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네가 필요했어!

“처음부터 날 속인 거예요?”

충격에 휩싸인 단비가 커다란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을 글썽이며 도경의 얼굴을 노려봤다. 분노를 참지 못한 단비의 손이 제 치맛자락을 꼭 움켜쥐었다.

“나는 널 속인 적 없어. 착각한 건 너야.”

“하! 거짓말.”

비틀린 입술 사이로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짜디짠 눈물이 창백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여태껏 감쪽같이 속았다, 이 남자에게. 단비는 이제 어떤 말로도 그가 용서되지 않았다.

“나는 너에게 진실을 말하려고 했어. 듣지 않았던 건 너야.”

“그래도 말했어야지. 어떻게든 진실을 얘기했어야지! 안 그런가요? 윤, 도, 경, 대표님!”

대표의 이름을 힘주어 부르는 단비의 비틀린 입술이 도경의 심장에 박혔다.

단비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도경의 심장이 찢겼다.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도경의 심장에 꽂힌 비수는 예상보다 더 아팠다. 비꼬듯 뒤틀린 단비의 쓰디쓴 미소를 보면서도 도경은 단비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미 제 심장에 너무 깊이 박혀버린 단비는 이제 어찌할 수 없는 도경의 일부였다.

“네가 필요했어.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고.”

“아니요, 대표님이 필요했던 건 제가 아니에요. 형과 공유했던 추억이지.”

커다란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단비가 더는 도경과 마주할 수 없다는 듯 매정하게 돌아섰다. 하지만 그 순간, 도경의 단단한 팔이 돌아선 단비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그건 억지야! 내가 사랑한 건 너야. 형과 공유했던 추억이 아니라. 어차피 네 마음속에 있었던 건 3년 전이나 지금이나 결국 나 아니었나?”

“…….”

도경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인정하기 싫었으나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렇다 해도 단비는 자신을 속인 도경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이것 놔요.”

단비가 잡고 있던 도경의 팔을 있는 힘껏 밀어냈다. 하지만 도경은 단비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단비 없이는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몸부림치는 단비의 몸을 도경이 거칠게 끌어안았다.

“이거 놔, 이 나쁜… 읍.”

도경이 끌어안은 단비의 입술을 미친 듯이 빨아들였다. 뒷말을 삼켜버린 단비의 입술이 도경의 입안에서 뭉그러졌다.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도경은 단비를 더욱 깊숙이 옭아맸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끈이, 단비를 점점 더 옥죄어 오는 느낌이었다. 참을 수 없는 욕망을 담아낸 입술이 조금의 틈도 없이 제 입술과 딱 맞물렸다. 처음엔 거칠게 다가왔던 도경의 숨결이 어느샌가 눈물을 머금은 단비의 호흡에 서서히 스며들었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도경의 손길에 반응하는 제 몸을 단비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싫어, 용서할 수 없어!’

***

6개월 전.

신입사원 입사 지원서를 들고 있는 도경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제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분명 단비가 거성 건설 해외 마케팅 부서 신입사원 환영회에 앉아있었다. 오늘, 김 비서가 가져온 입사 지원서에는 명확하게 한단비의 증명사진이 박혀 있었다.

한단비.

한국 대학교 국제학부 졸업.

토익점수: 920점

가족관계: 없음.

“후후!”

도경의 입에서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국 대학교 학생이었던 거야?”

입학하고 졸업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가족 관계없음이라, 그럼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건가?”

아마 혼자서 생활하느라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 와중에 이탈리아 여행을 가셨다?”

처음 알게 된 단비의 개인정보. 도경은 단비의 입사 지원서에서 한참 동안 눈을 떼지 않았다.

단비를 만난 건 3년 전, 이탈리아 여행에서였다. 우연히 만나 함께 여행한 이후, 일정 때문에 먼저 한국으로 돌아온 도경은 단비의 연락을 기다렸다. 하지만 단비에게선 끝내 연락이 없었다. 도경의 애절함이 하늘에 닿았던 것일까. 우연히 들른 강남의 한 호프집에서 단비를 다시 만났지만, 단비는 매몰차게 자신을 거절했다. 그날 이후, 도경은 단비를 마음에서 지웠다. 이제는 도경이 알고 있는 진실을 말해줄 의무도, 염두에 둘 의미도 없는 여자였다. 그런데 그 여자가 거성 건설 해외 마케팅 부서의 신입사원으로 지금 회사에 있단 말인가.

“후!”

자리에서 일어나 팔짱을 낀 도경이 통유리에 비친 한강을 바라봤다. 넘실거리는 한강을 바라보고 있으니 3년 전, 이탈리아 물의 도시인 베네치아의 강렬했던 물빛이 생각났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처음 본 단비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여자였다. 눈에는 생기가 넘쳤고, 거리낄 것 없는 당당함이 있었다. 이탈리아 여행 이후, 호프집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똑똑.

도경이 사방이 탁 트인 대표실 창가에 서 있을 때, 누군가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생각에 잠겨 잔잔한 물빛의 한강을 바라보던 도경이 무심한 듯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표님! 이 안 씨 오셨는데요?”

“이 안?”

잘생긴 눈썹을 살짝 찌푸린 도경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김 비서가 대표실을 나가자, 곧바로 이 안이 들어왔다.

“윤도경! 이제 대표 자리에 완벽하게 적응한 모습이네. 작년까지도 힘들어하는 것 같더니.”

“후후! 그랬나?”

대표실 중앙에 있는 고급스러운 카키색 가죽 소파로 이 안을 안내한 도경이 허탈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이 안의 얼굴을 본 건 거의 1년 만이었다.

“생각 안 나? 3년 전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만 해도 너, 세상 다 산 듯한 얼굴이었어. 하긴 형을 대신해 사실상 거성 그룹의 주인이 되었으니 적응하는 게 당연한 건가?”

순간, 도경의 미간이 좁혀진 것도 잠시, 김 비서가 그린 빛 색감이 도는 트레이에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이 안의 끈적이는 시선이 짧은 치마를 입은 김 비서의 날씬한 다리로 향했다.

“김 비서는 결혼을 해도 여전히 예쁘네.”

이 안의 시답지 않은 농담에 옅은 미소로 답한 김 비서가 얌전히 찻잔을 놓고 나갔다.

“저런 비서가 왜 대양에는 없는 거지? 저런 비서 몇 명만 있었어도 아버지가 그렇게 바라는 회사 일에 내가 관심을 좀 가졌을 텐데.”

“다행이란 생각 안 들어? 네가 좋아하는 여자들이 다 연예계에 있어서.”

이 안은 한국에서 재계 서열 순위에 드는 대양 그룹 차남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K팝 스타였다. 물론 거성과 비견할 수 있는 그룹은 아니었으나, 한국 내에서는 꽤 명망이 높았다.

“그렇긴 한데 글쎄, 뭐랄까? 딱히 매력이 없어. 나한텐.”

어이없는 표정의 도경이 한심한 듯 이 안을 바라보다 입술을 떼었다.

“매력이 없다. 후후! 그래서 그렇게 숱하게 연예계에 스캔들을 만들고 다니셨나?”

“그러니까, 매력이 없으니까 내가 그렇게 많은 스캔들을 만들었지. 한 여자한테 푹 빠졌으면 그렇게 숱한 스캔들이 나한테 생겼겠어?”

이 안의 저 말이 생소하지 않은 듯, 하얀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찻잔을 든 도경이 싱겁게 웃었다.

“여기는 웬일이야? 한창 유럽에서 활동 중이라고 들었는데.”

이 안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허브 향이 나는 차를 음미한 도경이 물었다.

“예전부터 친구 일에 관심 없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적어도 친구가 언제 한국에 들어왔는지는 알고 있어야지. 유럽에서 한국 들어온 지 8개월이 넘었다.”

찻잔을 들어, 차 한 모금을 입에 머금은 이 안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랬나?”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의 도경이 가만히 가죽 소파에 몸을 기댔다.

이 안과 도경은 처음부터 결이 다른 친구였다. 그리고 그 차이는 사춘기 이후 더 크게 나타났다. 하지만 도경의 생각과는 달리 이 안은, 이렇게 가끔 찾아와 궁금하지도 않은 제 안부를 전했다.

“너, 이 여자 봤어?”

찻잔을 내려놓은 이 안이 휴대전화에 저장된 사진을 도경에게 내밀었다.

“이번엔 또 누구? 저번에 말한 여자 연예인이랑 만나는 거 아니었나?”

“서연이 말하는 거야? 후후! 사람이 어떻게 매일 똑같은 것만 먹어. 가끔 별식도 먹어야지.”

별식이라, 이 안이 여자를 대하는 방식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네 운명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처음엔 나도 운명인 줄 알았지. 너도 알잖아, 서연이만큼 예쁜 여자 찾기 힘든 거. 근데 애가 어려서 그런지 너무 밝혀.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막 들이대니까 요즘은 좀 질리더라고.”

이번엔 스캔들 없이 꽤 오래간다 싶었다. 여자에게 금방 싫증을 느끼는 게 이 안이었다. 이 안의 연애 패턴은 누구보다 도경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안의 문란한 여자관계까지 간섭할 정도로 가깝지도, 한가하지도 않았다.

무심한 표정의 도경이 천천히 손을 뻗어 이 안이 내민 휴대전화를 건네받았다.

이 안은 여자가 생길 때마다 도경에게 자랑하듯 사진을 내밀었다. 벌써 이 안이 보여준 여자 사진이 몇 번이던가. 입소문이 무서운 연예계에서 개인의 사생활을 떠벌리지 않을 유일한 사람이 도경이었다. 그런데도 연예계 스캔들이 끊이지 않는 걸 보면 이 안의 연애 생활이 요란하긴 한 모양이다.

그런데, 이 사진.

늘 그렇듯 무심히 건네받은 도경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너, 이 여자…….”

뚫어지게 사진을 노려보던 도경의 날카로운 눈빛이 이 안에게로 움직였다.

“어때? 엄청 예쁘지? 꾸미지 않은 청순함 속에서도 빛이 나는 얼굴이랄까? 게다가 도도한 듯하면서도, 가끔 나타나는 엉뚱 발랄한 모습까지, 아주 사람 미치게 한다. 이 여자.”

이 안은 이미 이 여자에게 단단히 빠진 듯 보였다.

“요즘, 이 여자랑 만나?”

떨리는 입술을 감추기 위해 도경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도경의 날렵한 턱선이 움찔했다.

“아니! 지금 온갖 정성을 다 들이고 있는데, 잘 안 넘어와. 그래서 더 미치겠고. 근데 이 여자, 너희 회사에 이번에 입사했다고 하더라. 한 번도 못 봤어?”

이 안이 도경의 손에 든 휴대전화를 뺏어 다시 제 품에 넣었다. 도경은 휴대전화를 빼앗긴 손끝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어. 한 번도.”

“하긴, 거성 건설에 직원이 얼마나 많은데 이제 갓 입사한 신입을 네가 봤겠냐.”

“그 여자, 어디서 만났어?”

굳은 표정의 도경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빛으로 이 안을 쳐다봤다.

“웬일이야? 네가 내 연애에 관심을 다 기울이고? 네가 봐도 예쁘긴 하지?”

“어디서 만났냐고?”

도경의 묵직한 저음이 재촉하듯 물었다.

“몇 달 전 강남의 한 호프집에서. 거기서 저녁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더라고. 만난 지는 2개월 정도 됐는데 계속 작업을 걸어도 안 넘어오잖아. 약간의 오기랄까? 언제까지 안 넘어오나 시험해 보려고. 그래서 얼마 전부터 이 여자 일하는 시간 내내 호프집에서 살았지, 일정 다 빼고. 그랬더니 겨우 사진 하나 건졌어. 왜? 여자한테 관심 없는 네가 보기에도 예쁘게 생겼냐? 사진에서는 잘 안 보이는데, 이 여자 몸매가…….”

“이름은 알고?”

도경이 이 안의 말을 막아섰다. 사진 속 여자에 대해 그딴 식으로 싸구려처럼 떠들어대는 소리, 듣고 싶지 않았다.

“당연하지, 혜원. 이혜원이라고 했어.”

평소와는 사뭇 다른 도경의 반응이 이상했다.

“뭐? 이혜원? 하하하!”

지금껏 그늘졌던 도경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웃었다.

“너 미쳤어? 갑자기 왜 그래?”

사진을 본 순간부터 도경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혜원이라는 이름이 웃긴 건가? 이 안은 이해할 수 없는 도경의 반응이 낯설었다. 한 번도 제 여자에게 관심을 보인 적이 없는 놈이었다.

“이혜원이라…….”

비뚜름하게 한쪽 입술을 끌어올린 도경이 그녀의 이름을 입안에서 중얼거렸다.

이 안이 보여준 사진 속 여자는 단비였다. 게다가 거성 건설 신입사원이라고 했으니, 그 여자는 제가 아는 단비가 분명했다. 그런데도 이 안에게 이혜원이라는 이름을 알려줬다는 건, 단비의 마음속에 이 안이 없다는 얘기다. 분명 집요하게 달라붙은 이 안을 떼어내려 한, 단비의 거짓말이었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5일 동안 함께 했던 단비는 그런 여자였다. 아무에게나 곁을 내주지 않는.

“그래서 오늘은, 이 여자 만나러 거성에 온 건가?”

“뭐, 겸사겸사. 네 얼굴 보지 못한 지도 오래됐고.”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본 이 안이 천천히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가려고?”

“응! 이제 혜원이 퇴근 시간이야. 오늘 같이 저녁 먹으려고.”

“약속은 되어 있고?”

“아니, 부서로 찾아가려고. 설마 K팝 스타 이 안이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거절하겠어?”

도경이 비뚜름하게 웃었다. 아무리 K팝 스타 이 안이라고 해도 선약도 되지 않은 저녁 시간을 단비가 내어줄 리 없었다. 게다가 이름까지 잘못 알고 있는 거라면, 단비를 찾지 못할 확률이 훨씬 높았다.

“그래! 가서 약속 한번 잡아보던지.”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이전보다 한껏 여유로운 표정의 도경이 손을 뻗어 이 안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단비가 남자 보는 눈이 있다면, 적어도 이 안 같은 쓰레기는 거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제는 저와 전혀 상관없는 여자. 그럼에도, 그 여자가 잘 되길 바라는 작은 바람이 담긴 최소한의 연민 같은 것이었다.

“도경이 너! 신입사원 길들인다고 막 야근시키고 그러지 마. 우리 혜원이 힘들어.”

‘우리 혜원이.’

이 안은 그런 남자였다. 쉽게 여자에게 빠졌다가, 쉽게 질려 버리는.

“이 안! 경고하는데, 난 거성 건설 사원이 너 때문에 대중 매체에 오르내리는 거 싫어. 그리고…….”

도경은 하던 말을 멈추고 이 안을 빤히 쳐다보다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여자, 순진한 것 같던데 애인도 있으면서 함부로 장난치지 말고.”

“너, 갑자기 왜 그래? 너희 회사 사원이라니까 신경 쓰여? 대단하네, 사원 한 명, 한 명 연애사까지 관심 가져 주시고.”

이 안은 도경의 색다른 반응이 불편한 듯 빈정거렸다.

“사원이라서 신경 쓰는 게 아니라 상대가 너라서 신경이 쓰이는 거야. 거성 이미지 안 좋아질까 봐.”

“걱정하지 마! 이번엔 제대로 해 볼 생각이니까.”

‘제대로라….’

저 말이 제대로 거슬렸다. 이미 애인도 있는 남자가 단비와 제대로 뭘 어떻게 해 보겠다는 건가.

이 안이 대표실을 나간 후, 책상에 앉은 도경이 서류를 집어 들었다. 신경 쓰고 싶지 않은 여자였다.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여자였다. 하지만 그 여자의 상대가 이 안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