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혼하겠습니다

햇살은 따사롭고, 바람은 시원한 어느 여름날이었다.

오늘도 르클라시안 공작가의 유리 정원은 수천 골드를 들여 만든 티를 내듯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밖은 38도가 넘어가는 지옥이면서 마법으로 이 안은 26도라는 적정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럴 때 보면 마법이 참 편하긴 해.’

게다가 계절에 상관없이 세상 귀하고 예쁘다는 식물들만 엄선해서 들여와 정성 들여 관리했다.

하지만 르클라시안의 최대 자랑거리는 이 정원도, 제국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웅장한 저택도 아니었다.

물론 은행 금고에 잠들어 있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수천, 수백억의 재산 또한 아니었다.

르클라시안 가문의 대표적인 특징, 신비로운 검은 색의 머리카락과 보랏빛이 도는 보석 같은 눈동자를 가진 이 남자.

‘바로 내 남편, 칼릭스 드 르클라시안.’

그의 외모는 아름답다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 정도였고 그런 외모를 뛰어넘는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르클라시안 그 자체가 이 남자의 것인데, 부러울 게 뭐가 있는가.

그런 남자와 오늘 나는….

“이혼해주세요.”

이혼을 하려고 한다, 아니 반드시 할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오늘이 아니지, 오늘도가 맞는 표현이었다.

난 거의 매일을 그와 이혼하고자 하는, 르클라시안의 미친… 공작부인 정도니까.

“언제까지 그렇게 버티실 거예요? 그럴수록 공작가의 위상만 떨어질 텐데.”

“제가 루엘 당신과 이혼한다면, 재혼을 할 겁니다.”

“누가 그런다고 넘어갈까봐요? 하세요.”

옛날의 나, 르클라시안의 공작부인인 루엘리아 드 르클라시안이었다면 저 말에 벌벌 떨었겠지.

애당초 이혼하자는 얘기도 무서워서 못 했을 게 뻔했다.

하지만 난 지금 그때의 루엘이랑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니까 그런 말에는….

“그리고 당신을 그리워할 겁니다.”

“…네? 각하께서 누굴 뭘 한다고요?”

내 생각보다 그의 입에서 나온 뒷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그리고 새 아내 역시 이혼을 요구하게 될 겁니다.”

대체 저 남자의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있는지.

그의 확신은 거의 정확했기에 저런 말투에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렇게 이혼, 재혼을 반복하면…. 미쳐버려서 그 노예를 죽여 버릴 수도 있습니다.”

순간 칼릭스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그리고 그가 말한 ‘그 노예’는 나도, 그도 잘 아는 남자였다.

‘일단은 대외적인 내 애인인데….’

사실은 노예로 붙잡힌 황족이었다.

칼릭스 역시 그가 황족이라는 것과 그를 꼭 살려둬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저렇게 살벌한 표정으로 농담도 모르는 칼릭스가 말하니 진짜 같았다.

“뭘 그렇게 당황해요?”

“그냥…. 뭐든지요.”

분명 웃고 있지만 살벌한 눈동자에 이혼은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혼… 하고 싶어요?”

갑자기 칼릭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린 아이를 달래듯이 물었다.

그 물음에 나는 눈을 한 번 굴린 뒤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이혼 안 하면, 내가 많이 사랑해줄 텐데.”

“거절….”

“다행이네요. 이혼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칼릭스는 예쁘게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역시 이번에도 날 놀리는 장난이었다는 거군.

“저희가 이혼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기 전까진.”

“이미 절 사랑하지 않잖아요.”

사랑이란 걸 모르는 사람이 사랑을 말하며 이혼을 거절하다니.

내 인생에서 가장 어이없는 부분이었다.

“이상하네. 사랑도 하고, 질투도 하는데….”

칼릭스의 시선은 나를 지나쳐 누군가에게 고정됐다.

그 끝에는 내 애인,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애인이 있었다.

“이혼을 하고 싶다면 그 정도로는 안 될 거예요.”

칼릭스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내 손 등 위로 키스한 뒤 그 긴 다리로 빠르게 유리 정원을 빠져나갔다.

‘결국 오늘도 실패인 거야…?’

대체 내가 이 이혼을 위해 몇 개월째 공을 들이고 있는데.

이러다가는 곧 결혼 1주년, 나의 죽음 예정일이 다가온다.

이혼을 위한 내 노력과 고난은 내가 처음 루엘리아 드 르클라시안에 빙의했던 때부터였다.

***

코끝에서 진한 커피 향이 맴돌았다.

그래, 내가 분명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으니까 커피 향이 나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읽던 소설의 하얀 배경 위로 새겨진 검은 글자가 아닌 배우인지 아이돌인지 모를 남자가 앉아있다는 것이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숨이 멎을 정도로 잘생긴 남자를 만난 건 처음이었다.

“여기 계약서입니다.”

그 남자는 나에게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한국어도 아니고 영어에 가깝지만 영어와는 다른 처음 보는 문자였지만 자연스럽게 읽히는 게 놀라웠다.

그 내용은 [결혼 합의 계약서]라는 제목 그대로 계약서였다.

1. 서로의 사생활에는 일절 관련하지 않는다.

2.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남편, 아내로서 역할을 다 한다.

3. 남들에게 이 계약의 내용을 발설하지 않는다.

기간에 제한은 없으며, 을은 사재를 만들지 않는다.

겨우 단 3가지의 조건이 적힌 계약서는 특별할 게 없었다.

그러던 중 내 눈에 들어온 건 그 아래 적힌 서명이었다.

‘갑, 칼릭스… 드 르클라시안? 그리고 을, 루엘리아 드 르클라시안이라고?’

루엘리아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봤지만, 칼릭스는 익숙한 이름이었다.

내가 방금 전까지도 읽은 소설 속 흑막의 이름이 칼릭스였으니까….

‘잠깐 지금 이 남자…. 소설 속 칼릭스랑 닮은 것 같은데…?’

자세히 보니 눈앞의 남자의 외형은 소설에서 여러 번 언급된 칼릭스의 외모와 똑같았다.

외형뿐만 아니라 이름, 그 풍기는 분위기 까지도 모두 일치했다.

‘근데 소설 속 인물이 왜 내 눈앞에 있는 거지…?’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소설에서 읽던 인물이 갑자기 내 눈앞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니.

그제서야 들어온 주변 풍경 역시 내가 있던 카페가 아니었다.

심지어 내가 입고 있는 옷 역시 꽉 끼고 불편하지만 예쁘기만 한 드레스였다.

갑자기 나를 제외한 모든 게 바뀌어있었다.

“사인, 안 하십니까?”

그때 칼릭스, 아니 칼릭스로 추정되는 남자가 물었다.

그는 상대를 내려보듯이 오만한 눈을 하고는 인상을 쓰고 있었다.

‘소설에서 분명 칼릭스가 짜증이 났을 때 하던 행동이야….’

습관마저 닮았는데, 칼릭스가 아니라고 하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루엘리아 드 르클라시안. 당신의 이름도 잊으신 건가요?”

그 말에 당황한 나는 허둥대며 대충 옆에 있는 펜을 쥐어 들었다.

겨우 그 뿐이었는데 글을 읽는 것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손이 움직여 사인을 했다.

‘루엘리아 드 르클라시안…. 방금 내가 이렇게 쓴 거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을 처음 보는 문자로 너무 자연스럽게 써낸 내 신체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런 감정에 어색해하던 것도 잠시였다.

내가 사인을 다 하자마자 칼릭스는 종이를 낚아채듯이 가져가버렸다.

“그럼 이제 볼 일은 끝났습니다. 앞으로 일정은 집사를 통해 알려드릴 거고 다른 때는 자유롭게 행동하셔도 좋습니다.”

칼릭스는 그 말을 한 채로 아무 미련 없다는 듯이 나가버렸다.

그 모습을 멍하게 지켜보던 나는 내 손에 들고 있는 펜을 떨어뜨릴 때까지 그가 나간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자 더욱 더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방금 뭔 일이 일어났던 거야…?”

소설로 읽던 인물과 똑같은 남자가 나타났고 계약서에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인을 했다.

다시금 정리해 봐도 대체 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툭.

그때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에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책장이 보였다.

떨어진 건 책보다는 노트나 수첩 같아 보였다.

그리고 그 노트의 표지에는 계속해서 들었던 이름, ‘루엘리아 드 르클라시아’가 적혀있었다.

“일기 같은 건가?”

노트를 열어보니 한두 줄 정도로 하루를 기록한 일기장이었다.

972년 12월 27일. 르클라시안 공작님을 만났다. 생각보다 더 멋진 분이셨다.

973년 1월 5일. 공작님에게 계약 결혼을 제안 받았다.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973년 1월 12일. 공작님과 결혼하기로 했다. 그런데 공작님은 왜 처음 보는 나에게 청혼하신 걸까?

973년 1월 24일. 공작님은 공작가의 한 하녀를 사랑하신다. 그래서 나랑 결혼을…?

973년 2월 2일. 결혼식 날짜가 잡혔다. 계약에 의한 부부여도 잘 지내봐야지.

973년 2월 17일. 공작님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예비 신부가 아픈데 뭘 하시는 건지.

973년 3월 3일. 내일이 결혼식 날이다. 결혼식은 무사히 진행될 것 같다. 근데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날을 끝으로 일기는 끝이 났다.

그리 많은 내용이 적혀있던 것도 아니었고 별로 도움이 되는 내용도 아니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방금 전 남자가 소설 속 칼릭스 같다는 것과 내가 이 일기의 주인, 루엘리아 같다는 것뿐이었다.

‘역시…. 말도 안 되는 얘기야.’

물론 소설에서 칼릭스는 르클라시안 공작가의 공작이었고 제 손으로 죽인 전 부인이 있었지만….

“…전 부인? 맞아, 전 부인이 있긴 했지.”

소설이 시작할 때는 결혼한 지 1년 만에 칼릭스의 손에 죽어 등장조차 하지 않았다.

이름도 나오지 않았지만 소설에서는 백금발에 푸른 눈동자, 예쁘긴 했지만 존재감이 없었다고 했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 주위를 둘러보니 책상 위 작은 손거울이 보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거울을 들어 올려 얼굴을 비춘 순간, 절망스러웠다.

‘백금발, 푸른 눈…. 그리고 예쁘기는 한데 눈에 띄지는 않는….’

솔직히 이 정도면 굳이 누가 말해주지 않더라도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소설에는 이름도 한 줄 안 나온, 결혼한 지 1년 만에 남편인 흑막 손에 죽는 엑스트라에 빙의했다는 것을.

“허허….”

그 사실을 인정하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실제로도 소설 속으로 빙의하는 게 가능한 일이었다니.

그것도 카페에서 소설을 읽다가 읽던 소설 속으로.

현실성이라고는 없는 전개에 갑자기 이건 꿈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 이런 게 설마 실제로 가능하겠어?’

내가 최근에 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서 과몰입 하는 바람에 잠시 이런 꿈을 꿨다고 하는 게 더 현실성 있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이 개꿈에서도 깨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방금 전 칼릭스와 대화를 나눴던 소파에 누웠다.

소파는 정말 현실인 것처럼 부드럽고 푹신했다.

너무 생생한 감정이었지만 꿈일 거라 애써 부정하며 잠을 청했다.

***

두 눈을 뜨자 아까와는 다른 풍경이 보였다.

그래, 분명 아까 잠든 그 방은 아닌 게 확실했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원래 내가 있던 카페 역시 아니었다.

‘여긴 대체 어디지…?’

지금 보니 내 옷은 새하얀 실크 잠옷으로 바뀌어있었다.

그리고 내가 누워있는 곳은 소파가 아닌 크고 푹신한 침대 위였다.

커피 향이 가득하던 방금 전 방과는 다르게 이곳은 달콤한 향이 났다.

‘설마 뭐 또 다른 사람한테 빙의라도 했나?’

그런 어이없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 시야에는 눈에 익은 백금발이 들어왔다.

여전히 나는 루엘리아라는 증거였다.

‘어쨌든 나는 지금 꿈에서 안 깼다는 건가?’

아니지, 그렇다기 보다는 이게 꿈이 아니었다는 게 더 맞았다.

결론적으로 나는 지금 망했다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