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너 대체 이유가 뭐야?”

영윤이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

“그게….”

혜신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말이 나오질 않았다.

“이혼하자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영윤이 그답지 않게 크게 소리쳤고 놀란 혜신은 움찔 몸을 떨었다. 원래 지영윤이란 남자는 소프트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고 솜사탕만큼 달콤한 사람이다. 하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웃음기 없는 그의 얼굴은 얼음장보다 차가워 보였고 냉정한 그의 말투는 그 어느 때보다 심각했다. 혜신은 평소와 전혀 다른 그의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무서웠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땀이 등허리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꼭 움켜쥔 손도 곧 땀으로 흥건히 젖어 들었다. 영윤은 그런 그녀를 압박하듯 점점 더 거리를 좁혀 왔다. 마치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매서운 눈으로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압박감에 온몸이 굳어 갈 때 즈음 혜신의 눈이 번쩍 떠졌다.

꿈이었다. 다행이다. 여긴 우리 집이고 내 방 침대 위다.

“후우.”

혜신은 안도감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까의 그 서늘했던 감촉이 잊히지 않아 몇 번이고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그래도 꿈이라서 다행이야.”

한참을 꼼지락거리며 꾸물대던 혜신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동안 꾼 적이 없었는데 빌어먹을 그 꿈을 또 꾸고야 말았다.

***

행복 아파트 앞 작은 북카페 ‘쉼’.

“이모, 나 왔어.”

여섯 살 아리가 킥보드를 타고 카페 문을 쾅 들이받으며 들어왔다.

“이모가 카페에 들어올 땐 킥보드 타지 말고 끌고 오랬지!”

혜신이 인상을 찌푸리며 나무랐지만 아리는 듣는 둥 마는 둥 뚱한 표정으로 계산대 앞 자신의 지정석에 사뿐히 올라앉았다.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혜신은 마음속으로 참을 인을 새기며 다정하게 물었다.

“아리, 뭐 먹을래? 샌드위치? 누룽지? 시리얼?”

아무리 조카라 하여도 건물주 딸을 함부로 혼내는 것은 꺼려지는 일이었다.

“음… 시리얼.”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느릿느릿 대답이 신통찮았다.

“에휴. 앓느니 죽지.”

혜신은 몇 달 전부터 둘째를 낳은 동생 혜랑의 맏딸인 아리의 등하원을 담당하고 있었다. 북카페 바로 위층에 사는 아리가 유치원에 갈 준비를 하고 내려오면 그녀는 아침을 먹여 버스를 태워 보냈다. 예전엔 말 잘 듣는 귀여운 조카였는데 동생이 태어나고 나서부터 부쩍 짜증이 늘고 제멋대로 굴어 혜신은 요즘 종종 애를 먹었다.

“시리얼 먹어.”

혜신이 못마땅한 얼굴로 동그란 볼에 우유와 시리얼을 담아 아리의 앞에 놓아 줄 때 즈음 또 한 명의 단골손님이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옆 가게 주인인 준이었다.

“누나, 아메리카노 한잔이요!”

준은 방글방글 웃으며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는 자연스럽게 아리의 옆에 앉았다. 그는 혜신의 북카페 바로 옆 건물에서 핸드폰 가게를 하는 20대 후반 청년이었다. 그가 운영하는 대리점은 촌구석에 있는 가게답지 않게 매출이 어마어마하다고 들었다. 하긴 저렇게 어리고 이쁘게 생긴 놈이 방글방글 웃기까지 하니 핸드폰이 안 팔릴 수가 없을 거다.

“아리, 무슨 생각해?”

항상 조잘조잘 떠들던 아리가 오늘따라 조용해 보이자 의문이 든 준이 먼저 말을 걸었다.

“삼촌 혹시 들어올 때 어떤 아저씨 못 봤어요?”

대답 대신 아리가 준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작게 물었다.

“아저씨?”

“네, 키 크고 모자 쓴 아저씨요.”

“못 봤는데.”

준이 몸을 돌려 카페 밖을 휙 둘러보았다.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지나다니는 행인조차도 없었다.

“어? 조금 전까지 있었는데.”

아리가 갸우뚱하며 고개를 홱 돌려 카페 밖을 요리조리 살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아리가 ‘후’ 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준의 아메리카노를 내오던 혜신이 아리의 한숨 소리를 듣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니아니. 아무 일도 없어.”

아리가 고개를 내저으며 강한 부정을 했다.

혜신은 살짝 이상한 느낌을 들었지만, 새로운 손님이 카페 안으로 들어와 더는 물어볼 수 없었다.

“아리, 무슨 걱정 있어?”

혜신이 주문을 받는 사이 준이 아리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리가 이모에게 비밀로 하고 싶어 하는 눈치라 준은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 어떤 아저씨가 이모 좋다고 막 따라다녀서 이모가 엄청 힘들었거든요. 혹시 또 그런 아저씨일까 봐요.”

아리가 혜신의 눈치를 보며 개미만 한 목소리로 준의 귀에 속삭였다.

“그래서 걱정되는구나.”

준의 물음에 아리는 조금 심각해진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준도 들은 적이 있었다. 북카페를 처음 열었을 당시 어떤 중년의 남자가 스토커처럼 따라다녀 엄청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그 언젠가 우스갯소리로 혜신에게 들은 기억이 났다. 그때 너무 과하게 쫓아다녀 정작 자신은 괜찮았는데 어린 아리가 많이 놀랐었다고 말했었다.

“그때랑 똑같은 아저씨야?”

“아니요. 이번엔 어린 아저씨예요.”

아리가 비밀 접선을 하듯 또다시 조심스럽게 답했다.

“어린 아저씨?”

“네.”

혹시 그놈이 또다시 들러붙은 건 아닌가 염려스러웠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었다. 어쩌면 젊은 남자가 단순히 운영 여부가 궁금해 안을 둘러보았을 뿐인데 아리가 착각했을 수도 있다.

“걱정 마. 혹시 이상한 아저씨가 찾아오면 삼촌이 쫓아내 줄게.”

“정말요?”

“그럼. 삼촌 엄청 싸움 잘해.”

준이 팔을 직각으로 굽혀 툭 튀어나온 근육을 보여주며 안심시켰다. 아리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생긋 웃어 보였다.

“아리, 다 먹었어?”

노란 등원 버스가 올 시각이 다 되어 가자 혜신이 하던 일을 멈추고 아리를 재촉했다.

“으응.”

혜신의 다급한 목소리에 시간이 촉박한 걸 직감한 아리가 주황색 유치원 가방을 메고는 얼른 의자에서 내려왔다.

“잘 다녀와.”

준이 약속의 징표로 눈을 찡긋하며 아리를 배웅했다. 아리도 윙크로 응답하며 이모의 손에 끌려 카페를 나섰다.

아침 10시 30분이 훌쩍 넘은 시각. 평소였으면 벌써 자신의 가게에 가고도 남았을 텐데 준은 한 시간이 넘도록 느긋하게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다. 계속 죽치고 앉아 있는 그가 신경 쓰인 혜신은 망설이다 결국 먼저 입을 뗐다.

“가게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직원들 있는데요. 뭘.”

준이 싱긋 웃으며 이제는 얼음마저 녹아 버린 밍밍한 커피를 빨대로 쭉 빨아당겼다. 원래 출근 전 모닝커피만 잠시 마시고 가는 준이였지만 오늘따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리에게 들은 이야기가 신경 쓰였다. 사실 별일 아닐 수도 있는 일인 건데 괜스레 기분이 찜찜해서 준은 쉬이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오늘따라 엄청 출출하네. 누나 샌드위치 하나 주세요. 우유랑 같이요.”

다른 날과 달리 카페에 오래 머무르는 자신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 같아 뜨끔한 준이 빙긋 웃으며 추가 주문을 했다.

“따뜻한 우유랑 주면 되죠?”

“네, 샌드위치엔 뜨끈한 우유죠.”

혜신에게도 별다른 낌새가 없고 카페 밖에도 수상한 사람이 보이진 않았다. 그럼 신경 쓰지 말고 일하러 갈 만도 했지만 준은 아리의 한마디가 신경 쓰여 좀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어린 아저씨.’

아리가 본 수상한 사람이 젊은 남자란 소리였다.

그 말은 즉 그가 준의 경쟁자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준은 무려 2년 동안이나 혜신을 짝사랑해 왔다. 과거의 상처가 있어 직구로 고백하는 것은 불편해하는 것 같아 여태껏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주변에 머물러 왔다. 이제 슬슬 다가가 볼까 하는데 그녀 곁에 다른 남자라니 안 될 소리다. 최소한 그 남자보다 먼저 고백이라도 해보아야 했다. 이리 넋 놓고 빼앗길 순 없었다.

“여기 샌드위치요.”

도대체 누구일까? 어떤 놈일까?

샌드위치를 우걱우걱 씹으며 한참을 생각해 보았으나 준의 머릿속에는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그녀를 남몰래 흠모한 지 2년. 미심쩍은 인물이 있었다면 벌써 자신이 알아차렸어야 했다.

역시 아리의 착각인가?

아무리 기다려도 별 소득이 없자 준은 어린아이의 무한한 상상력에 휘둘렸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우유를 시원하게 들이켠 후 계산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설 때였다.

딸랑. 유리문에 달린 작은 종소리와 함께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다. 키가 크고 야구 모자를 쓴 아리가 말한 인상착의의 그 남자가.

“어서 오세….”

컵을 닦으며 해맑게 인사를 하던 혜신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오랜만이야. 박혜신.”

반갑게 알은체를 하는 남자와 달리 혜신은 당황해서 제대로 된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문 앞의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며 서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까만 눈동자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혜신의 표정을 본 순간 준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저렇게 당황한 그녀의 모습을 지난 2년간 본 적이 없었다. 대체 저 남자가 누구길래 저렇게 말 한마디 내뱉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 것인지 그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졌다.

“어떻게 왔어?”

한참 만에야 정신을 차린 혜신이 긴 침묵을 깨고 말을 건넸다. 애써 담담한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너 보러 왔지.”

굳은 혜신의 얼굴과 달리 남자의 표정은 무척 여유로웠다. 그는 씁쓸한 듯 옅게 웃으며 천천히 혜신의 앞으로 다가왔다.

“돌아가. 우리 편하게 볼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당황한 혜신이 급하게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컵을 닦기 위해 몸을 돌렸다. 태연한 척하려 노력했으나 바들바들 떨리는 그녀의 손을 감출 수는 없었다.

“가라고!”

점점 거리를 좁혀 오는 모습에 당황한 혜신이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에 남자의 걸음이 돌연 우뚝 멈추었다. 동시에 그 광경을 지켜보는 준의 얼굴도 조금 더 구겨졌다. 두 사람이 서로 이미 알고 있는 사이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그다지 좋은 관계는 아닌 것 같았다. 혜신이 저렇게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것을 보면.

“이야기 좀 하자.”

“싫어. 난 할 말 없어.”

“잠깐이면 돼.”

“난 할 말 없다니까!”

끈질긴 남자였다. 대놓고 거부를 하는데도 그는 돌아설 마음이 없어 보였다. 불편해 안절부절못하는 혜신의 모습을 보자 준도 더는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싫다고 하지 않습니까!”

불쑥 끼어든 낯선 목소리에 남자가 슬쩍 고개를 돌려 곁눈질로 준을 쳐다보았다.

“그쪽이 상관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는 위아래로 준을 훑어보더니 언짢은 듯 까칠한 목소리로 불퉁하게 대꾸했다.

“사장님이 불쾌해하시잖아요!”

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유 있어 보이는 그의 태도가 준의 화를 더욱 돋웠다.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 니. 라. 고. 요.”

남자도 쉬이 물러서지 않았다. 두 사람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곧 싸움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

카페 안을 감도는 살벌한 공기에 혜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갑작스러운 영윤의 등장에 완전히 넋을 놓고 있었다.

어제저녁 그런 이상한 꿈을 꾸어서일까?

마치 궁지에 몰린 쥐처럼 너무 당황하고 말았다. 꼭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침착하자.

혜신은 깊게 심호흡을 한 뒤 아까와는 다른 느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준이 씨 도움은 감사한데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녀는 방긋 웃으며 일단 준을 저지했다. 불의에 맞서는 정의의 사도라도 된 듯 그는 꽤 흥분상태였기에 좀 자제시킬 필요가 있었다.

“괜찮겠어요?”

“그럼요. 둘이 할 말이 있는데 잠시만 자리 좀 피해 주시겠어요?”

“혹시 무슨 일 있으면 곧바로 우리 가게로 와요. 아니면 소리라도 질러요. 내가 바로 달려올 테니까.”

영윤이 못 미더워 잠시 고민하던 준은 한참을 머뭇거리던 끝에 일부러 더 큰 소리로 당부를 하며 카페를 빠져나갔다. 그가 나가자 카페에는 혜신과 영윤 두 사람만 남았다.

딴짓을 하며 시선을 피하던 혜신은 영윤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섰다. 그를 대할 자신이 없어 무조건 피하고만 싶었는데 막상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덤덤했다.

“할 이야기가 뭔데.”

“대체 이유가 뭐야?”

쿵.

혜신은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영윤이 마지막까지 추궁해댔던 질문.

끝끝내 정확히 대답해 주지 못했다. 그래서 꿈에서까지 괴롭혔던 질문을 결국 현실에서 듣고 말았다.

“무슨 이유?”

혜신이 짐짓 태연한 척 되물었다.

“네가 날 떠난 이유.”

“신뢰가 깨졌으니까.”

“정말 그것뿐이야?”

영윤은 그녀의 눈에서 다른 이유라도 캘 듯 혜신의 까만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더 무슨 이유가 있겠어.”

혜신이 고개를 돌리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데 왜 나는 자꾸만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지?”

“나도 모르지. 근데 정말 다른 이유 없어.”

혜신이 다시 젖은 컵을 닦기 위해 마른행주를 들었다. 처음 영윤이 들어왔을 때와는 달리 그녀의 손길은 차분하고 편안했다. 그녀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영윤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