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첫사랑에게

#1

“첫사랑을 닮았다.”

어스름한 회의실의 화면 속, 봄 햇살을 만끽하는 여성의 분위기는 화사했고 발표하는 명주의 목소리는 낭랑했다.

그녀는 딱 떨어지는 끝맺음의 말로 떨림을 감췄다.

화면 속 사진은 밝은 햇살을 가린 나뭇잎들로 채워졌다. 나른히 두 팔로 뒤통수를 받치고 숲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는 자신의 모습이 절로 그려지는 각도였다.

“영롱하고 싱그러운 햇살의 봄은 너를 닮았다.”

햇살을 가린 나뭇가지들과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선보이는 빛의 파장. 그 청량한 화면은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초록의 잎과 갈색의 가지, 무지갯빛 오묘한 빛깔이 반죽을 빚듯 회전하며 섞여들었다.

변화의 완성 단계인 컬러 콘택트렌즈가 되어 큼지막하게 시선을 붙들었다.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봄의 빛.”

다시 한번 변화를 시도한 화면. 커다란 렌즈가 작아지며 쏘옥, 어느 틈에 봄을 만끽하던 여자의 눈에 안착해 제 기능을 뽐냈다.

모난 곳 없는 여성의 매끈한 얼굴 가운데 오묘하고 아름다운 빛의 콘택트렌즈가 뿜는 존재감이 가장 두드러졌다.

합성된 사진 속, 치렁치렁한 머리에 허연 얼굴의 모델은 스무 살 여대생의 상큼발랄한 모습으로 웃고 있다.

“너는 첫사랑을 닮았다.”

��! 화면은 정지하고 회의실엔 불이 들어왔다.

발표의 끝과 함께 급작스럽게 환해진 환경이면 좀 어수선하기라도 하던가.

미동도 없이 가만있는 좌중들을 보는 명주는 손이 떨리고 뱃속이 자꾸 간질거리는 게 화장실에 가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짝. 짝. 짝.

한 사람이 박수를 보내는데 그 인물이 이 회사의 대표인지라 두리번거리던 너도나도 한 명씩 박수 소리를 보탰다.

어딘가 썩 맘에 안 드는 뒷북 박수임이 느껴졌지만 웃어 보였다.

그때까진 그리 인정받을 만한 기획이 아니구나 여겼다.

그해 봄.

새로 선보이는 쓰리 컬러 렌즈 시리즈의 타이틀은 명주가 제시한 홍보 문구로 결정됐다.

첫사랑을 닮았다.

.

.

.

“이런 감성적인 접근 참 좋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명주 씨.”

‘네가 첫사랑이다’도 아니고 ‘너 내 첫사랑이랑 닮았다’라고 받아들일 멘트가 호감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오히려 자신만만 도발적인 면도 있고 더 느낌이 좋다던 대표님.

사람이 기분이 좋은 만큼 몸이 위로 떠오른다면 정말 이 건물 23층을 뚫고 하늘에서 내려다볼 수 있을 만큼 가슴이 부풀었었다.

지금 다시 그 순간이 온다면. 그냥 쏘쏘… 한데 그래도 20대라고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주체 못 하도록 좋았나?

알바생의 신분을 벗어나 처음 제대로 된 직장에 취직해 드디어 ‘회사원’이 되었고 첫 프레젠테이션. 거기에 자신의 기획안이 채택되었다는 사실.

앞으로는 이전의 삶을 보상받듯 모든 일이 다 술술 풀릴 것 같았다.

초고속 승진으로 대리를 거쳐 팀장이 된 자신을 상상하고, 깔끔한 작은 아파트로 입주할 모습을 그렸다.

그랬던 마음이 무색하게도 첫사랑 쓰리 컬러 렌즈는 자사 첫 번째 단종 모델이라는 기록으로 퇴장당할 만큼 결론적으로 인기가 없었다.

일희일비 외길 인생 서른둘 이명주 선생. 아니, 이명주 대리.

그녀는 다음 달 카탈로그에서 첫사랑 렌즈를 지우는 작업, 1초도 남아돌 고작 그 작업 하나를 가지고 오만 의미 부여와 함께 기분이 또 푹 꺼져 들어가는 중이다.

‘착용하면 티가 하나도 안 나는 렌즈를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심란할 게 뭐 있어.’

그래도 마인드 컨트롤이 안 된다.

첫사랑. 그 아이. 수림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축구. 축제. 그림일기….

스물아홉의 3개월 차 신입 사원이 첫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며 키워드에 맞춰 되살려낸 추억엔 그 모든 설렘의 순간이 함께했다.

저를 지탱해 주는 그 소중한 첫사랑의 존재까지 그리 볼품없이 사라지는 것만 같다.

나이 서른둘에. 애도 아니고….

퇴근 시간을 앞둔 이 시점에 명주는 핸드폰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미친 새끼.”

저도 모르게 육성으로 터진 욕설. 뒤늦게 휘둥그레하며 주변을 보지만 다행히 아무도 못 들은 것 같다. 옆의 수아는 벌써 슬쩍슬쩍 퇴근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두 달 전에도 같은 소리 했잖아. 또 일주일이야?]

[금방 갚는다고 할 때는 얼마 안 되는 돈인 것처럼 하더니 왜 뜸 들이는 건데?]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전화도 안 받고. 누군 너 같은 놈 목소리 듣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당장 입금해.]

그러고도 딱 일주일째인 오늘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오태성, 이….

‘아, 욕도 아까워.’

짜증이 배가되는 건 그 인간이 직접 잡은 데드라인이 하필 오늘, 제 생일이라는 거다.

기분은 이유 없이 푹 꺼지지 않는다. 다 이런 구질구질한 온갖 요소의 결합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저 먼저 들어가 볼게요.”

“어, 그러고 보니 오늘 또 무슨 약속 있는 차림이네? 어디 좋은 데 가나 봐?”

“네. 친구랑 영화 보기로 했어요.”

“응 들어가, 내일 봐.”

“네, 대리님도 좋은 저녁 되세요.”

좋은 저녁은 무슨.

“팀장님은 오늘 퇴근하고 뭐 하세요?”

“아! 엄마가 꽃게탕 한다고 일찍 오래.”

“오우! 맛있겠다.”

웃는 입이 썼다.

음력 생일 커밍아웃까지는 아니어도 오늘 같은 날 저녁을 함께 먹고 싶었는데.

20대와 40대를 대표하는 솔로 두 사람, 조수아와 신주은 팀장은 공사다망했다.

***

10월의 가을밤은 이른 시간 찾아오고 버스에서 내려 길을 건너온 명주는 한 해의 끝을 향해가는 이 시기에 몰려오는 감정을 애써 떨쳐냈다.

만날 이도, 함께하는 이도 없는 명주라도 마음의 안식처 한 곳은 있다.

입 안에 침이 고이는데 동시에 메말랐던 입술도 윤기로 번들거리는 느낌이다.

‘치킨은 배신하지 않는다.’

오랜 신조와 함께 트렌치코트를 여며 끈을 묶었다. 입장 전 경건한 마음과 함께 몸가짐을 단정히.

딸랑.

“네! 어서 오쎄여!”

깜짝이야.

씩씩한 남자의 인사가 맑게 울리는 풍경 소리를 먹어 치웠다.

분명 사장 아주머니 목소리는 아니고 뭐야?

명주는 절로 인상을 쓰다 풀었다.

‘아주머니?’

없는 줄 알았는데 있었지, 하듯이 출입문 바로 옆 카운터와 닭 튀기는 조리실의 경계벽에서, 쑥 허리를 펴며 웃는 얼굴로 맞아 주시던 아주머니는 안 보이고 웬….

장대 같은 몸체. 작달막한 사장님의 웃는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엔 끝나지 않은 사람 다리가 버티고 서 있다.

명주는 두꺼운 벽을 훑는 느낌으로 느리게 몸을 올려다보며 낯선 인물의 얼굴을 마주했다. 실은 그조차 남자가 고개를 숙여 창구로 들이밀어 가능했다.

허리와 가슴팍을 보며 상상했던 것보다 더 떡 벌어진 직각의 어깨 위로 달린 얼굴엔 콧수염 턱수염을 덕지덕지 길러서는….

“예쁜 아가씨네요, 안녕?”

‘흐엑!’

멘트마저 구렸다.

순간 주변을 의식한 명주가 홀 안쪽으로 주는 눈길에 걸려든 두 남자의 웃는 눈. 저것은 비웃음인가 추파인가.

‘사람을 쪽팔리게 만들어서 그냥 나가게 하려는 건가? 뭐야, 징그럽게.’

알아서 ‘반반?’ 찍어 주시며 웃는 눈빛 교환 후 ‘오늘 많이 피곤했나 봐.’ 하던 아주머니의 말에 괜한 힘이 나던….

뭐 이런 익숙함이 빚어낸 일상의 행복을 다시 느끼려던 계획의 어그러짐, 마음에 들지 않는 인상, 마음에 들지 않는 언행.

나가고 싶다.

“치킨 드시게요? 좋은 자리 안내해 드릴게요.”

치킨집에 그럼 불고기 낙지 덮밥 먹으러 왔겠니? 먹고 갈 거면 여기에 서 있겠니?

사람 가리고, 거슬리는 거 많고, 불호 키워드가 많은 명주에게 있어 수염은 비호감이다. 지극히 개인의 취향이라 대놓고 말은 못 하지만 그냥 싫었다.

답답해 보이고. 멋들어진 외국 영화 배우 중에서도 썩 잘 어울린다고 할 만한 외모는 극히 드문데….

눈앞의 이 남자에게 들러붙은 수염이 아주 안 어울리는 건 아니라지만 답답해 보이는 건 여전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비위생적이라는 생각이 먼저여서 유독 거부감이 든 걸까?

아니! 쓸데없는 말을 너무 큰 소리로, 의욕적으로 해서이다.

아니! 누구, 같이 먹을 사람도 없이 혼자 조용히 포장해 가는 자신의 처지를 놀리듯이 상기시켜서이다.

그냥 싫다.

삐익.

털보, 당신의 첫인상입니다.

처음 본 남자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내리는 마음과 다르게 ‘우물쭈물하다가 당해 버렸지’의 외길 인생 이명주는 입만 벙긋거렸다.

“네? 죄송해요. 못 들었는데 조금 크게 얘기해 주시겠어요?”

“포, 포장이요.”

“아, 뭘로 드릴까요. 저희 <싸우닭> 메뉴인데요. 1번 프라이드, 2번 양념….”

알아! 안다고!

“반반으로 주세요.”

“아! 반반! 어떤 반반으로 드릴까요? 여기 보면….”

항상 원 메뉴 주문이라 그것도 여러 가지 조합이 보기에 있는 걸 잊고 있었네.

“양념 반, 프라이드 반이요.”

“아, 양념 반! 프라이드 반. 반반, 잠시만 기다리세요. 배달 주문 금방 내놓고 바로 튀겨 드릴게요.”

아무래도 주인이 바뀐 건가. 명주는 먼저 계산을 하기로 하고 지갑을 꺼냈다.

“계산 먼저 하시게요? 만사천 원입니다.”

그냥 진행해도 될 모든 동작 하나하나를 이렇게 말로 풀어낼 작정인가?

진중하게 무게 잡을 것 같이 생겨서는. 목소리도 낮은 톤인 사람이 어울리지 않게 일부러 내는 하이 톤….

주인이 바뀌어도 착한 가격은 그대로였다.

다행이랄 것도 없다. 이제 <싸나이 우는 닭(이하 싸우닭)>은 발길을 끊어야 할 것이니.

‘부끄러워.’

“네, 계산됐습니다. 목소리 작은 아가씨, 여기 카드랑 영수증 꼭 쥐고 계세요!”

미쳤나 봐 진짜.

그래도 궁금하니 묻고 넘어가긴 해야겠다.

“여기 주인이 바뀐 거예요?”

“아! 사장님이 저희 고몬데 이제 일을 쉬고 싶다고 하셔서요. 제가 맡았어요.”

“아… 그렇구나….”

안 닮았다.

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눈이 가는 대로 조리실의 남자 뒷모습을 보자니, 더욱 광활했다. 등판이.

까만 반팔 티셔츠 아래 드러난 팔 근육이, 펄펄 끓는 기름에서 건져 올린 치킨 바스켓 손잡이를 들고 털어대는 동작과 함께 시시각각 움직거렸다.

‘…….’

딸랑.

배달 기사가 들어오는 순간, 제가 뭘 보고 있던 건지 자각한 명주가 깜짝 놀라 홀의 두 남자를 또 의식했다.

제겐 영 꺼려지는 수염 난 남자지만. 그들은 남은 자리에서, 짐승남에 반해 침 흘리는 여자였다며 한참 떠들 것만 같은….

그냥 저만의 불길한 예감. 예감….

“아! 그거 있구요! 잠깐만요, 하나 더 나가요.”

원래 해왔던 일은 아닌지 조금씩 느린 동작으로 움직여 기사에게 전달하는 남자. 그러다 기사가 출입문을 열고 나감과 동시에 그의 고개는 명주에게로 휙 향했다.

멍하니 시선을 주던 명주는 화들짝 놀랐다.

“이제 예쁜 아가씨 차례네요?”

그만해, 미친놈아….

***

축제라는 단어에 맞게, 그 분위기에 휩쓸려.

운동장 한가운데 캠프파이어 주변으로 모여들어 춤을 추는 아이들은 잘 추든 못 추든 모두 신이 나 있었다.

들썩거리는 음악, 곧 방학을 맞는다는 해방감, 그리고 친한 친구들과 주고받는 눈짓이 그들을 더욱 들뜨게 만들었으리라.

‘…….’

아이들에게서 뚝 떨어진 나무 아래 벤치는 고요했다.

‘소영아 빨리, 이리 와 봐.’

‘싫어, 나 진짜 못 춘단 말이야.’

‘아니, 너 찾는 사람이 있다니깐? 할 말 있대.’

‘아이참. 누가? 명주야, 유리야. 잠깐 다녀올게.’

인기 많은 소영이 먼저 그렇게 합류하고, 유리는….

소영이는 모르니까.

셋이 함께 있을 때나 친구지, 유리는 자신과 친구로 함께 어울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물론 유리가 대놓고 티를 내는 것은 아니지만 명주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의식했고, 그래서 더욱 둘만의 자리가 불편해졌을 것이다.

유리 또한 아는 아이를 부르며 곧장 떠나 버렸다.

“어? 하늘….”

늦게 찾아오는 초여름의 밤. 모닥불이 피워진 주변은 어둑한데, 올려다보는 하늘은 한참의 낮처럼 파랗게만 보였다.

너무 정신을 팔고 있었나. 가까이에서 나는 인기척을 이제야 들었다. 아무도 없어 느슨히 앉아 늘어져 있던 자신이 창피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쿵쿵대는 음악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그 공간에 그 아이가 있었다.

하얀 반팔 셔츠를 입은 그 아이는 나무 옆에서 기댄 것도, 아닌 것도 아닌 자세로 벙긋거리며 책을 읽고 있다.

‘…….’

명주는 눈을 떴다.

꿈은 항상 여기까지다. 히스토리의 왜곡이란 게 없이.

‘없던 뒷이야기라도 좀 흐뭇하게 들어가 줘도 좋잖아?’

쩝.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는 시간은 항상 알람이 울리기 1분 전이다.

명주는 얼른 팔을 뻗어 핸드폰을 찾아 침대 아래 바닥을 더듬어댔다.

“우씨!”

더듬다가 집는다는 게 또 침대 밑 깊숙이 미끄러져 들어가 버린… 느낌,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