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화장품 판매 아르바이트라는 게 참 그렇다. 손님이 있으면 짜증. 없으면 걱정이다. 오늘은 후자였다. 진열대에 꽉 차 있는 화장품이 무안해질 정도로 매장 안은 사람 기척도 없이 화장품 냄새만 가득했다. 손님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나.

“어디 이곳 화장품에 독극물이라도 나온다고 소문이라도 났나.”

도희가 짜증스레 중얼거리는데 문가에서 딸랑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한 남자가 혼자 가게 안을 들어서고 있었다. 큰 키에 다부진 몸이었지만 얼굴은 조금 앳된 남자였다.

‘남자 혼자라…. 대박 아니면 쪽박인가?’

누군가의 선물을 사러 왔을 확률이 높았다. 비싼 선물을 사러 온 거라면 좋을 텐데. 하지만 손님 하나 없는 매장에 혼자만 있다는 게 부담스러워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나가버릴 확률도 높았다. 이럴 땐 얼른 붙잡아야 했다.

“어서 오세요. 찾으시는 물건 있으세요?”

도희는 영업용 환한 미소를 장착하고는 남자에게 다가섰다. 남자가 흠칫 놀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잘하면 나갈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 도희는 손님을 확 자신의 페이스로 끌어당기기로 했다.

“여자친구 선물 사러 오셨어요?”

“아, 아니요.”

남자가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매장에 혼자 있는 게 어색한 듯했다. 그렇다면 더 몰아붙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도희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이렇게 부끄러워하는데 여자친구가 아니면 빼박 엄마 선물을 사러 왔을 것이다.

“어머니 선물 사러 오셨구나.”

도희가 방긋 웃자 남자가 헛기침을 몇 번 해 보였다. 도희는 이것도 아니구나 싶어서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여자친구도 어머니도 아니라면 자신 화장품을 사러 온 것뿐이겠지.

“아. 본인이 바를 거 찾으시는구나. 로션? 스킨? 아니면 선크림?”

도희가 남성 제품을 있는 쪽으로 남자를 안내했다. 남자가 뻘쭘한 태도로 도희를 따라왔다. 도희는 자신을 따라오는 남자를 보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뭐라도 사긴 사겠구나 싶어서였다.

“요즘은 남자분들도 화장품 많이 사세요. 요즘 안 바르는 분들 찾기가 더 힘들 걸요.”

“그런가요?”

“피부가 아기 같으시네요. 근데 지금부터 관리해야 해요.”

남자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홍조가 있으시구나. 그럼 이 크림이 좋은데. 어떠세요?”

남자가 주섬주섬 크림 있는 쪽으로 팔을 뻗으려고 할 때 문이 딸랑하고 열렸다.

“야. 윤성준. 너 왜 여기 있어?”

남자가 화장품 쪽으로 뻗으려는 손을 거두고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문을 밀고 들어온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와 성준의 팔을 잡아끌었다.

“또 길을 잘못 찾았냐? 휴대폰 두고 뭐해? 길 찾기 어플 좀 써.”

“썼는데 잘 모르겠어.”

“이 길치는 기계도 구제를 못 해주네. 빨리 와. 애들 다 모였어.”

도희가 어떻게 하기도 전에 친구로 보이는 남자가 성준을 잡아끌었다. 나가기 전 성준과 도희의 눈이 마주쳤다. 성준이 꾸벅하고 인사를 하는 듯 보였지만 순식간이라 도희는 인사를 채 건네지 못했다.

“잘 못 들어온 거였네.”

성준이라는 남자가 나간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머리를 쥐어 잡았다.

“오늘 점장한테 한 소리 듣는 거 아니야? 일요일인데 이렇게 손님이 없을 수 있나?”

도희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구석에 놓여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퇴근 시간이나 기다려야지. 손님 없는 게 내 탓이야?”

도희는 이 가게도 슬슬 운명이 다 하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때 같이 일하는 하진이 들어섰다. 예쁘장한 외모에 일도 싹싹한 편이라 점장님이 꽤 좋아라하는 친구였다.

“나도희. 오늘 손님 많았어?”

“개뿔. 하나도 없었다.”

“내가 없어서 그런가?”

하진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섹시한 표정을 지으며 도희를 바라보았다. 저러는 게 하루이틀도 아니다. 도희는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하진은 계속 말을 이었다.

“날 보러 오는 손님들이 내가 없으니까 안 온 거지.”

“왜 널 보러 오는 손님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데?”

도희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하진을 쳐다봤지만 하진은 당당하게 어깨를 펴곤 작은 탈의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아마도 내가 예뻐서?”

“저거는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지.”

도희는 은근슬쩍 주변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나는 안 예쁜가?”

도희가 눈을 크게 하고 입술에 미소도 지어 보였다. 그때 딸랑하고 문이 다시 열렸다. 도희는 깜짝 놀라 얼른 표정을 고치고 문쪽을 바라보았다. 아까 그냥 나갔던 성준이 숨이 찬 듯 씩씩거리며 들어서는 게 보였다.

“헉. 헉.”

거울을 보며 예쁜 표정을 지어 보이던 게 부끄러웠던 나머지 도희가 잠깐 앉아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저기….”

그 사이 옷을 갈아입고 나온 하진이 활짝 웃음을 지어 보이며 성준에게 다가섰다.

“찾으시는 화장품 있으세요?”

“그게… 저기….”

“여자친구? 아니면 어머니 선물?”

아까 자신이 다 해본 질문이라 도희가 말리려 했지만, 성준이 얼굴이 빨개지며 마스크 팩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거 계산해주세요.”

“요즘 남자분들도 피부관리 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손님 피부도 좋으신가? 애기 피부네요.”

성준이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도희가 마스크 팩을 들고 계산대로 들어가 계산하고는 성준에게 건네주었다. 성준이 나가면서 다시 도희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이번에는 도희도 꾸벅 인사를 했다. 성준이 나가는 동시에 하진이 비쭉 웃어 보였다.

“봤어? 나 보고 얼굴 빨개지는 거? 귀여워.”

도희는 성준이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그런가? 그래서 아까는 아무것도 안 사고 나갔는데 이번에는 사고 나간 건가?”

“뭐?”

“아니야.”

도희는 생각해보니 은근히 기분이 상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거울을 봤다. 뭐, 자신의 얼굴도 나쁘지 않았다. 충분히 매력있다고 생각했다.

***

다음날 밤이 되었다. 오늘은 손님이 제법 있었다. 바빠서 사람들을 상대하다가 겨우 숨 쉴 틈에 도희가 하진을 툭 쳤다.

“다행이다. 나 어제 이 가게 망하는 거 아닌지 걱정했잖아.”

“야. 안 망해. 걱정하지 마.”

“네가 어떻게 알아?”

“내가 있어서?”

어디서 오는 자신감인지 어이가 없었지만 싹싹한 성격에 저런 말을 하니 미워할 수도 없었다. 도희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일관성 있어서 좋다.”

그때 하진이 도희를 툭툭 건드렸다. 도희가 하진이 바라보는 곳을 같이 바라보았다. 거기엔 어제 팩을 사고 나간 성준이 우물쭈물하며 서 있었다.

“나보러 왔나 봐. 계속 이곳만 힐끔거리잖아. 웬일이니?”

도희도 성준을 바라보았다. 도희와 눈이 마주치니 남자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빨개지는 거 보니까 정말 하진이를 좋아하는 게 맞는 것도 같았다.

“그런가 보다.”

“그런가 보다라니. 내가 봤을 땐 100%야.”

도희는 알아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진이 환한 미소를 장착하며 성준에게 다가갔다. 성준이 머뭇거리는 것 같더니 팩 한 장을 들어 계산대로 왔다. 하진이 응대를 하며 계산까지 마쳤다. 성준이 나가면서 도희를 슬쩍 보더니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갔다.

“인사성은 바르네.”

성준은 다음날도 다음다음 날도 출근 도장 찍듯이 화장품 가게를 찾아왔다. 그것도 도희가 대학교 수업 마치고 일하는 밤 7시쯤이나 그 너머에 찾아오곤 했다. 성준이 찾아올 때마다 하진은 입이 찢어져라 환하게 웃었다.

“넌 남자친구도 있는 게 그렇게 좋아하냐?”

“어쩌겠어. 키 크고 잘생긴 사람이 날 좋아한다고 생각하니 좋아 죽겠는데.”

앞뒤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생각하는 하진이 어이없으면서도 부럽기도 했다. 남자친구가 없어도 성준처럼 키 크고 잘생긴 남자가 자신을 좋다고 하면 자신도 좋아서 입이 찢어지다 못해 귀에 걸릴 게 분명했다. 그러자 성준이라는 사람이 날 좋아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다음날에도 성준이 나타났다. 하지만 오늘은 하진 없이 도희 혼자였다. 도희는 성준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진이 없으니 성준이 공쳐서 어쩌나 싶은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은근히 자신 혼자 성준을 상대하는 게 기분이 좋았다.

“안녕하세요.”

도희가 인사를 건네자 성준이 쭈뼛대며 다가왔다.

“오늘 하진이는 없는데. 아깝네요.”

도희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운을 뗐다.

“하진이요?”

성준이 무슨 말인지 의아한 듯 도희를 바라보았다. 도희는 아직 서로 통성명을 못 했다는 걸 깨달았다. 아마도 매일 찾아와서 내적 친밀감이 생겨 아는 사람인 듯 말해버린 것 같았다.

“아. 같이 일하는 여자애 이름이 하진이에요. 이하진.”

하진이의 이름을 알게 돼서 성준이 기뻐할 걸 생각하니 도희는 괜히 입안이 썼다. 하지만 성준은 크게 좋아하지 않은 얼굴을 했다.

“그렇군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거려다가 도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 이름은 윤성준이에요.”

“저는 나도희에요.”

하진의 이름을 알려주려다 얼떨결에 자신과 통성명을 하게 됐다. 도희는 어쩐지 머쓱했다.

“나도희 씨. 반가워요.”

성준이 뭐가 기쁜지 활짝 웃어 보였다.

“네. 반가워요.”

도희도 비즈니스 미소를 장착하려 애쓰며 같이 웃어 보였다. 이럴 때 진짜 미소가 튀어나오면 자신만 민망해지니까. 그때 하진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성준이를 보곤 벽에 있는 거울로 얼른 얼굴을 들이밀어서 머리를 정돈하더니 웃으며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