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당신을 줘

“이런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네?”

이설은 서늘한 눈을 들어 제 앞을 막아선 건후를 노려보았다.

“그, 그게 아니라…….”

“흣!”

건후의 널따란 어깨 뒤로 남녀의 끈적한 신음이 쏟아졌다.

“네가 말하는 낭만이란 게 이런 거니?”

“그럴 리가요!”

이설이 건후를 따라 S 호텔 스위트룸에 들어선 것은 이곳이 벚꽃놀이 명당이라는 말을 믿어서가 아니다.

단지 시간 때울 곳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게 될 줄은 몰랐지만.

“여기서 보는 벚꽃이 예쁘다고 했지? 정말 그런지 확인해 볼까?”

사시사철 낭만을 찾는 건후가 이번엔 어떤 낭만을 찾아냈는지 직접 확인해야 했다. 그래야 더는 낭만 따위를 들먹이지 않을 테니.

허공을 가르는 손짓 하나에 건후가 체념한 듯 옆으로 물러섰다.

“새벽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는데…….”

들으라는 듯한 혼잣말이 들렸으나 이설은 가볍게 무시하며 침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벚꽃이 참 지저분하게 널려 있네.”

꽃잎이 나부끼는 봄의 한낮이었으나 한 몸처럼 엉겨 붙은 남녀에게 계절과 시간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그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본능적인 행위에 취해 있을 뿐이었다.

낯 뜨거운 광경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인간들은 늘 붙어먹지 못해 안달이지.”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벚꽃 머리 색을 한 남자는 여자를 탐하기 급급했다.

“흐읏.”

나신을 뱀처럼 타고 오르는 남자의 혀끝에 가냘픈 교성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 맞춰 가녀린 허리가 요염하게 들썩거렸다.

들끓는 욕정을 못 이긴 여자의 다리가 무방비하게 벌어지자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은밀한 곳에 깊숙이 얼굴을 묻었다.

녹아내리는 자극에 매달릴 곳이 필요해진 여자는 수풀 사이를 헤집는 남자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질세라 남자의 커다란 손이 풍만한 가슴을 우악스럽게 그러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딱딱하게 솟은 돌기가 음탕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등 뒤에서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설은 뒤쪽으로 힐끗 시선을 돌렸다.

“벚꽃 구경 한번 제대로 하나 보다?”

건후의 시선이 곧장 허공으로 치솟았다.

이설의 핀잔이 이어지는 사이 남자가 더운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이래도 그 자식 만나러 갈 거예요?”

남자의 입술은 제 것인지 여자의 것인지 모를 물기로 번들거렸다.

“당연하지.”

“이래도?”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남자가 굵게 부푼 욕망을 여자의 몸 안으로 사정없이 밀어 넣었다.

“읏!”

벌어진 여자의 입술 틈으로 얄팍한 신음이 튀어나왔다. 간신히 이성을 붙든 여자가 남자를 올려다보며 경고했다.

“지금 이 관계라도 유지하고 싶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누나가 딴 남자 만나러 간다는데 어떻게 그래!”

울분 섞인 남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여자는 조소를 머금으며 남자의 얼굴을 가까이 끌어왔다.

“딴 남자는 그 사람이 아니라 너야. 애초에 그 사람이 먼저라고. 알겠어?”

제 주제를 알라는 양 쳐다보는 시선에 남자의 담갈색 눈동자에 애증의 빛이 차올랐다. 그 눈을 마주하던 여자는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넌 그냥 나랑 지금처럼 즐기면 돼.”

“누나, 참 나쁘다.”

“나 나쁜 년인 거 알면서 만나는 거잖아. 안 그래?”

여자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는 대답 대신 힘차게 허리를 움직였다. 그렇게라도 그녀를 굴복시키고 싶다는 듯이.

“……그래. 흣, 착하지.”

어린아이를 달래듯 타이르는 음성과는 달리 쾌락에 젖은 손은 힘줄이 불거진 팔뚝을 움켜쥐느라 여념이 없었다.

여자의 손끝에 힘이 더해질수록 남자의 열망은 부피를 키우며 여자의 여린 속살을 더 깊숙이 점령했다.

“불륜 같은 걸까요?”

헐떡이는 숨소리 틈에 건후의 음성이 끼어들었다. 이설은 고개를 틀어 건후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벚꽃 구경은 역시 핑계였나 봐? 인간들 치정에 관심이 더 많은 걸 보면.”

“그럴 리가요.”

건후는 손사래 치며 극구 부인했으나 눈앞의 인간들에게 눈길이 쏠리는 것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그만 가자. 난 인간들 치정 따위는 관심 없으니까.”

“시간 되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걸요. 인간들 몸 섞는 일이야 곧 끝날 테니 원래 목적대로 벚꽃 구경이라도 하는 게…….”

“너의 낭만은 충분히 확인했어.”

아쉬워하는 건후를 뒤로한 채 이설은 차갑게 돌아섰다. 절정을 내달리는 남녀의 신음이 귓속을 따갑게 파고들었다.

***

크리스털처럼 반짝이는 건물과 조화를 이루는 길가의 벚나무들이 꽃잎을 비처럼 쏟아냈다.

“저 풍경이 머지않아 차가운 눈발처럼 느껴지겠지.”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벚꽃을 보며 호텔에서 못다 한 낭만에 젖어 있던 건후가 고개를 돌려 사수와 눈을 맞췄다.

“참 운이 좋아.”

“뭘 말입니까?”

이설은 눈앞의 광경을 초점 없이 바라보며 답했다.

“마지막 가는 길이 이토록 아름답잖아.”

“설마 지금 죽을 사람에게 운이 좋다고 하신 겁니까?”

그랬다. 그들은 얼마 후 저승으로 데려갈 망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승에서의 마지막이 오래도록 기억될지도 모르니까.”

이런 날 죽었다면 덜 비참했을까.

야속하게도 죽음의 기억은 이설의 가슴속에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차피 저승에 가면 다 잊을 텐데요.”

“과연 그럴까? 개중엔 잊지 못하는 인간도 있겠지.”

나처럼.

오래전 그날, 이설은 떨어지는 꽃잎처럼 힘없이 지고 말았다.

죽음의 순간 올려다본 하늘에는 푸른색 빛깔을 삼켜 버린 회색 구름이 짙은 어둠과 함께 굵은 비를 쏟아내고 있었다.

하염없이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자니 목이 탔다. 입을 벌려 빗물을 한 모금 삼키려는데 목구멍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비가 그토록 쏟아지는데도 갈증 하나 해소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았다. 그녀에게 있어 이승에서의 마지막 기억은 그렇듯 축축하고, 어둡고, 메마른 것이었다.

“에이, 그런 망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이 자신이라 말하고 싶지 않아 이설은 휴대폰에 띄워진 명부로 시선을 내렸다.

[도재하(陶在霞)

○○년(○○年) 을묘월(乙卯月) 경자일(庚子日) 십사시(十四時) 십삼분(十三分) 추락사(墜落死)]

“들어가자. 시간 다 됐어.”

이설은 건후와 함께 ‘도약 건설’이라고 적힌 건물로 들어섰다.

외관만큼이나 으리으리한 건물 내부는 두 개의 빌딩을 이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로비 중앙에서 꼭대기 층까지의 개방감이 상당했다. 속이 훤히 보이는 엘리베이터와 유리로 제작된 난간도 개방감을 넓히는 데 한몫하고 있었다.

로비 중앙에 멈춰 선 채 고개를 치켜들자 누군가 난간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5층 높이쯤 되는 그곳에 시선을 꽂은 건후가 모로 고개를 기울였다.

“남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봐도 여자 같은데요.”

“기다려. 아직 5분 남았어.”

건후가 미심쩍은 표정을 풀지 않는 사이, 이설은 난간 앞에 서 있는 여자 곁으로 이동했다. 뒤따라온 건후가 여자를 자세히 관찰했다.

“이 여자 울고 있는데요?”

이설도 이미 보아 알고 있었다. 슬프기보단 원통한 표정. 아마도 여자가 들여다보고 있는 휴대폰 속에 그 원인이 있을 터였다.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는 일이지만.

“남자는 아직이야?”

“네. 어? 혹시 저 남자 아닐까요?”

복도 끝에서 한 남자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눈에 띌 만큼 헌칠한 키에 명품 슈트로도 가리지 못한 완벽한 몸매까지.

훌륭하다 못해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한 남자의 자태는 인간의 삶이 참으로 덧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웠다. 완벽한 신체도 결국 죽으면 썩어 없어질 껍데기에 불과하니.

“저렇게 생긴 남자도 죽음 앞에선 어쩔 수 없네요.”

안타깝다는 듯 건후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사님은 저런 남자를 보면 흔들리지 않으십니까? 제가 여자였다면 골백번도 더 살려 줬을 텐데요.”

“난 여자이기 이전에 사자야.”

염라대왕의 명을 받아 망자를 인도하는 심부름꾼. 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일을 묵묵히 해온 이설이었다.

“결혼은 했을까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죽을 운명인데.”

인간을 향한 연민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이설을 보며 건후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는 사이, 울던 여자가 휴대폰 케이스에 끼워 둔 사진 한 장을 꺼냈다. 환한 미소를 매단 중년 여성과 눈앞의 여자가 함께 찍힌 사진이었다.

사진 속 중년 여성의 얼굴을 매만지던 여자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그녀를 위해 오늘도 참아내겠다고 다짐하는 듯했다.

그 순간, 여자의 손에서 사진이 빠져나갔다. 사진은 벚꽃처럼 흩날리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여자는 반사적으로 난간 너머로 손을 뻗었다.

바로 그때였다. 어느샌가 달려온 남자가 여자의 어깨를 붙든 것은.

황당한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어깨를 붙들린 여자가 남자를 사정없이 밀어낸 것이다. 흡사 몸싸움에 가까울 정도였다.

갑작스러운 반격에 무력하게 밀린 남자가 난간 쪽으로 등을 기댄 순간 커다란 몸이 허공에 붕 떠올렸다. 애석하게도 큰 키는 그의 안전을 지켜 주지 못했다.

남자의 몸이 미끄러지듯 난간을 넘었다. 마침내 때가 되었다. 이설이 그의 이름을 부를 때가.

그런데.

“어째서…….”

눈앞의 광경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설은 또렷한 감각 위로 시선을 내렸다. 마디가 굵은 남자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붙들고 있었다.

결단코 산 자는 저승사자를 만질 수 없건만.

또렷하게 시선을 맞춘 남자가 힘있게 입술을 벌렸다.

“날 살려. 어서!”

건후가 이설과 남자를 번갈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 이게 말이 됩니까?”

이설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붙들린 손목에 전해지는 뜨거운 체온이 머릿속을 어지럽힌 탓이었다.

남자의 다리는 철봉에 거꾸로 매달리듯 난간에 걸린 상태였다.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여자가 황급히 그의 발목을 끌어안고 안간힘을 썼다.

불행히도 그녀의 힘만으로는 남자를 구할 수 없다. 그의 운명이 그러했다.

그런데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친 의문이 있었다. 그가 자신의 손목을 쥔 것 또한 운명이 아닐까 하는.

이설이 망설이는 사이, 남자의 손이 슬며시 미끄러졌다. 위기를 느낀 남자가 손목을 으스러뜨릴 듯 움켜쥐었다.

인간 따위가 저승사자를 상대로 힘쓰는 모양새가 우스워 한쪽 입술 끝이 비틀렸다. 다시 입꼬리를 굳힌 것은 남자와 시선이 부딪쳤을 때였다.

살고자 하는 열망이 그득한 눈동자. 유난히도 짙은 새카만 동공에 이설의 얼굴이 또렷하게 맺혀 있었다.

“어떻게…….”

인간의 눈에 비치는 저승사자라니.

“으악! 재하 씨!”

아래쪽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날아왔다.

눈동자를 굴려 비명의 주인을 확인하자 익숙한 얼굴이 시선에 걸렸다. 몇 시간 전, 침대 위에서 신음하던 바로 그 여자였다.

“차사님, 저 여자…….”

이설은 알아보았다는 의미로 건후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딜 봐. 집중해!”

여자의 비명만큼이나 남자의 음성에도 날이 섰다.

“날 살리라고!”

목숨을 구걸해도 모자랄 판에 남자의 태도는 불쾌하리만큼 뻔뻔했다. 죽음의 문턱에서조차 자존심을 굽히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차사님, 시간 됐습니다. 어서 손 놓으시고 그자의 이름을 부르세요!”

“당겨. 어서!”

양쪽 고막에 각기 다른 목소리가 박혔다.

운명은 어느 편에 서고 싶은 걸까.

답이 무엇이든 저승사자인 이설이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면 그뿐.

그런데 왜.

이설은 남자에게서 좀처럼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더 정확히는 그의 눈동자에 선명히 박혀 있는 제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남자가 안간힘을 쓰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발.”

살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이 고고한 자존심을 꺾는 순간이었다.

“차사님, 시간이…….”

울먹이는 건후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잠시.

우르르 쾅쾅!

마른하늘에 뇌성이 울려 퍼졌다. 남자가 죽을 시각을 넘기고 만 것이다.

“결국, 이렇게 될 운명이었나.”

살 운명이라면 살릴 수밖에.

나지막이 혼잣말을 읊조린 이설은 남자의 손을 힘껏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들어 올려진 남자가 뒤로 물러서는 이설의 몸을 그대로 덮치며 쓰러졌다. 뒤늦게 손을 놓았으나 이미 일은 벌어진 뒤였다.

맞닿은 가슴 위로 쿵쿵, 남자의 심장 박동이 전해졌다. 그처럼 자신도 살아 있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