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프롤로그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행복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다. -빅토르 위고-

어린 시절, 인생의 질풍노도라는 시절을 지나면서 누구나 한번쯤 미래에 대하여 소크라테스 못지않은 철학자가 되어 주름도 없는 양미간을 한 손으로 짚은 채 심각한 고민을 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또는 행복한 결말의 동화 속 공주님을 로망으로 삼고서 꿈을 꾸었던 소녀들이라면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백마 탄 왕자님이나 드래곤 성을 지키는 기사가 현실 어디엔가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사로잡혀 수줍은 미소로 깊은 밤을 지새운 적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인생이라는 것이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 현수는 생각했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인생들에게 ‘사랑’이란 마법을 부리는 요정이 찾아오면 다음과 같은 현상들이 일어나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아무리 차갑고 힘든 현실 속에서도 봄날의 새싹처럼 비집고 올라오는 삶에 대한 소망. 지독하게 춥고 외로운 일상속에서도 이별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 아무리 헤어짐이 아프더라도 누군가와 다시 시작할 담대함. 사소한 햇살마저 두근대며 인사하며 말을 걸어오는 것들이 '사랑'을 하면 가능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현수는 어린 시절부터 해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본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제로였다. 그녀는 유난히 어린 시절부터 가족 이외의 낯선 사람과는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답답한 김현수!’

아마도 엄마의 이른 상실로 인하여 타인과의 관계가 힘든 거라 그녀와 가족 모두 막연히 생각할 뿐이었다. 서럽지는 않았다. 수없이 많은 혼자만의 시간을 무심히 보내왔기에 그녀는 오히려 혼자 있는 시간이 편하고 익숙했다. 그리고 혼자만의 상상 속에서는 뭐든지 가능했다.

막상 친구들이 다가오는 걸 불편해하던 그녀였지만 어린 시절 그녀는 친구들과 즐겁게 웃으며 학교를 다니는 자신의 모습을 자주 상상하곤 했었다.

물론 어른이 되어서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는 물가 상관없이 사고 싶은 것은 살 수 있는 통장 잔고나 덜덜거리는 고물 자동차가 명품 세단이 되고, 재활용 수거함 속으로 들어가야 할 철 지난 옷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유명 디자이너의 옷이 되는 그런 상상을 하지만 말이다.

물론 아쉽게도 그런 일은 실제로 벌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녀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열심히 해왔다. 책을 좋아했고, 학교 수업과 공부도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아버지와 오빠들을 위해 집안 살림도 도맡아 했다.

‘맞아. 참 열심히 살아왔어. 다만 그 모든 게 혼자였지만….’

학창 시절 그 흔한 친구들과의 수다 한번 떨지 않고 책만 파고든 덕분에 그녀의 성적은 언제나 최상위권이었다. 최우수 졸업생으로 대학 졸업 후에는 무난히 대기업에 취업도 했다.

물론 대인관계를 제외하면 모든 것이 완벽했다. 어른이 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주변 사람들과 편하게 이야기를 하거나 마음을 여는 것은 그녀에게 버거운 일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잘 되지 않는 일이 있기 마련 아닌가.

특히 가족 이외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유난히 힘들었기 때문에 그녀는 직장 사람들이 다가와 말 걸어오는 것이 끔찍이도 불편했다. 그래도 가끔은 혼자 상상 속에서만이라도 그녀는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즐겁고 신나게 말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곤 했다.

‘다이아몬드처럼 말이야.’

어린 시절 우연히 책에서 보았던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를 그녀는 생생히 기억한다. 하나의 원소만으로 구성되어있는 다이아몬드는 천연 광물 중 압도적인 강도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녀도 다이아몬드처럼 끝도 없는 어둠 속 터널을 뚫고 누군가에게 설렘과 기분 좋은 단단한 아름다움이 되고 싶었다.

‘언젠가는, 나도….’

현수는 자신만의 생각 속에서 용기 있는 자신을 그려보았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마주하며 당당히 주어진 시간과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며 반짝이게 빛나는 자신을 상상해보았다. 특히 사랑하는 누군가에게는 더욱 눈 부신 사람이 되고 싶었다.

먼 훗날 지나온 자신의 길을 되짚어 보았을 때 하지 못 한 것들로 인한 후회는 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사랑에 관해서라면 그 누구 못지않게 행복한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마치 르누와르의 그림 속 근사한 남자의 품에 안겨 행복하게 웃는 여인처럼 말이다. 근사한 남자의 아름다운 여인. 그것이 바로 그녀의 인생 모토였다.

‘하지만, 어떻게?’

언제나 현실과 이상은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를 지니고 있었다. 현수는 거울 속 자신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거울 속에는 극강의 소심함을 자랑하는 자신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흔히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해서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기 힘들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최강 소심녀, 김현수.’

긍정적으로 말한다면 자아내면 관찰도가 높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어린 시절부터 타인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해 왔던 생각의 패턴이라 말할 수 있었다.

그녀는 유난히 소심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시절 구구단 외우기 숙제를 검사받는 시간. 그 짧은 2단을 외우는 동안 자신의 목소리보다 가슴에서 방망이질 치는 심장소리가 더 커서 주저앉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 것이 마치 뜨거운 사막을 지나가는 일이 되어 그녀의 얼굴을 시뻘겋게 만들기 일쑤였다. 유난히 낯을 많이 가리는 그녀의 성격으로 인해 그녀는 점점 더 혼자만의 공간에 갇히게 되었고 마치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사람처럼 모든 이들을 관람하는 방관자가 되었다.

그리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그녀의 어린 시절 추억이라 불리우는 일들이었다.

다행히 나이를 조금씩 먹으면서 그녀의 심각한 낯가림은 많이 좋아졌지만 길가에 덩그러니 놓인 택배상자처럼 위태로운 모습은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그래도 나빴던 기억만 있는 건 아니잖아. 안 그래?’

항상 나쁜 것만 있는 것이 아닌 것이 바로 인생이라 했던가. 혼자만의 공간에서 머물러야 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그녀는 꽤 괜찮은 학교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녀가 똑똑해서라기보다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책 읽기와 공부라서 그런 것이었다. 그렇게 책에 집중하다보면 어느새 자신에게 엄마가 없다는 슬픈 잡념들을 잊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성적표의 한자리수 등수는 그녀의 서글픈 어깨를 잠시나마 시원하게 펴게 해주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덕분에 소위 명문대라 불리는 대학에 들어가서 대학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대학은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수 만권의 책이 가득 가득한 도서관은 시간제한 없이 마음껏 이용할 수도 있었고 대학생이라는 이름으로 좋아하는 연극이나 공연들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굳이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아도 그녀 혼자서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들을 보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남학생들과 미팅이나 화사한 옷차림은 그녀가 범접할 수 없는 영역들이었다. 대학 동기들도 그런 그녀와 함께하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그녀 역시 낯선 분위기에 익숙해지기 힘들었다.

물론 그녀의 외모가 이상하게 생겨서 친구들이 그녀를 피한 것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에는 여드름과 굵은 안경으로 외모에 자신감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대학 입시 공부를 하는 동안 햇볕을 잘 보지 못 한 탓에 그녀의 피부는 더욱 하얗게 되었고 점점 엄마를 닮아갔다.

사진 속에서만 보았던 엄마. 현수가 보기에도 사진 속 엄마는 미인이었고 그런 엄마를 바라보며 활짝 웃는 젊은 시절 아빠의 모습도 근사했다. 아빠는 엄마를 처음 만나자마자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고 하셨다.

‘현수야, 네 엄마와 나는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었단다.’

현수는 아빠의 그 말이 참 듣기 좋았다. 아빠의 행복해하는 눈빛을 보고 있으면 희미해지는 엄마가 더욱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수능이 끝난 다음날, 안과병원에서 월급쟁이 의사로 일하는 큰 오빠가 막내 동생의 대학 입학 선물이라며 라식 수술을 시켜준 덕분에 그녀는 검정 뿔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안경을 벗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했던 말을 그녀는 잊을 수가 없었다.

'우리 현수, 안경을 벗으니 엄마를 더 많이 닮았구나. 너무 예쁘다. 우리 딸.'

찰나의 순간, 아빠의 슬픔과 기쁨이 함께 어른거리던 아빠의 그 눈빛을 현수는 잊을 수 없었다. 그녀도 모르는 사이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엄마를 점점 더 닮아가고 있었다.

‘내가 엄마를 닮았구나.’

미인이었던 엄마를 닮았다면 대인관계의 어려움이 그녀의 외모 탓이 아니란 것은 확실했다. 문제는 그녀 스스로 혼자 있으려고 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대학 입학 후, 낯가림이 너무 유별난 그녀의 모습은 대학 친구들에게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동기들은 한두 번 그녀에게 어울리기를 청하기는 했지만 결국 현수는 어김없이 고개만 저으며 소리 없이 사라지곤 했다. 덕분에 대학에 입학한지 한 달도 안 되어 그녀는 별명이 생겼다.

‘유령’

소리도 없이 강의실에 들어와 수업을 들었다가 수업이 끝나면 인사도 없이 사라지는 그녀에게 붙여준 동기들의 별명이었다.

물론 그녀는 자신의 별명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졸업 할 때쯤 되어서야 작별인사를 하는 친구들에게 들어서 알았다. 그 정도로 그녀는 주변인들과 원만한 관계가 무던히도 힘들었다.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수다쟁이인 그녀였지만 집 밖에서 그녀는 ‘유령’이었다.

잠시 세상 밖으로 나와서 사람들을 존재를 살펴보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유령. 그것이 바로 그녀, ‘김현수’였다.

***

스물다섯. 지금 현수의 나이이다.

하지만 그녀는 가끔 생각한다. 자신의 몸은 한해 한해가 지나감에 따라 나이를 더해가고 있지만 그녀의 진짜 나이는 일곱 살에서 멈춰버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의 나이 일곱 살. 혼자서 놀이터에서 놀고 있으면 조금씩 해가 기울어지고 옆에서 놀던 친구들은 어느새 사라져버리곤 했다. 엄마의 부름을 받고서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자신도 엄마가 불러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나 자신을 부르는 것은 텅 빈 놀이터 모래들을 휩쓸고 지나가는 캄캄한 밤바람의 싸늘한 촉감 뿐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혼자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싫었지만 커다란 파란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항상 할머니의 맛있는 식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

“우리 현수 왔니? 어서 들어오너라. 손 닦고 식탁에 앉으렴.”

한상 가득 올라온 맛있는 할머니 반찬들이 현수를 향해 미소 지어주면 놀이터에서 느꼈던 씁쓸하고 서늘했던 바람의 기억은 어느새 사라지고 따스한 저녁시간이 한가득 밀려 들어왔다.

일곱 살. 엄마 없이 보내기에는 너무나도 어린 소녀였다.

어느 날 갑자기 그녀의 엄마는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 현수의 기억 속 엄마는 항상 하얀 피부에 가녀리고 약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도 항상 현수가 밝고 신나게 율동하며 동요를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는 활짝 웃어 주었다. 어린 그녀는 엄마를 더 많이 웃을 수 있도록 집에서는 항상 있는 힘껏 노래를 불렀다.

여느 때처럼 엄마는 또 병원에 갔다고 했다.

“할머니. 엄마는 언제 와요?”

“글쎄다….”

할머니의 표정이 유독 어둡긴 했지만 그래도 엄마는 항상 몇 주가 지나면 다시 웃으면서 집으로 돌아와 있는 힘껏 그녀를 안아주었다. 이번에도 분명 그럴 거라 생각하며 기다려보았지만, 엄마는 한 달이 지나도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유치원에서 돌아온 그녀 앞에 펼쳐진 집안 풍경이 이상하고 낯설었다. 오빠들이 할머니 품에서 울고 있었고 아버지 역시 창밖만 바라보며 어깨를 들썩였다.

“아빠, 왜 그래요?”

숨길 수 없는 슬픔에 꺼이꺼이 소리 내어 울고 있는 아버지의 등을 다독이던 할머니가 현수에게 다가와 따듯하게 꼬옥 안아주었다.

“현수야, 할미가 곁에 있으니까 우리 현수 아무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 알았지?”

수염이 덥수룩한 모습을 보인 적 없었던 단정한 아버지였지만 엄마가 사라진 후 꽤 오랜 시간 동안 아버지의 말끔한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아버지는 현수를 앞에 앉혀 놓고 울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현수야. 아빠가 할 말이 있는데 해도 될까?”

힘겹게 꺼내놓는 아버지의 말에 어린 현수는 긴장하며 들었다.

“우리 현수, 이제 일곱 살이지? 많이 컸어. 그렇지?”

“응! 나 이제 엄마 없어도 혼자서 양치하고 세수하고 옷도 갈아입을 수 있어요.”

“맞아. 우리 현수 다 컸어. 그래서 아빠가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괜찮을까?”

“응! 해도 돼요!”

“우리 딸. 엄마가 아파서 병원에 간 후로 갑자기 집에 안 오는 거 알고 있지?”

“응, 할머니가 엄마가 많이 아프다고 한 달 있다가 집에 올 거라고 했어요.”

“그래…. 엄마가 러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 할 것 같아.”

“왜요?”

“엄마가. 너무 아파서 오지 못 할 것 같아.”

“그럼, 언제 다시 오는데?”

“엄마는…, 하늘나라에 갔어. 나중에, 아주 나중에 만날 수 있을 거야.”

“싫어. 그럼 나도 하늘나라 갈 거야!”

“그건, 나중에 갈 수 있어. 현수야. 아빠도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그런데 참고 있어. 왜냐하면 우리가 자꾸 울면 엄마가 힘들까봐. 우리 현수, 엄마가 힘든 건 싫지?”

“응….”

울먹이는 자신을 보며 아버지도 간신히 눈물을 참고 있다는 걸 어린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현수는 아빠가 속상한 게 싫었다. 그래서 더 이상 아빠 앞에서는 엄마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근데, 엄마한테 불러주려고 연습한 노래가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 어떡하죠? 으앙!”

엄마에게 아직 불러주지 못 한 동요들이 한가득 남아있는데, 더 이상 엄마에게는 불러줄 수 없다는 아버지의 말에 현수 역시 목 놓아 울어 버렸다.

엄마가 보고 싶은 것보다 엄마에게 불러 주려고 연습한 노래들이 더 이상 소용없다는 것이 그녀는 더 속상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엄마가 보고 싶은 수많은 순간이 불쑥 찾아왔지만 어린 현수는 말로 꺼내 놓을 수 없었다. 엄마라는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기만 해도 아버지와 오빠들의 굳은 표정이 어린 그녀의 마음을 너무나도 아프게 했다. 그래서 어린 현수는 엄마가 보고 싶을수록 더욱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엄마….‘

어렸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엄마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엄마의 존재가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린 것에 대해서 그녀 못지않게 가족들도 많이 힘들어하고 있음을 말이다. 특히 아버지가 제일 힘들어하셨다.

엄마 사진을 가슴에 끌어안고서 혼자서 울먹이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마치 날카로운 바늘이 그녀의 가슴을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하늘나라에 있는 엄마를 마음속으로만 부르곤 했다. 그러면 어김없이 엄마가 꿈속에 나타나 그녀를 안아주곤 했기에 그녀는 잠자며 꿈꾸는 시간이 제일 좋았다.

그리고 다행인 것은 엄마가 사라진 이후 무엇보다 할머니가 현수의 곁에서 맛있는 음식을 해주시는 것이었다. 할머니 앞에서라면 마음껏 엄마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야. 우리 할머니 음식은 세계 최고예요!”

“맛있어? 내 새끼. 많이 먹으렴.”

“할머니! 이 두부조림도 우리 엄마가 좋아했어요? 여기 있는 된장찌개도 좋아했어요?”

“그래, 엄마가 많이 좋아했던 음식이지.”

“그래요? 나도 우리 엄마처럼 두부랑 된장찌개 좋아요!”

어린 현수는 집에서만 말을 했다. 이상하게도 엄마가 하늘나라로 가버린 다음부터는 밖에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현수야, 근데 왜 유치원에서 친구들이랑 말을 안 하는 거니?”

“음…, 그냥요. 말하기 싫어요.”

유치원에서도 거의 말하는 것을 볼 수 없다며 선생님이 걱정스러워했다. 할머니도 어린 손녀딸의 모습이 눈에 띄게 달라져서 걱정스러웠다.

다만 집에서의 현수는 여느 소녀들과 다름없이 재잘거리기를 좋아했기에 가족들은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현수의 그런 모습들이 잠시 스쳐 지나가는 생채기라 생각하며 말이다.

“우리 현수 배 많이 고프지?”

“네! 너무 고파요. 히.”

“근데 왜 이제야 들어와. 이 할미가 한참 기다렸잖어!”

“그냥요. 놀이터에서 놀다 보니까요.”

“친구들과 같이 놀았어?”

“아뇨, 나 혼자. 그냥 혼자서 있는 게 편해요.”

현수의 외할머니인 신 여사는 자신의 금지옥엽 딸을 빼 닮은 손녀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유난히 피부가 하얗고 고운 눈망울을 지닌 딸 정인을 똑 닮은 손녀딸이었다.

공부도 잘했던 정인이는 한국대학교에 입학하며 서울로 상경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름방학이 되자 키가 훤칠하고 눈매가 서글서글한 청년과 함께 경주로 내려왔었다.

“어머님. 정인이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청년은 불쑥 집에 찾아와서 딸과 결혼하고 싶다며 당차게 이야기했다. 대학 1학년이 무슨 결혼이냐며 혹시 사고를 친 것은 아닌가 하여 밤새도록 정인이와 지금의 사위를 다그치기도 했다.

나이가 여덟 살이나 많았던 사위는 군의관으로 근무하고 제대한 뒤 본교 병원에서 레지던트로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오랜만에 찾아간 대학 영화 동아리에서 정인이를 만났다고 했다.

군의관 제대 후 대학 신입생 정인이를 보고 첫눈에 반했고, 하루빨리 정인이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온 것이라며 무릎 꿇고 밤새 집 안뜰에서 나갈 생각을 안 했다.

정인이의 아버지가 있었더라면 그 난처한 상황을 쉽게 정리할 수 있었겠지만 신 여사 또한 일찍 남편을 여의고 딸과 둘이 살아온 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