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꿈속의 그녀 (국인서 20세의 3월, 이리나 19세의 12월)

‘안녕? 오늘도 나타났구나!’

감긴 거라 오해할 만큼 두 눈이 작아졌다. 반면 입꼬리가 두 배로 늘어났다. 마음으로 건넨 인사이지만 왠지 그녀가 들었을 것 같았다. 그녀의 투명한 머리카락이 잔잔한 바람에도 흩날리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투명하다니! 그렇다는 것만으로도 신비롭기 짝이 없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가 싶더니 얼굴 앞에서 흩날리던 머리카락이 일순 뒤로 모두 쓸려갔다. 그 바람에 얼굴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린 듯 유려한 눈썹과 영롱함을 담은 듯한 눈동자, 크지도 작지도 않은 콧날과 좌우로 균형을 이루고 있는 턱선, 그리고 그 위의 투명한 입술. 또다시 투명! 그래서인지 더욱 슬퍼 보이는 얼굴.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는 오늘도 투명한 입술을 열어 말했다.

“너구나. 국인서.”

그리고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그녀를 바라보며 인서는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덕쿵, 덕쿵, 덕쿵! 빠르게 요동하는 심장박동 소리가 온 귀를 장악했다. 시리디시린 그 얼굴이 또 지독히도 매혹적이어서 인서의 심장은 폭발할 것만 같았다.

“헉!”

그러나 언제나 거기까지였다. 인서는 그 지점에서 늘 눈을 떴다. 깨고 싶지 않아도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다가온 그녀가 자신에게 뭐라고 말할지, 어떤 행동을 할지 너무도 궁금했지만 언제나 거기까지였다.

초등학교 시절, 우연히 보게 된 그녀의 얼굴이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거의 매일 밤 꿈에 나타남으로 인해서 더욱 선명해졌다. 도대체 그녀는 누구일까?

“인서야, 일어났니?”

방문을 열며 노병욱 코치가 인서에게 물었다.

“네, 일어났어요.”

인서는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병욱은 걱정하는 빛을 감추지 못하고서 인서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대한민국 펜싱 국가대표였던 인서의 아빠와 선후배 사이다. 인서의 아빠보다 한 수 아래라는 평 때문에 그와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고 병욱은 말했다. 그러나 경쟁상대이던 ‘국현수’가 세상을 떴고, 그 아들인 인서가 아빠의 재능을 이어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병욱은 결심했다. 현수 대신 인서를 키워 보겠다고. 선수로 키우겠다는 결심은 아이의 엄마마저 세상을 떴을 때, 양육해야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졌다. 결혼도 하지 않은 노총각의 빛나는 결심이었다.

“컨디션 어때? 학교 갈 수 있겠어?”

7년간 인서를 거둬 키운 병욱은 인서를 최고의 선수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국내에 상대할 선수가 없을 만큼 성장했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뽑히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꾸준한 지원이 가능한 대학으로의 진학을 앞둔 때에 부상이 있었다. 발목 부상이 심해서 꽤 오랜 시간 병상에 있어야 했다. 산통보다도 더한 통증을 느끼는 ‘복합부위 통증증후군’, 그 병을 앓다가 간 엄마의 전철을 밟는 건 아닌가 하여 병욱은 불안했다. 그러나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다. 다시 운동을 시작하기에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채우지 못한 학업 일수를 채울 수 있을 정도로는 회복이 되었다.

“스무 살짜리 고3이라….”

인서가 씁쓸한 웃음이 섞인 말을 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된 것 같았다.

“그까짓 일로 의기소침해하지 마라. 나쁜 짓 해서 유급하는 녀석들도 있는데, 넌 다쳐서 그런 거니까 개의치 말고 학교생활 충실히 해, 응?”

마음으로 하는 응원은 하늘을 치솟았다. 그러나 병욱은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그저 그렇게 이야기했다. 너무 오버했다가 오히려 부담을 줄지도 모른다는 나름의 배려였다.

“잘할 거라 믿는다. 수업일수 채우면서 천천히 재활 훈련하고, 다시 재기하자!”

이번에는 좀 더 힘이 실린 조언이 뒤따랐다. 인서도 씨익 하고 웃어 보였다. 대학 진학을 앞둔 중요한 경기에 임하기 전, 의문의 차량이 인서에게 달려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빠른 속도로 달려오던 차량은 인서를 가까스로 스치고 지나갔다. 인서가 몸을 날려 피했지만 발목을 접질렸다. 좌절이 컸다. 하지만 의사가 우려했던 것보다 수술이 잘 되었고, 재기의 가능성이 보이게 되어 인서는 다시금 희망을 붙들기로 했다.

병욱이 차려 준 아침밥을 적당히 먹고 인서는 등굣길에 올랐다. 5개월 만에 등교를 하게 된 이날은 3월의 두 번째 날이었고, 깨끗한 하늘이 높은 날이었다. 인서가 무거운 발걸음을 애써 움직이고 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거기 조심해!”

그러나 조심할 수가 없었다. 방향 잃은 공이 이미 빠른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인서가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을 때, 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 당연히 공에 맞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둔탁한 소리만 났을 뿐 느낌이 없었다. 인서가 의아한 마음으로 눈을 떴을 때, 자신보다 한 뼘은 더 커 보이는 이의 등이 보였다. 그가 잡은 공을 주인에게 던져주고 있었다.

“아, 고마워!”

인서가 얼떨결에 인사했다. 그러나 돌아본 이의 표정이 너무도 차가웠다. 인서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뭐야, 도와줄 땐 언제고 뭘 저렇게 차갑게 노려봐?

“가자, 에단.”

뒤에서 부르는 여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단’이라 불린 남자는 대꾸 없이 그녀에게로 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유유히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인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키가 큰 에단, 교복을 입은 걸로 봐서는 같은 학교 학생이 분명했다. 함께 걸어가는 여학생 역시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평소라면 이렇게까지 관심을 두지 않았겠지만, 무심히 도움을 주고 간 사람이어서 조금 더 바라본 거라고 인서는 생각했다. 자꾸만 떨어지지 않는 시선이 그것 때문일 거라고. 그러나 인서의 마음에서 우러난 질문의 실체는 다른 맥락이었다.

‘저 머리카락을 어디에서 봤더라?’

등 뒤로 늘어뜨린 여학생의 머리카락이 어딘지 모르게 낯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인서는 칠흑같이 까만 머리카락에서 한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오빠, 이제 다 나은 거예요?”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여학생 무리가 있었다. 오랜만에 인서를 보게 되어 무척 반가워하는 이들이었다. 중요한 펜싱 경기가 있을 때마다 응원을 와 주었던 고마운 팬들이었다. 인서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제일 뒤쪽 빈자리에 앉았다.

“오빠가 부상 당했을 때, 우리가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맞아요, 내 발목이 부러진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니까요?”

“내 발목을 드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어요.”

인서의 옆으로 쪼르르 따라온 여학생들이 호들갑을 떨며 이야기했다. 인서는 고마운 마음이 들면서도 지나친 관심이 부담스러워 그저 어색한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유명 인사도 아닌데, 너무 난리 치는 거 아니야?”

마뜩잖은 목소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못마땅한 눈빛을 숨기지 않은 남학생의 핀잔이었다. 인서를 따르는 여학생들의 눈꼬리가 치켜 떠졌다.

“우리가 난리를 치든 말든, 네가 뭔 상관인데?”

“너희들 그거는 알고 난리 치는 거냐?”

남학생의 말에 무슨 의미인가 하여 여학생들의 입이 잠시 다물렸다.

“박기영 선수 이길 자신 없으니까, 부상 당한 척했다는 말이 있어. 못 들어봤어?”

“하! 말도 안 돼. 박기영 오빠보다 인서 오빠가 원래 실력이 뛰어났는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여학생 한 명의 뾰족한 응대가 이어졌다. 듣고 있던 인서의 입에서는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동료 선수들 사이에서 수군대던 이야기가 어째서 새롭게 편성된 교실 안에서 들리는지 알 수 없어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원래가 어딨어? 사람이 신도 아닌데, 실력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거지! 너희들 사람 외모 보고 그러는 거 아니다, 엉? 박기영 형이 제대로 겨뤄보지도 못하고 대학 가게 돼서 얼마나 찜찜한지 너희들은 모르지?”

인서는 다친 발목이 다시금 욱신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수술도 잘 됐고, 회복도 잘 됐다는 진단을 받았는데, 어째서 심사가 뒤틀릴 때마다 그곳이 욱신거리는지 모르겠다. 여학생들은 인서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서는 비난하던 남학생을 노려보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인서의 입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자신을 향한 곱지 않은 시선이 있는 곳에서 1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니. 피곤함을 담은 한숨이었다. 최대한 무심해지자고 마인드컨트롤을 해보았지만, 그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었다.

-“쟤 엄마, 마약쟁이였대.”-

어린 시절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던 그 말을 무시할 수 있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가! 인서는 씁쓸한 입맛을 쩝쩝 다시며 습관적으로 ‘꿈속의 그녀’를 떠올렸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던 그녀. 고된 시간에 그 얼굴을 떠올리면 희한하게도 인내가 됐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진통제 역할을 했던 존재.

‘아마 올 한 해도 그녀를 떠올려야 할 일이 많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던 인서의 심장이 내려앉는 일이 곧 발생했다. 작년에도 담임이었던 국어 선생이 또다시 담임의 자격으로 교실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것은 예상된 일이었다. 병상에 있느라 채우지 못한 수업일수 때문에 유급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 이가 그였다. 그리고 자신이 끝까지 책임을 지겠다고 이야기한 바가 있어서 다시 그의 반 학생이 될 거라는 걸 예상했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함께 데리고 온 두 학생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들이었다.

유독 키가 큰 남학생의 이름은 ‘정이든’이라고 했다. 인서는 너무 당황스러워 제대로 된 박자에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게 잘 안됐다. 그러나 애써 티를 내지는 않았다. 아까 운동장에서 날아오는 공을 막아 준 그의 이름이 ‘에단’인 줄 알았는데 ‘이든’이어서가 아니었다. ‘에단’이라고 불렀던 여학생의 이름은 ‘이리나’라고 했다. 역시나 온몸이 긴장으로 굳었다. 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하얀 얼굴이 예뻐서만도 아니었다. 모든 소리가 차단된 채 제 심장 소리만 커다랗게 들리는 이유! 그녀의 머리카락이 낯설지 않은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았다. 투명한 머리카락은 아니었지만, 늘어진 모양이 너무도 익숙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은 더욱 분명했다. 그녀였다. 꿈속의 그녀!

‘그럴 리가 없잖아. 자세히 봐, 국인서! 닮은 것뿐이야! 그녀가 아니야!’

마음 한쪽에서 아우성을 쳤다. 그랬다. 꿈속의 그녀와 다른 점이 분명 있었다. 날개도 없었고, 머리카락과 입술의 색도 달랐다. 그러나 인서는 도무지 완벽하게 부인할 수가 없었다. 선명한 눈매와 코, 입매가 영락없는 그녀였다. 꿈과 현실의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며 눈을 떼지 못하던 인서는 자꾸만 고이는 침을 부지런히 삼켜댔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첫인사를 했고, 선생님의 안내에 따라 인서의 옆자리로 걸어오고 있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두 귀를 장악한 탓에 앞의 과정에서 발생한 모든 소리가 인서에게는 웅웅거리는 소리로 느껴졌다.

“오늘도 좋은 하루! 감사합니다!”

담임과 학생들의 익숙한 인사가 들려오자, 다행히 인서는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살펴보니, 정이든은 인서의 왼쪽 분단 끝에 혼자 앉았고, 이리나는 인서의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인서는 자신을 빤히 들여다보는 리나를 쳐다보지 못했다. 현실로 다시금 돌아오기는 했지만, 낯설지 않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떠오르지 않았다.

“너 맞지? 국인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서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꿈속에서처럼 현실의 그녀도 내 이름을 알고 있다! 긴장된 마음으로 얼굴을 그녀에게로 향했을 때, 몇몇 여학생들의 비명 같은 소리가 여기저기서 내질러졌다.

인서는 곧 터져버릴 것 같은 심장을 숨기기 위해 두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 떨림을 들키지 않기 위해 미간에 힘을 주었다.

자신의 넥타이를 한 손으로 움켜쥔 그녀는 인서의 얼굴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긴 채였다. 인서가 남다른 순발력으로 교과서를 들어 올리지 않았다면, 두 입술이 맞부딪혔을 것이다. 인서가 본능적으로 입을 가린 영어 교과서에 이리나의 입술이 닿아 있었다. 하마터면 두 사람의 키스가 일어날 뻔한 것에 대해 학생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리나가 얼굴을 돌렸다. 화가 난 듯한 얼굴에 눈시울이 붉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인서가 영문을 모른 채 돌아본 곳에는 정이든의 편치 않은 얼굴이 있었다. 꼭 다문 입술 안으로 이가 악물리는 것처럼 보였다.

“쉽지 않아 보이네.”

조금은 여유를 찾은 듯한 이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득 인서는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았을 때가 떠올랐다. 13살, 어떠한 공간으로 사라져가며 자신을 바라보던 차가운 눈빛. 그리고 그때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잊고 있었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인서가 처음 느꼈던 감정은 ‘공포’였다. 그것이 뒤늦게 깨달아진 인서는 목덜미가 서늘해짐을 느꼈다.

“미리 말해두는데 난 너와 키스할 거야.”

자그맣게 읊조린 말이 들릴 듯 말 듯 했다. 인서가 어이없는 얼굴로 바라본 곳에 이를 악문 이리나의 얼굴이 있었다. 힘주어 노려보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인서는 의아한 마음으로, 동시에 경계하는 마음으로 절박해 보이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다른 의미의 두 눈빛이 서로 교차하고 있었다.

#2. 바람이 불 때 (국인서 11세의 4월, 이리나 19세의 3월)

꽃잎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직 꽃을 시샘하는 찬 기운이 기승인데, 그걸 이겨내고 기어이 울긋불긋 색을 발하고 있었다. 시기상으로는 활짝 피고도 남았어야 했지만, 바라보는 열한 살 아이의 눈에는 이만큼 추위를 이겨낸 지금도 훌륭해 보였다.

‘힘내, 꽃들아!’

마음으로 하는 말을 꽃들이 들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한 말은 아니었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한, 그저 소원 같은 말이었다. 유독 초롱초롱한 눈매가 따스함을 입고 꽃잎을 바라보고 있을 때,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풀기부터 시작한다. 하나!”

“하나!”

“둘!”

“둘!”

아이의 시선이 다급히 창문 안으로 향했다. 창문 안에는 예닐곱 명의 아이들이 자세를 잡고서 구령을 외치고 있었다. 하얀색 펜싱 도복을 갖춰 입은 아이들은 저마다 비장한 얼굴이었다. 14 미터의 금속성 마루 위에서 발뒤꿈치를 붙인 아이들이 무릎을 접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하나… 둘….”

인서는 안에서 수업을 받는 아이들과 같은 자세로 몸을 움직였다. 대신 구령을 외치는 목소리만은 속삭이는 소리였다. 아이들이 하는 수업은 너무도 흥미로웠다. 수강료를 낼 수만 있다면 꼭 듣고 싶은 수업이었다.

“옆으로 뛰기, 시작!”

인서는 창문 안의 아이들이 하는 대로 옆으로 서서 저만치까지 옆으로 뛰다가 다시 돌아오는 동작을 반복했다. 건물 안의 아이들은 기찻길 모양의 네모를 보며 옆으로 뛰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서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맨땅에서 기찻길을 상상하며 다리를 움직였다. 몸을 푸는 모습이 능숙했다.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발을 더 빠르게!”

코치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릴 때, 인서의 발은 더욱 빨라졌다. 구레나룻 위로 땀줄기가 흘러내렸다. 코에서 뜨거운 콧김이 연이어 뿜어져 나왔다. 이윽고 검을 들고 팔을 뻗는 자세를 연습할 차례가 왔다. 인서의 손에는 검 대신 긴 막대기가 쥐어져 있었다. 학교 뒷산에서 적합한 것을 찾느라 꽤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 막대기를 검처럼 잡고 빠르게 앞으로 스텝을 밟다가 찌르고 돌아오는 동작을 반복했다. 최선을 다해 동작을 반복하는 동안 인서의 얼굴과 등 뒤로 땀이 흥건했다. 아직은 매서운 바람이 불었지만,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뭐야? 또 왔어, 저 자식?”

휴식 시간이라 창밖을 내다보던 아이들의 눈에, 밖에서 홀로 연습하는 인서의 모습이 보였다. 두 남자아이가 연습하던 검을 든 채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막대기의 끝에 힘을 준 인서를 노려보았다. 인서는 연습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지난 수업 때도 몰래 훔쳐보다가 들켰다. 그때 인서를 발견한 노병욱 코치는 여기서 이러지 말라고 호되게 야단을 쳤다. 하지만 인서는 또 오고 말았다. 그것이 못마땅한 검을 든 아이, 박기영은 고개 돌린 인서의 얼굴 앞으로 검 끝을 내밀어 보였다.

“왜? 너도 배우고 싶어? 그럼, 가서 아빠한테 얘기해. 수업 듣고 싶다고.”

“야, 야. 국인서 쟤, 아빠 없어.”

옆에 있던 이정우가 알고 있는 사실을 이야기하며 슬며시 웃음을 흘렸다. 검을 들고 있는 기영 역시 빙싯 웃으며 인서의 얼굴을 흘깃거렸다.

“아~ 그러셔? 그럼, 엄마한테라도 말해야지. 이렇게 수강료도 안 내고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배우면 안 되지, 안 그래?”

검 끝이 인서의 팔뚝에 와 닿을 때 날이 휘어졌다. 인서는 해선 안 될 말을 가려 할 줄 모르는 아이들과 더 이상 시비를 가리고 싶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돌아서는 인서를 보며 기영이 불쾌감을 드러냈다.

“한 번만 더 나타나면 진짜 혼내줄 거야! 알아들어?”

기영은 옆에 있는 화단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쌕’ 소리와 함께 검이 스쳐 지나갈 때 잎사귀 여럿이 떨어져 나갔다. 가려던 인서의 시선이 화들짝 놀라며 꽃나무를 돌아보았다. 겨우 꽃망울을 틔운 분홍 진달래였다. 인서의 매서워진 눈을 바라보며 기영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왜? 나무가 불쌍해? 힘없이 떨어지는 이파리 보니까 꼭 너 같아?”

기영의 검이 다시 들렸다. 인서의 놀란 눈이 다급히 기영을 바라보았다.

“그러지 마!”

그러나 그 말을 들어줄 마음이 없는 기영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인서는 검이 향하고 있는 꽃을 불안하게 바라보며 달려갔다. 그러나 검은 기어이 꽃봉오리 하나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인서는 너무도 화가 나 기영에게 막대기를 겨누었다. 막대기로 검을 쳐내자, 검이 저만치로 날아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