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그래도 너, 옥상 커넥션 (SF로맨스판타지 단편집)


옥상 커넥션

 

 

#1 인연과 악연 사이

 

 

 

한여름을 앞둔 어느 날, 어둑어둑한 밤이 찾아오자 한 여인이 자기 집 현관문 앞에 다다랐다.

 

하지만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는 좁은 집에 들어가 봤자 복잡한 마음이 더 답답해질 거 같았다.

 

그래서 누르려던 현관 번호 키에서 손을 뗀 후 발길을 돌렸다.

 

이사 온 지는 좀 됐지만 처음으로 올라가 보는 옥상은 그녀의 집 바로 위층이었다.

 

비흡연자인 그녀에겐 좀 더 특별한 사정이 있었다.

 

담배로 일찍 아빠를 잃었던 아픈 과거 때문에 옥상이 괜히 꺼려지는 장소가 된 것이다.

 

그랬던 그녀의 마음이 바뀐 건 서른을 코앞에 둔 시점에 찾아온 짝사랑 때문이었다.

 

바로 오늘, 그녀는 고백도 못 해본 채 한 달 정도 이어온 서글픈 짝사랑의 끝을 맞이했다.

 

깊은 한숨과 함께 옥상 문을 열고 들어선 그녀가 구름이 잔뜩 낀 하늘부터 올려다봤다.

 

암흑 한가운데 놓인 평상이 눈에 띄자 그녀는 발이 없는 귀신이라도 된 것처럼 그곳으로 향했다.

 

평소의 그녀 같았으면 겁을 냈겠지만, 오늘의 좌절이 그 두려움마저 집어삼킨 듯했다.

 

평상에 주저앉은 비련의 여주인공 원도나가 결국 더 비참해질 요량으로 오후의 사건을 떠올렸다.

 

 

 

***

 

 

 

백수 시절 시작해 운 좋게 파워블로거까지 된 도나는 주변의 부러움을 사곤 했다.

 

특히 그녀에겐 맛집을 상대로 체험하러 다니는 것이 주된 일상이었다.

 

돈도 벌고 타고난 식탐까지 채울 수 있는 그녀의 직업은 당연히 부작용도 뒤따랐다.

 

원래 살이 잘 안 찌는 체질이었던 그녀가 최근 들어 서서히 튀어나오는 똥배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그녀는 집 근처 헬스클럽 한 달 체험 건이 생겨 겸사겸사 다니던 중 짝사랑을 만나게 됐다.

 

상대인 한 살 연하의 남자 김준도는 헬스클럽의 트레이너였다.

 

관장의 말에 의하면, 원래 고객이었던 준도가 뛰어난 운동 실력으로 특별히 스카우트됐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녀에게 그의 존재는 처음부터 특별하게 다가왔다.

 

훤칠한 미남은 아니었지만, 그에겐 다부지고 날렵한 몸과 어딘가 귀엽기까지 한 묘한 매력도 있었다.

 

그녀가 지난 한 달 동안 그의 트레이닝을 받은 건 단 두 번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사랑에 빠진 채 그를 소심하게 지켜보기만 했다.

 

하필 체험 마지막 날인 오늘, 그에게 이미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도나가 우연히 알게 됐다.

 

그것도 그를 더 보기 위해 사비를 들여 한 달 더 연장하려던 그 순간에 터진 일이었다.

 

그녀는 그때 전화하는 그의 통화 내용을 엿듣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당연히 헬스클럽 기간 연장은 없었던 일이 됐고 그녀에겐 실연의 아픔만이 남았다.

 

 

 

***

 

 

 

진짜 술이라도 마셔야 하나.”

 

도나는 멀리하던 술까지 떠올리며 중얼거리다가 비가 올 것처럼 찌푸린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뭐 하니. 취한다고 나한테 그 사람이 오는 것도 아니고. 내가 좋아한다는 것조차 모를 텐데.”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갑자기 흐느끼듯 웃기 시작했다.

 

누가 봤다면 진짜 귀신인 줄 착각할 만한 모습이었다.

 

그 순간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작았지만 두 번째는 좀 더 크게 울려 퍼졌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던 그녀가 세 번째 천둥에 맞춰 소리를 질렀다.

 

, ! 나는 안 되는 거야!!”

 

그녀의 고함이 끝나자마자 주황빛의 번개가 하늘이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옥상에 내리꽂혔다.

 

평상 바로 뒤의 맨땅에 떨어졌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마치 자기 몸에 벼락을 맞은 듯 정신을 잃고 쓰러진 그녀에겐 분명 불행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천둥 번개 이후에 보통 뒤따라오는 비바람조차 없는 하늘은 왠지 기이해 보일 정도로 고요했다.

 

 

 

***

 

 

 

날이 밝은 이른 아침, 평상에 쓰러져 자는 도나를 한 남자가 난감한 표정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에 가려졌던 그녀의 얼굴이 조금 드러나자 그의 표정은 곧 흥미롭게 변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장난스러운 몸짓으로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이봐요! 저기죽은 거 아니면 좀 일어나 봐요!”

 

그의 큰 목소리에 눈을 번쩍 뜬 그녀는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를 졸린 눈으로 올려다보던 그녀가 어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정신을 차렸다.

 

여기서 잠든 건가?”

 

그녀의 혼잣말에 피식 웃던 그가 평상에 걸터앉았다.

 

머리를 긁적이던 그녀는 옆에 앉은 그를 흘끗 쳐다보다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잠이 확 달아난 것처럼 두 눈이 동그래졌다.

 

, !”

 

그녀의 외침에 정면을 응시하던 그는 어이없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자기를 보며 황당해하는 그녀를 그도 같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 나 알아요?”

 

그의 옆모습에 이어 앞모습까지 제대로 확인한 그녀는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실연당한 어제부로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 여겼던 짝사랑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 아직 꿈이구나. 아니면 내가 미쳤거나.’

 

피식 웃는 그녀의 반응에 그가 의아한 눈빛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이젠 대놓고 자기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는 그녀를 당황스럽게 쳐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네.”

 

하지만 그녀는 짝사랑과는 완전히 다른 그의 헤어스타일과 후줄근한 분위기에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평상에서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그에게 말했다.

 

, 제가 착각했어요. 근데 언제부터 저를 지켜보신 거예요?”

 

그녀를 엉뚱하다고 느낀 그가 짓궂은 표정으로 답했다.

 

, 이런 적 없었는데 웬 여자가 옥상에서 노숙을 하나 해서 얼른 깨웠어요.”

 

노숙이요?”

 

아니에요?”

 

그의 단어 선택과 피식거림에 순간 기분이 상한 그녀가 허리에 두 팔을 얹으며 언성을 높였다.

 

제가 노숙자처럼 보인다는 거예요?”

 

그러자 오히려 재밌다는 듯 그의 빈정거림이 더해졌다.

 

아무리 여름이라 그래도 집 놔두고 여기서 잔 거 보면 그렇게도 보이는데요? , 아니면 말고요.”

 

안 그래도 실연의 후유증으로 짜증스러웠던 그녀는 화풀이 상대라도 찾은 것처럼 날을 세웠다.

 

남이야 집에서 자든 여기서 자든 뭔 상관이에요? 괜히 깨워서는!”

 

상관있다면? 여긴 내가 운동하는 곳이라 방해돼서 깨운 건데?”

 

그도 질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제야 그녀의 눈에 운동 기구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어머, 옥상 전세 내셨나 봐요?”

 

그녀의 따지는 말투에 그는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 셈이죠. 아무도 사용 안 하는 곳이니까.”

 

그럼 앞으로는 제가 여길 좀 써야겠네요!”

 

딱 걸렸다는 듯 그녀가 외치자 그가 설마 하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살아요?”

 

!”

 

대답은 생략한 채 그를 째려보던 그녀는 평상 위의 가방을 집어 들고 서둘러 옥상 문으로 향했다.

 

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이다 의아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 출입구가 원래 2개였었나?”

 

 

 

***

 

 

 

집에 돌아온 도나가 너무 오버해서 화를 냈나 싶은 마음에 한숨을 쉬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근데 성격도 다르잖아?”

 

그녀는 옥상의 남자가 짝사랑과 똑같이 생기긴 했지만 미묘하게 다른 점들을 되짚어 봤다.

 

곧 그녀가 역시라는 표정으로 웃음 지었다.

 

하필 닮아도 그 사람을. 아니야! 이건 신이 준 기회인지도 몰라. 또 만나면 대신 화풀이나 해야지.”

 

그녀는 어제의 아픔과 스트레스를 없애버릴 좋은 먹잇감이라도 잡은 것처럼 키득거렸다.

 

그럼 난 옥상을 무슨 용도로 써야 하려나?”

 

머리를 굴리던 그녀가 문득 예전에 블로그 체험 건으로 들렸던 옥상 노천카페를 떠올렸다.

 

해 질 녘의 멋진 분위기에 반해서 평소보다 더 많은 사진을 찍었던 곳이었다.

 

결국 그녀는 비슷하게 꾸며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본격적인 카페는 아닐지라도 지인들을 불러 놀기에는 더없이 좋은 공간이 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좋았어! 저 남자만 옥상 전세 내게 할 수야 없지.”

 

그녀에겐 실연의 상처를 잊기 위한 방법을 생각보다 빨리 찾았다는 안도감까지 느껴졌다.

 

가방 속 핸드폰을 꺼낸 그녀가 제일 만만한 심부름꾼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너 언제 올 거야?”

 

아침부터 뜬금없이 뭐야.

 

날 위해 해줄 게 있어. 시간 내서 와라!”

 

뭔데 그래!

 

와보면 알아. 엄마는 잘 지내지? 새아빠는 문제없고?”

 

, 우린 문제없어.

 

그래, 암튼 빨리 와!”

 

전화를 끊어버린 그녀는 머릿속의 계획을 실현할 생각에 잔뜩 부푼 모습으로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

 

 

 

오후가 되어 도나의 남동생 `원도남'이 잔뜩 궁금한 얼굴로 누나의 집을 찾았다.

 

5살 차이의 그는 친남매가 맞나 싶을 정도로 도나와 전혀 다른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길거리를 같이 걷다 보면 종종 애인 사이로 오해받기도 했다.

 

무슨 일이야? 설마 용돈 주려고 부른 거야?”

 

그런 거면 계좌로 쐈겠지. 별거 아닌데 기대하고 왔구나?”

 

그녀가 짓궂은 미소를 짓자 김샌 표정이 된 그가 침대에 주저앉았다.

 

그럼 무슨 일인데?”

 

저 구석에 있는 접이식 식탁 좀 옥상에 올려줘.”

 

?”

 

의자는 내가 들 테니까.”

 

그녀는 어이없어하는 그를 일으켜 곧바로 계획했던 일을 진행했다.

 

때마침 멋진 노을이 하늘에 펼쳐진 옥상에 남매가 짐을 들고 등장했다.

 

도나가 가리키는 곳에 식탁을 펼쳐 놓은 도남은 무슨 꿍꿍이냐는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앞으로 여기서 밥이라도 먹으려고?”

 

비슷해. 네 말대로 맛있는 거 먹어도 좋겠네.”

 

그냥 저 평상 위에서 먹어도 되잖아.”

 

, 저기는 좀 아니잖아! 난 노천카페를 구상한 거란 말이야.”

 

갑자기 그가 실소를 내뱉었다.

 

, 커피라도 팔려고?”

 

너한테는 팔아야겠다! 이왕 차 마시면서 쉴 때 이런 공간이 있으면 좋잖아. 나름대로 분위기도 있고.”

 

하긴 집구석이 좁아서 답답하긴 하겠다. 근데 한여름에 여기 있다간 쪄 죽을 텐데?”

 

네가 나중에 대형 선풍기 설치해 줘. 주로 저녁에 이용하려고.”

 

누나는 내가 해결사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귀찮으니까 빨리 남자친구나 만들라고.”

 

찡그리며 투덜대는 도남에게 그녀는 삿대질을 하며 언성을 높였다.

 

! 안 그래도 실패해서 기분 더러운데 하필 이 타이밍에 그런 얘길 하냐?”

 

실패? 설마 저번에 말한 그 남자랑 끝난 거야?”

 

시작도 안 했는데 끝은 무슨.”

 

짝사랑이 끝난 거냐고!”

 

그래! 여자가 있더라고.”

 

순간 갑갑한 표정으로 변한 도남이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노천카페 만들만했네! 좋아, 나도 종종 찾아와서 커피 팔아줄게.”

 

그런 의미에서 다음에 올 때 커피머신 좀 가져와.”

 

? 엄마가 쓰는 거?”

 

, 네가 대충 내 사정 얘기하고 가져와.”

 

하여간 이 누나 뻔뻔해.”

 

그의 황당한 웃음에 그녀가 더 천연덕스럽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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