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로리안 남작가.

과거에 지눌 공작가의 든든한 우군으로서 황제를 받들던 명망 높은 가문.

그걸 바탕으로 로리안 남작가만의 남다른 기술력을 통한 작물 재배와 기발한 아이디어에서 나오는 각양각색의 디저트는 수많은 사람에게 호평을 얻었다.

물론 이 모든 건 과거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여전히 비옥한 토지와 남다른 기술력은 죽지 않았으나 가문의 힘이 땅으로 떨어지며 지금은 이름뿐인 귀족에 불과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무슨 일로 이런 누추한 곳에 오신다더냐?”

“휴가 차원에서 조용히 쉴 수 있는 곳으로 저희 로리안 남작가의 영지를 고르셨다고 합니다.”

“뭔가 꿍꿍이속이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휴가 명목이라고 해도 황태자가 다 쓰러져 가는 귀족 가문에 몸을 의탁하는 것은 의문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현재 하녀에게 보고받는 인물은 현 로리안 남작가의 가주 대행인 샤벨 로리안이었다.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신비로운 분위기가 풍기는 아름다운 백발과 로리안 남작가의 특징인 자수정과 같은 보랏빛 눈의 외모.

제국을 넘어 대륙 전체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의 미인이라는 호칭이 어울리게 화사한 햇살을 받은 외모는 오늘도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언제 오신다니.”

“조만간이라고밖에 전갈에는 안 써져 있었어요.”

“사람 피를 말리게 하는데 도가 텄구나.”

샤벨은 짜증스럽게 혀를 차면서도 괜히 자기 눈치를 살피며 불안해하는 하녀 새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내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아버님이랑 오라버님에게도 소식을 알려 드리렴. 오늘부터는 고생 좀 해야겠구나.”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일도 아니죠.”

새라는 팔을 걷어붙이는 듬직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그래 봤자 여린 소녀의 가는 팔목을 보면 그리 든든하지는 않았으나 샤벨은 그런 새라가 귀엽다는 듯, 마치 인형을 끌어안듯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 아가씨!”

“우리 새라는 오늘도 사랑스럽네?”

샤벨은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새라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머리를 몇 번 더 쓰다듬었다.

“그럼 오늘도 우리 힘내자.”

“네, 아가씨. 간단한 다과랑 차를 금방 준비해 드릴게요.”

“하아, 일하기 싫다.”

“그래도 하셔야죠.”

“힝, 새라는 이럴 때는 너무 단호해.”

샤벨은 입을 삐쭉 내밀며 서운함을 토로하면서도 발걸음은 이미 방을 향해 옮기고 있었다.

“아, 맞다!”

방으로 들어가려던 샤벨은 불현듯 무엇인가 생각났는지 그대로 뒤를 돌아봤다.

“잊으신 거라도 있으세요?”

“응, 새라야. 나 오늘 어때? 예뻐?”

“물론이죠. 오늘도 아가씨의 머릿결은 천사의 손길이 닿기라도 한 것 같아요. 아니, 그냥 아가씨가 저에게는 천사예요.”

샤벨은 입이 마르고 닳는 칭찬을 듣고 나서야 만족한 듯 방긋 미소를 지으며 그제야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방으로 들어가는 샤벨이 향하는 곳은 서류 더미가 쌓여 있는 책상이 아닌 침대였다.

“여러분 안녕?”

이제는 보편화가 된 휴대용 마법 수정구.

귀족들 사이에서는 빛나는 일상 공유.

줄여서 일명 ‘빛일공’이 굉장한 화제가 되었다.

샤벨 역시 그 화제의 물결에 자연스럽게 탑승했고, 최근 추가된 실시간 소통 창구를 통해 자기 모습을 사람들에게 공유하며 소통하는 취미에 푹 빠져 있었다.

“하아, 저기 잔뜩 쌓여 있는 서류가 보여? 오늘 좋은 꿈을 꿨는데 눈이 떠지자마자 눈앞에 펼쳐지는 서류 더미에 기분이 나빠졌지 뭐야.”

-좋은 꿈이 뭡니까?

“좋은 꿈이 뭐냐고? 궁금해?”

실시간 소통 창구의 재밌는 점은 샤벨이 송출하는 영상을 사람들이 보고 수정구를 통해 바로 반응을 보일 수가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서로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샤벨은 처음에는 어색했으나 적응하고 나니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노는 것에서 쏠쏠한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후후, 궁금하다고 하면 내가 그냥 말해 줄 줄 알고?”

-로이스터 님이 만 오천 골드를 후원해 주셨습니다.

“무슨 꿈이냐면 갑자기 창틀로 황금 앵무새가 날아들어 오는 꿈이었어. 대단히 예쁘고 아름다워서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는데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내 손길을 좋아하더라.”

샤벨은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었고, 후원 알림이 들리자마자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이야기보따리를 바로 풀었다.

샤벨도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후원을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가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의도치 않게 뜸을 들일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후원을 해주기 시작했다.

거기서 비롯된 일종의 수금 문화.

수입이 제법 쏠쏠했기에 샤벨은 가끔가다 일부러 유도했고 보는 사람들도 딱히 기분 나빠하지 않으며 웃으면서 조금씩 후원을 해줬다.

-어떻게 생겼는지 실제로 보고 싶습니다.

“그런 앵무새가 실제로 있다고 하면 진짜 키우고 싶을 거야. 그래서 말이야 내가 기르고 싶은 마음에 새라한테 부탁해서 새장을 가져와 달라고 그랬거든? 그런데 새장을 보자마자 자기가 알아서 들어가더라고.”

샤벨은 꿈에서 본 장면이 너무나도 생생했던 나머지 아직도 그 속에 빠진 것 같은 황홀한 얼굴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진짜 너무 생생해서 일어나자마자 이게 꿈이 맞았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니까? 새장으로 아장아장 들어가는 게 어찌나 귀엽던지.”

-신의 계시라도 받으신 거 아닙니까? 되게 특이한 꿈이네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랑 이야기해 보고 싶어서 ‘빛일공’을 켠 거야.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는 어때? 좋은 꿈인 것 같아?”

-앵무새가 황금색이라고 했으니까 금전운이 아닐까요.

-귀인이 찾아온다는 거 아닐까요.

-그냥 좋은 일이 있겠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은데.

각양각색의 해석이 담긴 반응들.

각자의 해석이 모두 다르기는 했으나 결국 긍정적인 일이 생길 것이라는 의견은 공통이었다.

“후후, 좋은 이야기들 많이 해줘서 고마워. 아쉽지만 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어서 오늘 소통인 여기서 끝이야.”

-안 돼. 가지 마.

-좀 더 같이 이야기해 주세요.

-결혼하고 싶다.

“너는 맨날 나랑 결혼하고 싶다고 하더라. 물론 너만 그런 건 아니긴 한데. 내 눈에는 항상 너만 보여.”

-헉! 혹시 이거 저한테 신호 준 건가요.

“신호를 준 거겠니.”

샤벨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하며 수정구를 향해 꿀밤을 때리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이제 진짜 가야겠다. 나중에 보자.”

샤벨은 언제나 그렇듯 달콤하게 녹아내리는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이듯이 수정구에 대고 속삭였고, 사람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확인한 뒤 수정구의 연결을 종료했다.

“어째 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네.”

처음에는 귀족 영애의 모습이 신기해서 들어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제국 최고의 미모라는 소문으로는 다 담지 못할 정도의 아름다운 외모에 홀린 사람들은 그대로 자리 잡았고, 입소문이 나면서 점차 더 많은 사람이 실시간 소통을 즐겨 보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의 시선과 더불어 쌓이는 후원 금액이 부담스럽다가도 적응이 되고 나니 쏠쏠한 재미만 남게 되었다.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가령 하늘에서 거대한 황금 덩어리가 떨어진다거나.”

수도에서 끈이 떨어진 지방 귀족들은 빈곤함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로리안 남작가의 경우 그동안 축적해 둔 부가 있었다.

하지만 모종의 사건과 더불어 영지의 주력 상품이라고 할 수 있는 각양각색의 과일과 디저트들을 수도에서 더 이상 받아 주지 않으면서 힘이 점점 빠지게 되었다.

이제는 창고에서 썩어 나가는 과일들에서 나오는 손해들까지 메워야 하니 영지민들의 불만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난관을 돌파할 뾰족한 수가 없으니 샤벨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나 떠들 수밖에 없었다.

***

“뭘 그리 보십니까?”

“끝났네.”

“설마 또 그걸 보신 겁니까.”

로리안 남작가를 향해 달려가는 마차 안.

그 마차에는 제국의 황태자인 크리스티안 폴과 그를 모시는 비서관인 모엘 카인과 호위 기사인 샤인 카인이 있었다.

그리고 모엘은 수정구를 유심히 지켜보는 황태자를 의심스럽게 째려보며 확신에 가까운 의심을 하고 있었다.

“굉장히 무례한 눈빛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나?”

“원인 제공은 전하께서 하셨습니다.”

“겁도 없이 황태자에게 덤터기를 씌우는 것도 그렇고 내가 요즘 너무 잘해 줬나 보군.”

크리스는 바다의 푸른 물결을 그대로 가져다 박은 것 같은 벽안으로 모엘을 흘겨보며 말했다.

“그리 얼버무리시면 더 수상하답니다.”

“그래, 로리안 남작 영애의 방송이란 걸 봤네. 그게 그리 문제가 될 일인가?”

“평소에는 그리 싫은 티를 내시면서 그 방송이란 건 꾸준히 챙겨 보시니 이러는 것 아닙니까.”

“지금 모엘의 말에는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하아, 내가 인생을 잘못 산 것 같군.”

크리스는 일부러 한숨을 크게 내뱉으며 자신의 서운함을 토로했다.

“그냥 호기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말거라.”

“그런 것치고는 너무 집중하시던데.”

“어허!”

이 이상 깐족댔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직감한 것인지 모엘과 샤인 두 사람 모두 곧장 입을 다물었다.

“전하께서 관심을 가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죠. 로리안 남작 영애가 최근 수도에서 화제가 되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샤인 경이 알 정도면 정말 유명하기는 한가 보군.”

“저희 기사단은 이미 남작 영애에게 홀리기라도 한 건지 호들갑도 그런 호들갑이 없습니다.”

“뭔가 순탄치 않은 나날들이 될 것 같군요.”

무의식적인 직감.

세간에 이목을 끄는 독특한 취미를 가진 남작 영애.

그런 영애가 현재 남작가의 실질적인 업무를 전담하고 있다고 하니 모엘은 벌써 피곤함에 찌든 얼굴로 연이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순탄치 않을 게 뭐가 있겠나. 우린 그냥 조용히 지내면서 황제 폐하의 특명만 완수하고 바로 수도로 올라가면 돼.”

“그 과정이 어디 쉽겠냐 이 말입니다.”

“알았으니 한숨 좀 그만 쉬게. 진짜 땅이 꺼질까 봐 무섭네.”

크리스는 슬슬 옆에서 들리는 한숨 소리가 심히 거슬려 호통을 침으로써 모엘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차피 별일도 없을 거야.”

이때까지만 해도 크리스는 로리안 남작 영지에 도착해 본인이 당할 황당한 일에 대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망했어도 귀족은 귀족이라는 건가.”

크리스는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다소 낡은 느낌이 있더라도 귀족의 기품은 잃지 않은 로리안 남작저를 둘러보고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한 터라 제대로 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

황태자의 위엄에 로리안 남작가의 사용인들은 입을 다문 채 그저 고개를 숙여 샤벨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리안 남작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로리안 영애?”

“네, 로리안 남작 영애 샤벨 로리안이라고 합니다. 황태자 전하를 모실 수 있게 되어서 참으로 영광스럽습니다.”

“한데 늦은 것도 모자라서 어째서 영애만 모습을 보인 거지?”

“그게….”

“뭐, 남작가의 사정은 알고 있으니 너무 나무랄 생각은 없네. 망한 귀족가에 정상적인 대접을 바란 게 멍청한 생각이겠지.”

샤벨은 갑작스러운 황태자의 날카로운 핀잔에 당황스럽기는 했으나 미소를 지으며 대응했다.

가문의 치부를 찌르는 대화 내용이었으나 어쨌거나 황태자를 맞이하는 데 있어서 하자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영애가 가문의 일을 도맡아서 한다고 하던데.”

“네, 그렇습니다.”

“어깨에 힘을 좀 빼는 게 좋아.”

“무슨 말씀이신지….”

“이미 로리안 남작가의 명운은 정해졌다는 말이네. 한낱 영애의 힘으로 귀족 가문을 다시 세운다는 당찬 포부는 좋으나 현실을 볼 줄도 알아야지.”

샤벨은 갑자기 조언을 늘어놓는 황태자의 모습에 심히 당황해 말문이 턱 막혔다.

“저 혼자만의 힘이 아니랍니다.”

“그러면?”

“저희 로리안 영지의 영지민들도 함께 할 것이에요. 헛된 희망일지는 몰라도 저는 저희 로리안 남작 가문의 저력을 믿고 있답니다.”

샤벨의 눈동자에는 올곧은 빛이 깃들어져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는 그런 샤벨의 포부가 우습다는 듯 입꼬리를 기분 나쁘게 올리며 웃고 있었다.

“흥! 그런 것 치고는 눈에 보이는 성과도 없지 않나? 게다가 말과 행동 역시도 다르던데.”

“소녀가 아둔하여 황태자 전하의 고명한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닐세. 그런 것보다야 수도에서 괜찮은 남편감을 찾는 것이 가문을 살릴 지름길이라고 생각하네만.”

“괜찮습니다.”

황태자의 날카로운 말투에서부터 묻어나는 적대감.

샤벨은 어째서 황태자가 자신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화살이 자신에게로만 향해 있는 느낌이기에 웃으며 넘길 수 있었다.

“참으로 한심하군. 몸이 성치 않은 영식이야 이해할 수 있어도 로리안 남작은 도대체 뭐지? 아직도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하고 폐인처럼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네만 이렇게까지 한심한 모습을 보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군.”

샤벨이 느꼈던 것처럼 크리스는 샤벨 로리안에게 좋은 감정은 없었다.

그렇기에 첫 만남부터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으며 샤벨의 자존감을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특히 가문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로리안 남작 부인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은 일종의 불문율을 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의문 부호를 잔뜩 남긴 불미스러운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막을 아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황궁 내에서 무언가 죄를 지어 목숨을 잃었다는 소문만 나돌 뿐이었다.

당연히 세간에서는 그런 죽음을 납득할 리가 없었다. 그저 황제의 명이 떨어졌기에 모두가 입을 다물 뿐. 그 누구도 로리안 남작 부인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하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황제의 총애를 받던 귀족 가문의 부인임에도 어려운 서민들마저도 감싸던 그녀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