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백산 여우골 인수산 자락 아래 서양식 건축 집이 비밀스럽게 자리하고 있다. 붉은 벽돌로 견고하게 지어진 이 집의 이름은 레드스톤 하우스다. 19세기 후반 조선 시대, 영국의 선교사 가족이 머물던 집이었다. 3층으로 된 외벽은 지나온 세월을 말해 주듯 검게 변색되고 장미 넝쿨이 2층까지 덮고 있다.

마을에서 가장 안쪽, 가장 높은 언덕에 위치한 그 집 앞마당에 서면, 드문드문한 20여 채의 집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뒷마당에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산자락까지 뻗친 넓은 호수가 있다. 밤이 되면 달빛에 반사되어 은은한 빛을 내고, 풍성한 금빛 털을 가진 여우가 내려와 목을 축였다. 그러다 조그만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번뜩이는 야광 눈으로 전방을 주시하곤 재빠른 몸놀림으로 흔적을 감추었다. 지금은 한 마리도 볼 수 없는 시대지만, 옛날에는 그런 여우들이 수십 수백 마리가 존재했었다고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짓궂은 마을 아이들은 그 집을 드라큘라의 성, 혹은 귀신의 집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가끔 구름이 달빛을 가린 캄캄한 밤에, 어른들의 눈을 피해 호기심으로 가득한 대여섯 명이 플래시 불빛에 의지해 무리를 지어 길이 아닌 잡풀이 무성한 언덕을 올라 앞마당 근처에 나타나곤 했다. 바위와 나무 뒤에 숨어 플래시 불빛으로 대문과 담벼락이 없는 그 집을 탐색하다 삼각형 지붕 아래 동그란 창에 불빛이 짠 켜지면, 다들 혼비백산해 올라온 길을 정신없이 달려 내려갔다.

단영은 창문을 열어 도망가는 초등학생들을 보고 깔깔대고 웃었다.

“겁쟁이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어서 단영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창문을 닫았다. 눈처럼 하얀 백구, 희동이가 오도카니 앉아 고개를 들고 단영을 올려다보았다. 쫑긋 선 두 귀, 역삼각형 얼굴, 까만 두 눈과 까만 코, 허벅지까지 오는 키. 단영은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두 손으로 희동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희동아, 쟤들 너무 웃기지?”

희동이 선홍색 혀로 단영의 손등을 가볍게 핥았다. 투명하게 빛나는 두 눈으로 단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무엇이 웃기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뒤에서 느껴지는 검은 형체의 등장에 단영이 불쾌함을 느꼈다. 희동을 만지던 손을 떨어트리고 일어섰다.

가슴을 단단하게 여민 옷깃, 발목을 덮는 검은색 긴 도포, 용 문양이 새겨진 붉은색 가죽 허리띠, 왼쪽 허리춤에 차고 있는 장검, 어깨 아래로 내려오는 머리를 검은 띠로 반묶음을 한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 전장을 누비는 무사의 모습을 가진 그는 사신, 주룡이었다. 달갑지 않은 그의 등장에 단영은 얼굴에 어린 미소를 지우고 창문을 향해 등을 돌렸다. 방금 전까지 단영을 바라보던 희동이 사라졌다. 어둠에 잠긴 집 밖은 춥고 괴괴한 기운만이 감돌았다. 다만 검푸른 하늘에 초승달과 새벽별이 밝게 떠 있을 뿐이었다.

“생전의 기억을 소환한 모양이구나.”

“왜요? 그러면 안 되나요?”

“이승의 끈을 놓아 버리지 못할망정……, 부질없는 짓을 저질렀구나.”

주룡이 한심하다는 듯 얇은 입술을 비틀었다. 그가 단영을 향해 턱을 들어 올리자, 그녀가 입은 네이비색 트레이닝 바지와 윗옷이 소복으로 바뀌었다. 웨이브가 들어간 긴 머리는 흰 끈으로 묶인 생머리로 바뀌었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변해 버린 모습에 단영은 화가 났다. 이 씨! 단숨에 주룡을 노려보았다.

“네 주제를 알아야지.”

주룡이 약 올리듯 말했다.

“나도 알아요. 안다고요.”

“그럼 갈 테냐? 저승으로?”

단영은 냉정함을 되찾았다.

“아니요! 그렇다고 간다는 뜻은 아니었어요.”

단영은 새초롬하게 대꾸했다. 그러곤 주룡을 지나쳐 다락방을 나왔다. 2층으로 내려가 자신을 방으로 갔다. 방을 가로질러 발코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산과 맞닿아 있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달빛에 반사되어 은은하게 빛나는 호수의 표면 위로 잉어 한 마리가 입으로 물을 뿜으면서 튀어 올랐다.

단영은 버선발로 난간 위로 올라섰다. 발을 딛고 선 난간의 폭이 좁은데도 아슬아슬함이라곤 없었다. 무심히 올라선 그녀가 초승달과 새벽별이 뜬 밤하늘을 한참 바라보니 이내 큰 숨을 들이쉬고 호수를 향해 몸을 던졌다.

풍덩!

크게 물보라가 일었다. 그녀의 몸이 깊은 심연 아래로 차츰차츰 가라앉았다. 그녀는 호수 속에서 숨을 쉴 필요도, 숨을 참을 필요도 없었다. 그냥 엄마의 자궁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편안함과 안정감만 느끼면 되었다. 은색의 붕어 떼가 둥글게 몸을 만 채 침잠해 있는 그녀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 물살에 그녀 몸이 한 바퀴 돌았다.

아직은 갈 수 없어. 내가 왜, 어떻게 죽었는지 알기 전까지는. 절대로.

단영. 그녀는 죽은 자였다.

#2화

단영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살갗이 비칠 정도로 소복이 푹 젖어 몸에 달라붙었다. 호수 밖으로 나오자, 소복과 머리칼을 적신 물이 수만 개의 물방울로 방울져 나와 호수로 도로 스며들었다. 순식간에 마른 단영의 소복은 풍성해졌고 긴 생머리도 젖은 적이 없었던 듯 등 뒤에서 찰랑거렸다. 주룡은 팔짱을 끼고 서서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행동을 지켜봤다.

“대체 호수로 뛰어내리는 이유가 무엇이냐?”

“방해받기 싫으니까요.”

“…….”

“편안하고 조용해서 좋아요. 숨 쉴 필요도 없고, 이렇게 옷도 바로 말릴 수 있잖아요. 귀신이 되어서 좋은 점이라면 이거 하나인 것 같아요. 이 기분 모르죠? 당신은 인간인 적이 없으니까.”

단영은 팔짱을 끼고 꼿꼿하게 선 주룡 곁을 유유히 지나갔다. 주룡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무표정한 차가움, 그대로였다. 주룡은 사신이다. 언제부터랄 것 없이 원래부터 지금까지 그래 왔다. 감정은 없고, 죽은 자를 찾아내어 저승으로 데려가는 임무만이 있는 사신. 한 치의 실수 없이 해 오던 임무. 그러나 그는 지금 헤매는 중이었다.

처음 만난 단영은 자신은 절대 죽지 않았다고 했다가 그렇다면 죽은 이유를 알기 전까지 저승으로 갈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원래 영혼들은 자신들이 죽지 않았다고 주장하기 바쁘기에, 주룡은 단영의 말을 무시하고 붉은 오라를 묶어 강제로 데려가려 했다. 그러나 어디서 나온 건지 알 수 없는 영력으로 그녀는 붉은 오라를 풀어 버렸다. 주룡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스러움이 어렸던 상황이었다. 그 정도의 힘을 발휘할 만큼 원한이 깊은 혼이란 걸 짐작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주룡은 여기저기 잘도 도망치는 단영을 결계 안에 가뒀다. 임시방편이었지만 효과는 있었다. 적어도 찾아다니는 수고를 덜 수 있었으니까.

결계 안 세상의 하늘은 항상 초승달과 새벽별이 떠 있는 깜깜한 새벽이었다. 사선으로 깎아지른 듯한 산자락 아래 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고, 바로 그 호수 옆에는 붉은 벽돌로 견고하게 지어진 이국적인 집 한 채가 자리하고 있었다. 단영은 그 집에서 산 사람처럼 행동했다. 요리해서 음식을 먹고, 차를 끓여 마시고, 음악을 듣고, 잠을 자는 등. 주룡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주방으로 간 단영은 홍차를 마시기 위해 주전자에 생수를 담아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물이 끓는 동안 식탁 앞에 앉아 턱을 괴고 생각했다. 과연 결계를 뚫고 이 집에 들어올 자가 있을까. 그래서 자신의 하소연을 듣고 죽음의 원인을 밝혀 줄 수 있을까.

“그래 가지고 어느 세월에 한을 풀겠느냐? 벌써 한 달이 되어 간다.”

“그러니까 날 여기서 내보내 주면 되잖아요. 내가 직접 나서서 알아보면 훨씬 빠를 텐데.”

“귀신 주제에 이승을 누비겠다고? 또 악귀들 눈에 띄어서 잡아먹히면 어쩌려고.”

주룡의 말에 단영은 힘이 빠져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쉬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벼랑 끝에 선 것처럼 눈앞이 아찔하다. 죽고 나서 얼마 뒤였을 것이다.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른 채 거리를 배회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눈앞에 보이는 공간이 깜깜해지더니, 뿌연 안개가 서리고 반딧불이 날아다니는 구불구불한 숲길이 나타났다. 그 길 끝에서 이리로 오라는 속삭이는 음성이 느껴졌다. 그러나 단영은 그 길로 가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예감에 돌아섰다. 후에 그녀 앞에 세 번이나 똑같은 길이 펼쳐졌지만 역시나 가지 않았다.

달도 별도 구름에 가려진 깊은 밤이었다. 아스팔트 길은 축축했고 차가운 공기에서 비릿한 비 냄새가 났다. 소름이 돋을 정도의 한기가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이상한 기분과 함께 몸을 떨면서 단영은 목적지가 없는 걸음을 재촉했다. 거리의 상점은 모두 문을 닫았고, 불 꺼진 집들의 창문과 대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그녀를 둘러싼 세상 전부가 시커먼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 끔찍한 악몽 속 같았다. 그때였다. 그녀 뒤에서 까만 연기가 서서히 뻗쳐 왔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들.

죽은 사람이야, 죽은 사람. 귀신이다, 우리 같은 귀신. 한이 많구나, 원한이 아주 깊어. 젊은 처녀야.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단영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집채만 한 새까만 연기가 그녀 앞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연기 속에는 옛날 한복을 입고 죽은 자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장칼에 목이 잘리고, 목매어 혀가 길게 늘어지고, 두 눈이 뽑히고, 짐승에게 얼굴이 물어뜯기고, 등등. 끔찍하게 죽은 귀신들이 한가득했다.

“너도 이리 와, 우리와 함께 가자.”

단영은 냅다 뛰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도 괴물 같은 이들에서 멀어지지도 않고, 그 자리가 그 자리였다.

“하하, 저 애 좀 봐. 혹시 자기가 죽은 줄 모르는 거 아냐?”

상투가 잘려 머리가 산발인 얼굴이 파란 남자 귀신이 고개를 길게 빼고 냄새를 킁킁 맡았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처녀 귀신이야. 음기가 아주 가득해. 나이는 한 스물대여섯? 저 귀신의 기를 빨아 먹으면 우리 영력이 훨씬 더 강해질 거야. 그러면 더 오래 이승에서 인간들의 영혼을 더럽힐 수 있다.”

이번엔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 묶은 현시대의 어린 여자아이가 나왔다.

“저승으로 가지 않은 걸 보면 우리처럼 이승에서의 원한이 아주 깊은 것 같은데. 얘, 너의 기운을 우리에게 줘. 그리고 너도 이리 와서 여기에 껴. 우리도 너와 같은 존재야. 어서.”

단영은 담벼락 아래 쪼그리고 앉았다. 연기 속의 귀신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여차하면 단영이 연기 속으로 빨려 들어갈 기세였다. 그 위험한 순간에 나타난 게 주룡이었다. 검은색 장화, 발목을 덮은 긴 검은색 도포. 얼굴을 가린 단영의 팔 사이로 그의 모습이 보였다. 주룡의 등장에 연기 덩어리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사신이다! 사신이야!”

“왜 하필 주룡이야.”

“우린 이제 끝장인 건가.”

웅성웅성. 자기들끼리 겁에 질려 난리를 피웠다. 주룡은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도망가려는 악귀들을 향해 왼쪽 허리에 차고 있는 장검을 뽑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검이 붉게 빛나더니 커다란 붉은 용이 포효하며 나왔다. 공중에서 한 바퀴 원을 그리고 악귀들을 향해 돌진해 자신의 몸으로 거대한 연기를 단번에 휘감았다. 악귀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용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기운에 악귀들이 타고 있었다. 붉은 용은 몸에 더욱 힘을 주어 악귀들을 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기 덩어리가 펑 하고 터져 사라졌다. 제 할 일을 마친 붉은 용이 검을 향해 유유히 날아갔다. 검 속으로 들어가 붉은빛을 번쩍 내고는 이내 검과 한 몸이 되었다. 주룡은 검을 검집에 넣고 땅으로 내려왔다. 그때까지 쪼그려 앉아 있던 단영을 돌아보았다.

“넌 누구냐? 왜 이승을 떠돌고 있지?”

“나, 난 몰라요.”

“숲길을 보지 못했어?”

“숲길…….”

“그래, 거기가 저승으로 가는 길이다.”

“하지만 난 죽지 않은걸요.”

“그따위 어리광은 나한테 안 통해.”

주룡이 단영의 팔을 잡았다. 저승의 문을 열기 위해 다른 팔을 허공으로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런데 갑자기 단영이 주룡의 팔을 뿌리쳤다.

“진짜라구!”

단영이 소리쳤다. 이윽고 난데없이 번개가 침과 동시에 주룡의 몸이 뒤로 밀렸다. 그 틈에 단영은 주룡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 반대로 몸을 돌려 힘껏 내달렸다. 당황한 주룡은 멀어지는 단영의 뒷모습을 쳐다볼 뿐이었다. 자신이 날고 있다는 걸 안 건 주룡에게서 도망친 지 한참 지나서였다. 주룡이 쫓아오는지 보기 위해 뒤를 슬쩍 돌아보았는데, 산과 나무와 건물 들이 그녀 발아래 있었던 것이다. 뺨을 스치는 공기의 흐름이 빨랐다. 너무 놀라 떨어질 뻔했으나 이내 자신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중심을 잡아 자유자재로 날았다.

단영은 끓는 물을 머그잔에 붓고 자신의 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그녀가 호수로 몸을 던졌던 테라스 난간에 기대섰다. 인수산에서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에 그녀의 풍성한 치맛자락이 머리카락과 함께 나부꼈다. 밤하늘에 떠 있는 초승달과 새벽별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나직이 소원을 빌어 보았다. 부디 자신의 집을 두드릴 수 있는 그 누군가를 빨리 보내달라고. 그 순간 달과 별이 유난히 반짝이고 빛났다.

#3화

제우는 흠칫 놀라며 잠에서 깼다. 몇 번 눈을 깜박이자 직사각형의 미닫이 창문과 회색 벽지, 서랍장과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자신이 유기견 보호소센터의 당직실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틀 전에 제우는 동물병원의 휴무를 이용해 친한 대학 선배가 근무하는 의양의 유기견 보호센터에 왔다. 서울에서 기차로 두 시간 떨어진 의양은 선배의 집이자 고향이었다. 주변에 산이 높고 강이 흐르고 꽃향기를 머금은 바람이 부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두 달 전부터인가 제우는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끔씩 잊을만 하면 반복대는 꿈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꿈 내용은 별것 없었다. 어떤 이층집에서 소복을 입고 흰 끈으로 긴 생머리를 낮게 묶은 모르는 여인이 2층 난간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가 호수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내리는 것이었다. 매번 그 장면만 나오는 이상한 꿈이었다. 검푸른 하늘에 사선으로 깎아지른 산자락, 샛노란 초승달과 붉은빛을 발하는 새벽별. 꿈에서 깨고 나면 처음엔 잠깐 기분이 멍했다가 조용했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이 아는 누군가가 큰 봉변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안 좋았다. 눈가에 살짝 눈물마저 고였다. 아무리 슬픈 영화를 봐도 운 적이 없어 감정이 메말랐다고 친구들로부터 늘 야유를 사는 그였는데. 제우는 정말 요상한 일이 자신에게 벌어졌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어디 아픈가. 병원에 가서 상담이라도 받아야 하나. 고민이 깊어지자 또다시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제우는 옆자리를 더듬어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03:40. 제우는 얕은 한숨을 쉬었다. 의양에 오면 달라질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았다. 서울에서 그랬던 것처럼 같은 시간에 깨고 있으니.

병이 생긴 걸까.

제우는 억지로 잠을 청하는 대신에 패딩 점퍼를 입었다. 바람도 쐴 겸 보호소에 입소해 있는 유기견들이 잘 있는지 살피러 방을 나섰다.

오후 두 시. 번식장에서 여러 번 새끼를 출산했을 거라 추정되는, 입소한 지 보름 된 암컷 몰티즈 세 마리의 중성화 수술이 끝났다. 양손에서 고약한 소독약 냄새가 진동했다. 싱크대에서 꼼꼼히 비누칠을 하고 센 물줄기에 박박 문질러 씻었다. 선배도 제우 옆에 서서 손을 씻었다.

“너 어째 오늘 눈이 퀭하다, 어제 잠 못 잤어?”

“요즘 좀 그래.”

“왜? 서울 생활 힘들어? 2차 병원이라 일이 빡세?”

“아냐, 병원 일은 좋아. 선배도 알잖아, 수의사는 내 천직인 거.”

“근데 얼굴색이 왜 별로야?”

“나도 모르겠어.”

제우는 머쓱하게 선배 얼굴을 쳐다보고는 돌아서서 건조기에 손을 말리고 밖으로 나왔다. 초봄의 기운을 머금은 산바람이 불어왔다. 제우의 이마 위에서 4월의 햇살이 눈부시게 빛났다. 그의 연한 파란색 수의사복이 바람에 나부꼈다.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 푹 자고 싶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