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서막
동료들이 다 퇴근한 회계팀엔 지완 혼자만 남았다.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지완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이내 눈을 감아 버렸다.
금방이라도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릴 것처럼 시어서 더는 버티기가 힘들 정도였다.
감은 눈 틈 사이로 눈물이 새어 흐르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연이은 야근에 제대로 탈이 난 듯싶었다.
지완은 되도록 눈화장이 지워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눈두덩이를 지압하듯 꾹꾹 눌렀다.
혹여 그렇게라도 하면 눈의 피로가 조금은 풀어질 듯해서였다.
“와아! 두 달째 이러고 있으니 정말 눈이 빠질 것 같네. 가뜩이나 안 좋은 시력 이러다 훅 가버리는 거 아냐?. 이런 것도 산재에 들어가는 거 아닌가? 하아!”
어떤 이유로 이 일이 자신에게 던져진 것인지 알 길이 없으니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더구나 부사장이 발등에 불 떨어진 사람처럼 재촉하는 통에 턱없이 기간을 짧게 잡은 것도 이리 무리하게 된 원인 중 하나였으니 강찬기 부사장은 지완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왕재수 중의 왕재수였다.
그중에서도 이 모든 상황에 자신의 의견은 단 하나도 반영이 되지 않았다는 게 가장 큰 불만이었다.
지완의 잇새로 기다란 한숨이 연달아 새어 나왔다.
지완의 눈길은 자연스레 책상 한쪽에 잔뜩 쌓인 회계 전표 바인더 더미로 향했다.
바인더마다 색색의 라벨이 덕지덕지 붙은 게 그동안 회계 프로그램과 얼마나 열심히 비교해가며 살펴봤는지가 딱 봐도 한눈에 드러날 정도였다.
라벨이 붙은 전표는 아마도 조만간 자취를 감추게 될 운명이었다.
지완은 천천히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좌우로 천천히 돌렸다.
뻣뻣한 목에서는 어긋나 있던 뼈가 맞춰지는 듯 ‘두두둑’소리가 연이어졌다.
“진짜 피곤하다. 그냥 이대로 잤으면 정말 좋겠다. 하아!”
숨을 길게 내뱉은 지완은 고개를 최대한 뒤로 젖힌 뒤 뻐근한 목과 딱딱해진 승모근 부위를 최대한 힘을 주어 주물렀다.
한참을 어깨를 주무르던 지완은 부릅뜬 눈으로 모니터를 노려보다가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맞다. 지금 내가 이렇게 여유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시간이 별로 없었다.
남은 시간 동안 최대한 꼼꼼하게 전표철과 비교하며 살펴야 했다.
지완의 두 눈과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자 라벨을 붙여 표시해 둔 바인더가 확인 과정까지 거친 후에 한쪽에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약속했던 날짜가 오늘인 건 잊지 않았겠지? 물론, 서 대리 입으로 철석같이 약속했으니 신용을 깨는 일 따위는 없을 거로 생각하네. 흠, 그럼 내가 따로 할 말도 있고 하니 보고서 받고 나서 하면 되겠군. 그럼 가봐.”
능구렁이처럼 서늘하면서도 축축한 눈길로 제 온몸을 훑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애꿎은 아랫입술만 세게 깨물었던 기억이 떠오르자 가슴 한가운데서부터 분노가 치밀었다.
그때는 어떻게 된 일인지 마치 뇌가 아니 입술이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대꾸할 말조차도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얼이 빠져 있었다.
더구나 시간을 더 달라는 말을 입 밖으로 밀어낼 엄두조차 내지 못한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저‘네. 알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고 돌아 나온 것이 전부였다.
방을 나오고 나서야 자신을 위아래로 훑었던 부사장의 그 끈적끈적했던 눈빛이 무얼 의미하는지를 깨닫자 기분이 나쁜 걸 넘어서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걸 느꼈다.
바보처럼 굴었던 걸 후회하며 가슴팍을 쳤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얼마나 주먹을 세게 쥐고 있었는지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였다는 걸 그리고 얼마나 입술을 깨물고 서 있었는지 입 안에서 피비린내가 난다는 걸 느끼고서는 허망함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을 뿐이었다.
마치 이명처럼 부사장의 소름 돋는 목소리가 내이에서 무한 재생되었다.
뒤이어 왕재수의 ‘그만 나가 봐.’라는 말에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인사까지 하고 그 방을 나왔던 기억이 떠오르자 분노가 또다시 치솟았다.
“하아! 정말 왕재수야.”
지완은 자꾸만 떠오르는 상념에서 벗어나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크게 흔들었다.
“서지완, 정신 차려.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니까 어떻게든 오늘 끝내는 거야. 그러면 되는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정해진 시간 안에 끝내는 것만이 지금 느끼는 이 이상한 불안함을 없애는 지름길이라 생각했다.
그것에만 매달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 더는 부사장과 대면할 일도 엮일 일도 없을 거라 굳게 믿었다.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그때, 책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진동하며 불빛을 뿜어냈다.
쌍둥이 여동생 지영이였다.
자신과는 달리 살가운 성격이었다.
이란성 쌍둥이여서 그런지 생김새도 성향도 약간 달랐다.
“응, 서지영 왜?”
- 치이. ‘지영아 왜?’ 이것도 아니고 ‘서지영 왜?’ 이게 뭐야. 하여간 무뚝뚝하긴.
“바쁘니까 그렇지. 용건만 간단하게 얘기해.”
- 언니는 안 바쁠 때도 꼭 그러더라. 확실히 언니는 T야. 뭐 그래그래. 너그러운 내가 오늘도 참는다. 오늘도 야근이라고 했지? 벌써 두 달째인 거 알아?
“응, 알아. 오늘이 마지막이야. 그래서 오늘 꼭 마무리해야 하거든.”
- 혹시 오늘도 여전히 언니 혼자인 거야? 와! 다른 직원들은 언니가 여태 야근하는데 도와주지도 않는단 말이야?
“아니야. 내가 얘기했잖아. 왕재수가 나한테만 따로 지시한 게 있다니까. 물어볼 게 그거야?”
- 그건 아니고. 왕재수 아니 그 부사장이란 사람 너무하는 거 아니야? 왜 회사 일을 언니한테만 다 시키는 건데?
“아! 내가 분명 바쁘다고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할 말 있으면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라.”
동생 지영이 말을 돌리며 뜸을 들이자 지완은 입술을 앙다물고 신경질적으로 재촉했다.
- 아이참, 그냥 전화했어. 영 걱정이 돼서 말이야. 이따 내가 데리러 갈까?
“무슨 걱정? 됐네요. 걱정도 팔자다. 누가 들으면 내가 무슨 중, 고등학교 다니는 앤 줄 알겠다. 시간이 뭐 얼마나 늦었다고. 내가 야근을 하루 이틀 한 것도 아니고. 여태 아무 일도 없었는데 새삼 데리러 오기는. 됐어.”
- 내 말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거의 두 달째 그것도 직원이 언니만 있는 것도 아닌데 야근을 혼자서만 하고 있으니 걱정이 안 되냐고.
“솔직하게 말해. 도대체 이렇게 걱정을 늘어놓는 이유가 뭐야?”
지완은 통화하면서도 모니터에 뜨는 시간을 보고는 조급한 마음에 목소리가 퉁명스러워졌다.
가끔이기는 하지만 동생의 도를 넘는 오지랖에 짜증이 치밀어서였다.
- 워워. 짜증은 내지 말고. 아니 언니가 너무 바쁘니까 얘기할 기회도 별로 없어서. 요 며칠은 유난히 퇴근이 늦어지니까. 그냥 찜찜하기도 하고. 요즘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설마 그런 일이야 없겠지만 그냥 여러모로 걱정돼서.
“서지영, 아주 입이 방정이야. 시간이 남아돌지? 쓸데없는 걱정은 사절이다.”
- 아! 알지. 알지. 알았어. 알았다고.
“그럼 끊는다.”
- 언니, 저녁은?
“최대한 빨리 끝내려면 저녁 먹을 시간조차 아껴야 해. 더 할 말 없으면 이제 끊자.”
- 알았어. 그럼 혹시 많이 늦으면 재진 오빠라도 불러. 그때쯤이면 오빠도 끝날 시간 아닌가? 저녁 안 먹었다고 하면 혹시 알아. 언니 좋아하는 리코타 치즈 샐러드라도 포장해서 납실지.
“됐어. 바쁜 사람을 굳이.”
- 언니 혹시 재진 오빠랑 문제 있는 건 아니지?
“아니라고. 그리고 별로 배고프지도 않은데 뭐. 얼른 마무리하면 아주 늦진 않을 것 같기도 하고. 넌 저녁 먹었어?”
그제야 그저 순수하게 자신을 걱정해 맘 졸이고 졸이다 전화했을 동생 생각을 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 짜증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그래서인지 지완의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 당연히 먹었지. 가끔 보면 언니는 나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은 것 같아. 나한테 관심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먹는 거에 진심인 사람이라는 걸 잊었어? 느긋하게 저녁 챙겨 먹었지. 내가 분명 아까 연락했던 것 같은데 벌써 깜빡한 거야?
“아! 맞다. 하긴 우리 서지영 먹성은 알아줘야 해.”
- 당연하지. 내 식탐이야 뭐 하루 이틀인가? 참, 내가 수다가 너무 길었지? 언니 바쁠 텐데 끊을게.
“그래.”
통화하는 내내 동생의 살가움에 미소를 머금었던 지완의 얼굴은 통화가 끝나자마자 금세 굳어졌다.
핸드폰을 손에 쥔 채 만지작거리며 망설였다.
아무 문제 없던 평상시라면 이렇게 고민할 일조차 없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상태라면 지영의 말처럼 재진에게 연락해 늘어지게 하소연하는 건 불가능했다.
요즘 들어 재진과의 사이가 소원해진 듯한 느낌에 선뜻 연락하기가 어려웠다.
얼마 전 다툰 뒤 화해를 하기는 했지만, 그 뒤로는 연락도 뜸한 상태였다.
지완은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힘없이 책상 위에 내려놓고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완은 팔을 뻗어 가볍게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연이은 야근으로 인해 여기저기 삐걱거리는 몸뚱어리도 문제였지만, 지친 두 눈이 더 시급했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초고속으로 온몸을 갉아먹을 듯한 이 피로를 몰아내야 했다.
이대로는 도저히 책상 위에 잔뜩 쌓인 서류들을 더는 살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눈이 시린 것도 모자라 이제는 눈물까지 차올라 모니터 속 숫자들까지 두 개로 겹쳐 보일 지경이었다.
의자에 털썩 앉아 한참을 눈을 감고 있던 지완은 이내 탕비실로 가 커피를 아주 진하게 내려서 자리로 돌아왔다.
바짝 집중할 에너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지금으로선 진하게 내린 커피가 유일했다.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한 지완은 꼼꼼하게 살펴본 후 만족한 듯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출력 버튼을 눌렀다.
지완의 책상 위 한쪽에는 바인더에서 빼낸 라벨이 붙여진 전표 뭉치가 잔뜩 쌓여 있었다.
프린터가 빛을 뿜으며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서류를 토해내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지완의 눈이 순간 빛났다.
그사이 모니터 화면에 띄워 놓은 서식들을 USB에도 저장했다.
본체에서 USB를 분리한 지완은 숨죽인 채 주변을 살핀 후 제 핸드백 속에서 또 하나의 USB를 꺼내서 저장한 후에 재빨리 핸드백 속에 집어넣었다.
*
프린터에 기대서는 출력이 다 되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고 있던 지완은 출력이 다 되자 서류 뭉치를 집어 들어 한 번씩 더 살펴보며 정리했다.
“휴우! 드디어 다 됐네. 그래도 오늘 안에 다 마무리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누가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깔끔했다.
브리핑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 더 만족스러웠다.
이제 이 서류를 부사장한테 던져 주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게 오늘이든 아니면 내일 아침이든 그건 상관없었다.
이로써 자신은 약속을 지킨 셈이니까 말이다.
출력된 서류와 더불어 USB에 저장된 날짜와 시간이 그걸 증명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서류 뭉치를 품에 안은 지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 자리로 움직일 때였다.
[Rrrrr. Rrrrr. Rrrrr.]
제자리에 놓인 전화기에서 인터폰이 울리자 흠칫 놀랐다.
빠른 걸음으로 자리로 다가간 지완은 인터폰을 한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고는 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도대체 왜……. 이 시간에?”
소름이 온몸으로 퍼지면서 지완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온몸을 에워쌌다.
서류 뭉치를 잔뜩 껴안은 채로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 뿐 전화기를 선뜻 들 수가 없었다.
[Rrrrr. Rrrrr. Rrrrr.]
자신이 여기 있다고 확신하는 듯이 계속 울리고 있는 인터폰 소리에 더는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잡아채듯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네, 부사장님.”
- 흐음, 늦은 시간까지 고생이 많군. 내일까지 느긋하게 기다릴 수가 없어서 말이지. 혹시 다 됐으면 지금이라도 보고 받을까 하고. 어차피 할 말도 있고 하니 지금 보도록 하지.
“네? 마, 마무리는 다 됐습니다. 제가 내일 오전에 보고드리겠습니다.”
- 아니야. 굳이 그럴 필요 뭐 있어. 그냥 지금 가지고 내 방으로 와.
지완의 두 눈동자가 불안한 듯 곧장 벽에 걸린 시계로 향했다.
10시를 5분 정도 남긴 시간이었다.
그리 늦은 시간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불안했다.
거절할 만한 타당한 이유를 만들어 내야만 했다.
“죄송합니다. 시간도 너무 늦었고. 마무리는 했지만 완벽하다고 할 수 없는 자료입니다. 검토한 뒤에 보고드리겠습니다.”
- 아까는 마무리가 다 됐다며. 그래 놓고 금세 완벽하지 않다고 말을 바꾸는 건 대체 뭐야? 서 대리 본인 입으로 오늘까지 마무리하겠다고 하지 않았었나? 약속했으면 보고하는 데 문제없게끔 해야 할 거 아니야. 서 대리 그렇게 안 보였는데 약속도 제대로 안 지키는 그런 사람이었나?
인터폰 너머인데도 부사장의 목소리에서 묘한 짜증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거야 그렇지만……. 죄송합니다.”
- 죄송하면 지금 그 상태로 가지고 와. 어차피 내가 미리 살펴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오케이?
“……네.”
- 아! 회계 전표 바인더는 내가 지시한 대로 처리해서 회차별로 잘 정리해 넣어 뒀고?
“네.”
강찬기 부사장이 말하는 처리란 문서 세단기로 라벨 붙은 전표 더미의 존재 자체를 없애 버리라는 얘기였다.
지완은 무의식적으로 ‘네.’라고 대답했다.
- 그럼 지금 바로 내 방으로 와.
“네, 부사장님.”
한숨을 길게 내쉰 지완은 서류 뭉치를 잘 정리해 결재판에 넣고는 가슴팍에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USB도 챙겨 들었다.
‘시간이 늦었다고는 해도 설마 회사 안에서 별일이야 있겠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애써 내리누르며 부사장실로 향했다.
미리보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