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혜진이 여섯 살 때였다.

지금도 아버지 홀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시골집에 이웃 아주머니들과 친척들이 모여들었다.

까닭은 지난 몇 달간 병원 생활을 한 혜진의 어머니가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결론에 얼마 전 집으로 돌아왔고, 이제 이생의 시간이 거의 끝에 다다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서였다.

어린 혜진은 마당에서 혼자 강아지와 놀다가 어른들의 넋두리를 들었다. 어렵다고. 산에 가서 명약이라도 캐오면 모를까 이미 강을 건너고 있다고.

조용히 강아지의 눈을 들여다보던 혜진은 곧 어머니의 얇고 해진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논길을 따라 밭길을 따라 산자락을 따라 점점 산으로 올라간 꼬마 아이는 독특해 보이는 풀이나 꽃들을 꺾어 가방에 담았다. 발걸음이 닿는 대로 산길을 걸으며 이마에 맺힌 땀도 닦았다.

이윽고 가방에 꽃과 풀들이 수북이 쌓였을 때 혜진은 높은 숲이 사방을 메우고 있는 걸 보았다. 길을 잃은 걸 깨달았지만 울지 않았다. 그저 어서 집에 가야겠다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산그늘은 빨리도 밀려왔다.

하늘은 푸르러도 주위는 벌써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달빛을 남기고 그 하늘마저 어두워졌을 때에야 혜진은 비로소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잠시 후 어둠 속으로 불빛들이 흔들리며 혜진을 찾는 외침이 들려왔다.

혜진은 소리 내 울며 불빛들을 향해 걸어갔고, 한달음에 달려온 사촌 오빠들은 화를 내거나 철없음을 탓하지 않고 그저 어린 동생을 등에 업고 집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혜진은 사촌 오빠의 등에서 가방만 꼭 쥐고 있었다.

하늘엔 별들이 떠오르고 어둠이 자욱한 시골길을 달려 도착한 집엔 어수선한 어른들의 모습이 혜진을 탓하듯 반겼다.

방으로 들어가자 친척 할머니가 엄마 아픈 데 어딜 갔었냐고 물었다. 혜진은 약초를 캐러 산에 갔었다고 말했다.

가방을 내놓으니 산에서 나는 풀들과 꽃들이 한가득 쏟아졌다. 풀잎 향기가 방 안에 퍼졌고 숨소리가 여려지던 어머니는 그 향기를 마시며 점점 호흡이 또렷해져 갔다.

어머니는 손을 움직여 혜진의 손을 잡았고 호흡은 더욱 선명해져 갔다. 유언을 하듯, 어린 딸이 캐온 약초를 맛보려는 듯 어머니는 방 안의 모두가 놀랄 정도로 가슴을 떨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미안하다고, 더 이상 놀아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이생의 마지막 이야기가 눈물이 되어 차올랐다.

그리고 어느덧 그 머나먼 강을 다 건넌 어머니는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고 떨리던 가슴도 가라앉았으니 마침내 아련한 한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한 방울 눈물이 어머니의 눈가를 지났을 때 방 안에는 풀잎 향기만이 짙었다.

누군가로부터 시작된 울음소리가 방 안을 물들였다. 혜진도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서럽게 울었으니 그 울음소리 가득한 시공엔 못다 한 이야기와 애타는 풀잎 향기가 가슴 깊이 사무치고 있었다.

#2

20년 후….

비 갠 하늘이 파랬다.

두둥실 떠가는 구름 하나가 솜사탕을 닮았다. 거리의 은행나무는 길게 뻗은 2차선 도로를 따라 푸르렀고 오가는 차량들은 햇살에 반짝거리며 봄날의 풍경화를 그리고 있었다.

혜진은 3층의 거실 창가에 다탁을 놓고 앉아 카푸치노를 마시고 있었다.

“맛있다.”

베란다가 없는 거실 창 너머는 허공이었다. 물론 하얀 철제 난간이 안전하게 설치되어 있었고,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난간 사이로 거리의 풍경은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혜진은 손가락 위로 연필을 빙그르르 돌렸다.

올해 나이 스물여섯, 혜진은 로맨스 소설 작가였다.

아직 완결이 되지 않은 열한 권짜리 로맨스 판타지는 꽤 인기가 있었는데, 쇠락한 귀족 가문의 여주인공인 ‘테인’이 병든 어머니의 약을 구하기 위해 온 세상을 찾아다니며 뜻하지 않은 모험을 하는 이야기였다.

“이번엔 어디로 갈 거니? 테인….”

주인공인 테인은 혜진의 마음이 투영된 모습이었다.

어린 시절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 아련히 맺혀 있는 혜진은 여전히 소설 속에서도 어머니를 깨울 약초를 찾아 헤매고 있었고, 그런 혜진의 필명은 ‘풀잎향기’였다.

“테인… 울지 마.”

비 온 후 세상은 판타지 세상과 겹쳐 보이듯 살며시 슬픈 향기가 흘렀다. 혜진의 마음이 흰 구름 너머 파란 하늘 어딘가를 꿈을 꾸듯 날아가고 있었다.

* * *

멀지 않은 곳에 혜진보다 일곱 살 위인 큰언니가 살고 있었다.

혜진은 큰언니와 홍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고, 언니가 차려 준 맛난 점심을 먹은 후 막내 조카와 인형 놀이를 하며 까르르 웃고 놀았다. 그러다 오후 3시 무렵 언니네 집을 나섰다.

“차 조심해. 상상하느라 멍하니 앞만 보고 가지 말고.”

“알았어. 보미야, 이모 또 올게. 잘 있어.”

“으응, 이모 빨리 와.”

올 때는 짐이 있어 택시를 탔지만 갈 때는 버스를 탔다. 비가 올 수도 있다더니 하늘은 흰 구름만 유유자적 떠갈 뿐 파랗게 맑았다. 버스의 차창을 비추는 햇살도 사람들의 노곤한 표정 위에 아른거렸다.

‘1년 중에 봄이 제일 좋다. 비 내리는 모습도 촉촉하고 맑은 날은 이렇게 부드럽고….’

앉아서 가다가 내릴 때가 되어서 미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근에 대학교와 번화가가 있어 버스 안이 젊은 남녀로 복잡했다. 혜진은 한 걸음씩 문 쪽으로 옮겨가다가 문득 걸음을 세웠다.

‘어?’

곁눈질의 시야가 상당히 넓은 혜진은 얼굴이 앞을 향한 채로도 옆을 훤히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버스 손잡이를 잡으려고 고개를 살짝 돌리다가 모자를 쓴 중년 남자가 면도칼로 한 여학생의 가방을 쓱 긋는 걸 본 것이었다. 혜진은 저절로 몸이 굳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순간이었다. 날렵한 칼질 한 번에 가방은 옆구리를 벌렸고 소매치기는 그곳에서 지갑을 꺼낼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어….’

느닷없는 상황에 혜진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두려움과 놀람이 소름처럼 번져 나가며 가슴을 고동치게 했다.

그때였다. 혜진은 정말 자신도 모르게,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던 우산을 뒤로 돌리며 동시에 손을 앞으로 쭉 뻗어 하차 버튼을 눌렀다. 그 몸동작에 뒤로 돌린 우산 끝이 여학생의 다리를 건드렸고 여학생은 주춤하며 뒤를 보았다. 가방을 노리던 소매치기는 황급히 손을 거뒀다.

가방의 옆구리가 한 뼘이나 벌어져 있었지만 여학생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고, 혜진은 정신없이 콩닥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조용히 우산을 앞으로 거뒀다.

일단 소매치기는 막았지만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몸은 나무처럼 굳고 머릿속은 하얗게 숨죽인 채 금방이라도 폭발음이 들릴 것만 같은 버스 안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여학생 쪽에선 아무 반응도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혜진은 버스의 손잡이만 부서질 듯 움켜쥔 채 차창 밖의 풍경을 응시했다. 다행히 곧 버스가 정류장에 멈췄고 뒷문이 열리자마자 쏟아질 듯 휘익 내려갔다.

인도로 올라선 혜진은 어마어마한 긴장감에서 해방된 것처럼 온 가슴이 벌렁거렸다. 돌아보니 버스는 힘찬 엔진음을 내며 떠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혜진은 불현듯 흠칫하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천만다행히 소매치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아…!”

커다랗게 한숨을 터트렸다. 심장이 그야말로 쿵쾅쾅 가슴을 들이받았고 버스는 저 멀리 아파트 단지 쪽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혜진은 버스 안에 소매치기가 그대로 있다는 사실에 다시 눈을 반짝 떴다.

“어떡해. 어떻게 해. 어….”

당황하다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경찰에 신고를 하려고 112를 누르려던 찰나….

“…….”

무언가 이상한 느낌에 혜진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불어오는 바람이 등 뒤에서 이상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손을 뒤로 돌려보자… 얇은 블라우스가 두 쪽이 나 있었다.

머리칼이 힘없이 흔들렸다.

버스에서 내릴 때 소매치기가 면도칼로 그어 버린 모양이었다. 혜진은 잘린 블라우스 안으로 손을 넣어 보았다. 축축하게 피가 흘러내리는 상상이 펼쳐졌지만 다행히 속옷은 무사했다. 하늘색 얇은 블라우스만 손등에 나붓거렸다. 자전거 한 대가 찌르릉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위태로이 곁을 지나가니 정신이 휘청거렸다.

‘아….’

크게 베여 버린 몸이 남실거렸다. 버스는 사라지고 없었다. 어깨 위로 소름이 흘러내리고… 혜진은 조용히 핸드폰을 껐다.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였다. 사람들이 오가고 버스들이 오갔다. 잘린 마음이 고독한 두려움으로 흔들렸다.

‘가자….’

걸음을 옮겼지만 몇 걸음 못 가 힘없이 멈춰 섰다. 가슴이 물빛으로 여울졌다. 마법과 검과 영웅은 판타지 세상에서나 존재할 뿐, 현실은 이렇게 나약한 마음이 눈물처럼 나부낄 뿐이었다.

#3

이슬비가 날리고 있었다.

하늘엔 연회색 구름이 부드럽게 흐르고 깨알 같은 빗방울 역시 그처럼 가벼이 허공을 부유하고 있었다. 혜진은 거실 창의 난간에 기대 편안한 호흡을 했다. 언제나 그렇듯 비가 오면 호흡이 편해졌다.

“좋다….”

3층에서 내려다보는 물빛 젖은 풍경이 좋았다. 거리를 오가는 색색이 다른 우산들과 맑은 봄비 속의 초록빛 은행나무도 예뻤다.

“하아.”

블라우스가 두 쪽이 났던 기억은 하루하루 흐르는 시간을 따라 이제 이상한 꿈처럼 멀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무섭고 싫은 영화를 본 것 같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그래.”

날숨을 내쉬고 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을 하자. 정신을 차리고 일을 해야지. 즐거운 나만의 일을.”

혜진의 손엔 하얀 A4용지 여러 장이 들려 있었다. 그곳엔 연필로 쓴 깨알 같은 글자들이 가득했고, 그 비밀 이야기를 바라보는 작가의 얼굴엔 시나브로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분홍 치마가 바람에 살랑… 속살이 보일 듯 말 듯 반짝… 마음은 벌써 바람을 타고 그대에게….’

종이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그때였다. 거리의 소음 사이로 귀에 익은 아이의 칭얼거림이 들려왔다. 고개를 내밀어 보니 역시나 목소리의 주인은 귀여운 윤후였다.

“후후, 우리 쪼꼬미.”

윤후는 혜진의 바로 아래층, 2층에 살고 있는 다섯 살 남자아이였다. 그런데 지금 건물의 1층 입구에서 앙증맞은 투명 우산과 씨름을 하고 있었고, 자세히 보니 걸림쇠를 눌러 우산을 풀어야 하는데 걸림쇠의 탄성이 강한 건지 제대로 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에고, 우리 사나이 윤후가 보기보다 힘이 없으신가 보다. 딱지는 잘만 접더니만. 기다려 봐. 이 누나가 내려가서….”

혜진은 마법의 요정처럼 슝 내려가 도와주려 했는데, 때마침 하얀 선으로 테두리가 진 검은 우산이 윤후 앞에 멈춰 섰다. 윤후는 그를 쳐다보았고 곧 표정이 밝아지며 자신의 투명 우산을 내밀었다.

‘그 사람인가?’

혜진의 짐작이 맞았다. 말쑥한 캐주얼 정장 차림을 한 남자는 한 손으로 윤후의 우산을 받아 당연히도 아주 간단하게 톡 접었다. 윤후의 표정이 세상 환해졌다. 혜진은 상체를 뒤로 물려 혹시 모를 그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셰런….’

윤후의 우산을 접어 준 남자는 작년 가을부터 이 앞길을 하루에 두세 번씩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볼 때마다 혜진은 자신의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마법사 ‘도이크 셰런’을 떠올렸다. 혹 셰런이 우리네 세상에 살고 있다면 저런 느낌일까 하고.

‘살짝 비슷한 느낌. 눈매가 조금 닮았다고 할까나.’

물론 소설 속의 셰런은 얼음처럼 차갑고 근엄했으며, 윤후를 도와준 남자는 그렇게까지 냉랭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뭐 하는 사람일까?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앞을 왔다 갔다 하는 이유가. 설마 판타지 세상에서 셰런이 날 보러 온 건 아닐 테고.’

혜진은 조심히 고개를 내밀어 다시 아래를 보았다. 귀염둥이 윤후가 잘 가라고 손을 흔들고 있었고, 셰런을 닮은 남자는 큼직한 검은 우산을 들고 이제 제 갈 길을 가려 하고 있었다. 어디서 뭐 하는 사람인지 한 번 따라가 보고 싶은 그때였다.

휘이익!

주방 쪽의 열어 놓은 창문에서 갑자기 바람 한 자락이 질풍처럼 달려와 거리를 내다보고 있던 혜진의 오른손을 거세게 후려쳤다.

화락!

손안의 종이들이 하얀 새처럼 날아올랐다. 혜진은 움찔하며 그 모습을 멍하니 보았고, 새들은 그러나 더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지 못한 채 허공을 팔랑팔랑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

흩날리는 종이들을 그렇게 지켜보던 혜진은 갑자기 화들짝 놀랐다. 날아간 원고는 자신의 로맨스 판타지 소설 ‘산책’의 원고가 아니었다.

그건 이따금 정신적 해방감을 느끼기 위해 쓰곤 하는 초단편 야설이었고, 자신의 정식 필명인 ‘풀잎향기’가 아닌 아무도 모르는 또 다른 필명 ‘깊이있는여사’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고 있는, 그야말로 생생한 성행위와 적나라한 지읒과 비읍이 난무하는 본인이 봐도 낯 뜨거운 초고수위 기떡물이었다.

‘오 마이 갓!’

충격을 받은 혜진은 현관문을 향해 내달렸다. 거실 실내화 차림으로 계단을 파다다닥 내려갔고, 2층을 지나 1층 중간쯤 내려오니 윤후가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

소리를 지르듯 답하고 1층으로 내려와 유리문을 홱 열고 거리로 나가니 빗물이 고여 있는 인도 곳곳에 A4용지가 널려 있는 게 보였다. 혜진은 비명을 지르는 심정으로 황급히 거둬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