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의 연구실은 대학 건물 중 가장 끝에 있었다. 산 중턱에 올려놓은 모든 건물 중 가장 마지막.

수업을 위해 올라오는 학생들의 불만이 있었지만 태인은 그 고즈넉함이 좋았다.

고요하고 차분한 느낌의 공기도.

단 하나만 빼면 말이다.

며칠 동안 그를 따라붙는 시선이 문제였다.

신경이 쓰이는 태인은 습관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왜?”

지수는 동그란 눈을 하고 그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이미 도착하고도 남았는데 태인은 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 왔어.”

차창 밖을 한참이나 응시하던 그가 결국 문을 열었다.

지수는 내리는 그의 곁을 바짝 따라서 내렸다.

“그럼 갈게. 나중에 또 봐.”

그의 손을 한 번 끌어 잡은 뒤에야 그가 앉은 자리로 다시 올라타는 지수였다.

차는 그대로 앞으로 미끄러져 나갔고 태인은 한참이나 서 있다가 몸을 돌렸다.

집으로 가는 걸음이 조금씩 느려지다 결국 멈추었다.

“결국 너였네.”

태인은 눈앞에 서 있는 하연을 보고 차갑게 내뱉었다.

짙은 눈썹 아래 뜨거운 눈이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옅은 가로등 아래 서 있는 하연, 그녀는 한 마리의 화려한 나비 같다.

하늘거리는 화사한 무늬의 검은 옷이 밤바람에 흩날린다.

바람을 타고 흘러오는  향은 태인도 익숙한 향이었다.

분하지만, 하연은 전보다 더 아름다워져 있었다.

“잘 지냈어?”

‘잘….’

그의 이빨이 꽉 물린다.

요동치는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 억누르는 숨결이 떨리듯 흘러나온다.

그는 방금 손 흔들고 간 지수를 떠올리며 심박을 진정시켰다.

“여기는 무슨 일이야.”

“할 말이 있어서 왔어.”

뻔뻔스러운 그 말에 비웃음이 올라오려는 입이 살짝 비틀렸다.

그의 비켜선 시선 앞으로 하연은 한 발 더 다가선다.

“하루, 단 하루만 내게 빌려줘.”

“빌려? 하루를?”

씹어뱉어 버리기도 끔찍한 무언가가 입 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그의 미간이 거칠 것 없이 구겨졌다.

“방금 내린 사람 봤어?”

봤다.

태인이 차가 가는 그 끝까지 돌아서서 보고 있어서 하연은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다.

“응. 봤어.”

“내 약혼녀야.”

약혼녀….

그의 입이 열리자 하연은 수줍은 듯 웃음을 지었다.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턱을 살짝 들어 올리고 눈을 가늘게 뜬 태인은 비웃음마저 지워버렸다.

“그리고 너, 한다며, 결혼….”

문장이 꼬여버렸다.

뱉고 싶지 않은 말이 가장 뒤로 가서 붙어 버렸다.

결혼이라는 말에 하연의 입이 기다린 듯 벌어지더니 예쁜 선을 그리며 활짝 웃었다.

알고 있을 줄이야.

전혀 아무 것도 모를 거라 생각했는데.

“뭐야, 내 소식 듣고 있었네.”

입을 가리며 하연이는 다시 수줍게 웃었다.

비밀을 들킨 것 같은 얼굴이었다.

태인은 그 모습을 싸늘하게 지켜봤다.

반년,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2년이라 해도.

시간은 기억을 미화시키기도 하니까.

하지만 눈앞에 다시 나타난 건 4년이나 지나서였다.

하필이면 지금 순간에.

태인의 속도 모르고 하연은 재촉했다.

“하루만인데, 안돼?”

“그래. 안돼.”

하루아침에 없는 사람처럼 모든 것을 차단당한 건 그였다.

태인은 단호하게 내뱉고서는 그 앞에 서 있는 하연을 피해 옆으로 몸을 돌렸다.

스쳐 가고 싶지도 않았다.

우연히 다시 보면 차갑게 지나가리라 생각한 것처럼 돌아섰다.

다만, 그의 집으로 올라가던 길의 골목 사이로 많은 건물이 생겼다.

길은 좁아졌고 석 달 전 새로 짓던 빌라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사잇길이 막혀 버렸다. 

지금 하연이 막고 있는 길 말고는 멀리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가는 건 가는 건데. 내가 왜 돌아가야 하지?’

태인은 걸어가던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몸을 돌렸지만 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걸어가는 그의 뒤에서 소리도 없이 뒤따라오던 하연이 고개를 숙인 채 계속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가 그의 가슴팍에 닿고 나서야 두 다리가 멈추었다.

“그 구두…, 어울리네.”

갈색 코가 예쁜 구두였다.

그가 입고 있는 짙은 코트에도 잘 어울렸다.

그의 발이 시선에서 사라지려 한다.

이렇게 빠져나갈 줄이야.

하연은 서둘러 태인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목의 시계를 들어 그에게 보여줬다.

“그러면, 오늘이 끝나려면 1시간 42분. 딱 오늘까지만.”

그의 손을 잡은 하연의 손은 긴장으로 차가워져 있었다.

뚫어질 듯 그녀를 쏘아보는 태인의 날카로운 눈이 너무 뜨거웠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좋아.”

그의 입에서 결국 승낙이 떨어졌다.

집을 향하던 그의 몸이 돌아서서 하연을 스쳐 걸어간다.

돌아 나온 학교로 다시 가고 있는 태인이었다.

잠자코 따라 걷는 하연은 언덕이 점점 가팔라지자 밭은 숨을 내뱉었다.

거의 꼭대기까지 올라서서 태인은 주택가 사이로 사라졌다.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았을 때, 그는 어느 문 앞에 서서 하연을 보고 서 있었다.

“뭐해, 들어오지 않고.”

와인바.

조금 외진 곳에 있는 작은 와인바였다.

밖에서 보기엔 어두워서 열려 있는지 모를 곳은 간판도 없었다.

그는 하연을 보고 머리를 까닥였다.

그리고는 두꺼운 나무 문을 열어둔 채 그 옆을 슬며시 쓸었다.

그가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은은한 나무 향이 실내에 묘하게 감돌았다.

“어서 오세요.”

“시간 괜찮을까요?”

영업시간이 두 시간도 채 남지 않은 가게는 한산했다. 얼굴을 아는 주인이 그를 보고 알은 채 하듯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편한 자리로 앉으세요.”

그의 말에 태인이 자리 잡은 곳은 내부의 가장 깊은 곳이었다.

테이블 안쪽으로 들어가서 앉는 하연을 보자 그는 순간 안도했다.

적어도 이야기 도중에 도망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구석진 틈에 앉은 하연이는 몸을 조금 숙여 자리를 잡고 마주 앉는 그를 보고 있었다.

한 번 눈에 담기 시작하니 눈동자가 저절로 그의 몸을 훑었다.

벌어진 그의 어깨에 딱 맞는 셔츠. 그 넓은 등을 감싼 슈트가 자연스러우면서도 격식 있어 보였다.

잘 정리한 그의 머리는 어울렸다.

한눈에 봐도 잘생긴 얼굴. 짙은 눈썹 아래의 깊은 눈동자는 불쾌하게 하연을 훑고 있었지만. 그 눈마저도 멋있었다.

하연이는 천천히 그를 눈에 한 장씩 담기도 바빠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하연의 시선은 그의 눈썹 뼈 아래 흉터로 옮겨 갔다.

“눈썹 근처에 흉터는 왜 생겼어?”

가게 주인은 물을 내려놓는 동시에 눈으로 태인의 눈썹을 훑었다.

하연의 시선이 닿은 흉터를 매만지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 찾으려다가, 헤매다가 박아서 생긴 흉터. 넌 얼굴에 있는 흉터만 보이지?’

대신 기다리는 가게 주인에게 주문을 먼저 넣었다.

“지난주에 보관해 둔 와인, 그거로 주세요.”

“잔은 2개?”

태인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늘 조용히 와서 혼자 머물다 가던 그였길래 물어본 거였다.

두 사람 사이로 작은 쿠키가 내어지고 멀리서 와인이 따지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가지런히 포개어 놓은 태인의 손에 긴장이 타고 흘렀다.

아무렇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조금 당혹스러웠다.

하연의 시선은 온통 그를 향해 있었다.

내부의 장식에 신경을 쓴 어떤 구석에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테이블에 내려 준 와인잔 중 하나에만 그는 와인을 약간 따라냈다.

미워하다 증오하다, 이제 감정이란 것이 다 사라져 지수를 볼 때면 느껴지던 평온함이 그가 가진 전부였는데.

태인의 손이 심장을 덮고 싶어 움찔거린다. 

고작 몇 센티미터 앞에 하연이 보이고, 테이블에 올려진 손까지는 10센티미터도 되지 않는데, 너무 멀게 느껴졌다. 

“뭐야. 벌써 10분이나 지났어. 그렇게 질문이 어려워?”

대답을 기다린 건가.

답을 듣지 못한 하연이는 시간을 확인하고 마치 약속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놀란 눈을 했다.

“그러면 요즘, 밥은 잘 먹어?”

“그래.”

“잠은 잘자?”

“그래, 잘자.”

“새벽에 깨지는 않고?”

“어, 안 깨.”

“어깨는 아프지 않아?”

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는?”

“폐차했어.”

어깨를 다치고도 어떻게든 끌고 다니던 차였다. 그걸 몇 달 전에야 폐차했다.

사실 애초에 차는 필요 없었다.

그의 연구실까지는 걸어서도 충분히 오갈 만했으니까.

그는 그편이 편했다. 지수도 별말 없었고.

그의 주르륵 나오는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하연이는 볼이 발그스레 해져서 웃음을 지었다.

“손, 한 번만 잡아봐도 돼?”

태인은 하연을 바라보며 손은 테이블 아래로 내려버렸다.

“하연아.”

“너무 갔네. 미안.”

하연이는 그런 그를 보고 몸을 뒤로 살며시 빼며 손을 들었다.

“갑자기 나타나서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너 잘 지내나, 눈으로 보고 싶었어. 정말인지.”

하연은 태인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보며 대답했다.

“고작 그거? 그럼 봤으니 됐지.”

태인은 와인잔을 끌어당겨 한입에 들이켰다.

그리곤 몸을 일으켰다.

4년 전 눈앞의 하연이 그랬던 것처럼.

일어나서 나가버리고 영원히 어디에서도 볼 수 없도록….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를 하연의 손이 먼저 붙들었다.

“강태인.”

그 손 한번을 쳐내기가 그렇게 어렵나. 태인은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전해줄 게 있어서. 이거.”

언제 꺼냈는지 하연의 손에 들어있는 작은 상자가 그의 앞으로 밀려온다.

“받고 싶지 않아.”

“안 주고는 못 가.”

그녀의 단호한 말에 태인은 망설임도 없었다.

움켜쥔 상자는 그의 손안에 쏙 들어왔다.

상자를 받은 태인은 그대로 서서 하연을 말없이 보다 등을 돌려 나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