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처음 만난 싸가지

LA에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

비즈니스석에 앉아 처연히 창가를 바라보는 재희의 모습은 환상 그 자체였다.

남자인 주제에 여성의 아름다움까지 품은 욕심 가득한 외모에, 흐린 밤하늘 별과 같이 촉촉이 젖은 눈동자. 가끔 창으로 흐릿하게 비치는 그 눈동자는, 승무원들로 하여금 때에 맞지 않는 모성애를 느끼게 할 정도였다.

“저 고객, 아직 아무것도 안 먹었지?”

“물 한 모금도 안 마셨어.”

“물도 못 마실 정도로 안 좋은 일이 생겨서 급히 귀국하는 건 가봐. 어쩌면 좋니.”

“아무래도 이별 같은데? 하아, 내 가슴이 다 아프다. 얼마나 사랑했으면…….”

“소설 쓰지 마라. 솔직히 저 얼굴로 미쳤다고 차이겠냐?”

그녀들은 틈이 날 때마다 재희를 훔쳐보며 수군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긴 비행 동안 식사는 물론, 잠자는 것조차 볼 수 없는 슬픈 이별의 주인공이 등장했으니 관심을 쏠릴 수밖에.

재희가 처음 등장했을 땐, 남자인 주제에 어쩜 저리 예쁠 수 있냐는 호들갑들뿐이었다. 쌍꺼풀 하나 없음에도 저렇게 러블리한 남자는 박보검 이후 처음이라고. 또, 어지간한 남자들은 주눅 들어서 저 옆을 지나가지도 못하겠다고.

하지만 이후 기내식을 모조리 거부하고 처연히 창가만 바라보는 그를 보며, 그녀들은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되었다.

“입꼬리만 살짝 올려도 빛이 날 것 같은데…….”

그중 제일 마음이 쓰였던 것은 한 번도 웃지 않던 저 쓸쓸한 입술.

“저 남자, 이 긴 시간 동안 아무것도 안 먹었어. 안 되겠다, 뭐라도 좀 가져다줘야지. 더는 내가 못 견디겠어.”

결국, 참다못한 승무원 하나가 따로 챙겨온 간식을 가득 담아 재희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불룩한 간식 봉투를 보이며 조심히 말을 건넸다.

“고객님, 기내식이 불편하시면 이거라도 좀 드셔보시겠어요?”

그녀는 슬며시 턱을 들어 저를 올려다보는 재희를 향해 다시 한번 환한 미소를 그려 올렸다. 그러자 곧, 간절한 마음에 응답이라도 하듯 비행 중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그의 무거운 입술이 그녀를 향해 천천히 열었다.

“이게 뭐죠?”

시원한 물이 흐르고,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는 넓은 동굴에서나 울릴법한 시원한 울림.

‘목소리도 미쳤구나.’

행여 꾹 닫은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예쁜 외모와는 상반된 상남자의 목소리는 아닐까 살짝 염려했는데, 이건 기대 이상이었다.

그녀는 듣기만 해도 상쾌해지는 그의 목소리에 한껏 신이 나, 예쁜 말과 함께 손에 들고 있던 간식거리를 내밀었다.

“기내식이 물릴 때 승무원들끼리 먹는 간식거리입니다. 단것들이라 입맛이 돌 거예요.”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보통의 경우 ‘감사합니다.’라는 인사와 함께 간식을 받거나, 보통이 아닌 경우라도 ‘죄송합니다. 지금은 단 것이 당기지 않네요.’ 등의 예의 바른 거절이 나올 텐데, 그는 보통의 반응도, 보통이 아닌 반응도 없이 그저 간식 봉투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

“……?”

갑작스러운 어색한 기류에 그녀는 인위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자 재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쪽이 먹는 간식을 저한테 제공한다는 거죠? 사적으로.”

“네, 입맛이 없어 보이셔서요. 괜찮으시다면 이거라도…….”

“참나, 난 또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네.”

“네?”

다시 입을 연 것에 안도하며 친절한 대답을 하는 것도 잠시, 재희는 매정할 만큼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싹둑 잘라냈다.

“그쪽이 건넨 간식 쪼가리가 이곳에서 제공하는 기내식보다 값어치가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까?”

“네…… 에?”

“와인 한잔 마시지 않고 있는 내가, 그깟 과자봉지에 손을 댈 거라는 경솔한 생각은 어디서 시작된 거냔 말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그제야 지금껏 그렸던 상상의 나래가 한참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긴 비행 동안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는 남자의 독한 성격을, 그저 예쁜 외모에 반해 순정만화로 단정한 것이 잘못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그저 내가 걱정돼서?”

“네, 걱정이…….”

“걱정이 아니라 작업이겠지.”

“네?”

“가서 일이나 봐요. 기껏 승무원 간식 쪼가리에 설레는 싸구려 아니니까.”

“……네.”

재희는 볼일 끝났으면 꺼지라는 듯 고개를 획 돌렸다. 뭘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호통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는 쌀쌀함에 몸을 떨며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잠시 후, 밀려드는 모멸감으로 인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아닌 말로, 비행 내도록 쫄쫄 굶고 있는 저에게 선의를 베푼 이를 이따위로 얕잡아 대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의 태도인가? 그리고 뭐? 승무원 간식에 설레는 싸구려?!

“진짜 어이가 없네.”

그녀는 후끈대는 열을 식히려 손가락을 모아 연신 부채질을 해댔다.

***

이른 아침, 태균은 재희의 입국 시간이 한 시간이나 남아있었음에도 이미 공항에 도착해 게이트 번호를 재차 확인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째서인지 많이 초조해 보였다.

시간이 흘러 출국장으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자 그는 목을 길게 빼, 빠져나오는 사람들을 일일이 확인했다. 그러던 그때.

“이거 받아.”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투박한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찰나의 순간, 태균은 본능적으로 몇 걸음 옆에 재희가 있음을 직감했다.

“어? 어, 그래!”

아니나 다를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커다란 캐리어가 허벅지를 툭 하고 때렸다. 태균은 얼른 캐리어를 잡아 재희의 곁으로 달려갔다.

“와, 왔어? 휴가는 재미있었고?”

“참 재미있었지. 차라리 집에 있을 걸,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

재희와 눈이 마주치자 차가운 기운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언제나 그랬듯 태균은 재희의 언짢은 표정 앞에 가만히 고개를 숙여야 했다.

“열 시간을 넘게 날아야 하는데 눕지도 못하는 비즈니스석을 끊어 놨더라?”

“미안, 그런데 어쩔 수 없었어. 갑자기 일정을 바꾸는 통에 날짜에 맞는 표가 있어야지. 그것도 겨우 구한 거야.”

“그럼 처음부터 일등석은 없다고 말을 했어야지, 내가 왜 LA에서 충전한 소중한 에너지를 고작 한국에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소비해야 해? 휴가가 일회용 용기야? 끝나자마자 이렇게 김빠져도 돼?”

이에, 태균은.

‘일등석이 없다는 말을 했으면? 잘도 알겠다며 일정을 바꿨겠다. 잔소리만 두 배가 됐겠지!!’

라는 말은 딱 가슴까지만, 그러니까 기껏 목구멍 아래까지도 올라오지 못한 채 그저.

“미안해…….”

라는 말만 소심하게 흘려보낼 뿐이었다.

“비지니스석에 앉아있으니까 과자 부스러기나 건네받는 거 아니야? 쪽팔리게.”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됐어, 말하기도 민망해. 차 대기 시켜놨지?”

“지금 바로 타면 돼.”

“회사로 가자.”

“집으로 안 가고?”

“가는 길에 오디션 지원 데모 파일 담아 온 거 있으면 좀 틀어 봐.”

재희는 묻는 말의 대답 대신 제 할 말만 툭툭 던졌다. 그런 그가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태균은, 알겠다는 말과 함께 서둘러 재희의 뒤꽁무니를 쫓았다.

음반 기획사인 슈퍼 소울의 총괄 프로듀서이자 대표이사 강재희.

그는 여자들도 울고 갈 예쁜 외모에 호리호리한 체격과 훤칠한 키, 거기에 엄청난 재력까지 타고난 최고의 남자다.

하지만 이렇게 제대로 갖추고 태어난 그에게도 딱 하나 없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인격이었다. 한마디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싸가지가 없는 놈이라는 것.

‘벌써부터 숨이 막힌다…….’

등 주름 하나 없는 슈트를 보니 그 긴 거리를 비행하면서 의자에 몸 한번 기대지 않은 모양이었다. 대체 얼마큼의 성질머리를 가지고 있어야 저렇게 지나치게 꼿꼿할 수 있을까.

재희와 알고 지낸 지 벌써 10년이 가까워지지만, 아직도 턱하고 숨이 막힐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서둘러 차에 오른 태균은, 뒷좌석에 재희가 앉자마자 시동을 걸고 USB를 꺼내 카오디오에 연결했다.

“데모 온 것 중에 힙합도 있어. 요즘 힙합이 대세이긴 한 모양이야. 우리 회사엔 힙합 가수도 없는데.”

“틀어 봐.”

“응.”

곧 투박한 비트가 울려 퍼지더니, 제법 괜찮은 남자의 랩핑이 흘러나왔다.

-체킷! 이름은 들어봤나? 내 이름으로 말하자면~

“다음 노래.”

재희의 성에 차지 않는 것이 문제였지만.

“별로야?”

“스네어만 살짝 뒤로 빼면 다 트랩이야?”

“비트는 그렇다 해도, 랩도 별로야? 이름이라도 한번 들어 보지 그래?”

“별로야. 다음 곡 틀어.”

“다음부터는 전부 밴드 음악인데…….”

“누가 랩 음악 듣고 싶데?”

“으, 응.”

곧바로 다음 노래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재희는 이 역시 단 5초 만에 종료시켰다.

“누가 요즘 첫마디에 정직하게 쓰리 코드를 써? 수준 알만하다. 다음.”

이쯤 되자 태균도 더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저 재희가 시키는 대로 다음 곡을 재생할 뿐.

“이제 한 곡 남았어.”

“응.”

그렇게 고작 1분 만에 다섯 곡을 흘려보낸 뒤, 마지막 곡이 재생되었다.

-보고 싶다, 네가 정말. 내 하루에 절반이 그리움이야.

전주 없이 여성의 노랫말이 흘러나오더니, 뒤이어 이펙터를 가득 입힌 기타 선율이 더해졌다.

‘이것도 망했군.’

태균은 이 또한 5초를 넘기지 못할 것을 직감했다.

보컬은 들어 줄만 했으나, 이어지는 기타가 재희에게 퇴짜를 맞기 딱이었기 때문이다.

저렴한 톤에 딱히 세련되지도 못한 연주. 재희는 몇 푼 아끼려고 소중한 음악에 싸구려 엔지니어링을 하는 가난한 음악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랑을 하고 이별을 했어. 행복했던 시간만큼 참 많이 울었었는데. 너무 보고 싶어.

그런데 어째서인지 1절이 끝나가는 동안에도 묵묵히 노래를 듣고 있었다.

태균은 운전대에 달린 종료 버튼에 엄지를 올려놓고, 룸미러로 재희의 눈치를 살폈다. 피곤한 비행으로 인해 혹시 잠이라도 들었나 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재희는 못마땅한 얼굴로 여전히 음악을 듣고 있었다.

“형.”

“응, 재희야, 왜?”

“이 여자, 솔로야?”

“아니, 팀이야.”

“그럼 기타는 여자가 치는 게 아니네?”

“그렇겠지?”

“기타가 참 어이없다.”

“이것도 별로구나?”

“구성은 괜찮은데 사운드가 왜 저 모양이야? 도대체 마인드가 얼마나 싸구려길래 저따위 공간계를 집어넣고 데모를 만들 생각을 해? 평생 싸구려 음악이나 할 생각인가?”

“그렇지? 하하.”

역시나였다.

재희는 이 노래가 좋아서 계속 듣고 있었던 게 아니라,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1절까지나 듣고 있었던 거였다.

“꺼.”

“그래, 알았어.”

“보컬이 좀 아깝긴 하다.”

다만 보컬이 아깝다며 나직이 흘려보낸 아쉬움까진 운전 중이던 태균이 들을 수 없었다. 태균은 그저 대부분의 소속 가수가 계약 종료된 이 시점에, 신인 제작이 급하다는 것을 재희에게 각인시켜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연습생 중에 잘하는 애들 뽑아서 일단 팀이라도 만들면 안 될까?”

“안 돼. 아직 완벽한 애들이 없어.”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잖아? 이러다 적자 나겠어.”

“다른 회사 애들이랑 비빌 정도는 돼야지. 지금 애들 내보내면 잘 만들어봐야 행사용이야. 아이돌은 조금 있다 만들기로 하고, 우선은 대중성 있는 밴드를 찾아서 세상 밖으로 꺼내야 해. 그게 현재로선 더 빨리 돈 버는 길이야.”

그럼 눈 좀 낮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다 또다시 가슴 언저리에서 꽉 막혔다.

태균은 늘 그랬듯이 하고 싶은 말은 꺼내보지도 못하고, ‘그래, 네 말이 맞아.’라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재희야. 그런데 휴가 일정은 왜 빨리 당긴 거야? 일이라도 생겼어?”

“엄마가 빨리 들어오래.”

“어머니가? 왜?”

“몰라. 또 갱년기 터지셨겠지.”

“그래? 한국 도착했다고 전화는 드렸어?”

“회사에 계실 거야.”

“뭐? 회사?!”

청천벽력이었다.

재희만으로도 벅찬데 어머니라니. 그것도 아침에. 그것도 공복에!

“굳이 회사까진 오실 필요 있어? 오시기…… 불편…… 하실…… 텐데.”

태균은 잔뜩 그늘진 얼굴로, 애써 제 마음을 숨기며 물었다.

그 마음을 알 리 없는 재희는 한숨 잘 기세로 뒷좌석에 기대 아예 눈을 감고 있었다.

“알게 뭐야. 좀 잘 테니까 회사 도착하면 깨워.”

“비행기에서는 전혀 못 잔 거야? 비즈니스석이라서?”

“요즘 가끔 꾸는 악몽이 있어서 아무 곳에서나 못 자.”

“악몽?”

“그런 게 있어. 도착할 때까지 깨우지 마.”

“응…….”

운전대를 잡은 태균의 손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02. 반복되는 꿈

아들 강재희와 엄마 김자영 여사의 만남은 그 시작부터 살벌했다.

“싫어요.”

“싫다고? 왜!?”

“엄마가 만나라고 하는 여자면 뻔할 테니까요.”

“뻔하지 않아!”

어쩌다 사장실까지 따라 들어와 관계도 없는 기싸움에 뒤섞인 태균은 좌불안석이다. 그냥 나가 있으라고 하면 될 것을, 금방이면 된다며 굳이 모자간의 싸움을 구경하게 만드는 건 무슨 심보인지.

“민영광 국회의원 알지? 그분 딸이 우리 호텔에 식사하러 왔다가 널 보고 반했다지 뭐니? 그래서 만든 자린데 어떻게 뻔해? 국회의원 딸이야. 국회의원!”

“그러니까, 그깟 선이나 보라고 제 꿀 같은 휴가를 이틀이나 앞당기신 거군요.”

“그깟 선?! 얘가 지금 이게 얼마나 금쪽같은 기회인데 그깟 이래?”

“안 해요.”

“내일 우리 호텔 레스토랑 VIP룸이야. 잔말 말고 머리라도 하고 와.”

“분명 안 한다고 말씀드렸어요.”

상대방이 뭐라고 하든 말든 하고 싶은 말만 밀어붙이는 것이, 한눈에 봐도 그들은 가족이었다.

태균은 점점 살벌해지는 분위기에 새우등이 터질까 봐, 슬그머니 엉덩이를 들어 빠져나갈 타이밍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김 피디! 김 피디도 이게 그깟 선으로 보여?”

태균을 향해 따지듯 묻는 자영을 보니, 안타깝게도 새우등이 터질 위기는 벌써 다가온 것 같았다.

“아…… 그게, 그러니까…….”

태균은 힐끗 눈을 굴려 재희를 바라봤다. 역시나 그도 태균을 묵직하게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