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프롤로그

그날은 날씨가 무척 따뜻했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과 딱 보기 좋게 떠 있는 많은 구름, 청명한 하늘. 뭐 하나 흠잡을 것 없이 멋진 날이었다. 레먼드의 대재벌 왕족이자, 이제는 세계로 뻗어 나가는 세계적 기업의 총수인 레오 카만을 맞이하면서 이보다 더 좋은 날은 없었다.

하 사장은 날을 정말 잘 잡았다고 자화자찬하며, 그를 위해 준비한 만찬장으로 레오 카만 일행을 안내했다. 아주 오래전 고심해서 지은 단독주택, 뭐 쓸데없이 이렇게 크게 짓냐면서 주변 지인들이 한소리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잘한 일인 듯. 레오 카만 사장을 안내하면서 그는 전혀 꿀림이 없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만찬을 준비해 놨습니다.”

“감사합니다, 하 사장님.”

막 만찬장으로 향하는데, 레오 카만의 비서 리차드가 다급한 소식을 알렸다. 그는 레오 카만에게 다가가 뭔가 귓속말을 했고, 레오 카만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결국, 카르 왕자가 또 사고를 친 듯. 지금 수습하지 않으면 일이 커질 것이다.

“이거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하 사장님. 본국에 일이 생겨서 급히 돌아가야 합니다. 만찬은 다음 기회에 하지요.”

“아,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별건 아닙니다. 다만, 제가 꼭 가야 하는 일이군요. 애써 준비해 주셨는데 미안합니다.”

“오늘만 날이 아니지 않습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어서 가보세요.”

“네, 감사합니다.”

하 사장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레오 카만의 팔라스 기업과 중요한 프로젝트의 합작을 진행하는 이때, 오늘 만찬은 그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할 좋은 기회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말 오랫동안 준비했고, 기대도 컸지만, 급한 일이라니 할 수 없지.

그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레오 카만 일행을 다시 바깥으로 안내했다. 안에서 만찬장의 세팅을 다시 이리저리 고치며, 신경 쓰고 있을 부인에게 뭐라 노티도 못 해줬다. 하긴, 지금 메시지를 보내면 아마 부인은 광분할지도 모른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전화벨을 계속 울려댈지도 몰라. 그런 망신스러운 상황을 연출할 수는 없지.

“아까 왔던 길과는 다르군요.”

“급하다고 하셔서, 정원을 가로질러 가는 게 더 빠릅니다.”

“그렇군요.”

정원을 가로질러, 입구를 향하는 중. 레오 카만의 눈에 무엇인가 들어왔다. 긴 머리카락의 소녀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는 것인지, 아니면 뭘 보며 깔깔 웃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그녀의 주변은 복잡하기만 하다. 자세히 보니, 오리 몇 마리가 뛰놀고 있었다.

하 사장은 급히 그의 시야를 가로막으며, 사과했다. 으득. 하연우, 네가 결국 사고 치는구나.

“아…, 죄송합니다. 제 딸이 여기서 하필….”

“그림을 그리고 있군요.”

“그냥 취미로 가끔 그리는 것 같은데, 실력이 빼어난 편은 아닙니다. 어서 가시죠.”

하 사장은 둘째 연우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아니, 내가 그렇게나 귀빈인 레오 카만 사장 오니까, 만찬장에 나와서 의전하든가, 아니면 방 안에 처박혀 있든가, 그것도 싫으면 아예 나가서 놀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 이 중요한 순간에 대체 왜 그림 그린다고 후원에 있단 말인가. 물론, 만찬장은 저택 바로 앞쪽, 넓은 정원에 마련되어 이곳 후원과는 그 영역을 달리했지만, 지금 하 사장의 눈에는 딸이 딸이 아니었다. 원수지.

저렇게 머리 산발을 해서, 오리랑 깔깔대며 붓을 들고 있는 딸의 모습은 빈말로라도, 예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연우, 이 말괄량이 같은 것. 너, 이 아비 사업에 물 끼얹으려고 아주 작정했지?

나중에 실컷 혼내 주겠다고 다짐하며, 그는 레오 카만을 잘 전송하고자 했다. 하지만, 레오 카만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잠깐 그림을 그리는 소녀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레오 카만 사장님?”

“아, 미안합니다. 오리 그림이 깜찍하군요.”

“그게 보입니까?”

이 먼 거리에서 쟤가 그린 그림이 보인다고요? 혹시 몽골의 후예가 아닌가 싶을 만큼, 레오 카만의 시력은 좋았다. 실제로 그의 시력은 2.0이 넘었다.

“네, 잘 보이는군요. 레먼드 인의 평균 시력은 1.5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소개 한번 해주시죠.”

“…혹시, 연우요?”

“아, 저 아가씨 이름이 연우군요. 첫째분이 선우, 저분은 그럼 둘째겠군요.”

“그…, 그렇죠. 아직 어리고 철이 없습니다.”

“그게 매력으로 작용할 때도 있죠.”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영어를 쓰다 보니 해석상 문제가 가끔 발생했다. 하 사장은 대수롭지 않게 듣고는 레오 카만 일행을 현관문까지 잘 배웅했다. 레오 카만은 원래 표정이 풍부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제왕학 등 어떤 자세로 민중을 이끌어야 하는지에 대해 배웠던 만큼 그에게 감정이라는 것은, 일종의 사치와도 같았다. 그랬던 레오 카만 사장이 차에 올라타기 무섭게, 빙그레 웃자 비서는 좀 놀랐다. 사장이 웃고 있다고? 왜? 어째서?

“무슨 일 있으십니까?”

“왜 묻지?”

“아니, 웃으셔서 말입니다.”

“아아, 오리랑 노는 소녀가 꽤 귀여워서. 몇 살이나 되었을까? 하선우가 스물여섯 살이라고 했으니, 하연우는 20대 초반이려나? 보기에는 딱 열다섯 살이던데.”

“네에?”

리차드는 그가 왜 그런 걸 궁금해하는지 몰랐다. 이제껏 10년이 넘게 그의 곁에서 공, 사를 떠나 모셨지만, 이렇게 어떤 인물에 대해 호기심을 표하는 것은 처음 봤다. 더구나 여자한테.

“혹시, 하선우 씨는…, 어떠십니까?”

“갑자기 무슨 소리지?”

“아니, 하 사장이 첫째 딸을 소개해 주지 않았습니까. 한국인 같지 않게, 키도 크고, 서양의 미를 가진 여인이라고 말씀하셨던 거, 기억나십니까?”

“아, 뭐. 기억은 나. 특별할 것은 별로 없었지만. 한국인은 거기서 다 거기야.”

역시나, 내가 잘못 생각했나 보다. 리처드는 자신이 괜히 쓸데없는 질문을 했다고 자책하며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급히 레먼드에서 생긴 원유 분쟁의 개요를 상세히 브리핑하면서, 돌아갈 비행기를 준비하는 그였다. 전자기기에 코를 박고, 비행기 시간을 조율하느라, 리처드는 보지 못했다.

레오 카만이 다시 킥킥대며 살짝 미소 지은 것을. 대체 뭘 생각하는지, 그는 입가에 호선을 그리고 저 멀리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30분 전.

“야! 너 그거 비싼 거야! 얼른 안 내놔? 네가 내 물감 다 먹어 버리면 난 뭐로 그림을 그리냐고! 내놔!”

오리가 이리저리 뒤뚱거리며, 그녀의 물감을 부리에 물고 사방으로 움직였다. 연우는 그런 오리의 뒤꽁무니를 잡아채려다가 그만 털퍼덕 넘어졌다. 온통 얼굴에 파란 물감이 가득 튀었는데도, 오리는 멈출 줄 몰랐다. 나중에, 정말 화가 난 연우는 오리를 향해 점프했다. 그와 동시에 연우의 단정한 머리도 흐트러졌다.

“내놓으라고! 이 오리가 진짜! 내가 너, 삶아 먹는다! 좋은 말할 때 내놔!”

오리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턱이 있나. 결국, 연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오리를 향해 질주하는 모습이 펼쳐졌다. 카만은 그 모습을 눈에 담는 순간,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연우가 고생하는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게 느껴지던지. 여성을 보고 웃은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너 멋지게 그려 준다고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이 배은망덕한 것! 너, 진짜 통오리 구이 해버린다고! 이리 안 와?”

겨우 오리를 잡았지만, 오리는 오히려 연우의 품에 파고들어 부리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 김에 가슴 언저리가 간지럽고, 목을 물자, 그 간지러움은 더욱 커졌다. 연우는 오리를 끌어안고 깔깔댔다.

“야! 놔! 오리! 놔! 하하하! 간지럽잖아! 안 놔!”

이미 거의 완성한 그림을 앞에 두고, 연우는 오리와 한판 대결을 벌이느라 자신을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아버지인 하 사장이 얼마나 곤혹스러워하면서 앞을 가리려고 애쓰는지도. 그녀의 관심사는 오로지 오리 한 마리, 그리고 자신의 그림뿐이었으니까.

하연우라.

정말 귀여운 여인이었지. 레오 카만의 입가가 기분 좋게 호선을 그렸다. 꼭 한 번 더 만나고 싶은 소녀. 그는 자꾸만 오리와 싸우던 연우가 생각나 혼자 미친 사람처럼 웃고야 말았다.

#1. 계기

같은 딸이라도 겉 다르고 속 다르다.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아마 엄마는 나를 가졌을 때 무진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아니면 갑자기 재정의 궁핍함으로 인해 영양분 있는 것을 많이 못 드셨던가. 가만 보면 외모도 그렇다. 언니는 아빠 얼굴 1/3, 그리고 엄마 얼굴 1/3, 나머지 1/3은 그냥 타고난 어여쁨을 가지고 태어났건만, 본인은 거울만 봐도 그저 그런 평범한 여자일 뿐이다.

여기까지만 좋다. 외모라면, 서러울 것 하나 없는 우리 부모님 밑에서 꼭 언니같이 이쁘고 늘씬한 사람만 태어나라는 법은 없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외모에서만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정말 너무하지 않은가. 공부도, 운동도 하다못해 음악이며 미술이며 모든 재능은 언니가 월등히 우월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하연우가 공부를 못했다든가, 운동 실력이 후지다든가 하는 것은 아니다.

나름 잘하는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다.

시험을 보면 1등은 못해도, 세 번째 손가락 안에는 들었고 달리기를 해도 2등은 했다. 운 좋으면 1등 할 때도 있고. 음악을 하든, 미술을 하든 평균 이상이니.

늘 듣는 말.

- 역시 하선우 동생은 다르구나. 언니한테 조금만 더 배우면 되겠다.

정도?

처음에는 언니가 대단하다 여겼고, 부모님도 장녀인 선우 언니를 든든하게 여겼기 때문에 나 역시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언니가 이뻐서 좋았고, 혜택 봤다 여겼다. 가끔 나와 언니를 대놓고 차별하는 멘트나 행동들이 서러울 때도 있었지만 어쩌겠는가.

친자매인 것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아야지. 언니가 미운 것도 아닌데. 그리고 솔직히 까놓고 말하면 재수 없을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선우 언니는 좋은 언니 축에 속했다.

좋은 거 있으면, 콩 한 쪽도 나눠 먹는다를 아주 자연스럽게 시전하는 언니였으니까. 다른 언니들처럼 기분 나쁘다고 소리 지르거나, 본인 것을 아껴 절대 못 줬다면서 땡깡도 한번 피운 적 없다. 오히려 본인이 언니 것을 더 빼앗아 썼지.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집 안의 정적에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왜 나만 봐? 내가 뭘 어쨌다고.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냐고 묻고 있잖아요.”

평소에는 별로 위력을 발휘하지 않는 연우의 작은 목소리가 쩌렁쩌렁 거실을 울려댔다.

“일단 진정하고.”

“지금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아니, 말 같은 소리를 해야 가만히 있지. 지금 내 나이가 몇 살인데!”

선우는 흥분해서 이제 침까지 튀겨대는 동생의 앞에서 풀이 죽었다. 그것은 이 여사도 마찬가지다. 선우 못지않게 죄책감 가득, 참담한 심정을 그대로 내보이는 모습이었다. 평소 같으면 그런 엄마 보기 싫어서라도 대충 기분 풀 텐데 이건, 정말이지.

뭐 말이 되어야 내가 알았다고 할 것 아냐! 나 주워 왔어? 혹시, 정말 나 이쪽 친혈육 아닌 거야? 그런 거야?

“연우야, 내 말 좀.”

“지금 언니 이야기하는 걸 좀 듣고 말하세요. 이게 말이 돼요? 레먼드하고의 혼약은 제가 아니라 언니였잖아요. 저는 그쪽 말은 하나도 몰라요. 키도 작고요. 더구나 제가 지금 몇 살인지 알고는 계세요? 이제 겨우 스물두 살이라고요.”

“곧 스물세 살이 되지 않니.”

엄마가 끼어들자 연우는 더욱 발끈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괴함을 질렀다. 진짜 그 말만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지금 불난 곳에 기름 잔뜩 끼얹은 것이다. 엄마의 발언은.

“그걸 지금 말씀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선우는 귀를 막고는 다시 동생의 눈치를 봤다. 아무래도 쉽지 않을 듯. 동생은 지금 거의 이성을 잃어 가고 있었다. 연우가 평소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는 성품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지금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도 느낌이 팍 왔다.

끝까지 버티면, 정말 쉽지 않은 설득이 될 것이다. 혹시 짐 싸 들고 나를 수도 있고 말이지.

“어차피 3년쯤 있으면, 시집갈 준비해야 하는데 이렇게 좋은 혼처가 어디 있어. 잔말 말고.”

“아빠!”

“선우가 지금 여건이 안 돼. 너도 알잖아. 오죽하면 우리가 이러겠니. 너도 언니 입장이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 줄 수 없을까?”

“무슨 여건? 대체 무슨 여건인데, 대체 왜 내가 알지도 못하는 레먼드 남자한테 이렇게 갑자기, 이 어린 나이에 시집가야 하는 건데. 나 대학 졸업하면 바로 미국으로 유학 갔다고 했잖아요. 결혼이라니. 이런 날벼락이 어디 있어. 그것도 언니 약혼자한테!”

“아직 약혼자는 아니지. 레먼드에서 약혼한 것도 아닌데. 그냥 서로 사진 몇 번 주고받은 게 다잖아. 레먼드 쪽에서 꼭 선우를 고집한 것도 아니고.”

“…허.”

연우는 자리에 앉았다. 언니를 노려보자 선우가 그녀의 눈을 슬쩍 피했다. 민망해하는 게 역력했다. 엄마도 마찬가지고. 이미 한통속이 되어서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런 된장. 평소에는 언니 반만 따라가라고 구박 멘트 날리던 아빠마저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닌가.

연우는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언니는 정말 뻔뻔한 인간이다. 이제껏 동생을 위하는 착한 언니라고 칭찬했던 거 완전 취소. 빠꾸다. 언제는 레먼드같이 돈 많은 곳에서 청혼 들어왔다면서, 그쪽이 무지무지하게 잘생겼다고 좋아했으면서… 회사 위해서 몸 파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가 선우한테 머리까지 맞았던 자신 아니던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우리가 그렇게 못 사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의견 피력할 때에도 들은 척도 안 하던 인간들이 이제는 발뺌했다.

자신더러 책임지란다. 기가 막혀서. 아니, 내가 왜? 내가 무슨 죽을죄 지었나. 그러니까 내가 왜에에에에!

“왜 언니가 가면 안 되는 건데요. 그렇게 하기로 다 했었잖아요.”

침묵.

연우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좋아, 나도 성인이야. 못 들은 걸로 하겠어!”

연우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하자 선우가 일어나 소리치듯 외쳤다.

“나 임신했어!”

뭘 했다고? 연우는 마치 녹슨 기계가 움직이듯 삐거덕거리는 목을 돌려 선우를 바라봤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가족들의 침묵은 더욱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