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이언 게이트

막다른 골목의 4층짜리 건물, 그곳엔 특이하게도 담쟁이덩굴 대신 기다란 상록수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덕분에 쌀쌀한 해 질 녘의 날씨에도 정확한 계절을 가늠하기 힘들어 보였다.

두 나무 사이로 보이는 4층 발코니에 서 있는 훤칠한 미남 역시 동네 분위기와는 어딘가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왜 안 오지…. 배고픔을 견딜 애가 아닌데.”

집 안에서 풍기는 음식 냄새에 잠시 고개를 돌렸던 그가 다시 밖을 바라봤다.

곧 그의 기다란 눈이 동그래진 건 기다리던 손님이 골목에 등장해서였다.

“그럼 그렇지!”

갑자기 화색이 돌며 분주해진 그는 손님을 부르려다 관둔 후 얼른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현관문을 자기 집처럼 열고 들어온 여자가 진짜 주인을 향해 손 인사를 건넸다.

“어서 와. 네가 언제까지 참나 했다.”

“참았다기보다… 사정이 있었어.”

“그래서 3일 동안 굶은 건 아니겠지?”

“대충 때웠어.”

그녀는 거실과 이어진 부엌에서 풍기는 샤부샤부 냄새에 코를 킁킁거리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왜 거기 앉아. 식탁으로 와!”

그의 말에 귀찮은 듯 천천히 일어나던 그녀가 거실을 두리번거렸다.

“덕지는 어딨어?”

“몰라, 오늘은 시크 모드야. 종일 어디 들어가서 자나 본데.”

슬쩍 미소를 지으며 식탁에 앉은 그녀는 역시라는 표정으로 상차림을 바라봤다.

“원 셰프! 내가 이 맛에 여길 안 올 수가 없다니까.”

재빨리 젓가락을 집은 그녀가 샤부샤부 재료를 국물에 투하했다.

“왠지 오늘은 네가 올 거 같더라고.”

“와야지 그럼. 나도 기운 바닥난 상태였어.”

“그러게…. 좀 야윈 거 같다?”

그가 어딘가 달라진 친구의 분위기에 두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그녀의 입에서 대답 대신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무슨 일 있었구나? 문자에 답도 없길래 눈치는 챘지만.”

“밥맛 떨어질라. 일단 좀 먹고.”

고기부터 건져 먹던 그녀는 이내 젓가락질 속도를 늦췄다.

맞은편에서 같이 먹던 그도 속도를 줄였다.

“어디 가서 깨작거리는 거 배워온 거야? 평소랑 다르게 왜 그래?”

그때 갑자기 식탁 옆에 등장한 고양이가 두 사람을 올려다봤다.

“어, 덕지야! 오랜만이다?”

밝게 웃던 그녀가 팔을 뻗었지만 시크한 고양이는 뒷걸음질 쳤다.

“밥 줄게.”

자리에서 일어난 집사의 움직임에 고양이도 그제야 배고픈 몸짓으로 뒤를 따랐다.

“덕지는 생각보다 많이 안 먹는데 왜 토실할까?”

그녀의 물음에 그는 사료를 밥그릇에 옮기며 피식 웃었다.

“글쎄, 중성화 때문이려나? 체격이 일반 고양이보다 좀 크기도 하고.”

“난 덕지의 저런 몸매가 좋더라.”

밥그릇에 얼굴을 파묻은 고양이의 ‘고등어’ 문양 털이 반질거렸다.

“너 정말 이름 잘 지었어. 덕지라니.”

그녀의 키득거림에 다시 식탁에 앉은 집사도 짓궂게 미소 지었다.

“코에 짜장이 덕지덕지!”

두 사람이 마주 보며 동시에 외치자 밥을 먹던 고양이가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

고양이 덕분에 한층 분위기가 밝아진 여자는 다시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남자도 기다렸다는 듯 따라 먹으며 그녀의 행동을 살폈다.

고양이는 어느새 거실 소파 위로 올라간 상태였다.

“저 봐. 많이 안 먹네, 덕지는.”

그녀의 말에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얼굴이 상한 이유를 말해봐.”

아까부터 그의 시선이 거슬렸던 그녀가 자기의 뺨을 손으로 살짝 두드렸다.

“그렇게 티 나?”

“그래! 널 알게 된 6개월 동안 매일 밥 먹은 사이로서.”

결국 젓가락을 내려놓은 그녀는 심문의 시간이 왔음을 느꼈다.

“얼마 전 때려치운 회사 때문에 후회해?”

“아니.”

“그럼 돈 문제 때문이야? 부업으로 블로그 마케팅인가 했었다며.”

“응, 월세 내고 먹고 살 정도.”

“백조 아닌 백조라서 의기소침한 건가?”

그녀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혹시, 오랜만에 가족들한테 연락 왔어?”

“아니, 여전히 콩가루야.”

“야, 한다비! 나랑 스무고개 하자는 거야?!”

화가 났다기보다 궁금증에 어쩔 줄 모르는 그의 반응에 그녀는 피식 웃으며 따지듯 말했다.

“원하빈 셰프님. 당신이야말로 지금껏 나랑 만나면서 너에 대한 얘기를 안 하셨잖아요.”

“뭐? 그래서 일부러 그러는 거야?”

어이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가 뒤로 물러나듯 의자에 몸을 기댔다.

“너도 나처럼 콩가루 집안 출신이라 이렇게 독거 생활하는 것까진 짐작하겠는데 말이야.”

“서른이면 콩가루 출신 아니어도 혼자 사는 거야.”

“그래, 그렇다 치고. 그럼 네가 요리 잘하고 덕지 집사라는 것 빼면 내가 아는 게 뭔데?”

그는 대답 없이 자신의 긴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아, 너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지? 그래 뇌섹남에 요섹남, 미남인 것까진 알지.”

“야, 그 정도만 알면 됐지. 얼마나 더 나에 대해 속속들이 얘기해야 하냐?”

“현재로선 네가 내 유일한 친구라 그런지 괜히 섭섭하네.”

그녀의 헛헛함이 그에게도 전해졌다.

“만난 지 6개월이야…. 속도의 문제지. 차차 얘기할 테니 진정해.”

***

두 사람 모두 식어버린 음식을 잠시 바라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때문에 나까지 입맛 떨어졌어. 그냥 디저트나 먹자.”

“미안, 그래도 샤부샤부 맛 좋더라. 역시 원 셰프야.”

“직접 육수 우려낸 거 아는구나?”

“물론이지.”

고양이가 엎드려 누운 소파에 앉은 다비가 어느새 깜깜해진 창밖을 내다봤다.

식탁을 대충 치운 하빈이 냉장고에 넣어둔 과일 케이크를 꺼냈다.

“케이크도 만드셨군. 하여간 내 취향을 잘 알아.”

그녀의 말에 어깨를 으쓱하던 그가 고급스러운 나무 쟁반 위의 디저트를 대령했다.

“밥은 거의 남겼으니까 이거라도 다 먹어봐.”

“네, 아빠.”

꿀밤 때리는 시늉을 하는 그를 보고 그녀는 피식 웃으며 포크를 집어들었다.

자다 깬 고양이가 하품을 한 후 테이블 위의 케이크와 소파에 앉은 두 남녀를 바라봤다.

“덕지랑은 좀 놀아주는 거야?”

“오늘은 숨어서 안 나오길래 놔뒀지.”

키위가 올라간 부분의 케이크를 포크로 잘라 한입에 넣은 그녀가 고양이의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그녀의 손길을 아주 잠깐 허락한 고양이는 덩치와는 달리 날렵한 몸짓으로 소파를 벗어났다.

“덕지 개냥이 모드 보고 싶다.”

“내일 오면 개냥이 돼 있을지도. 변덕쟁이라.”

“그래도 길고양이 출신치고 곁을 내줘서 예쁘다니까.”

“동감.”

창가의 캣타워 기둥에 앞발톱을 긁던 고양이는 위로 올라가지 않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덕지 몇 살이라 했지?”

“3살은 넘었을 거라는데. 6개월 전에 수의사가.”

“아, 나랑 처음 만났을 무렵 덕지와도 만난 거구나?”

“응.”

문득 하빈의 머릿속에 다비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

6개월 전 어느 늦은 밤, 뭔가를 찾는 것 같은 하빈이 한 좁은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살짝 당황한 그가 저편의 누군가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점점 반가운 표정으로 변했다.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던 한 젊은 여자가 그를 흘끗 쳐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빈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고양이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놀라셨다면 죄송해요. 저는 그냥 고양이가 밥 먹는 모습을 구경하려는 거였어요.”

“아, 네. 고양이한테 밥 주지 말라고 잔소리하는 사람인 줄 알고 긴장했는데….”

하빈이 고개를 저으며 도망도 치지 않고 허겁지겁 사료를 먹는 고양이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고양이 좋아하시나 봐요? 쟤가 나한테만 그러는 줄 알았는데 그쪽 보고도 가만히 있네요.”

“아, 고양이… 좋아하죠. 근데 이렇게 늦은 시간에 밥을 주시고 마음이 참 예쁘시네요.”

그는 언뜻 고양이를 닮은 그녀의 예쁘장한 얼굴을 쳐다보며 매혹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화제를 돌렸다.

“아, 이 동네 사세요?”

“네, 이 근처에 살아요.”

“저도 그런데.”

“그렇구나, 그러면 늘 이 시간쯤 고양이 밥 주시는 거예요?”

“아, 오늘은 외출해서 집에 돌아가는 길에 밥 준 거예요. 매일 주지는 못하고 있어요.”

“네, 매일 챙겨준다는 게 쉬운가요? 이렇게 가끔이라도 신경 써주는 것도 대단한 거죠.”

이어지는 그의 칭찬에 그녀가 마음의 빗장이 풀린 것처럼 수줍게 미소 지었다.

“저는 원하빈이에요. 우리 또래 같은데… 알고 지낼까요?”

그녀는 조금 당황한 듯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한다비예요. 갑자기 친구가 생긴 건가요?”

두 사람의 작은 웃음소리 때문인지 물을 마시던 고양이가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

다비는 조각 케이크의 반을 조금씩 먹어 치우다 포크를 내려놓았다.

“또 남겨?”

하빈의 물음에 포크를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케이크 위의 딸기를 툭툭 건드렸다.

“대개 깨작거리게 되는 이유가 있지. 몸이 진짜 어디 안 좋거나, 정신이 뭔가에 팔렸거나.”

그의 말에 그녀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예리하네.”

“둘 중 뭔데?”

그녀가 대답 없이 딸기만 씹어먹고 있었다.

“안색을 보면 몸이 안 좋을 수도 있을 거 같고, 직감적으로 후자인 듯하지만.”

갑자기 그는 자기의 손을 그녀의 이마에 갖다 댔다.

움찔하던 그녀는 그의 손을 치우며 얼굴을 찡그렸다.

“열도 조금 있는 거 같은데?”

“그래, 나 정신 팔렸다.”

“뭐에…?”

“정신 팔려서 몸도 안 좋아진 거 같아.”

그녀의 작은 한숨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너 또 스무고개 할래? 오늘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굴어?”

“나도 그럴만하니까 선뜻 말을 못 하는 거야.”

“알았어, 더는 안 물을게.”

소파에서 일어난 그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부엌으로 향했다.

“열 있으니까 보리차나 마셔라.”

***

미지근한 보리차가 담긴 유리컵을 건네받은 다비가 자기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열이 있나? 암튼….”

보리차를 단번에 마신 그녀가 옆에 서 있는 하빈을 올려다보며 컵을 내밀었다.

“고마워, 대신 뭐 하나만 약속해주면 무슨 일이 있었나 얘기할게.”

컵을 받아 든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옆자리에 앉았다.

“뭘 약속해줄까?”

“비웃거나 욕하지 말라고. 너 평소에 잘하듯 가만히 들어주기만 해.”

“음….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 비웃고 욕할만한 뭔 일을 벌인 모양이지?”

그의 얼굴에 퍼지는 얄미운 미소를 본 그녀는 주먹을 그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약속할 거야, 말 거야?”

그는 ‘OK’라는 손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조금 긴장이 풀리는 듯 그녀가 소파에 깊숙이 기댔다.

“나… 실은 3일 전 거의 죽을 뻔했어.”

“뭐?!”

“그래도 더 살 운명인지 죽기 직전에 구세주가 나타났지만.”

그녀는 인상 잔뜩 찌푸린 하빈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