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년 전.'''''' "아버지, 저 그 사람이랑 헤어져요."'' "……."'' "죄송해요……."'' 정 교수는 딸의 담담한 말에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몇 달 새 반쪽이 된 딸의 얼굴은 지난 시련에 상반될 정도로 오히려 처연해만 보여서 아버지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 정 교수는 고개를 수그리고 바닥에 앉아 있는 딸을 남겨 둔 채 조용히 방을 나왔다. 가을밤, 한기가 스며든 하늘은 어둠이 깊어서 바라보는 시선을 아득하게 하고 있었다. 위를 올려다 보며 담배연기를 불어내는 그의 얼굴에 뿌옇게 시름이 내려앉았다.'' 끝까지 반대했어야 했는데. 무릇 인연이란 어울리는 사람과 맺어야 하는 것을, 순리를 간과해 딸애가 고통 받는다는 자책에 윤 교수는 애가 끓었다.'' 10년 전, 대학생이던 혜원이 사귀는 사람이라고 처음으로 집에 남자를 데려왔을 때 정 교수는 대견하고 서운한 맘이 동시에 들었었다. '' 중학교 때 어미를 잃고 홀로된 딸아이에게 갖는, 정 교수의 부정(父情)은 애틋하고 특별했다. 혜원은 조용하고 얌전한 아이였다. 어른 말씀을 거역할 줄 모르는 예절바르고 단정한 성품이었고, 아버지에겐 속 깊고 다정한 딸이었다. 그렇듯 언제나 아이로만 생각했던 딸애가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남자친구를 소개하니 정 교수는 거의 충격이다 싶게 깜짝 놀랐다. 게다가 상대는 국내 초일류 기업의 외아들이었다.'' 신호그룹. 대한민국의 경제를 이끈다 하는 10대 기업 중에서도 단연 최고에 있는 이 재벌회사는 사람들에게 있어 경영왕조로 통했다. 60년이 넘는 연혁 동안 기업이 이루어 온 성과는 신화로 표현될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취급업종만 해도 30여 개 가까이 되었고, 오래 전 타계한 창업주의 자손들이 분야를 나누어 경영했는데 그 중 핵심이 되는 전자 쪽을 유일하게 여자 회장이 맡고 있었다. '' 모두들 그녀를 철의여인이라고 불렀다. 환갑을 바라보는 그녀는 창업주의 고명딸이었고 20년 전 남편 사후 홀로 사업을 떠맡아 명실상부, 신호의 최고 실세로 부상했다. 강신영 회장. 그녀가 바로 혜원의 남자친구 최인서의 모친이었다.'' 아무튼 혜원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안의 자제와 사귄다니, 정 교수는 덜커덕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아직 어린 연인들이기에 좋은 만남에서 그치겠거니 하고 물러서서 관망하는 것을 택했다. 그랬는데, 불과 1년 후 두 사람은 결혼을 선언했다. '' 정 교수는 선뜻 허락할 수 없었다. 남들은 재벌 사위를 얻어 좋겠다며 부러워했지만 정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제 아무리 딸애의 연인이 반듯하고 믿음직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아버지의 마음은 딸이 어려운 집안에 시집가 맘 고생하느니 차라리 부족하지만 평범한 집안에서 보통의 행복을 누리며 살기를 바람했다. 더더군다나 강 회장의 반대는 말할 수 없이 거세기만 해서 정 교수 역시 그런 집안에 딸을 내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인서는 두 달 만에 어머니를 굴복시키고 혜원과의 결혼을 완성해 냈다. 끔찍이도 사랑하는 두 사람이었기에 그들을 막기란 불가능해서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최인서의 고집이 어머니 강 회장을 능가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힘들게 이뤄 낸 결혼이어서 행복은 달콤하기만 해 보였다. 자주 친정에 찾아오지는 못하지만 일주일에 몇 차례 있는 딸의 전화에 정 교수도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혜원은 언제나 밝은 목소리로 모든 게 다 좋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아버지의 안부만 챙겼다. 그러던 것이, 정 교수의 생일 날 이제까지의 실상이 빠짐없이 드러났다. 결혼식 이후 6개월 만에 친정을 찾은 혜원의 모습은 이전의 그녀였다고 알아보기 힘들게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정 교수는 바짝 말라 광대뼈와 쇄골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딸의 외양에 속이 문드러지고 말았다. 얼마나 맘 고생이 심했으면 혜원에게서는 빛과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참으로 눈부시게 화사한 아이였는데.'' 그러면서도 혜원은 안 그런 척, 부단히도 아버지를 안심시키려 애썼다. 정 교수는 차마 아픈 맘을 내색할 수가 없어 화를 꾹 눌러 참았다. 안 그랬다간 딸애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아서 겁이 났다. 또한 사업 때문에 바빠서 저녁 늦게야 처가에 들른 사위에게도 좋지 않은 심기를 드러낼 수 없었다. 다만 평소에 안 하던 술을 과하게 들이키며 정 교수는 인서에게 자신이 부족해서 미안하다고 서글프게 웃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났고, 혜원이 마침내 아이를 가졌다. 아이의 존재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여태까지 업신여겨지고 밀려나 있던 혜원의 입지가 완전한 최씨 집안 사람으로 단번에 굳어졌다. 하지만 그녀에게 삶은 관대하지 않았다.'''''' 친정으로 온지 열흘 동안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줄 알았던 혜원은 아침이면 숲길을 산책하기도 하고, 아버지의 원예작물을 돌보기도 하는 등 평상시와 다름없는 일과를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교수는 너무 고요한 딸이 불안스레 느껴졌다.'' 지방대학의 원예과 교수로 일주일에 세 번 강의를 나가는 정 교수는 강의가 없는 화요일, 분재를 손질하다 딸과 점심식사를 같이하기 위해 정오 즈음 화원을 나왔다. 비닐하우스 문 앞에서 목장갑을 벗어 막 옷의 먼지를 털고 있을 때였다. 저편 신작로에 검정색 세단이 정차하는 게 보였다. 인서였다. '' 정 교수는 동작을 멈추고 사위가 다가오는 것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짙은 회색 양복에 언제나 빈틈없어 보이는 최인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장인 앞에 멈춰 섰지만 정 교수는 사위에게서 풍기는 축축한 기운을 감지했다. '' 괴롭겠지. 네 녀석도 괴롭겠지. 이럴 땐 소리라도 쳐야 하는 거야. 아프면 고함이라도 질러야지.'' "왔나?"'' "아버님……."''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어. 가을도 없이 겨울이 올 모양이야."'' 정 교수는 선문답 같은 말로 인사를 받으며 사위를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 인서는 곧 그를 뒤따랐고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전원의 낙엽길을 걸었다.'' "이제……, 서로 편안해져."'' 정 교수의 말에 인서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자네도 저 애 놔 주고 자유로워지게. 그게 서로를 위한 일이야."'' "혜원이가……, 그만두고 싶다던가요?"'' 목이 콱 막혀 겨우 끌어올린 소리처럼 음성이 탁했다. 하지만 정 교수는 모른 척, 먼 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앤……, 이미 오래 전에 마음을 정리했어. 그러니 자네도 그만……."'' "아니요, 못합니다. 정말……, 못합니다, 아버님. 죄송합니다. 그 사람, 데려가겠습니다."'' 인서는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단호하게 말하고 홱 몸을 돌렸다. 집 쪽으로 멀어져 가는 사위의 뒷모습을 보며 정 교수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 이제 서로를 위해 헤어지라는 그의 말에 사위는 안 한다고 하지 않았다. 못한다고 말했다. 안 한다 가 아니라 못한다고.'' 정 교수는 인서를 받아들이기엔 이미 내면이 텅 비어버려 어떠한 반응도 나타낼 수 없는 혜원의 상태에 마음이 아팠다.'''''' 집 앞에 다다른 인서는 가슴이 조이는 걸 겨우 진정시키고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주방에선 무슨 요리를 하는지 시원한 국물 냄새가 거실로 흘러 들어 있었다. 아내가 점심을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인서는 갑자기 왈칵 그리움이 밀려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아버지, 어서 손 씻고 오세요. 해물칼국수 했어요. 국수 불기 전에…… 어, 당신!"'' 주방에서 나온 그녀는 역시나 놀란 것 같았다. 여전히 창백한 얼굴은 이마의 실핏줄이 퍼렇게 드러날 정도로 투명했고, 눈은 커다랗게 치켜 떠진 채 손으로 앞치마 자락을 그러쥐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충격이 무심함 속으로 사라졌다.'' "언제 왔어요? 아직 점심 전이면 식사하고 가요. 칼국수했어요."'' 어쩌면 저리도 태연할 수 있는지. 인서는 그가 금방이라도 갈 것처럼 단정지어 말하는 그녀가 괘씸했다. 아니, 열흘 전 일방적으로 결별을 선언하고 집을 나가서, 다시 만난 지금 이토록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대하는 그녀가 두려웠다. 하지만 그는 약해진 마음과 달리 강압적으로 내뱉었다.'' "짐 챙겨. 바로 출발할 거야. 계속 지체할 시간 없어."'' "나, 안 가요."'' 지독히도 차분하게 내놓는 말이었다. 인서는 얼굴 근육에 경련이 일면서 한참동안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그가 양보한다는 투로 말했다.'' "그럼 일주일만 더 있다 와. 그 이상은 안 돼." '' "안 간다고 했잖아요. 헤어져요. 안 살아요. 당신과, 더는 안 살고 싶어요."'' 돌아서는 그의 어깨가 움찔했다. 하지만 들은 체도 않고 인서는 힘 주어 다시 말했다.'' "일주일이야. 그때, 다시 올게."'' "싫다구요! 못 들었어요? 싫다구요, 싫어! 당신의 돈 냄새를 참을 수가 없어. 알아? 질렸다구! 당신 어머니의 모진 성질도 끔찍하고, 당신 집안의 위선도 지긋지긋해. 흑, 당신들 때문이야. 흐흑, 당신들 때문에 내 아이가 죽었어. 내 아이 살려 내! 우혁이 살려 내란 말야! 살려 내! 아악!" '' 아들을 잃었을 때도 이토록 절규하지 않던 그녀가 정신을 놓아 버릴 것처럼 악을 쓰고 있었다. 인서는 속을 쑤셔 파는 통증에 숨이 막혔다. '' 혜원은 그의 양복 깃을 부여잡고 오열하고 있었고, 인서는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무섭게 움켜쥐었다. 설움에 복받친 소리가 앙갚음하듯 쏟아져 나왔다.'' "너만 우혁이를 사랑했던 건 아냐. 나도, 나도 사랑했어. 깨 있을 때나 잠을 잘 때나 항상 아이 냄새가 콧속에 감겨. 숨을 쉬면 그 느낌에 가슴이 긁혀. 끔찍한 기분이야. 하지만, 아이가 떠나고 남은 건 뭐지? 슬픔? 아니, 남은 건 우리 둘이야. 널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난……, 난…… 흐흐흐흐. 제기랄, 애 없이는 살아져도 너 없인……, 너없이는 진짜 죽을 것 같으니. 크크크크……."'' 번민에 허파가 다 절어 히죽히죽 웃던 그가 이윽고 껄껄 웃기 시작했다. 눈물이 가득 차 고통스런 울림이 되는 그 소리에 혜원은 참혹한 느낌에 젖어 들었다. ''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어. 제발 헤어지잔 말만 하지 마. 내겐 오직 너뿐이야. 너 밖에 없어."'' 그가 그녀를 끌어안고 필사적으로 애원하고 있었다. 혜원은 그에게 안긴 채 공허한 눈으로 천장을 쳐다보았다. 가슴으로 남편의 떨림이 전해져 왔지만 그녀는 가차없이 마지막 미련을 잘라냈다.'' "불쌍한 척하지 말아요. 자신만만하고 이기적이던 때가 더 당신다우니까."'' 축, 그의 팔이 힘을 잃고 아래로 늘어졌다. 혜원은 멍하니 넋이 나간 남편에게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 ''''' 그들은 별거에 들어갔다. 다섯 살 배기 아들이 유괴되어 죽은지 아홉 달 후였다.'' 인서는 절대 이혼만은 안 된다고 못을 박았고, 혜원은 최후의 인심처럼 최씨 집안의 자존심을 받아 들였다. 정혜원은 아직까지 공식적으론 최인서의 아내로 통했다. 만남도, 전화도 없고, 소식조차 알려 하지 않는, 완벽히 타인같은 아내. '' 그렇게 3년이 흘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