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파혼당한 공녀
어릴 적부터 함께해 온 레이먼. 나의 레이.
언제나 내 곁에 있던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자.
헤이브리언 후작가의 장남. 제국에서 가장 강한 황실1기사단 단장.
나는 그가 늘 자랑스러웠다.
언제나 빛이 나는 남자, 그의 은빛 머리카락은 찬란한 금빛보다 더 아름답게 빛이 나 더 아름답다.
날 향해 웃어 주는 그도, 내 이름을 부드럽게 불러 주며 안아 주는 그를 정말 사랑했다.
어른이 되면 황실 기사단 단장이 되어 나와 평생 함께하자는 약속을 지키려고 내게 청혼한 그에게 내 모든 것을 다 바쳐 헌신하기로 했다.
결혼식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팔레폰 제국의 유일한 공작가의 공녀였던 나 멜리샤 로우멘스와 제국을 세울 때 우리 공작 가문과 함께 힘을 보태 준 후작가의 장남인 레이먼 헤이브리언의 결혼 소식은 제국 모두에게 축복받았다.
그 행복이 금이 가기 시작한 건 공작가의 유일한 아가씨였던 내게 이복 동생이 생긴 그날.
한 여자가 나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여자를 데려오면서 산산이 조각났다.
“이 아이의 이름은 아이린, 공작님의 딸입니다.”
“……!”
“세상에… 설마… 공작님께서!”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여자아이는 아버지와 나와 똑 닮은 금발이었다.
오른쪽 광대에 난 점 위치까지.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 자식이 나 말고도 또 있었다니.
더욱 충격적인 건 내 이복 여동생의 어머니인 여자의 정체였다.
여자는 내가 다섯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 병시중을 들었던 하녀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보이질 않는가 싶더니 20년 만에 다시 공작가로 돌아왔다.
나와 다섯 살 차이 나는 여동생이란 여자와 함께.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근엄해도 가정에 충실한 사람인 줄 알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재혼하지 않은 사랑꾼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죽어 가는 어머니의 병시중을 들었던 하녀와 몰래 정분을 나눴다니.
그리고 그 하녀는 아버지의 딸이라고 제 딸과 함께 돌아왔다.
꽃다운 스물이 된 이복 여동생은 정말 예뻤다.
제 어머니를 닮은 황금안이 유난히 더 그녀를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아버지의 금발과 어머니의 적안을 물려받았다면 내 배다른 여동생은 제 어머니의 금안을 물려받았다.
그런 그녀를 보는 이들은 모두 넋이 나가 있었다. 금발에 금안인 여자는 같은 여자가 봐도 아름다웠다.
마치 온몸을 금으로 두른 것처럼.
여자는 무척 수줍음이 많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설레하는 하인들.
아무튼 난 행복한 결혼을 며칠 앞두고 아버지의 파렴치한 과거를 알게 되어 아버지와 당연히 사이가 틀어졌다.
뻔뻔하게도 아픈 어머니를 간호하는 여자와 바람을 피워 놓고 과거일 뿐이라며 입을 놀리는 인간과 의절하고 싶었다.
심지어 하녀였던 그녀를 후처로 들이고 그 여자가 낳아 온 여자를 내 동생으로 받아들였다.
“저… 언니….”
“…….”
“정말 보고 싶었어요! 비록 어머니는 다르지만… 저한테… 언니가 있다는 게… 너무나도! 기뻤어요!”
어째서인지 이복 여동생만큼은 미워할 수가 없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내 손을 잡고 무척 기뻐하는 그때의 아이린은 미워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생긴 새엄마와 여동생. 어차피 레이와 결혼하면 다신 얼굴 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루빨리 레이와 결혼해서 더러운 집구석을 나가고 싶었다.
아이린의 어머니이자 내 계모인 그 여자는 다 늙어 빠진 공작이 죽고 나면 공작가의 재산을 얻기 위해 들어온 것이었다.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일.
이 공작 가문을 어떻게 하든 내 알 바는 아니었다.
그런데 정말 더 믿을 수 없는 일이 천천히 벌어지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었을지도.
나밖에 모르던 레이먼이었다.
여자라고는 나밖에 모르던 그 레이먼이 내 이복 여동생인 아이린과 만남을 가지면서 점점 이상해졌다.
언니가 생겼다며 스무 살이나 된 여자애가 내 뒤만 졸졸 쫓아다녀 귀찮아도 따라다니는 게 조금은 귀여워서 데리고 다녔더니.
그런 아이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레이먼을 볼 때마다 난 바보처럼 설마라며 고갤 내저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레이먼만큼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게 제일 멍청한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고.
아이린은 늘 내 곁을 졸졸 쫓아다녔다. 내가 어딜 가든 마치 새끼 오리가 어미 오리 뒤를 졸래졸래 쫓아오듯.
그 모습이 귀여웠다.
어릴 적부터 귀여운 여동생이 하나 있었으면 했던 나였기에 날 졸래졸래 쫓아오며 마치 어린아이 같은 눈망울로 내가 무엇을 하든 신기하게 쳐다보는 그 아이가, 시골에서 자란 순박한 그 아이가 너무나도 귀여웠었다.
레이먼이 그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그래도 멍청이처럼 내가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라고 부정했다.
지금 이 장면을 보기 전까지는.
“이러지 마세요! 왜 이러세요! 당신은! 멜리샤 언니와 결혼하실 분이잖아요!”
“당신을 더 사랑하게 됐어. 아니, 사랑해. 아이린.”
“무슨… 아… 어… 언니…?”
“…….”
레이먼이 왔다고 하기에 방에서 나왔지만 응접실이나 그 어디에서도 그를 찾을 수가 없어서 혹시나 하고 정원에 와 봤더니 이 꼴을 보여주고 있었다.
레이먼은 내가 지금 앞에 있는데도 아이린의 손목을 놓지 않고 있었다.
이가 갈렸다. 뭐 하는 짓이냐고, 그 손 당장 놓지 못하겠냐고 윽박을 지르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이거! 놔주세요!”
아이린은 레이먼의 손을 겨우 뿌리치더니 내 곁으로 다가왔다.
“언니! 오해하지 마세요! 전… 저는!”
“아이린은 아무 잘못 없어. 내가….”
“그 입 닥쳐.”
처음으로 레이먼에게 험한 소리를 내뱉었다. 더 험한 말을 해주고 싶지만 난 긍지 높은 로우멘스 공작가의 딸이니까.
“언니… 흐윽…! 흐윽!”
“들어가 있어.”
“네… 언니… 흐윽… 정말 죄송해요!”
아이린이 사라지자 한없이 낯선 모습으로 다가오는 레이먼을 보게 되었다.
처음 보는 그의 차가운 검은 눈동자에 심장이 저렸다.
“미안해.”
“하… 미안하긴 하니?”
“…….”
“언제부터였던 거야?”
“아이린을 처음 만났을 때.”
“…….”
“반하고 말았어.”
어쩌면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이렇게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거지? 어떻게 하면?
“날 사랑한다면서?”
“…….”
“날 사랑해서 결혼하는 거 아니었어? 날 사랑해서…!”
“미안해, 널 더는 사랑하지 않아.”
이 잔인한 한마디에 우리의 17년간 쌓아 온 사랑이 무너지고 말았다.
사랑이 변하는 걸까, 아니면 사람이 변하는 걸까.
사람이 변하기 때문에 사람이 변하는 걸까.
아니면 그 반대인 걸까.
너무 충격이 컸던 건지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파혼하자.”
지독하게 끝까지 잔혹했다.
정말 날 17년을 사랑했던 남자가 맞는 건지 의심이 들 정도로.
“내가 알아서 정리할게. 미안해, 멜리샤.”
“…….”
지나쳐 가는 레이먼에게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나와 파혼하면 바로 아이린에게 청혼할 거냐는 말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못했다.
그렇게 난 17년 사랑에 배신당했고 파혼당했다.
* * *
결혼을 앞두고 파혼당한 공녀가 되어 버린 나는 밖에선 비운의 여자가 되었다.
이복 여동생에게 남자를 빼앗긴 불쌍한 공녀.
솔직히 빼앗긴 것도 아니다. 그 사랑이 변한 것이지.
너무나도 갑자기 내게 이복동생이 생긴 것처럼.
“한심한 것 같으니! 남자 마음 하나 못 잡아서 집안 망신을…!”
“여보. 진정하세요. 멜리샤도 얼마나 상심이 크겠어요… 하필이면… 우리 아이린을….”
“좋아하는 거 억지로 숨기셔도 되는데요?”
“무… 무슨…!”
“왜 아버지 앞에선 저 위하는 척하세요? 새어머니. 어젠 아이린보고 레이먼의 청혼을 받으라고 그리 닦달을 하시더니.”
“그…? 흐흐윽… 아무리 내가 싫어도… 그런 거짓말을…!”
“하….”
“꼴도 보기 싫으니 방으로 들어가! 너무 마음에 두지 마오. 저 녀석도 지금 속이….”
“아버지, 저한테 집안 망신이라고 하셨죠? 근데 그거 아세요? 지금 밖에선 아버지랑 새어머니 이야기도 파다하게 퍼지고 있는 거.”
“무…!”
“아픈 아내 병시중 들던 하녀와 정분난 공작. 20년 만에 나타난 그 하녀가 데려온 딸에게 결혼할 남편을 빼앗긴 그 공작의 딸. 정말 집안 꼴 잘 돌아간다고요.”
“이… 당장 올라가지 못해!”
“여보! 진정하세요! 이러다 혈압 오르시면…!”
정말 역겹고 더러운 기분이 들어 바람 좀 쐬려고 나와 보니.
“아이린!”
“정말 왜 이러시는 거예요! 전 당신이 싫다고요! 아… 언니!”
“…….”
머리로는 잘 알고 있다. 이 아이에겐 아무 잘못 없다는 거.
하지만 아이린이 싫다. 밉다. 오직 나에게만 향하던 레이먼의 마음을 한 번에 뺏어 버린.
내 이복동생인 아이린이. 밉다. 싫다.
“흐윽… 언니… 저 때문에… 제가 사라질게요… 제가… 사라지면…!”
“당신이 가는 곳이 어디든 난 따라갈 거야.”
“정말 왜 이러세요! 저한테 왜 이러시냐고요! 싫다는 왜 이러시냔 말이에요!”
“좋아하게 만들 자신 있어. 날 사랑하게 할 자신 있으니까.”
“당신은 어떻게… 언니 앞에서…!”
“멜리샤, 네가 말해 줘.”
“…뭘?”
“이젠 너와 난 아무 사이가 아니란 걸.”
단단히 돈 놈인가? 내가 왜 이런 놈을 17년이나 사랑한 거지?
“정신 차려요! 언니! 흐윽… 저 좀 도와주세요… 제발…! 저 사람 좀… 제게서 떨어트려 주세요.”
“미안하지만 아이린, 저 남자 말처럼 난 이제 헤이브리언 장남과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 널 도와줄 수 없을 것 같아. 네가 정 싫으면 아버지한테 말씀드려 보든가 하렴.”
“언니…!”
“아이린! 제발!”
“이거 놓으시라고요!”
집 안에서도 집 밖에서도 편하게 마음 둘 곳이 없다.
어머니의 고향으로 내려갈까. 그곳에서 그냥 조용히 살까.
그러기엔 너무 억울하다. 더욱이 아버지가 죽으면 공작가의 모든 것이 악마 같은 여자에게로 넘어간다.
이 더러운 가문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그래도 내가 받을 건 챙겨야지.
파혼 소식이 잠잠해질 때까지는 그냥 귀 닫고 눈 감고 살아야겠다.
#2. 사생아 황태자
“아가씨! 아가씨! 그 이야기 들으셨어요?”
“무슨 이야기?”
“요즘 제국 안에서 헤이브리언 후작 장남이 미쳤다는 소문이 파다해요! 후작님과 후작 부인께서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다니신대요!”
“아, 그래.”
“죄송해요, 아가씨. 듣기 싫으실 줄은 알지만 그래도! 아가씨께서 꼭 알고 계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말씀드린 건데….”
“소피아.”
“네! 아가씨!”
“머리 손질은 그만해 줘도 괜찮으니까. 달달한 게 먹고 싶어.”
“네! 금방 가져올게요.”
“고마워.”
“고맙긴요!”
이 집에서 유일하게 날 편안하게 해주는 아이가 저 아이다.
이복동생인 아이린보다 세 살이나 어린 소녀지만 나이에 맞지 않게 의젓하고 말도 잘 통해서 늘 곁에 두고 있는 아이.
이젠 내 인생에서 지워내고 싶지만 워낙 주목을 많이 받는 사람이니.
나나 레이먼이나.
그나저나 후작님과 후작 부인께서는 그렇게 믿고 자랑스러워하던 장남 때문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다니신다니 안타깝네.
레이먼은 헤이브리언 후작 부부의 자랑이었고 후작가의 기둥이었다.
어릴 적부터 영민했기도 했었고 무엇보다 제국의 유일한 공작 가문인 나와 17년을 함께했으니 이보다 더 든든할 순 없겠지.
그런데 그랬던 그 아들이 한순간에 미쳐 버려선 결혼하기로 했던 나와의 결혼을 끝내고 갑자기 생긴 내 이복 여동생을 사랑하게 되었다며 자존심이든 체면이든 뭐든 다 내려놓고 저리 애정을 구걸하고 있으니 얼마나 속이 타실까.
아니, 어쩌면 그런 척하실 수도 있을 거다. 아이린도 엄연히 이 공작가의 딸이 되었으니.
장남이 나를 선택하든, 아이린을 선택하든 그쪽에선 손해 볼 것도 없으니.
오히려 나보단 아이린을 더 좋아할지도 모르겠네.
나처럼 기가 강한 여자보다 아이린처럼 수수한 시골 처녀가 더 그들에겐 좋을 테니까.
웃음이 나올 뻔하던 그때, 밖에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봐도 소피아가 달려오는 소리다.
하녀장이 복도에서 뛰지 말라고 그렇게 주의를 주었는데 고치질 못하네.
벌컥!
“아가씨!”
“문 부서지겠다. 소피아, 무슨 일이니?”
“그, 그게…! 지금 당장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무슨 일인데?”
귀찮은 일만 아니면 좋겠지만, 애초에 소피아는 내가 귀찮은 것을 딱 질색하는 성격인 것을 잘 알기에 정말 큰일이 아니면 저렇게 고하러 오지 않는다.
“헤이브리언 후작가의 차남께서 아가씨를 만나 뵙고 싶다고 지금 정원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루이가?”
“네!”
“일단은 알겠어. 금방 나가겠다고 전해 주겠니?”
“네! 아가씨!”
파혼하고 일주일은 지난 것 같은데. 아니, 좀 더 지났을지도 모른다. 집 밖에만 나가면 수군거리는 시선이 싫어서 좀처럼 나가질 않았으니까.
“그나저나 루이가 무슨 일로 찾아왔을까?”
루이, 레이먼의 남동생이자 후작가의 차남.
쌍둥이가 아니냐고 혼동할 정도로 형과 닮았지만 열 살이나 차이 나는 형제이다.
나와 레이먼이 루이의 기저귀를 갈아 주었던 적도 있었지.
형제가 없던 나에겐 남동생처럼 귀엽기만 했었는데. 한때 나는 레이먼과 가족이 되면 루이에게 좋은 형수가 되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젠 그건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지만.
대충 차려입고 허전한 어깨 위엔 평상시 잘 두르고 다니던 실크로 된 숄을 걸치고 계단을 내려가고 있으니 아래에선 흐느껴 우는 아이린과 그런 딸을 질책하는 여자의 듣기 싫은 소리가 내 귀에 울렸다.
미리보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