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프롤로그

옮기는 발걸음이 결코 가볍지가 않았다. 몇 걸음 앞으로 옮겼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길 몇 차례, 망설이길 수십 번이었다. 앞에 보이는 건물이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거대해 보였다. 그녀는 확실히 겁에 질려 있었다. 여기까지 오기가 왜 그리 힘든지 무려 한 달이라는 시간을 헤맸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뛰기 시작했고 덩달아 숨도 가빠졌다. 또다시 다음을 기약해야 할까. 아니, 다음은 없다. 그다음은 아마도 없을 거야. 여기서 멈추면 안 돼. 그럼 진짜 끝인 거야. 숨을 깊게 들이쉬며 심호흡했다.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이번엔 겁이 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마 제대로 된 영양섭취가 없어서 그런 것이리라. 그 영향으로 온몸이 파르르 떨리는 게 아닌가 싶다.

제발 정신 차려. 이번엔 반드시 가야 해. 남의 눈은 의식하지 말자. 저곳에 간다고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어. 그냥 내 상황만 얘기하면 되는 거야. 입을 앙다문 채 결심한 듯 속으로 여러 번 다짐했다. 건물 안으로 일단 들어가고 나니 자연스레 엘리베이터를 찾게 되었다. 엘리베이터에 타기 전 사람이 없음에 조금 안도했다. 팔 층 버튼을 눌러 자신의 목적지를 다시 확인했다.

오후 네 시 십분. 그렇게 바쁘지도 않은 한가하기가 어중간한 시간이었다. 어쩌면 다행이다. 엘리베이터 안에 사람도 없고 다른 층에서 타는 사람도 없어 올라가기가 수월했다. 덜컹거리며 낡은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더니 느릿느릿 팔 층을 향했다. 이제 여기까지 왔으니 다시 내려갈 순 없었다. 아니, 내려가면 안 된다는 확고한 의지가 그녀의 팔과 다리를 붙잡았다. 맑은 소리의 신호음과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양쪽을 번갈아 보다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막상 목적지에 다다르자 또다시 겁이 덜컥 났다.

문 옆의 자동문 버튼을 바라보며 누를까 말까 망설였다. 천천히 손을 뻗어 누르려고 한 순간 생각지도 않게 문이 열렸다.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데 안에서 나오다 마주친 사람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머, 저희 병원 오신 거예요?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그녀는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아, 저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예약은 몇 시로 하셨죠?”

“예약…… 해야 하는 건가요?”

마음먹고 왔는데 예약이라는 말에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오셨어요? 어쩌죠, 저흰 예약제인데. 상담 시간이 길어서 예약을 하셔야 진료와 같이 보실 수 있거든요.”

직원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아무래도 자신에겐 기회조차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실망하여 돌아서는데 뒤쪽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죠?”

진료실에서 나온 사람이 물었다.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쓴 나이는 삼십 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아, 선생님. 이분이 예약 없이 그냥 오셔서…….”

오른쪽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보던 그는 조금 망설이는 것 같더니 흔쾌히 들어오라고 말하며 그녀를 받아주었다.

“알겠습니다. 처음 오셨다고 하셨죠? 이것 좀 작성해 주세요.”

메모지를 하나 건넨 직원의 안내에 따라 이름과 연락처, 주소를 적어주자 전산에 입력하기 시작했다.

“잠시만 앉아계세요. 등록하고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뒤에 보이는 소파로 향한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벽에 붙은 선생님의 이력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곳엔 깨알같이 적힌 이력들이 연도순으로 나열되어 빼곡히 박혀 있었다.

“유진하 님?”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일어난 탓인지 눈앞이 아찔했다. 잠깐 멈칫한 뒤에 소파 머리 부분을 움켜잡고 중심을 잡았다.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세요.”

제1 진료실이라고 쓰여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긴 그녀는 경직된 상태로 문을 열었다. 아까 보았던 선생님이 가운데 놓인 커다란 책상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의 뒤로 보이는 책장엔 전문 서적들이 깔끔하게 꽂혀 있었다. 책들 앞 공간엔 선생님과 누군가와 찍은 사진이 몇 개 진열되어 있었다.

“어서 오세요. 여기 자리에 앉으세요.”

책상 앞 덩그러니 놓인 의자에 앉아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바로 앞에 그의 명패가 보였다.

맑은 정신의학과 원장 최정현.

“너무 겁먹지 마세요. 여긴 무서운 곳 아닙니다. 물론 잡아먹지도 않을 거고요.”

농담조로 한 얘기 같지만 그다지 와 닿지 않아 웃기도, 그렇다고 이미 타이밍을 놓친 후라 예의상 웃을 수도 없었다. 정현은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녀의 표정을 살핀 후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유진하입니다.”

신상 등록을 했으니 모니터에 떠있을 텐데 스스로 이름을 말하게 하기 위함인지 그녀에게 물었다.

“예, 그래요. 유진하 씨.”

이름을 반복적으로 말하다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식사는 제대로 하시나요?”

“아……니요.”

“그렇죠? 너무 마르셨네요. 이렇게 살이 빠진 지 얼마나 되신 거죠?”

“이 개월, 아니 삼 개월쯤 된 거 같습니다.”

진지한 표정을 지은 정현의 눈썹이 약간 치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키보드로 무언가를 치더니 이번엔 책상 위의 빈 차트로 시선을 옮겼다.

“최근 일반 외래 진료를 보신 적은 있으세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부러 빼신 건 아니신 거 같고 그렇다고 거식증이 있는 것도 아니시고. 오로지 여기, 여기 때문에 살이 빠진 겁니까? 이삼 개월 사이에?”

정현이 자신의 손을 왼쪽 가슴팍을 툭툭 치며 물었다. 진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고생을 많이 하고 있군요. 여기에 오신 것도 아마 수많은 다짐을 하고 오셨겠죠. 알겠습니다. 어디 그럼 얘기를 해보세요. 들을 준비 되었으니 어려워 말고 무엇이든, 그 어떤 것이든 전부 꺼내 보세요.”

정현은 의자를 바짝 당겨 앉으며 진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선생님, 전…….”

잠시 뜸을 들였다. 선뜻 입 밖으로 고민이 튀어나오지 못했다. 멍울이 목에 잡힌 듯 아프더니 이내 눈을 자극해 눈물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괜찮아요. 유진하 씨. 여긴 마음의 병을 고치는 곳이고 그걸 고치고 싶어서 오신 거잖아요. 진하 씨 안에 자신을 괴롭히는 것을 전부 끄집어내세요. 그래야 제가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얘기해주세요.”

“선생님, 전…….”

선뜻 대답하지 못하다 진하는 결심이 섰는지 입술을 떼었다.

“저는 살고 싶습니다. 살고 싶어요. 그래서 왔습니다. 이대로 죽을 것만 같아서…… 무서워서 왔습니다.”

그녀가 한번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더니 손으로 가슴팍을 쥐어짜듯 잡았다.

“여기가 너무 아파요. 차라리 죽을병에 걸린 거라면 좋겠어요. 그러면 포기가 되니까. 아, 이제 곧 죽겠구나.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렸구나. 그럼 할 수 없네. 어쩔 수 없으니까 그만 마음을 접자. 포기하자. 그렇게 생각할 텐데 그런 게 아니라 더 괴로워요. 잘 먹지도 못하겠고 잠을 자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겠지. 알아서 마음이 접어지겠지. 인연을 끊기 위해 도망쳤는데 머릿속에서, 가슴 속에서 차마 끊어지지가 않아요.”

“억지로 끊으려 하지 마세요. 그러다 본인만 더 다칩니다. 그래요. 그 인연이란 게 뭔지 유진하 씨의 스토리를 풀어놔 보세요.”

메모할 준비를 한 최정현은 진하가 얘기를 꺼낼 때까지 잠시 기다려 주었다. 여전히 쉽게 입을 열지 못해 한참을 망설인 끝에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1. 비밀은 없다지만 있었으면 좋겠어.

현존하는 아이돌 그룹 중 현재 가요계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정글의 왕, 제우스.

5년 전 가요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그룹 제우스의 멤버는 다섯 명(성현(26), 리온(25), 하루(24), 민형(24), 엔제이(21))이다.

그들은 신인 시절 당시 제우스를 알리기 위해 가요계로 뛰어들었지만, 닥친 현실은 마음처럼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곳은 마치 아마존의 정글과도 같은 곳이다. 정글 안 곳곳을 힘겹게 헤쳐 나가 왕관을 손에 넣어도 한시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는 곳.

왕관을 노리고 그것을 빼앗기 위해 기회를 노리는 동물들이 도사리고 있는 정글. 그 정글의 왕이 되기 위한 싸움은 처절했다. 처음부터 쉽게 왕 위를 찬탈한 자는 없다. 무시와 압박, 서러움, 노력에 또 노력, 자신과의 힘겨운 싸움, 인맥. 이 모든 것에서 이겨낸 자만이 왕이 될 수 있는 곳.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왕이 된 후에도 한시도 마음을 놓아선 안 된다. 왕은 백성들의 민심을 사로잡아야 하고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준 그들을 배신해선 안 된다. 또한 왕 위를 노리고 있는 자들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왕의 자리에 힘겹게 올라갔다고 해도 그 왕을 끌어 내릴 수 있는 자가 나타나면 언제든 내려올 준비를 하는 곳이 바로 이곳, 가요계이다.

이것은 유독 한 곳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닌 모든 곳을 통틀어 적용되는 연예계의 법칙이다. 살아남아라, 살아남는 자만이 정글의 왕이 될 수 있다. 제우스, 그들은 5년 만에 정글의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들이 왕좌를 얼마나 오래 지켜낼 수 있을지 지켜보기로 한다.

-연예부 기자 하성진-

진하는 기사를 읽고 버릇처럼 댓글을 보기 위해 스크롤을 올렸다. 댓글을 쓴 연령별 분포도가 고루 퍼져 있는 것을 보니 뿌듯했다. 하지만 댓글을 읽어 내려가던 그녀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그들을 응원하는 댓글도 있었지만 거친 욕설의 악성 댓글 또한 수두룩했다. 아마 다른 가수의 팬이거나 할 일 없는 키보드워리어일 것이다. 왜 이들이 가요계의 왕이냐, 자기 오빠들이 더 잘나간다. 기사는 머리로 안 쓰고 발로 쓰는 거냐. 당장 기사 내려라. 이 듣보잡들은 뭐냐. 그룹 제우스는 물론 멤버 개인에 관한 욕에서부터 기사를 쓴 기자한테까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런 댓글들을 무시한 제우스의 팬들은 그들을 격려하고 응원했다. 이런 현상들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었다.

“뭘 보고 있어?”

언제 왔는지 친구인 정아가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왔어?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긴. 뭐야? 진하 너도 연예 기사 봐?”

그녀의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정아는 뜻밖이라며 신기한 동물 보듯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신기해서. 넌 그런 거에 관심 없을 줄 알았지.”

“너도 늦을 거 같고 혼자 있기 따분해서 이것저것 다 보고 있었어. 근데 이 기사 너도 봤어?”

“제우스에 대한 기사? 버스 타고 오는 길에 당연히 봤지. 왜? 너도 드디어 입덕하시게? 이제야 제우스한테 관심이 생긴 거야?”

제우스의 팬인 정아는 눈을 반짝거리며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고 그냥…… 기분이 좀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이 아니면 그들이 상처받든 말든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 같아서. 댓글들이 너무 심하네.”

“흠……. 그렇지? 근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그로들은 그냥 무시하는 게 좋아. 할 일 없는 애들이나 하는 짓이지. 톡방 가면 더 가관이야. 할 일 없는 것들이 괜히 와서 사람 속 뒤집어 놓는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라며 무시가 정답이라고 했다.

“진하 넌 커피 시켰어?”

“아니, 오면 같이 주문하려고 아직. 뭐 마실래? 내가 사 올게.”

“아냐, 전에 한번 네가 샀으니까 이번엔 내가 살 차례잖아.”

“그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잘도 기억한다.”

“그런 건 잘 안 까먹거든.”

정아가 커피를 주문하러 가고 진하는 기사에 달린 댓글을 또다시 훑어보다 기분이 좋지 않아 핸드폰을 그냥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정아가 커피를 들고 테이블로 돌아오자 이번엔 진하가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정아는 한 잔은 자신의 앞에, 또 한 잔은 진하의 자리에 놓았다. 그러다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자 익숙한 벨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뭐지, 이 기집애? 팬도 아니라면서 왜 제우스 노래를 벨 소리로…….”

말끝을 흐린 정아의 시선이 핸드폰에 꽂혔다. 화면에 이름이 떠 있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핸드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태준? 에이, 그 박태준은 아니겠지?”

화면에 뜬 태준이란 이름을 보고 정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계속 울리는 핸드폰을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 설마 하는 마음에 통화버튼을 눌러버렸다.

[어디야? 여보세요? 누나. 야, 유진하. 듣고 있어?]

전화 너머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았다.

‘설마, 아니겠지. 태준이란 이름은 흔하지 않나?’

[왜 대답이 없어? ……끊겼나?]

재촉하는 상대방을 향해 뭐라 대꾸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한 정아가 막 입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리온 형! 녹화 들어간대. 얼른 와요!]

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에서 리온이란 이름이 나오자 정아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

“여, 여보세요? 진짜예요? 진짜 리…….”

정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상대방이 정말 제우스의 리온인지 물으려 하는데 진하가 재빨리 자신의 핸드폰을 낚아채 꺼버렸다. 진하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