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사랑이 떠난 시간

'제 1 장 질 투'''''
' 지는 해를 등진 남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움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것이 떠 안기는 위압감은 남자의 키만큼이나 컸으며 덩치만큼이나 무겁게 느껴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감히 대적할 수 없을 것이라는 한숨이 일었다.'' “그래, 찾았다고?”'' 축 가라앉은 목소리가 퍼지자 사무실 곳곳에 퍼진 음산함이 짙게 깔렸다.'' “예, 상무님.”'' 여섯 달이나 걸리다니, 너무 오래 걸렸어.'' 남자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불만에 찬 심기를 드러냈다.'' “놈은 어디 있지?”'' 남자의 입에서 언 뜻 뿌드득 이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관악구 봉천동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교통사고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교통사고? 언제?”'' “공교롭게도…… 2월 1일이었습니다.”'' 남자는 2월 1일이란 말에 그렇지 않아도 차가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도망치다 천벌을 받았군. 그런데 이를 어쩌나, 천벌보다 더 지독한 벌을 받아야 할 텐데? '' “상태는 어때?”'' “의사의 소견으론 완쾌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랍니다. 외상은 많이 치유된 상태라고 했습니다.”'' “가족은?”'' “피아노 학원 원장인 아버지와 주민등록상 동거인으로 등재되어있는 여자가 있습니다. 정명진과 결혼을 약속한 여자라고 합니다.”'' 약혼녀라…….'' 순간 남자의 입가에 잔뜩 비틀린 냉소가 떠올랐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제가 무슨 짓을 저지른 지도 모르는 놈을 감옥에 처넣는 것보다 그쪽이 한결 낫겠군.'' “내일까지 그 여자에 대해 자세히 알아봐.”'' 완쾌된 날, 네 놈이 건강을 되찾은 걸 저주하도록 만들어 주겠어.'' “예.”'' 남자의 손에 쥐어진 테이프가 부서질 듯 부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일 모레, 놈의 아버지와 여자를 이리로 데리고 와. 될 수 있는 한 상황 설명은 자제하고.”'' 그래야, 고통이 더 심할 테니 말야. ……더불어 선택의 시간도 짧아질 테고.'' 설핏한 빛에 제법 만족스런 몸짓으로 고개를 돌리는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깎아 내린 듯한 얼굴선 안에 아름다운 눈과 날렵한 콧날, 모양이 좋은 입술이 세심하게 고려되어 배치되어 있었다. '' “서둘러!”'' 그러나 악마도 고개를 돌릴 잔인한 미소가 그어져 있었다. 그 미소는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미지의 두려움을 흩뿌리고 있었다.'''''
1'''''
' 창 밖은 초여름 햇살이 한창이었다.'' “이시연 선생! 누가 찾아왔더라, 나가봐.”'' 따스한 창 밖 풍경에 시선을 빼앗겼던 시연은 느릿느릿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누구…….”'' 보습학원 복도에서 마주칠 가능성이 희박한 분위기와 차림새의 남자 두 명이 서 있었다.'' “이시연씨?”'' 한 가닥의 감정도 싣지 않은 목소리가 이시연이라는 이름의 임자인 지를 물었다. 아니, 그것은 물은 것이라기보다 확인하는 것에 가까웠다.'' “정명진씨 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명진 오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설마, 혼자 밖에 나갔다가……. 아니야, 아니야.'' 시연은 슬금슬금 엄습해 오는 두려움에 휘둘리고 있었다.'' “일단 가보시면 압니다.”'' 두 남자는 할 말을 다 마쳤다는 듯 앞장서 걸었다.'' “이보세요!”'' 한 남자는 계속 걸어나갔고 나머지 한 남자만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그녀를 보았다.'' “처음 보는 사람을 어떻게 쫓아가라는 거죠?”'' 마치 무기처럼 남자의 얼굴에 장착된 무테안경이 부담스러운 안광을 고스란히 통과시키고 있었다.'' “정영식씨도 함께 가실 겁니다. 지금 밖에 기다리고 계십니다.”'' 깜박이는 눈동자에 이만하면 대답이 되었냐는, 이제 더 이상의 질문은 사양하겠다는 빛이 어렸다.'' 무언가 큰 일이 생겼다는 불안한 마음이 낯선 두 남자에게 둘러싸였을 때부터 두근거리기 시작한 심장을 할퀴고 있었다.'' 시연은 동료 선생님들에게 말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걸음을 재촉해 두 남자의 뒤를 쫓았다.'' “아저씨!”'' 정 원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시연은 조금이나마 안도했다. '' “시연아”'' 증폭되고 있는 두려움에 차에 타지 않고 서 있었던 정 원장 또한 시연을 보자 약간의 안정을 찾은 것 같았다.'' “명진 오빠한테 무슨 일 있는 거예요?”'' “나도 모르겠다. 병원에 전화해보니 병실에 누워있다는데…….”'' 뒷좌석에 앉자마자 서로의 손을 꼭 쥔 손바닥에 식은땀이 베어들었다.'' “어디로 가는 거죠?”'' “걱정 마십시오. 많은 시간이 소요되진 않을 겁니다.”'' 남자의 무심한 음성은 시연의 걱정을 조금도 불식시켜주지 못했다.'' 차가 멈춰선 곳은 테헤란로에 위치한 황금빛 빌딩 현관 앞이었다. 시동이 꺼지기도 전에 조수석에 앉은 남자가 차에서 내려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내리시죠.”'' 신우.'' 시연의 입에서 빌딩 꼭대기 즈음에 장식된 두 글자가 구슬프게 흘러나왔다. 올 초, 대학원 졸업을 한 학기 앞둔 명진이 그리도 들어가고 싶어했던 회사였다. 그리고 신문, 방송에서 접할 때마다 그녀의 가슴을 싸하게 만드는 이름이기도 했다.'' 시연과 정 원장은 로비 왼편에 위치한 전용엘리베이터로 안내되었다.' 엘리베이터는 24층에 섰다. 앞서 걷던 두 남자가 사장실 앞에 멈춰 서서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십시오.”'' 시연은 떨리는 손목을 움직여 문고리를 돌렸다. 분명 밖은 환한 대낮이었는데 열리는 문 사이로 보이는 건 어둠뿐이었다.'' 정 원장이 불안정한 걸음을 내딛고 시연이 그 뒤를 따랐다. 새까만 정적 속으로 들어선 시연이 문을 닫으려 할 때 문은 이미 닫히고 있었다.'' 끼익.'' 화창한 날씨와 어우러지기엔 너무나 을씨년스러운 소리였다.'' 정 원장과 시연의 눈이 어두움에 적응되기도 전에 커다란 TV화면이 켜지더니 엄청난 빛을 내쏘았다.'' 눈앞에 펼쳐지는 화면은 자동차 사고를 담고 있었다.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소리가 난 후 얼마가 지났을까, 사고를 낸 운전자가 얼굴에 흘러내리는 피를 훔치며 나왔다. 차에 치여 쓰러져 있는 여자를 살피는 남자의 얼굴에 충격이 스쳤다. 주변을 둘러보던 남자는 휴대폰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남자는 당혹감과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차에 올라타 사고 현장을 서둘러 빠져나갔다.'' “무척 낯익은 사람이죠? 알아본 바에 의하면 정명진이란 이름을 가졌더군요.”'' 차디찬 목소리가 어둑한 실내에 울려 퍼졌다.'' “저, 저건 조작된 거예요! 오빠가 아니에요. 오빠 차는 산길에서 굴렀어요.”'' 어둠 속의 목소리는 시연의 외침에 한참 반응이 없었다.'' “조작이라, 내 사전에 없는 단어로군.”'' 큭큭거리는 음침한 조소와 함께 끔찍한 사고 장면이 리플레이되었다.'' “다시 봐, 정명진인지 아닌지.”'' 명진이 맞았다. 화면 상태가 고르지 않아 번호판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결단코 그의 차가 맞았다.'' “명백한 뺑소니 현장을 담아낸 테잎이지, 안 그래?”'' 조소는 멎었으나, 어투에 담긴 경멸은 더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저씨!”'' 시연의 손을 붙들고 있는 정 원장의 몸이 휘청 중심을 잃었다.'' “이게…… 어떻게…… 당신 누구요?”'' 팟.'' 갑자기 천장에 달린 모든 전등이 켜졌다. 시연과 정 원장은 눈이 부신 나머지 남자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했다.'' 이윽고 눈을 들어 남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 시연은 얼어 붙어버렸다.'' “저 파렴치한 놈이 죽인 여자의 오빠입니다.”'' 그리고 사고를 당한 여자의 가족이나 연인일 것이 당연한데, 죽은 여자의 오빠라는 말이 무에 그리 큰 충격이라고, 시연은 물밀 듯 밀려오는 절망 앞에 무방비 상태로 선 듯 보였다.'' “그리고 놈이 죽인 여자의 뱃속에 있던 아이의 삼촌이기도 합니다.”'' 정 원장과 시연은 서 있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인적이 드문 곳에 잘 못 설치된 감시 카메라에 잡혔더군요. 차종만으로 사람을 찾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주저앉았음에도 정 원장의 온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 “바로 경찰에 넘길까 했습니다만, 고이 감옥에 처넣고 싶지 않아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시연은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는 정 원장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어, 어떻게 할거요!”'' “지금부터 그 문제에 대해 이시연씨와 얘기할 겁니다.”'' 삑-'' -네, 상무님.'' “정영식씨 댁까지 모셔다 드려.”'' 바로 문이 열렸고 닫히는 문틈으로 정 원장의 울부짖는 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시연은 전신을 휩싸는 찬 기운에 두 팔을 들어 몸을 감쌌다.'' “성명, 이시연. 나이, 스물 네 살.”'' 그녀의 시린 눈에 단어 하나 하나를 금방이라도 뚝뚝 떨어져 나갈 것처럼 차갑게 내뱉고 있는 남자의 상이 뿌옇게 맺혔다. '' “신장, 161센티미터. 체중, 44.2킬로그램. 학력, S대 경영학과 중퇴…….”''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 지나 말해요.”'' 시연은 손을 들어 눈물을 훔쳐냈다.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애원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남자 못지 않게 차가운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제법 앙칼진 목소리군.”'' 창가에 걸터앉은 남자가 손에 들려진 흰 종이에서 눈을 떼고 시연을 향했다. '' “맘에 들어. 죽은 척 엎어지는 것보다 적당히 날뛰는 게 더 재미있을 테니까.”'' 순간 시연의 전신은 멈춤 상태에 돌입했다. 그와 맞설 준비를 하고 있던 모든 신경이 굳어버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차갑다 못해 싸늘한 눈동자, 경멸과 조소에 찬 입술이 이내 흰 종이로 방향을 틀었다.'' “가족, 15년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9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 쓰레기 같은 의붓어머니, 그리고 의붓오빠 두 명. 병력, 어려서 의붓어머니의 상습적인 폭행에 시달려 정형외과와 정신과에서 치료받았음. 현재 거주하는 곳, 서울특별시 관악구…….”''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 지나 말해요.”'' 시연의 음성은 표정을 잃은 얼굴만큼이나 무미건조했다. 남자는 앙칼지게 덤비려던 기세를 갑자기 누그러뜨린 시연이 맘에 들지 않는 듯 서늘하게 바라보았다.'' 몸을 일으킨 남자가 흰 종이를 신경질적으로 구겨 던져버리고 시연에게 다가왔다. 남자의 큰 키와 커다란 몸집이 떠 안기는 공포가 남자에게 결코 휘둘리지 않겠다는 그녀의 결심을 단숨에 낚아채 가버렸다. 시연은 더 이상 남자의 페이스에 말리지 않기 위해 시선을 떨궈야 했다.'' “번거롭게 그런 걸 말해서 뭐해? 내가 뭘 요구하든 넌 받아들일 거잖아.”'' “뭐라구요?”'' 여전히 감정을 싣지 않고 조용하게 말했지만 시연은 어느새 주먹을 쥐고 있었다.'' “남자친구를 위한 희생정신을 발휘할 것도 없을 텐데? 그 사람들 아니었음, 너…… 반정신병자로 평생 음지를 떠돌았을 지도 모르니까, 널 구원해준 은인들을 위해 뭐든 해야 하잖아?”'' 꽉 쥐어진 두 주먹의 작은 떨림이 딱 그쳤다. '' “그래, 그래야지.”'' 뼈마디가 튀어나올 듯한 새하얀 주먹에 고정되었던 시선을 드는 남자의 눈에 만족스러운 기색이 돌았다.'' “그래야 인간이라 할 수 있지. 살 수 있었던 사람을 저 한 몸 무사하자고 내팽개쳐버린 개 같은 새끼처럼 되지 않으려면 말이야.”'' “그래요, 뭐든 해야겠죠. 그래도 내가 복수에 눈이 뒤집힌 당신을 위해 무슨 짓을 하면 되는 지 들어야겠어요.”'' 끝내 자웅을 겨루어야겠다는 시연의 말투에 막 걸음을 옮기려던 남자가 멈칫했다.'' “자, 말해요. 내가 무슨 짓을 하면 되는 지.”'' “좋아, 그 정도 말버르장머리쯤이야……. 아량을 베풀도록 하지.”'' 표정과 상반되는 너그러운 눈빛이 시연에게 소파에 앉으라는 사인을 보냈다.'' “됐어요, 얘기나 해요.”'' “내가 베풀 아량의 정도를 파악하는 중인가?”'' 남자는 참을성이 다한 자신의 상태를 잇새로 뱉어냈다.'' “어서 앉지 못해!”'' 시연은 증오에 불타는 시선을 피하며 그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소파에 앉았다. 시연이 앉는 것을 확인한 남자는 소파 주위를 천천히 맴돌았다.'' “우리는 다음 주 금요일에 결혼할 거야.”'' 무릎에 놓여진 시연의 주먹이 다시 하얘졌다.'' “물론 정식 결혼이야, 그러니 넌 우리 어머니를 모시고 내 애도 낳아야 해.”'' “아무 여자나 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닐텐데요?”'' “그래 맞아, 그까짓 거 아무 여자나 할 수 있는 일이지.”'' 남자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시연의 음성에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의외의 한 방에 어그러진 뺨은 저주를 퍼붓기 위해 움직였다.'' “너여야만 하는 이유라……. 정명진 그 새끼가 기억을 되찾는 날, 넌 정명진에게 제 약혼녀가 왜 나와 결혼했고 그간 어떻게 살아 왔는지 보여주어야만 하기 때문이지. 아, 잊을 뻔했군, 녀석이 받는 충격의 양과 질에 따라 자식을 빼앗기고 돈 한푼 없이 이혼 당하게 될 수도 있어.”'' “명진 오빠가 영영 회복되지 못하면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완쾌시킬 테니까. 유감스럽게도 그리 오랜 세월이 걸리진 않는다는, 절대 가능한 일이라는 의사의 진단이 있었어.”'' “용의주도하시네요.”'' 시연은 남자의 메마른 눈웃음을 노려보았다.'''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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