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모든 것의 시작은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가졌던 작은 술자리 때문이었다.

오랜 연애를 끝으로 이별을 맞이했던 난, 술김에 그만 그와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어버렸다.

***

서울의 야경이 탁 트인 어느 한 레스토랑. 난 그곳에서 태준과 마주 앉았다.

반짝이는 은색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썰던 도중 문뜩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쳤다.

‘아… 죽여 버릴까…?’

내 월급 일주일 치와 맞먹는 이 고기 대신, 바로 맞은편에서 와인잔을 들던 그에게 나이프를 가져다 대고 싶다는 욕구가 치솟았다.

“아 참, 소을아. 애들 가르치는 건 좀 어때? 할만해??”

태준은 잔에 입술을 가져다 대는 듯 싶더니 급기야 나에게로 시선을 틀었다. 난 깜짝 놀라 흘겨보던 눈을 바르게 정리하며 퉁명스러운 말투로 답했다.

“그냥 뭐…. 똑같지.”

“…….”

왠지 냉랭해보이던 내 분위기를 어렴풋이 느낀 듯한 태준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아직 입에도 대지 않은 와인잔을 툭 하고 내려놓았다.

“…혹시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안 좋은데.”

그는 한쪽 손으로 자신의 턱을 받치며 걱정스러움이 잔뜩 묻어나는 얼굴로 날 빤히 주시했다.

“…….”

태준의 말에 난 아무 말 없이 손에 쥔 나이프와 포크를 무게감 있게 내려놓았다.

‘그래. 이젠 슬슬 끝내야해.’

지금 뱉으려는 이 말을 도저히 맨정신으론 할 수가 없을 것 같아 바로 옆에 놓인 붉은빛을 띠던 와인을 집어들었다.

내 태도가 극변하는 모습을 본 태준은 황당하다는 기색을 드러냈다. 그는 곧이어 턱을 받친 손을 풀어 반듯하게 허리를 펴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우리 헤어지자.”

난 술기운이 가시기전에 짧고도 명확한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그 말에 태준은 아까보다 더욱 커진 눈으로 날 바라봤다. 금방이라도 눈알의 뒷면이 드러날 정도였다.

“그…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갑자기 왜 그래?? 우리 곧 부모님도 뵙기로 했잖아….”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리던 그는 온전치 못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도 모르게 가느다란 웃음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나갔다.

‘정말 나랑 결혼까지 할 생각이었어?’

그런 짓을 하면서 나와의 미래를 꿈꾸다니… 정녕 이게 내가 알던 사람이 맞나 의심되었다.

“…너 수진이랑 잤지?”

잠깐의 뜸을 들이다 달싹이던 입술을 뗐다. 테이블 밑으로 모으고 있던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얼마 전 네일을 받은 탓에 손바닥은 점차 따가워졌다.

변명이라도 할 줄 알았건만…. 태준은 내 그 한마디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맞나 보네.’

사실 둘이 밤을 함께 보냈다는 것은 나도 모르던 사실이었다.

정황상 대충 넘겨짚어 물은 것뿐이었는데… 태준의 반응을 보니 내 추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진듯했다.

고개를 푹 떨군 그를 보며 느낀 건, 8년이란 시간이 참으로 허무하다는 것이었다.

***

일주일 전, 태준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앞 차가 후진을 하다 실수로 살짝 박은 정도였다.

직접적으로 부상을 입은 것은 아니었지만 차가 찌그리진 탓에 수리비를 받아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난 정확한 상황 확인을 위해 태준이 알바를 나간 사이 그의 차에 있던 블랙박스 메모리카드를 빼왔다.

자취방으로 올라가 가져온 노트북에 메모리카드를 연결해 확인하다 무언가의 싸늘함이 내 등 뒤에 닿았다.

“어…? 이거….”

20XX년 2월 17일. 함께 차박을 하러 가기로 했던 날이었지만 세차를 맡겨버렸다며 약속을 미뤘었다.

분명 그랬는데… 이상하게도 그날의 블랙박스 영상이 남아있다.

난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못한 채 마우스로 그 영상을 클릭했다.

블랙박스에 찍힌 곳은 다름 아닌 태준의 자취방이 있는 바로 이곳. 지하주차장이었다.

- 오빠. 소을 언니랑은 언제 정리할 거예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던 영상을 10초 정도 넘기자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바로 대학 후배인 수진의 목소리였다.

- 조금만 참아~ 8주년 선물만 받아내고 정리할게. 애가 순진해서 비싼 선물도 잘 사준단 말이야.

곧이어 무척이나 부드럽던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박혔다. 난 덜덜 떨려오는 손으로 입가를 틀어막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이를 악 물곤 영상을 20초 더 뒤로 넘겼다.

그러자 듣기 힘들 정도인 수진의 음성이 들려왔다. 영상에서 드러나진 않았지만 그 둘이 차 안에서 하고 있는 야릇한 행위들은 내 머릿속에 선연하게 그려졌다.

탁.

난 영상이 다 끝나기도 전에 노트북을 덮어버렸다. 아마 이대로 헤어지진 않았을 것이란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우웩…!!”

급기야 속이 미친 듯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곧장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 앞에 몸을 낮춰 모든 것을 토해냈다. 아침에 먹은 것이 없어서 그런지 속이 무척 쓰라렸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가 흐른 뒤 난 정신을 단단히 붙잡고는 그 영상을 내 노트북으로 옮긴 후, 메모리카드를 다시 태준의 차에 끼워뒀다.

매일 타고 다니던 차에서 둘이 입술을 맞대고, 항상 드나들던 그의 자취방에서 함께 나뒹굴었을 생각에 기분이 더러워졌다.

- 태준아. 나 볼일이 생겨서 먼저 집에 갈게. 이따 연락하자.

원래라면 태준이 알바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블랙박스를 확인했단 걸 사실대로 말하려 했었다.

하지만 사실을 알아버린 지금,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난 그에게 먼저 가겠다는 문자 하나만을 남기곤 구역질 나던 그곳을 빠져나왔다.

영상을 담아둔 노트북을 품에 꼭 안고서….

***

“야. 강소을.”

12시가 넘은 시각. 집 근처 편의점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난 소꿉친구인 원우를 불러냈다.

방금 막 샤워라도 하다가 온 건지 그의 머리카락은 물기를 가득 머금고 있던 상태였다.

“왔냐??”

난 안줏거리로 삼을 어묵탕과 오징어 다리를 테이블 위에 나란히 정돈해놨고, 오늘의 주인공인 캔맥주 여섯 캔을 일렬로 세웠다.

사실 원랜 일곱 캔이었지만, 한 캔은 그가 이곳에 도착하기 전 이미 비워둔 뒤였다.

오징어 다리 하나를 어금니로 잘근잘근 씹으며 다급히 뛰어오던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꽤나 바쁜 삶을 살고 있었던지라 우린 거의 몇 달만의 만남이었다.

“…너 괜찮냐? 왜 나한테 미리 말 안 했어?!”

원우는 못말린다는 듯 날 바라보더니 맞은편 자리에 앉아 걱정 반, 짜증 반을 같은 비율로 섞어놓은 듯한 말투로 물었다.

전화로 이미 자초지종을 설명한 상태였기에, 이젠 그의 긴 잔소리를 듣기만 하면 되는 처지였다.

태준이 바람을 피운다는 것을 알아버린지 시간이 좀 흘렀던 상태였지만 난 끝까지 입을 다물었었다.

굳이 걱정을 끼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런 판단을 내린 것이다.

가만히 듣기만 하긴 지루해 난 세워둔 맥주 하나를 내 앞으로 가져왔다.

역시 난 재미조차 없는 비싼 와인보단 편의점에서 소소하게 먹는 맥주가 취향에 더 가까웠다.

“너 내 말 듣고 있어?!!”

맥주캔을 입에 가져다 대려는 순간 커다란 손 하나가 캔의 입구를 막아섰다.

“아, 잘 듣고 있어~”

난 원우를 심드렁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건성건성 답했다.

8년 가까이 사귄 남자친구가 바람이 났는데 태연하기 그지없던 내가 이상했던 건지, 아니면 안쓰러웠던 건지 그는 측은한 얼굴을 드러냈다.

낯설던 원우의 이런 반응 탓에 괜스레 나 또한 울컥해져 눈물이 시야를 가렸다.

약한 모습은 보이기 싫었기에 난 급기야 고개를 푹 떨구며 맥주의 입구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제대로 잘 정리하고 온 거 맞아? 그 자식이 뭐래. 헤어지재??”

“…그냥~ 입 꾹 다물고 있길래 나가려고 일어서니까 붙잡더라? 무릎 한번 걷어 차주고 나왔지.”

폭풍같이 쏟아지던 원우의 물음에 난 어깨를 으스대며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하아. 다음에 걔랑 또 만날 일 있으면 나 불러. 혼자 가지 말고. 뭐, 일단 그런 일이 없어야겠지만.”

원우는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하며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무척이나 짜증이 나있는 듯했다.

“…고마워, 백원우.”

“뭐가?”

뜬금없는 내 감사 인사에 그는 떨궜던 고개를 들어 올려 가늘게 찢어진 눈으로 날 빤히 바라봤다.

“…그냥~ 네가 있어서 든든하다!!!”

난 맥주 캔을 높게 들어 올리며 경쾌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취했냐?’리고 말하는 듯한 그의 표정이 느껴져 난 더욱 큰 소리로 웃어댔다.

“허. 진짜 못 말린다니까….”

그제야 원우도 맥주 캔 하나를 집어 들어 축 처진 입꼬리를 옅게 들어 올렸다.

좀 진정된 그의 모습에 그제야 난 웃음을 멈출 수 있었다.

깊은 친구일수록 도움은 많이 받게 되지만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것은 어려워진다.

원래라면 그냥 웃어넘겼을 테지만… 상황도 그렇고, 왠지 오늘은 꼭 고맙다는 그 말을 원우에게 전하고 싶었다.

***

눈을 뜨자 따사로운 햇볕이 방 안으로 가득 들어왔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에 대자로 누워있던 나 자신의 모습을 봤을 땐 추하기 그지없었다.

“으으….”

골골거리며 일어나자 머리가 빙빙 돌아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올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 난 침대 밑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워들어 통화 목록에 들어가 태준의 이름을 찾았다.

“……어? 왜 없지?”

목록을 아무리 뒤져봐도 애타게 찾은 그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내 머릿속에 어제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곤 곧바로 깨달았다. 내가 태준과 헤어졌다는 사실을.

“아. 바로 차단했었지 참….”

습관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었다.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뻔했다.

난 벌렁거리던 심장을 부여집곤 침대에서 천천히 기어 내려갔다.

어찌 저찌 화장은 지우고 잔 건지 얼룩덜룩한 화장 솜 여러 개가 화장대 위에서 말라가고 있던 게 보였다.

취한 와중 할 건 다 했다는 생각에 세삼 나 자신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지끈거리던 머리를 콩콩 두드리며 방문을 열자 원우가 앞치마를 맨 채 부엌에서 국을 끓이던 게 보였다.

“일어났냐? 수저 놔. 밥 먹자.”

원우는 이곳에서 밥하는 게 익숙한 듯 찬장에서 냄비 받침을 찾아 식탁에 올려두곤 멍하니 서있던 날 바라보며 말했다.

“집에 안 갔네? 여기서 잤어??”

난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겨 수저를 놓곤 자리에 앉았다.

사실 그가 내 집에서 자고 가는 것은 꽤 흔한 일이었다. 대학 입학 후 좀 뜸해진 것일 뿐….

“거실에서 좀 자다가 아까 콩나물 사왔지. 넌 어떻게 냉장고에 든 게 없냐?? 밥은 해 먹냐? 맨날 시켜 먹지? 몸에 안 좋다고 그렇게 말을 해도….”

‘또 시작이네….’

잊을 만하면 시작되는 원우의 잔소리에 난 눈을 지그시 감으며 두 귀를 틀어막았다.

즉석밥을 데워 앞에 놓아주던 그는 내 모습을 보곤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드러낸다.

잠시 후, 원우는 다 끓인 콩나물국과 마트에서 파는 김치를 접시에 덜어 내 앞에 내어다 줬다.

그가 요리를 잘 한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았기에 입 안에선 벌써부터 군침이 돌아났다.

“아. 나 오늘 김태준 만나러 갈 거야.”

“……뭐?”

입맛을 다시며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던 콩나물국 쪽으로 수저를 담그려던 순간, 원우는 맞은편 자리에 앉아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난 미간을 깊게 좁히며 아까와는 다른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이건 허락이 아닌 통보에 가까웠다.

“만나서 뭐 하려고?”

말에 원우는 ‘알면서?’라고 말하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나보곤 너무 경각심이 없다며 툴툴거리던 그였지만 정작 경각심이 없던 사람은 원우 쪽에 더 가까웠다.

“…진짜 갈 거야?”

난 팔짱을 낀 채 현관 중문에 기대어 신발 끈을 단단하게 조여 묶던 원우에게 물었다.

사실 그가 아무것도 안 하길 바랐지만 이미 그의 마음은 확고한 듯 보였다.

“걱정 마. 싸우러 가는 거 아니니까.”

영 못마땅해 하는 내 표정에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걱정을 덜어주듯 안심하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럼 뭐 하러 가는데?”

“음… 손절 치러 가는 거라고 해두자.”

꽤나 유치한 단어 선택이었다.

손절이라는 말을 스물다섯이나 먹고 쓴다는 건 좀 부끄러웠다.

분명 어린 아이들이 쓰는 걸 보면 그저 귀엽기만 했는데, 원우가 그런 말을 입에 담으니 웃음이 절로 새어나왔다.

“좀 더 자다가 일하러 가.”

“어, 그래야지. 근데 넌 왜 숙취가 하나도 없냐? 우리 한 서너 캔 먹지 않았어?”

무심하듯 뱉은 그의 말에 난 크게 하품을 하며 물었다.

“무슨 소리야? 난 한 캔 밖에 안 마셨어. 너 혼자 여섯 캔 먹은 거야.”

원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술로 왜곡된 나의 기억을 살려내고야 말았다.

“너 끌고 오느라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내가 그럴 리 없다며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는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심지어는 정말 힘들었다는 점을 온 몸으로 표현하려고 어깨를 세게 두드리기까지 했다.

“야. 너 꺼져.”

“이따 연락할게.”

솟구치는 민망함에 난 단단한 주먹을 내보이며 원우를 죽일 듯 노려봤다.

그는 소꿉친구답게 쿨한 인사를 건넸다. 우린 서로에게 손조차 흔들어주지 않고 그대로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