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산들거리는 바람과 따뜻한 햇볕이 낮잠 자기엔 딱 좋은 날씨였다.

그런 햇살이 조용히 내려앉는 궁궐의 외진 정자 안, 붉은 치맛자락이 바람에 흩날리듯 언뜻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어디선가 낮고 고른 숨소리가 쌕쌕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자를 둘러싼 담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실 하얀 손 하나가 난간 너머로 비죽 나와 있었다.

“은화 공주님께서는 또 앓아누우셨다지?”

“아, 나도 들었어.”

담을 따라 외진 길을 걷고 있던 궁녀들이 불쑥 그렇게 말을 꺼냈다.

윗사람의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인데, 평소 거의 다니지 않는 길이었던데다 멀지 않은 곳에 은화 공주의 처소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정말 큰 일이야. 몸이 너무 약하셔서, 자꾸 앓아누우시니…. 혼례를 치르셔야 할 나이도 훌쩍 넘기셨는데, 전하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시잖아.”

“그러게. 은화 공주님이 저리 자꾸 앓아누우시니, 유경 옹주님도 나이가 차셨는데 이렇다 할 말이 없잖아.”

궁녀들의 말소리에 담 너머, 난간 사이로 비죽 나와 있던 손가락이 움찔하고 작게 경련한 듯했다.

하지만 손은커녕 담 안쪽의 풍경에도 관심이 없는 궁녀들이 그를 알 리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유경 옹주님께 혼사가 들어왔는데…. 은화 공주님께서도 아직 하가(下嫁)하지 않으셨단 이유로 어그러졌다지?”

“맞아. 조금 먼 곳이긴 하지만, 유서 깊은 가문의 장손이라고 들었어. 몇 해 전 무과(武科)의 수석을 지냈고, 현재는 장군으로 변방에 있지만 유경 옹주님의 외가처럼 전도유망한 무관이라고 들었는데?”

“…하지만 영비 마마께서 결국 ‘은화 공주님’ 때문에 안 된다고 하셨다지 않아. 유경 옹주님도 안됐어. 막말로 유경 옹주님도 혼기가 꽉 차셨는데, 은화 공주께서 저러고 계셔서 자꾸 혼사가 어긋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은화 공주님께는 혼담은커녕 전하께서 먼저 하가 이야기를 꺼낼까 봐 신하들이 어전에서 은화 공주의 ‘으’ 소리도 꺼내지 않는다잖아.”

“풋.”

소리를 낮추며 상전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고 있던 이들이었다. 이야기를 주고받은 궁녀 중 하나가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나 같아도…, 은화 공주님 같은 며느리는 싫을 거야. 안 그래도 원래 부마는 제약이 많은데, 일 년의 절반 이상을 앓아누워 지내며 ‘골골거리는’ 며느리라니 말이야.”

“좀 그렇긴 하지? 게다가 소문에 은화 공주께서 몸이 너무 약하셔서 대를 잇기도 힘들 거래. 안 그래도 골골하는 며느리, 남의 귀한 집 대를 절손(絶孫)시킬까 봐 대신들께서도 전하께서 혼사 문제 꺼낼까 봐 전전긍긍이라잖아.”

“그 덕분에 세자 저하까지도 그 연치에 작년에 겨우 가례를 치르셨으니. 정말 전하께서도 은화 공주님만 생각하면 답답하시겠어.”

궁녀들은 걱정스럽다는 듯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지만, 두 눈동자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흥미진진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는 가꾸지도 않나 봐. 지날 때면 너무 으스스해.”

“공주님 처소가 너무 안쪽의 외진 장소에 있는 데다가, 마냥 누워지내시니 궁인들도 정말 최소한으로 있다지 않아. 길목마다 지키고 있는 게 당연한 호위들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나도 심부름으로 이 길을 지날 때면 기분이 좋지 않다니까. 어서 가자.”

“그래. 상궁 마마께서 또 야단치시겠어.”

해가 이제 겨우 기울기 시작했지만, 그녀들이 걷고 있는 길 위에는 더욱 짧은 듯했다. 아무래도 손질이 되지 않아, 낡고 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건물들과 풀숲이 되어 버린 길이 어우러져 더 좋지 못한 느낌을 자아낸 듯했다.

궁녀들이 서로의 손을 마주 잡고, 잰걸음으로 바삐 지나갔다.

“하암.”

그러기를 한참 후, 작은 하품 소리와 함께 늘어져 있던 하얀 손이 쑥 난간 안으로 딸려 올라가듯 사라지더니 대신 작은 머리통 하나가 비죽이 솟아올랐다. 산발된 머리카락으로 얼굴 절반이 가려진, 작은 머리통이었다.

사라졌던 손이 찢어질 듯 벌어진 입을 건성으로 가리고 있었다.

얼마나 달게 잤던지, 입이 찢어질 듯 하품을 해도 잠기운이 떨치기 힘들었다.

덕분에 커다란 두 눈 가득 눈물을 한 방울씩 매단 채, 은화가 몽롱한 시선으로 이제 희미한 뒷모습으로 남아 있는 궁녀들을 흘깃 응시했다.

“유경이에게 혼담이 있었다고? …그런 또 몰랐네.”

은화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앓아누웠다던 공주가, 폐가가 되다시피 한 후원의 정자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고 한다면, 궁녀들은 다른 의미로 대경했을 터였다. 하지만 모르고 지나쳤으니 다행인 일이었다.

은화에게나, 그녀들 자신에게도 말이다.

“낮것을 너무 먹어서, 잠깐 눕는다는 게…. 까맣게 잠들어 버렸네. …이런.”

느릿느릿한 어조로 혼잣말을 이어가며, 은화가 풀어헤친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연신 쓸어내렸다.

평소 잘 묶지 않는 머리카락을, 그대로 풀어헤치고 마루를 굴러다니며 잠이 든 탓인지 긴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엉켜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각이….’

해가 벌써 저물기 시작했다.

궁녀들이 이곳에서 으스스한 기색을 느낀 것은 공연한 일이 아니었다.

‘시각이 지체되어 서둘러야 하겠는데. 궁문(宮門)이 닫힐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어.’

은화가 곱게 차려입은 공주답지 않게, 시퍼런 칼끝처럼 예리하고 차가운 시선을 머금었다.

잠들기 전 벗어 던졌던 버선을 찾아 신고, 두 다리로 댓돌을 딛으며 몸을 일으키는 동작이 자못 경쾌했다.

은화가 입고 있는 붉은 치마와 그 위에 걸쳐 입은 긴 저고리를 가벼운 손길로 툭툭 털었다.

이곳에서 자신의 처소까지는 인적이 끊긴 길이었다. 사실 아까 궁녀들이 지나치기는 했지만, 그런 일이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였다.

그래서 보는 이의 시선을 걱정할 일은 없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할 것은 따로 있었다.

‘최 상궁이 보면 또 잔소리할 테니까.’

바로 제 처소의 상궁을 조심해야 할 것이었다.

은화가 미간을 찌푸린 채 머리를 돌려 옷의 먼지와 나뭇잎을 털어내고는, 그대로 문을 향해 느릿하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제 처소는 이곳과 담 하나를 이웃할 정도로 먼 길은 아니었으니 더 다행스러웠다. 예상치 못한 낮잠 때문에 최 상궁이 잔소리를 하겠으나, 그래도 잠깐 잤다며 변명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공주님!”

하지만 처소의 문을 넘어 침실로 향하기 위해 마루 위로 올라설 때였다. 찢어질 것처럼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소리가 푸르스름한 형체와 함께 그녀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꼭 자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침소 앞에서 우왕좌왕하며 기다리다가 모습이 보이자마자 잡아먹을 것처럼 달려든 모습이었다.

“으음.”

단정한 옷차림과 진중한 얼굴이었지만, 그래서 더 사납게 느껴지는 최 상궁의 모습에 은화는 당황했다.

“대체 어딜 다녀오시는 겁니까!”

“음. 그게….”

“꼴은 또 이게 뭐고요. 제가 아무 곳에서 드러누워 잠드시는 그 황당한 행동 좀 하시지 말라고 말씀드렸지요?”

“…….”

그래도 변명은 시도해 봤지만, 역시 최 상궁에게는 씨알도 안 먹힐 듯했다. 은화는 당황과 포기한 심정으로 눈동자를 굴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행동은 여염집 아녀자도 해서는 아니 될 행동이라고, 큰일 날 행동이라고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또 대체 어디에서 자빠져…, 아니 드러누워 주무신 겁니까.”

“안 잤….”

“안 주무셨다니요? 모습이 또 땅바닥 위에서 구르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인데요!”

최대한 태연한 얼굴로 시침 떼보려 했지만, 냉정하고 가열 찬 음성이 응수해 왔다. 입을 떼다 말고 은화가 멍하니 최 상궁을 바라봤다.

‘그래도 털었는데. 어찌 안 거지?’

어쩜 이리 귀신같이 알아차리는지 신기한 기분이었다.

“하아.”

최 상궁이 멍해 있는 은화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높여 말하던 언성을 애써 낮춘 채 시선을 돌려 자신과 함께 이곳 수안궁에서 공주의 최측근으로 일하는 궁녀 효선을 찾았다.

“효선아, 듣고 있느냐? 씻을 물을 준비해야겠다.”

“아, 예. 최 상궁 마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런데 공주님, 이번에는 대체 어디에서 주무신 거예요? 처소 안 나무 위들은 제가 다 살펴봤는데요.”

“후원 정자.”

효선의 말에 은화가 떨떠름한 얼굴로 답했다. 침소의 곁방에서 나왔던 효선이 ‘아아.’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은화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녀가 대체 어떻게 안 걸까, 하고 궁금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거요. 이거.”

효선이 최 상궁을 눈짓하면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했다.

“아.”

그제야 은화가 등 뒤에 늘어져 있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힐끔 응시했다.

“가지런히 빗고 나서신 머리카락이 그게 뭡니까. 새가 둥지 하자고 하겠습니다.”

돌아보지도 않고 효선의 행동을 알아차린 최 상궁이 시큰둥하게 맞장구쳤다. 은화가 애써 빗어 내렸던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잡아봤다.

역시,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는 정도로는 눈속임하기에 무리였던 것 같다.

“큭.”

꾸물거리며 제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공주를 보면서, 남자의 입술 사이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듯했다.

그녀를 지켜본 지 이제 겨우 몇 달이었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남자가 팔을 뒷머리에 괴며 등을 나뭇등걸에 깊이 기댔다.

은화가 최 상궁에게 등을 떠밀려 씻으러 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은화가 정자에서 누워 잠이 들어 있을 때는, 수안궁 지붕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지만, 지금은 침소 입구까지 들창 너머로 훤히 보이는 아름드리 나뭇가지 사이로 몸을 옮겼기 때문이었다.

공주의 처소에서 제 안방처럼, ‘그녀를 훔쳐보며’ 생활하고 있는 남자였다.

게다가 그 남자는 무엄하게도 비스듬히 몸을 눕힌 채, 차갑기 그지없는 얼굴에 잠깐 드러났던 미소를 깨끗하게 지워낸 채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도 나가려는 모양이군.’

그녀가 침소 안으로 들어서며 문을 닫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수안궁을 향해 있던 시선을 거뒀다.

대신 그의 시선은 경계가 삼엄한 전각들, 그 붉은 지붕 위를 무심히 훑어내렸다.

이곳 동휘국의 구중궁궐을 이루고 있는 전각들이었다.

수안궁이 지대가 높고, 그가 몇 달째 숨어 살다시피 하는 나무가 높고 커서 동휘국의 구중궁궐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자, 이제 어떻게 할까?”

공주를 향해 있던 시선에는 어느새 북풍한설 같은 차가운 기운만이 가득 내려앉아 있었다.

그가 낮게 중얼거리며 싸늘한 시선으로 궁궐의 어느 한 곳을 짚었다.

그곳에 아마 자신의 원수가 있을 터였다.

‘한가하게 퇴궐 준비를 하며, 오늘은 어떤 계집을 품고 풍류를 즐길까 고민 중이겠지.’

남자의 한기 어린 눈동자가 그곳에 있을 자신의 원수를 생각하며 더욱 싸늘해졌다.

“공주님! 씻은 물기를 닦지도 않고, 어딜 가십니까?”

그때 은화 공주의 수안궁 안쪽에서 또 최 상궁의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궁궐 전각을 돌아보며 다른 생각에 잠겨 있던 그의 시선이 다시 수안궁을 향했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공주가 어떤 행동으로 저 불쌍한 상궁을 괴롭히고 있는 것인지 이미 훤했다.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지 벌써 몇 달째였기 때문이었다.

눈깜짝할새 몸을 일으킨 남자는 수안궁의 지붕을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가 무슨 의도로, 이 경계 삼엄한 구중궁궐에 숨어들어 무엄하게도 공주의 생활을 엿보며 지내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우우. 컹. 컹!

그때 수안궁에서 가까운 산속 어디선가, 남자의 행동을 나무라듯 늑대의 울음소리가 크게 울려 펴졌다.

“아이쿠. 깜짝이야. 저 짐승이 또 이 근처까지 내려온 모양이네! 공주님께 아뢰어, 군사들에게 산속에서 짐승 사냥을 좀 하라고 하든지 해야지.”

밖으로 나와 낙엽 떨어지는 마당을 쓸고 있던 궁녀 효선이 그렇게 불만 어린 말을 내뱉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자꾸 수안궁 근처에서 나는 짐승의 울음소리에 깜짝깜짝 놀라는 탓이었다.

“저러니까 공주님의 거처인 수안궁이 흉가나 다름없다며, 다른 궁녀들이 놀리는 거라고.”

효선이 산밑의 담을 째려보며 불평 어린 말을 이어갔다.

“훗.”

사내는 궁녀의 불평 어린 말을 낱낱이 들으며 가볍게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담 너머를 바라보는 듯 느껴지는 순간, 그 자리에서 사내의 모습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01

개국한 이래, 태평성대를 지내 온 동휘국은 수십여 년 전부터 ‘권신들의 나라’라고 불렸다.

몇 대에 걸친 왕위 다툼으로 인해, 왕이 힘을 잃어 권력이 권신들에게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정확하게는 한 가문, 주씨 일문(一門)이 그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주씨 가문을 이끄는 주광은 현 왕의 친우이자, 세자의 스승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주광의 아비는 왕위 다툼을 조장했고, 끝내 자신의 의지로 왕위에서 가장 멀었던 소심한 왕자를 왕으로 옹립했다. 그랬기 때문에 현 왕은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정사에 관심에 큰 관심이 없었고, 무기력한 일상을 보내는 중이었다.

덕분에 가문을 물려받은 주광이 두려워할 이 없이 제멋대로 호가호위하고 있음은 당연했다. 그런 그들에게 빌붙은 간신배들 때문에 동휘국의 앞날은 점점 어둡기만 했다.

촤라락.

긴 나삼을 입고 너른 욕조에 앉은 예화의 위로 효선이 조심스레 물을 끼얹었다. 그러자 감아두었던 붕대가 젖으며 옆구리의 상처에서 붉은 핏기가 배어 나왔다.

편치 않은 얼굴로 옆에 서 있던 최 상궁이 그 광경에 깜짝 놀라 말했다.

“마마. 괜찮으신 겁니까?”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수안궁의 공주 침소였다. 정확하게는 목욕과 단장에 사용하는 그 곁방이었는데, 뒤늦게 공주의 옷을 정리하고 그곳으로 들어서던 최 상궁이 깜짝 놀라 하는 말이었다.

“괜찮아. 피가 멎어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목욕은 조금 일렀던 모양이네.”

자신의 상처를 흘깃 내려다본 은화가 특유의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남의 일을 말하듯 건조한 말투에 최 상궁은 울컥 심화가 치밀었으나 꾹 눌러 참았다.

“하아. 어쩌다가 이리 다치신 겁니까. 공주마마. 당장이라도 어의를 모셔와야겠습니다.”

고운 말로 그녀가 옷을 벗을 때 붕대를 감은 것을 보기는 했다. 하지만 여느 때처럼 긁힌 상처이려니 애써 자신을 다독였었는데, 이리 꽤 깊은 상흔을 입었는 줄은 몰랐다. 최 상궁이 걱정 어린 말로 간언했지만 돌아온 것은 시큰둥한 시선이었다.

“그건 안 된다고 했잖아. 내 다친 상처가 알려져서 좋을 게 없어. 또 어의가 직접 내 상처를 살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별것도 아닌 상처로 공연히 위험해질 일을 만드는 건 좋지 않아.”

최 상궁이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하아.”

하지만 그녀도 별수 없음을 알았던 모양인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효선을 향해 눈짓했다. 효선이 다가와 물기를 닦아 내고 약을 발라 붕대를 새로 감은 뒤 은화에게 의장을 갖추어 주는 것을 보면서 최 상궁은 입술을 들썩이며 내뱉지 못할 말을 삼켰다.

공주님에게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성격과 본분상 잔소리가 저도 모르게 입술 끝까지 차올랐다.

그만큼 그녀를 향한 잔소리가 최 상궁의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최 상궁. 아무 말도 할 생각 마.”

“…제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러십니까. 입도 벙긋거리지 않았습니다만.”

은화가 입을 비죽이는 최 상궁을 빤히 응시했다.

“입은 꽤 벙긋거렸는데…….”

“흠, 흐음. 그런 적 없습니다! 그건 그렇고 얼른 단장을 마치시지요. 전하께서 기별하신 지 꽤 되었습니다. 전하를 더 기다리시게 하는 건 아니 되지요.”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리는 은화의 말에 최 상궁이 사레라도 든 것처럼 크게 기침을 했다. 그리고 말이라도 돌리려는 것처럼 얼른 덧붙이는 말에 은화의 얼굴이 한없이 어두워졌다.

“아바마마께서?”

“예. 공주 마마.”

“…….”

“전하께서 부르신다는데 어찌 그런 얼굴을 하십니까? 무척 싫은 듯한 얼굴을 하고 계십니다. 혹 다른 이가 본다면 크게 경을 칠 일입니다.”

은화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최 상궁이 깜짝 놀라 말했다.

“아니…. 아바마마를 뵙기 싫어서는 아니고. 그냥 좀 배가 고파서…….”

은화가 그녀의 말에 시무룩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턱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다른 손으로 제 배를 어루만지는 것을 보니 배가 ‘조금’ 고픈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