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

여느 때처럼 밝은 미소로 출근한 예슬은 오자마자 마주친 사원들에게 인사하기 바빴다.

늘 항상 그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 중 하나가 바로 이 기분 좋은 인사였다.

“예슬 씨도 좋은 아침!”

휘어진 듯한 웃음을 지으며 살갑게 웃는 예슬의 활기찬 인사에 기운 없던 직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기분 좋은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예슬은 이럴 때마다 늘 보람을 느꼈다.

‘오늘 하루 시작 이상 무!’

덩달아 행복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걷던 예슬은 문득 어딘가에 멈춰섰다. 당당하고 기똥차던 그녀의 걸음이 멈춰선 곳은 다름 아닌 사장실 앞.

아침인사 코스의 최대 난제, 그것은 다름 아닌 ‘사장님께 인사하기’이다.

인사성 좋은 예슬이 가장 버거워 하는 코스 중 하나였다. 아니, 싫어하는 코스라고 할까.

이곳 제일그룹의 사장이자, 회장님의 손자 강지환 사장.

예슬은 그런 그를 비서로서 2년이나 보좌했으나 여전히 적응할 수 없는 멀고도 먼 존재이기도 한 사람이었다. 그에 대한 소문은 다양했다.

잘생기고 훤칠한 외모, 게다가 젊고 돈 많은, 기업가의 후계자. 이러한 타이틀로 인해 그를 흠모하는 여사원들이 꽤나 많았다.

그러나 그를 가까이서 2년간 비서 역할을 수행한 예슬은 도무지 그러한 타이틀에 단 1퍼센트도 공감할 수 없었다.

물론 잘생기고 키 크고 돈 많은 영 앤 리치인 건 인정했다. 멀리서 봐도, 가까이서 봐도 그는 잘생긴 건 확실했으니까.

그런데 제 상사는 그 모든 요인들을 다 사라지게 하는 감정 따위 없는 냉혈한에 일중독, 그리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 그가 얼마나 차가운가? 말 한마디에 차가운 살얼음판을 기어가듯 한기가 흐르는 기분이었다.

예슬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녀가 오늘도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사장실 문을 똑똑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인사는 크게 할수록 더 좋다고 엄마가 그랬었다.

예슬은 당찬 인사와 함께 오늘은 절대 이 인간 앞에서 기죽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챙겨온 서류를 들고 지환의 앞에 섰다.

그런 그녀의 앞에, 무심하게 결재 서류를 확인하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부터 각을 딱딱 잰 듯 완벽한 저 얼굴과 옷태. 맘에 안 들긴 하지만 잘생기긴 여간 잘생긴 게 아니었다.

역시 그에게선 대답 따위 들려오지 않았다.

기대조차 안했다는 듯 예슬은 이어서 서류를 내밀었다. 그러자 지환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다시.”

“네?”

“여기, 서식 다 틀렸어.”

그의 말에 예슬이 서둘러 그가 짚은 부분을 살펴보았다.

소름이 돋도록 정확히 그가 딱 짚은 부분의 서식이 몽땅 오타가 나 있었다.

예슬은 민망함에 고개를 서류를 서둘러 집어 들며 얼굴을 붉혔다. 태연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서늘한 냉소를 짓는 그의 얼굴이 예슬의 시야에 들어왔다.

얄미웠다. 세상에서 제일. 어떻게 내려놓은 지 단 3초도 안 돼서 결점을 발견한단 말인가.

그때, 지환이 결재 서류를 옆쪽으로 치워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어 말했다.

“윤 비서.”

“네, 사장님.”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체 이런 사소한 것까지 내가 언제까지 지적해야 하지?”

그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자신은 늘 그에게 혼나고, 그는 늘 자신을 혼냈다.

이유는 뻔했다.

그저 그는 너무 완벽한 상사였고, 자신은 일을 못하는 비서에 불과했다.

늘 예슬은 그에게 혼나기만 하는 자신이 싫었지만, 노력해도 자꾸 틀리고 실수하는 자신이 답답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예슬이 한 자 한자 힘을 주어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자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하던 지환이 한숨을 내쉬었다.

“윤 비서.”

“네.”

예슬이 고개를 들어 그의 대답을 기다리듯 바라보았다.

그러자 지환이 이내 고개를 돌리며 닫았던 입을 열었다.

“…됐어, 이만 나가봐.”

사장실 밖으로 나온 예슬은 아침부터 혼이 나는 바람에 꿀꿀해진 기분을 대신하기 위해 자리로 돌아와 휴대폰을 켰다.

그리곤 카카오톡 메시지 창을 열어 ‘내 자기’라고 입력된 남자친구에게 답장을 보내었다.

늘 그에게 혼날 때면 생각나는 사람이라곤 남자친구인 유혁준. 얘밖에 없다.

그럴 때면 늘 혁준은 바로바로 그녀에게 답장을 보내며 스윗한 위로와 함께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그것이 제 직장생활의 유일한 낙이다.

예슬은 바로 앞 사장실에서 보이지 않도록 몰래 메시지를 보내었다.

‘자기야, 나 오늘 또 혼났어.’

입력을 마친 예슬이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웃음 지었다.

남자친구가 있다는 존재만으로도 이렇게나 삶에 활력이 될 수 있구나를 깨닫는 순간이 바로 이런 때다.

늘 혁준은 자신이 폰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칼답을 보내왔었다.

“어? 이상하네? 오늘따라 바쁜가?”

예슬은 보통 때라면 바로 답장이 왔어야 할 그에게서 톡이 오지 않자 의아해 하며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그러나 1자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머물러 있었다.

“오늘은 위로 좀 바로 해주지. 나 힘든데.”

예슬은 작게 한숨을 뱉었다.

그리곤 중얼거리다가 제 책상에 자리한 물티슈를 뽑아 들며 새어나오려던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내었다.

누가 보지 않도록 재빨리 닦아낸 예슬이 여전히 신경 쓰이는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러던 그 때였다.

“업무에 집중 안 하고 뭐합니까, 윤 비서?”

“엄마야!”

쾅.

예슬이 화들짝 놀라며 커다란 소리와 함께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물티슈로 눈물 자국을 닦던 도중, 갑작스레 제게 들이닥친 것도 모자라 얼굴을 들이민 사람이 다름 아닌 악마 같은 제 상사, 강지환이었다.

그는 여전히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큰 키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파리한 낯빛을 한 예슬이 코앞에서 들려온 제 상사의 음성에 놀란 나머지 엉덩이를 찧고 말았던 것이었다.

“사, 사장님!”

두 눈이 동그랗게 말려 커다래진 예슬은 제 코 앞에서 닿은 그의 음성을 잊을 수 없다는 듯 당황했다.

처음이었다. 제 상사와 이토록 가까이서 얘기를 한 적은 없었다.

분명 사장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을 그가 왜, 하필 지금!

“뭐하냐고 물었는데.”

지환이 토끼눈을 뜬 예슬에게 건조한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그의 낮은 음성에 순간 정신이 번쩍 든 예슬이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녀는 바싹 마른 제 입술을 부딪치며 그에게 횡설수설 말을 늘어뜨리기 시작했다.

“그게, 잠시 눈이 아파서 닦고 있었습니다.”

예슬이 대충 핑곗거리를 지어내며 들키지 않도록 눈을 깜빡이며 둘러대었다.

그리곤 긴장한 낯빛으로 말을 마친 후 눈을 살며시 들어 올리며 지환의 눈치를 살폈다.

행여나 훌쩍거렸다는 걸 들켰다간 정말 제대로 ‘쪽팔릴 일’이다.

사장한테 혼나고 우는 비서라는 타이틀로 찍히고 싶진 않은 그녀였다.

“그거 말고.”

“예?”

그녀의 대답에 지환이 차가운 낯빛을 한 채 뜨거운 숨을 뱉었다.

“윤 비서가 누구랑 톡을 하건 상관없지만 내 회사에서 나를 보좌하는 내 비서가 일에 지장을 주는 건 질색입니다.”

그가 차갑게 말을 마치며 예슬의 두 눈을 응시했다.

가만히 지환의 말을 듣던 예슬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어깃장을 놓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혼날까 무섭고 여전히 무서운 존재인 사장이지만, 할 말은 해야 할 것 같은 그녀였다.

“죄송하지만 사장님.”

내가 늘 이렇게 당하고만 살 줄 알아?

예슬은 눈에 힘을 꾸욱 주며 부릅떴다.

지환이 그녀의 단호한 어조에 이만 돌아서려다 멈추어 섰다.

그리곤 뒤돌아 긴장한 모습의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예슬이 이어서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업무시간이지만 제가 누구와 톡을 하건, 제 사생활… 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사장님께서 이렇게까지 제한을 두실 사항은 아닌 것… 같지만 업무에 지장을 끼친 점은 죄송합니다….”

예슬은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은 기분을 느꼈지만 입술을 꾹 누르며 참아내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사이 침샘이 다 마르다 못해 타들어 가는 기분이 든다.

그때, 지환의 차가운 눈이 그녀의 뜨거운 볼에 닿았다.

“……!”

그 서늘한 눈길에 예슬의 동공이 커질 대로 커졌다.

심장이 곤두박질치다 못해 내던져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그녀와 달리 덤덤한 눈빛의 지환은 평온한 눈길로 그녀를 응시하더니, 숨결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로 사이를 좁히기 시작했다.

“너무 떨면서 말하진 말고.”

예슬은 얼어붙을 것 같은 그의 말에 얼떨떨했다.

얼떨떨한 표정의 예슬을 가만히 응시하던 지환이 그녀를 건조한 눈빛으로 훑다가 이내

돌아서며 말했다.

“이따 결재 서류 모조리 챙겨서 내 방으로 오도록.”

그가 자리를 떠나고, 홀로 남겨진 예슬은 긴장이 풀리자 떨리던 다리에 힘이 풀리며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저 시베리아 벌판 같은 남자가 지금 나더러 뭐라는 거야?

“오늘 아침부터 일진이 안 좋아.”

예슬은 떨리는 손으로 제 의자를 책상으로 바짝 끌어당기며 훌쩍 거리는 눈물을 닦아내었다.

그리곤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1자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일이나 집중하자 일!”

굳게 다짐하듯 힘주어 말하던 예슬은 다시 서류 속으로 파묻혔다.

곧 그녀에게 다가올 폭풍우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책상 위에 놓인 예슬의 모래시계가 거꾸로 뒤집어졌다.

***

“사장님, 곧 회장님께서 도착하신다고 합니다.”

날카로운 종잇장을 만지작거리던 지환에게 정적을 깨고 그의 비서 기현이 말했다.

지환은 그제야 제 손목에 차인 시계를 설핏 응시하며 낮은 저음으로 말했다.

“예상 도착 시간은?”

“10분 후입니다.”

지환은 생각보다 이른 강 회장의 도착에 놀라며 의자에 너른 등을 붙이며 기대었다.

강 회장의 방문은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방문이었기에 지환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자신의 할아버지이자, 제일그룹의 회장.

불편하지만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 바로 자신의 할아버지였다.

“그동안 눈이라도 붙여야겠군.”

지환은 잠시 피곤한 눈을 감았다.

그는 업무를 쉬지 않고 보는 성격 탓에 12시간째 잠도 자지 않아 몹시 피곤한 상태였다.

게다가 할아버지를 맞이하려면 피곤함이 더욱 커질 테니 10분이라도 자두는 것이 나았다.

사실 그를 피곤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할아버지 강 회장이 몇 달 전, 자신에게 제안한 3가지 때문이었다.

처음 들었을 땐 도저히 말이 안 된다 싶었다.

그러나 태연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이 3가지를 지키면 제일그룹을 주겠다 제안하는 강 회장의 표정을 보고야 깨달았다.

강 회장은 정말 그 3가지를 지키지 않으면 자신에게 제일그룹을 물려주지 않을 셈이었다는 것을.

“귀찮게.”

지환은 눈을 감고 그 생각에 미치자 퍽 화가 난듯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기업을 두고 그런 제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지환은 제 손을 꽈악 쥐었다. 그러자 그의 손등에 난 힘줄이 잔뜩 부풀어 오르며 그의 심경을 대변하듯 곳곳에서 솟구쳤다.

“하….”

그가 제 이마에 긴 손가락 끝을 대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대로 평화롭게 제일 그룹을 거머쥘 수 있게 될 줄 알았다.

회사 일이 좋았던 것도 있지만 단 한 가지, 오로지 복수심.

그 일념 하나로 이 회사를 물려받기 위해 용을 써왔던 자신이었다.

그러나 바로 어제, 자신의 할아버지가 내민 조건을 듣고 그의 계획에 브레이크가 밟혀버렸다.

자신이 제시한 3가지 조건을 지키라는 말, 더군다나 그 3가지는 현재의 그가 지킬 수 없는 터무니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결혼이라….”

그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낮게 읊조렸다.

3가지 조건 중 하나이자, 가장 해내고 싶지 않은 장벽.

그렇다고 해서 선을 봐서 아무나 결혼할 수도 없었다.

단순한 정략결혼이나 계약 결혼과 같은 쇼윈도 결혼을 할 수조차 없도록 자신의 할아버지 단단히 조건을 걸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강 회장은 그 답을 들으러 오고 있다.

남은 시간은 10분.

어떻게 하면 강 회장에게 만족스러운 해답을 내 놓을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강 회장에게 답을 줘야 하는 몇 달간, 업무와 회사일로 바빠 생각도 하기 싫었던 그였다.

첫 번째 조건을 오늘까지 강 회장에게 답을 보여주기로 약속한 그였다.

하지만 그 대상조차 정하지 못한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