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꼬여 버린 첫 만남

철썩! 철썩!

잔잔한 파도가 고운 모래사장 위로 흩어져 내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정우는 느른한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부신 태양이 오늘도 어김없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후우!”

정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한낮의 더위를 증명하듯 반듯한 이마 위로 땀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손등으로 무심히 땀방울을 닦아낸 정우는 앞을 가로막고 있는 서비스 데스크에 상체를 기대며 몸을 기울였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습관처럼 다시 바다로 향했다.

넓게 펼쳐진 맑고 투명한 바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파랗고 깨끗한 하늘, 아름다운 해변을 즐기고 있는 몇몇의 사람들까지.

거기에 까르륵거리는 어린아이의 웃음소리까지 더해지며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운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휴우!”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한숨이 정우의 입에서 다시 한 번 흘러나왔다.

‘도대체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지…….’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한 것이 모두가 즐겁기만 한 이 세상에서 혼자만 외딴 섬에 갇혀 있는 기분이 들었다.

「가서 밑바닥부터 경험하며 너 스스로를 증명해 보이거라!」

노기 가득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게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쫓겨나듯 오게 된 곳은 사이판에 위치한 제이 리조트.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리조트 체인 중 한 곳으로, 다양한 해양 스포츠 시설과 강습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신분을 숨긴 채 신입 크루로 일한 지도 어느새 한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평소 활동적인 스포츠를 즐기던 정우였기에 그동안 큰 무리 없이 버텨 왔지만, 진상 손님을 대할 때나 지금처럼 더위 속에서 빈 부스를 지키고 있을 때면 답답한 마음이 가득했다.

‘그때 그 호텔을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필 거기서 걸릴 게 뭐람.’

정우는 때늦은 후회와 원망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은 사람이 많지 않네요.”

상념을 깨는 목소리에 정우가 고개를 돌렸다.

부스 앞으로 다가온 건 해변 감시를 맡고 있던 사이판 현지인 크루 게리였다.

정우보다 나이가 두 살 어린 게리는 리조트 크루 경력이 없던 정우에게 일을 가르쳐 주며 사수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게요.”

정우가 가볍게 대꾸했다.

성수기가 아닌데다 손님들로 북적이던 주말도 지난 터라 오늘은 리조트 전체가 한산한 느낌이었다.

덕분에 이번 주에 정우가 맡게 된 비치 스포츠 센터도 지루할 정도로 한가하던 참이었다.

“나 잠깐 화장실에 좀 다녀올게요.”

씩 웃어 보이며 던지듯 말한 게리가 비치 센터 뒤쪽으로 향했다.

게리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슬쩍 쳐다본 정우는 별 대꾸 없이 해변으로 눈을 돌렸다.

요즘 들어 게리가 화장실을 핑계로 자리를 비우는 일이 점점 잦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우는 알고 있었다. 화장실 얘기는 그저 핑계일 뿐이라는 걸.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한동안 자랑을 해대더니 시도 때도 없이 여자 친구와 연락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게리가 향한 곳이 화장실이 있는 곳과는 다른 방향이라는 것도 굳이 알은척하지 않았다.

평소의 정우였다면 벌써 문제 제기를 하고도 남았겠지만, 억지로 끌려와 일을 하고 있는 지금은 그 정도의 열정도 남아 있지가 않았다.

그저 아버지의 화가 풀리실 때까지 조용히 지내다 가자는 마음뿐이었다.

때문에 게리에게도 별다른 불만을 드러내지 않은 채 주어진 일만 묵묵히 하는 중이었다.

정우는 자리를 비운 게리를 대신해 다시 한 번 해변을 유심히 살폈다.

바닷가 모래밭에는 서너 살쯤 된 어린아이와 그 부모로 보이는 젊은 부부가 함께 모래놀이를 하고 있었고, 바로 앞바다에는 초등학생 아들과 아버지로 보이는 두 사람이 함께 카약을 탄 채 노를 젓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먼 바다에는 윈드서핑 장비를 챙겨 갔던 중년의 아저씨가 힘겹게 돛을 잡은 채 한창 바람과 실랑이 중이었다.

방금까지 해변 가까운 곳에 있었던 걸 보았는데, 어느새 바람을 타고 저 멀리까지 나간 모양이었다.

커다란 체구에 한껏 부푼 배. 햇볕에 벌겋게 그은 피부는 전형적인 러시아 중년 사내의 모습이었다.

정우는 사내가 윈드서핑을 하는 모습을 안타까운 눈으로 보며 혀를 찼다.

어쩜 저렇게 실력이 늘지를 않는지…….

오전 10시에 하는 윈드서핑 강습에 3일 연속으로 참가한 걸로 아는데 아직도 자세가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도전하는 노력과 끈기 하나만은 알아줘야 할 것 같았다.

정우는 사내의 위태위태한 모습을 주의 깊게 살피며 옆에 있는 스탠드형 마이크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흠! 아, 아!”

먼저 가볍게 목을 가다듬은 후 마이크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제이 리조트 비치 센터에서 안내 말씀드립니다. 지금 바다에서 윈드서핑을 하고 계신 손님께서는 안전선 안쪽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바다 쪽으로 향해 있는 스피커에서 정우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시 한 번 안내 말씀드립니다. 바다에서 윈드서핑을 하고 계신 손님께서는 안전선 안쪽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우는 매뉴얼 대로 두 번에 걸쳐 안내 방송을 하고는 사내의 모습을 예의 주시했다.

여차하면 직접 달려 나가 손님을 데리고 와야 할 수도 있었다.

방향 전환이 서툴러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 종종 벌어지는 일이었다.

다행히 안내 방송을 잘 들었는지, 중년 사내는 타고 있던 윈드서핑 보드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보드의 방향이 천천히 바뀌는 모습을 보며 정우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도 그동안의 강습이 영 쓸모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아저씨에게 강습을 하며 땀을 뻘뻘 흘리던 선배 크루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중에 만나면 저 손님의 일취월장한 실력에 대해 이야기를 해줄까 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안녕하세요?”

그때 밝고 쾌활한 목소리가 정우를 불렀다.

“네,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정우는 목소리의 주인공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교육받은 대로 친절하게 응수했다.

“저희 스노클링을 하려고 하는데요, 장비 좀 빌려주세요.”

2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자 세 명이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걸어왔다.

“방 번호가 어떻게 되시죠?”

정우는 장비의 대여 상황을 적는 장부를 펼치며 윈드서핑 하는 아저씨를 슬쩍 곁눈으로 살폈다.

윈드서핑 보드가 안정적으로 돌아오고 있는 모습을 확인한 정우는 마음을 놓으며 다시 여자 손님들에게 집중했다.

“1206호요.”

대답하는 여자들의 얼굴이 잔뜩 기대에 들떠 있었다.

“신발 사이즈는요?”

서비스 데스크 위에 적당한 사이즈의 스노클을 찾아 올려놓은 정우가 여자들을 향해 물었다.

“신발 사이즈는 왜요?”

“스노클링 하는데 신발도 필요해요?”

여자들이 궁금하다는 듯 질문했다.

“리프 워커를 신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 이 앞바다에는 날카로운 산호초가 많거든요.”

“그래요? 그럼 저는 230이요.”

“나는 240. 너는?”

정우의 설명에 여자들의 대답이 이어졌다.

“이거 어떻게 신는 거지?”

“발이 잘 안 들어가는데?”

“이건 이렇게 쓰는 게 맞나?”

신발을 받은 손님들은 발에 잘 맞는지 신어 보고, 스노클도 얼굴에 써 보며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서로의 모습도 봐 주고, 사이사이 웃고 떠들기도 하느라 한동안 소란이 이어졌다.

정우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여성들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응대하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그때였다.

“으악! 저 사람 어떡해!”

“저기요! 사람이 물에 빠졌어요!”

갑자기 사람들이 술렁거리며 외치는 소리에 하던 일을 멈춘 정우가 획 고개를 돌렸다.

아이와 놀던 가족, 카약을 타던 부자……. 정우의 시선이 해변에 있던 사람들을 재빨리 훑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들이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을 때에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윈드서핑을 하고 있던 중년 남성이었다.

정우는 들고 있던 스노클을 내팽개치듯 집어던지고는 중년 남성이 있는 곳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첨벙!

정우가 재빨리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동시에 다른 쪽에서도 누군가가 물속으로 몸을 날렸다.

첨벙!

요란한 물소리에 정우의 고개가 순간적으로 그쪽으로 향했다.

‘누구지?’

함께 몸을 날린 건 처음 보는 여자였다.

‘아! 구명환!’

정우는 함께 몸을 날린 여자가 들고 있는 구조용 튜브를 보고는 아차 싶었다.

수월한 구조를 위해서는 구명환을 가지고 출발하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후회를 하기엔 이미 늦었다.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겨를이 없었다.

저 멀리에서 다급한 듯 팔을 허우적대고 있는 중년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는 정우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촤악! 촤악!

정우는 온 힘을 다해 팔을 저으며 물살을 갈랐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팔 근육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남자와의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수시로 고개를 들어 남자의 위치를 확인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남자의 발목에 줄로 연결되어 있어야 할 윈드서핑 보드가 남자와 점점 멀어지며 물살에 떠밀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연결된 줄이 풀린 모양이었다.

마음이 점점 더 조급해져만 갔다.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 남자가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정우는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있는 힘껏 팔을 저었다.

‘살려야 해!’

정우의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

“허억! 허억!”

한껏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정우가 고개를 들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뜨거워진 피가 온몸을 빠르게 돌고 있었지만, 요구조자를 좇는 정우의 눈빛만은 냉철하기 그지없었다.

“푸학!”

손 내밀면 닿을 만큼 가까워진 남자가 물 밖으로 힘겹게 머리를 내밀며 거칠게 물 투레질을 하고 있었다.

남자는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황해 발버둥을 치는 바람에 자꾸만 물을 먹고 있는 듯했다.

정우는 침착하려 애쓰며 남자의 뒤쪽으로 다가갔다.

이럴 때 섣불리 앞으로 다가갔다간 자칫 둘 다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사람이 살고자 하는 마음에 본능적으로 구조자를 잡아당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요구조자의 목덜미 부근을 잡은 채 끌고 나가는 게 매뉴얼에도 나와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마침 구명조끼를 입고 있으니 구명조끼의 뒷부분을 잡아끌고 나가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정우가 남자의 구명조끼를 잡으려 팔을 뻗을 때마다 자꾸만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남자가 급한 마음에 자꾸만 몸을 돌리며 정우의 팔을 잡아당기려 하는 거였다.

“잠시만요! 구해 드릴 테니까 진정하세요!”

간신히 팔을 빼낸 정우가 수차례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남자는 이미 패닉상태에 빠져 정우의 말 따위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급해진 정우는 다시 한 번 팔을 뻗어 남자가 입고 있는 구명조끼의 어깨 쪽을 간신히 잡았다.

‘됐다!’

이제 끌고 나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 남자의 기다란 팔이 정우를 낚아챘다.

“으악!”

꼬르륵!

정우를 덮친 남자가 정우의 머리를 양팔로 끌어안다시피 하는 바람에 정우의 머리가 순식간에 물속으로 밀어 넣어졌다.

꾸르륵! 꾸르륵!

물속에 갇혀 버린 정우는 남자를 밀치고 물 밖으로 빠져나오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일반인을 훨씬 웃도는 남자의 커다란 덩치와 힘을 도저히 이겨내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구명조끼를 입고 있는 남자와 그렇지 않은 정우는 애초부터 물속에서는 상대가 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