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섹시 레트리버

5년 전.

커다란 강당에 [한국 대학 병원 신규 간호사 오리엔테이션]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사회 초년생이라면 으레 그렇듯이, 그곳에 가득 찬 사람들은 봄날의 새순처럼 생명력이 가득했다. 그들은 머지않을 쓰디쓴 앞날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수많은 이들 사이, 눈에 띄지 않는 맨 끄트머리에 인하가 앉아 있었다. 머리망과 실핀으로 잔머리 삐져나올 틈 없이 묶은 뒷모습, 화장기 하나 없는 민얼굴에 정돈된 눈썹, 짧게 깎은 손톱이 지금 그녀가 얼마나 긴장하고 또 준비했는지 알려 주었다.

사방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에도, 인하는 홀로 작은 보조 테이블 위에 수첩을 펼친 채 쓰인 내용들을 곱씹고 있었다.

“저기.”

누군가가 제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면접 때 5조였죠? 저 기억 안 나요? 같은 조였는데.”

코앞에 들이민 얼굴을 한창 들여다보고 있으니, 언뜻 그날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맞아요. 합격하셨구나! 그때 춤추신 분 맞죠?”

인하의 말에 여자가 입을 한 손으로 가리며 쑥스러워했다. 면접관들 앞에서 비보잉을 할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낯선 사람들에서 그나마 덜 낯선 이가 있다는 게 웬 위로인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저릿했던 손끝이 사르르 풀리는 듯했다.

“옆에 앉아도 돼요?”

“네.”

인하가 다리를 살짝 비켜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을 내주었다. 자리에 앉은 여자가 인하가 보던 수첩을 곁눈질했다.

“뭐예요?”

인하가 뒷덜미를 긁적였다. 민망한 표정이 고스란히 하얀 얼굴에 드러났다. 첫날부터 너무 유난 떤다고 생각하려나? 애꿎은 볼펜 꼭지만 또각또각 눌러댔다.

“약물 정리한 거요. 혹시나 해서….”

여자가 자연스레 수첩을 들고 종이를 넘겼다.

“와, 엄청 꼼꼼하시구나.”

다행히 여자는 별다른 눈총을 주진 않고, 오히려 감탄의 뉘앙스를 풍겼다. 그러나 인하는 괜한 칭찬에 낯부끄러워, 입술을 감춰 물었다. 여자가 제 손에 든 것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놨다.

“근데 벌써 이럴 필요 없어요. 어차피 부서 정해지면 다시 공부해야 할걸요. 저희 언니도 여기 간호사거든요. 부서 가면 프리셉터들이 붙어서 새로 자료 나눠 준대요.”

“아.”

저는 모르는 사실이었다. 아는 연줄이 있다는 게 이럴 때 좋은 거구나. 출근하라는 전화를 받자마자 준비한 것들이 허무해졌다.

“근데 희망 부서 어디 썼어요? 당연히 1지망은 종양내과일 테고, 2지망은….”

여자가 인하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마취과? 조용한 데가 어울려 보이는데.”

“신생아 중환자실이요. 저 아기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환자들이 잘… 안 죽으니까.”

여자가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은요?”

“종양내과랑 응급실이요. 정신없이 움직이는 게 좋거든요. 아드레날린이 막 솟구친다랄까?”

휘황찬란한 춤을 췄던 걸 보면 충분히 이해되었다.

“근데 종양내과는 왜요? 암 환자들 상대해야 해서 되게 까다로울 텐데. 오히려 기피 부서 아니에요?”

여자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인하는 그런 반응에 오히려 멀뚱멀뚱 눈만 껌뻑거렸다.

“혹시 몰라요? 섹시 레트리버?”

“네? 레트리버는 알죠.”

황금색 털을 휘날리며 늘 헤헤 웃고 다니는 개야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근데 병원에서 웬 강아지 타령이람? 그리고 뭐, 섹시?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형용사였다. 마주 앉은 여자가 입술을 달싹였다.

“진짜 개 말고, 사람이요. 별명이 섹시 레트리버라고요. 종양내과에 엄청나게 잘생긴 레지던트 있거든요.”

“아아, 별명.”

설명을 들으니 인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 사람 얼굴은 부드럽게 생겼는데, 눈빛이…… 하아…….”

여자는 남자를 떠올리는 듯 제 양 볼을 감싸며 몸을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녀의 귀 끝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때 인하의 옆으로 직급이 높아 보이는 간호사들 몇 명이 복도를 따라 내려갔다. 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전해졌다.

“올해도 종양내과로 다 쏠렸어요? 이번 기수는 남자 신규도 없는데 어떡해요.”

맨 뒤에서 걷던 사람의 표정이 심란했다.

“에휴, 일단 배치는 끝났으니까 부딪쳐 봐야지. 정 안 되면 중간에 추가로 뽑든가.”

얘기를 주고받던 사람들이 멀어졌다.

그리고 인하는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기 시작했다.

‘오티가 아니라 팬클럽 정모였구나.’

“다들 조용!”

마이크에서 울려 퍼지는 엄숙한 소리에 인하가 늘어졌던 몸을 곧추세웠다.

몇 시간 뒤.

인하가 병동 입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지금쯤 보송보송한 아기 냄새를 맡으며 행복한 하루를 보낼 줄 알았는데…….’

앞날을 생각하니 벌써 코끝이 찡했다. 그때 하얀 천으로 머리끝까지 덮은 환자 침상이 제 옆을 지나갔다. 익숙한 약품 냄새가 콧속 깊숙이 찔러 왔다. 인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어 사그라든 의지를 어떻게든 살려 보고자 했다.

“어? 신규예요?”

왠지 경력이 많아 보이는 간호사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김인하입니다.”

인하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내가 김인하 선생님 프리셉터예요. 반가워요. 이보영이에요.”

두 사람은 스테이션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하에게 커피를 건넨 보영이 제 것을 한 모금 삼키며 물었다.

“혹시 전략이었어요? 여기 지원 안 한 거?”

“네? 그게 무슨?”

“인하 쌤만 종양내과 안 썼다던데? 그래서 여기 배치받은 거예요. 보통은 남자 신규만 보내거든.”

“에이, 설마요.”

“진짜예요. 간호부 친구가 말하던데.”

아까 느꼈던 광기가 진짜였다는 말인가? 인하는 경악스러움과 허탈함으로 할 말을 잃었다.

“근데 정말 관심 없어요? 솔직히 조승원 장난 아닌데.”

보영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인하의 진심을 살피겠다는 듯 훑었다.

“제가 외모를 그렇게 보진 않아서요.”

“그럼 뭐 보는데? 성격? 능력?”

“글쎄요, 딱히 없는데요.”

“흠흠, 그렇게 말하는 애들이 더 까다롭더라. 어쨌든 다행이네. 여기서 그 사람 보고 반했다가 된통 당해서 도망간 신규가 한둘이 아니거든.”

삐익! 호출 벨이 울렸다.

“일단 따라와요.”

인하가 보영의 뒤를 쫓는데, 병동의 자동문이 스르륵 열렸다. 병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청량한 바람과 시원한 바다 향이 훅하니 불어왔다. 코끝을 스치는 좋은 느낌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그리고 걸음이 그대로 바닥에 붙었다. 곧이어 뚜벅이는 구두 소리와 함께 제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비켜요.”

남자의 잇새에서 낮은 저음이 흘렀다.

‘목소리도 좋네.’

심장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하얀 의사 가운 앞섶이 살짝 벌어질 만큼 너른 어깨와 탄탄한 가슴, 병아리 같은 저와는 달리 성숙미를 상징하는 듯한 빳빳한 와이셔츠 그리고 한 개의 툭 풀린 단추 사이의 목울대, 꾹 다물린 와중에도 희미한 호선을 그리는 입술. 무엇보다 부드러운 눈매와 달리 날카로운 기세를 품은 눈동자가 저를 빨아들이는 듯했다.

“비키라고.”

남자가 한 말은 인하의 귓등을 스쳐 지나갔다. 결국 그는 미간을 잔뜩 구긴 채, 인하의 몸을 옆으로 밀치고 지나갔다.

“김인하 선생.”

보영의 부름에도 인하는 멀어져 가는 그의 모습을 깜빡이며 응시했다.

“이거, 이거. 또 하나 망쳐 놨구만.”

보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서, 선생님 저분 누구예요?”

“조승원? 저 사람이 섹시 레트리버잖아. 우리 과 레지던트.”

‘아아, 여기 안 쓰길 잘했다.’

죽음의 냄새로 찌든 곳에 향기로운 꽃잎이 휘날리는 듯했다.

*

한 달 뒤.

인하가 제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지나가는 환자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을 동동 굴렀다. 이미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조승워어어언! 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인간 같으니라고!”

인하는 뒷덜미를 부여잡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러곤 무슨 생각인지 텅 빈 A4 용지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뭐 해?”

보영이 옆에 앉아 종이를 들여다봤다. 어설픈 사람 모양 위에 의사 가운을 입혔다. 인하가 볼펜을 꽉 움켜쥐고 두두두 그림을 찌르기 시작했다. 몇 분 동안 이어진 화풀이가 끝났다. 이마에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인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쌤은 조승원한테 열받은 거 없어요? 이거 해보실래요?”

인하가 종이를 쓰윽 내밀었다. 보영은 팔짱을 끼며 피식 웃었다.

“됐네요. 나는 이미 저런 거에 해탈한 지 오래지. 그 사람 정도면 병원에서 양반이야. 세상에 또라이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 그나저나 너 이제 콩깍지 다 벗겨졌나 보다?”

인하가 콧김을 뿜었다. 콩깍지가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그래도 세 달이면 오래 버텼다. 네가 신기록이야. 다들 그 싸가지에 일주일 만에 손들던데.”

“제가 다시는 남자 외모에 속아 넘어가나 보세요. 그때는 제 눈깔을 아주 파버릴 거예요!”

인하는 다시 또 울분이 치미는지 종이를 난도질했다.

“그래도 당분간 그 잘생긴 얼굴 못 볼 텐데 너무 그러지 마.”

“왜요?”

“다음 달에 턴이잖아. 레지던트들은 분원에도 가거든. 경기도랑 강원도까지 돌고 오면, 아마 내년에나 다시 볼걸?”

“그게 뭐예요. 결국 또 봐야 한다는 거잖아요.”

인하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지금보다는 덜 마주칠걸. 3년 차 때는 얼굴 잘 안 보여.”

“…….”

인하는 그거마저도 마음에 안 들었다.

‘아예 내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인하는 너덜너덜하다 못해 반투명해진 사람 그림을 공처럼 구겼다.

“난 다음 달에 어떤 사람이 올지 더 걱정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조승원 정도면 괜찮아. 일단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키진 않잖아. 좀 쌀쌀맞긴 하지만.”

“좀이요? 저한테 하는 거 안 보셨어요? 조금만 실수해도 아주 죽일 듯이 잡는데….”

목이 먹먹해지는 탓에 말이 끊겼다. 찔끔 튀어나오는 눈물을 삼키며, 아이스커피를 쭉 들이켰다. 얼음을 아드득 씹는 소리가 났다.

***

다시 현재.

택시가 떠난 자리에는 먼지만 부옇게 일었다. 인하는 멀어져 가는 차의 뒤꽁무니를 쳐다봤다. 이제 볼 일 없다 이거고만.

공항에서 보였던 살가운 태도는 어디로 가고, 택시 기사는 짐만 길에 턱 하니 내려놓은 채 쏜살같이 사라졌다. 잇새로 허탈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인하는 캐리어 손잡이를 쭉 끌어 올려 잡았다. 걸음을 떼기 전 가만히 멈춰 서서 두 눈을 감았다. 온갖 낯선 감각들이 몸을 향해 쏟아졌다. 폐로 들어오는 공기 온도와 습도, 냄새 그 어느 것도 익숙하지 않았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여섯 시간의 비행으로 몸은 고되었지만, 첫 자유 여행의 긴장감 역시 만만치 않은 터라 온몸의 솜털이 바짝 섰다. 인하는 손등의 힘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니, 동네에는 이미 검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 몇 개가 희미하게 빛을 냈다.

드르륵. 드르륵. 아스팔트 위로 플라스틱 바퀴가 굴러가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관광객이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네.’

“여긴가?”

벽 한편에 [JS 스쿠버 다이빙 숍 & 게스트하우스]라고 한글로 쓰인 작은 간판이 있었다. 인터넷에서 봤던 익숙한 문 앞이었다. 그렇게 두리번거리고 있자 구석에서 한 남자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김인하 씨 맞으시죠? 사진이랑 똑같으시네요.”

“아……. 네.”

“제가 여기 주인이에요. 이진욱입니다.”

그는 윗옷은 어디로 갔는지 문신 가득한 상체에 자유의 상징인 레게 가수가 그려진 노란색 서핑 바지를 입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차림새였다. 자칫 시선이 무례할까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여자 숙소는 2층이라, 제가 짐 들어 드릴게요. 엘리베이터가 없거든요. 이쪽으로 오세요.”

“감사합니다.”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한쪽 벽에는 다채로운 색감의 그림이 몇 점 걸려 있고, 몸을 푹 파묻히고 싶게 생긴 소파가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