자리에서 일어섰다.

“레나르트 양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보아하니 귀족으로서의 품위도 전혀 부족해 보이지는 않는군요.”

긍정이구나!

정말 다행이다.

밝아진 얼굴로 윌리엄을 올려다보자, 그가 나를 빤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입주면 좋겠습니다. 물론 마차를 보내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윌리엄이 탁자를 검지로 몇 차례 두드리곤 입을 열었다.

“아이의 상태가 저 모양이니 곁에서 꾸준히 함께해 줄 이가 필요합니다. 그러기엔 입주가 좋지요.”

만약 면접에 붙는다면 입주로 하고 싶다고 말해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윌리엄이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내주었음에도, 그 이유가 빈센트에게 있다는 것에 마음이 아팠다.

윌리엄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답을 채근했다.

“어렵겠습니까?”

나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입주가 제게도 편할 것 같습니다.”

윌리엄은 안도한 듯 풀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당장 오늘부터 빈센트를 봐주면 좋겠군요. 짐을 가져와야 한다면 시종들을 보내겠습니다.”

“아….”

나는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짐은 따로 없습니다. 옷도 이 한 벌이 다여서… 매일 세탁해서 입으면 되니까 시종을 보내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윌리엄이 나를 한차례 훑어보곤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의류와 생필품도 제공하는 것으로 하지요. 여러모로 집이 아니라 불편할 테니.”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놀랐다.

옷까지 줄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얼굴이 홧홧해졌다.

그에게 미안하면서도 창피하고, 그러면서도 고마웠다.

나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듯 고개를 푹 숙이며 귓바퀴를 만지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