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 만남

처음으로 승차하는 고급 차량의 감촉이 지안은 영 불편했다.

길지도 않은 18년 해를 사는 동안 잘생긴 기사까지 대동하고 이처럼 귀빈 대접받는 것이 처음이었던 그녀는 그저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어리둥절한 건 옆에 앉은 그녀 어머니도 마찬가지인 듯싶었다.

물끄러미 창밖만 내다보고 있는 어머니의 무표정한 얼굴에선 결코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엿보이고 있었다.

그녀의 손을 꼭 쥐고 있는 어머니의 보드라운 손아귀 안에선 끈적끈적한 땀들이 흥건하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지안은 교복 재킷 안에서 손수건이라도 꺼내어 땀으로 축축해진 어머니의 젖은 손바닥을 닦아 드리고 싶었지만 깊은 상념을 깨뜨리면 안 될 것 같아 얌전히 앉아 있었다.

한 달 전 가게를 접은 어머니는 학교에서 하교하던 그녀를 무작정 데리고 대기하고 있던 차량 안으로 함께 올라탔다.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야?”

미끄러지듯 차량이 서서히 출발하자 그제야 지안은 나름 멋을 부린 어머니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20살 꽃다운 나이에 미혼모의 몸으로 그녀를 출산한 어머니는 올해 30대 중반을 넘어선 미인이었다.

게다가 얼굴까지 동안이었기 때문에 모녀가 나란히 서 있기라도 하면 친자매로 오해받기도 했었다.

어머니는 매력적인 미모 덕분에 사방에서 유혹의 손길 또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뻗쳐왔었으나 꿋꿋이 견뎌냈다.

물론 이유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딸 서지안 때문이었다.

작년 여름, 5살 연하인 젊은 사업가가 청혼했었을 때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었다.

“정말 어디 가는 거야?”

“좋은 데.”

“좋은 데 어디? 설마 우리 이사가?”

“응.”

어머니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말 없었잖아? 근데 이삿짐은 어디 있어?”

“전부 버리고 왔어. 미안해. 미리 말 안 해줘서. 나중에 전부 얘기해줄게.”

집게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는 어머니의 조용한 시늉에 지안은 백 개도 훨씬 넘을 것 같았던 질문들을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고급 차량이 멈춘 곳은 역시 고급스럽게 지어진 커다란 저택 앞이었다.

손수 뒷좌석 문까지 열어주는 기사의 부담스러운 친절에 그녀는 어머니의 뒤를 따라 냉큼 차 안에서 내렸다.

“여기가 어디야?”

“앞으로 우리가 지내야 할 집.”

온통 수수께끼 같은 어머니의 대꾸에 지안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혹시 엄마 결혼해?”

만일 정말 그런 거라면 어쩌면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릴지도 몰랐다. 세상에서 가장 상냥하고 예쁜 어머니를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긴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아니.”

“그럼?”

“사실 오늘부터 이 집에서 입주도우미를 하기로 했어.”

“입주도우미? 설마 가사도우미를 말하는 거야?”

깜짝 놀란 지안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렇긴 한데 월급도 제법 많고 네 대학 학비 정도는 충분히 벌 수 있을 것 같아서…….”

“결국 나 때문에 이 집에서 입주도우미를 하겠다는 거야?”

“딱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야.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 같은 건 안 해도 돼.”

“정말 내 학비 때문에 이러는 거라면 다시 생각해봐. 학비 정도는 내가 충분히 장학금 받을 수 있어. 그리고 그 밖의 생활비는 알바하면서 벌면 되고.”

소규모 화장품 가게를 했던 어머니의 가게가 최근 들어 손님도 줄고 매출이 신통치 않아 결국은 접고 말았었다.

근처에 대형 화장품 매장이 생기면서 손님들이 그쪽으로 몰렸기 때문이었다.

“지안아, 엄마 믿지?”

“어?”

가까이서 자신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다정한 시선 안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더 이상 어머니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지안은 옅은 한숨을 나직이 내쉬었다.

기사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그녀는 어머니와 나란히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들어갔다.

“근데 엄마, 이 집 주인과 잘 아는 사이야? 직접 차까지 보낸 걸 보면. 보통은 그런 과잉친절은 베풀지 않잖아?”

“어릴 적 한동네에서 친하게 지냈던 분이야. 우연히 만나게 됐는데 내 사정을 듣고 입주도우미를 부탁하셨어.”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을 둘러보면서 어머니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지금처럼 어머니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별로 본 적이 없었던 지안은 그 모습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언제나 단아한 이미지에 늘 무표정한 얼굴로 생활했던 어머니가 이 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계속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래. 엄마가 행복하면 나도 좋은 거야. 근데 짐은 왜 전부 버리고 온 거지? 하다못해 옷가지라도 챙겨왔어야 하는 거 아닌가?’

지안은 빈 몸으로 달랑 남의 집에 이사 들어오는 것이 영 께름칙했다.

그녀가 제일 아끼는 속옷과 몇 벌 안 되는 청바지까지 두고 온 것 또한 내심 마음에 걸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절친 혜영이가 청바지 빌려달라고 했었을 때 선심이나 쓸 걸…….’

지안이 어머니와 나란히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백발이 성성한 노년의 신사가 두 사람을 정중히 맞아주었다.

검은 양복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착용한 노신사의 모습은 말 그대로 멋스러운 중후함을 풍기고 있었다.

사람은 무엇보다 첫인상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녀는 괜스레 머리를 매만지고 짧은 교복 치마 위의 미세한 먼지들을 탈탈 털어냈다.

“오시는데 불편한 건 없었습니까?”

“덕분에 편하게 왔습니다.”

낯가림이 심한 어머니는 노신사와 안면이 있는 듯 시선을 가까이 마주하며 대답했다.

“대표님은 오늘 좀 늦으십니다.”

이내 노신사의 시선이 지안에게 향했다.

“제 딸 서지안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어머니가 그녀를 노신사에게 소개했다.

어색한 자세로 어머니 뒤에 서 있던 지안은 엉겁결에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노신사의 눈길에 지안은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엄마의 미모를 쏙 빼닮았네요.”

분명 칭찬인 건 확실한데 그녀는 여전히 노신사의 강한 카리스마에 짓눌려 잔뜩 겁먹고 있었다.

“이 집안의 모든 일을 도맡고 계시는 백 집사님이셔. 그냥 집사님이라고 부르면 돼.”

어머니의 자상한 설명에 지안은 그저 고개만 부지런히 끄덕거렸다.

“백 집사님!”

그때 난데없이 욕실 안에서 튀어나온 남자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그녀는 소리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 지금 갑니다!”

환갑을 훌쩍 넘긴 연세에도 불구하고 백 집사는 우렁찬 대답 소리와 동시에 쏜살같이 욕실로 달려갔다.

“우리 정말 이 집에서 사는 거야?”

거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어머니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던 지안은 온통 값비싼 가구들로 이루어진 부잣집에서 지내게 된 것이 웬일인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작은 평수에 화장실도 아담했던 예전 살던 집이 벌써부터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활짝 열린 욕실 문 사이로 제일 먼저 지안의 눈에 보인 건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남자였다.

“이 집의 아드님이십니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있는 남자를 백 집사가 두 사람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방금 전 샤워를 마친 듯 촉촉이 젖은 갈색빛 머리칼 사이로 남자의 예리한 눈빛이 지안과 어머니를 쏘아보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도 못마땅한지 일자로 꾹 다물어진 남자의 입술은 냉소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조금이라도 미소가 머물고 있었다면 잘생긴 얼굴이 더욱 돋보였을지도 모른다.

“이분은 입주도우미로 함께 지낼 서고운 씨입니다. 그리고 여기 여학생은 아주머니의 딸 서지안 양이고요.”

백 집사의 친절한 소개에도 남자는 여전히 얼음장 같은 표정만 고수하고 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먼저 허리를 깊숙이 조아리는 고운의 태도에 남자는 끝내 단 한마디 대꾸도 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해하세요. 원래는 저리 차가운 성격이 아니셨는데…….”

민망해진 백 집사가 그를 대신해 고운에게 양해를 구했다.

“괜찮습니다. 다 알고 있으니까요.”

나이 어린 자신을 무시하는 건 상관없었지만 처음 마주한 그녀 어머니까지 인격적 대우를 하지 않는 남자가 지안은 내심 못마땅했다.

뽀로통해진 얼굴로 잔뜩 볼이 부어 있는 그녀와 달리 고운은 남자의 냉랭한 태도에도 전혀 상처받지 않은 듯 보였다.

빈방이 여러 개 있는 탓에 두 사람은 2층에 있는 방을 각자 사용하게 되었다.

백 집사가 일러준 방으로 들어가자 푹신한 침대와 최신형 노트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가 정말 내 방이란 거야?”

TV에서나 보아왔던 유럽식의 고급스러운 방안에서 지안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커다란 꽃무늬 시트를 깔아 놓은 침대 위에 감히 앉아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그녀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빠끔히 옷장 문을 열어보았다.

순간 놀라움으로 한껏 벌어진 그녀의 입술 사이로 짤막한 감탄사가 여지없이 튀어나왔다.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린 의상들 때문에 지안의 두 눈은 휘둥그레지다 못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서랍장마다 새 속옷과 양말 등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고, 낯익은 교복과 가방은 지금의 이 상황들이 절대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각인시켜 주고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어머니가 왜 굳이 짐을 챙겨오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똑똑.

마음에 드는 옷들을 몸에 대보고 있던 지안은 노크 소리에 재빨리 옷장 문을 닫았다.

“어때? 방은 마음에 들어?”

어느 사이 다른 옷으로 갈아입은 고운이 방안에 들어섰다.

몸의 곡선을 그대로 드러낸 원피스 위에 앞치마를 두른 어머니의 자태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근데 엄마, 이젠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 줄 수 있어?”

아무리 어릴적 같은 동네에서 친하게 지냈던 사이었다 하더라도 이처럼 자신과 어머니에게 극진한 대접을 해주는 것이 그녀는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분명 이건 도를 넘어선 선심이었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거야. 넌 아무 생각 말고 여기서 편히 지내기만 하면 돼.”

좀처럼 딸의 궁금증을 시원스레 풀어주지 않는 어머니가 내심 서운하기도 했지만, 지안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녀가 계속 조르고 떼를 써봤자 어머니 성격에 어떠한 얘기도 속 시원히 들려주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너도 얼른 옷 갈아입고 나와. 샤워하고 싶으면 지금 해도 상관없어.”

그러잖아도 무더운 여름 날씨에 온몸이 땀으로 근질근질했던 지안은 곧장 새 옷을 챙겨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를 틀자 뜨거운 물줄기가 분수처럼 그녀 머리 위로 쏟아졌다.

긴 목선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 소리를 들으면서 지안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찬물을 유독 싫어하는 그녀는 한여름에도 뜨거운 샤워를 즐기곤 했었다.

여유 있게 샤워를 마친 지안은 간편한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곧장 1층으로 내려갔다.

드라이로 말린 그녀의 긴 머리카락들이 기분 좋게 목덜미를 간질였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마침 방에서 나오던 남자와 지안은 정면으로 마주쳤다.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남자의 살벌한 기세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주춤 뒷걸음치고 말았다.

“제 이름은 서지안이에요.”

순식간에 집안 공기를 무겁게 짓눌러 버리는 남자의 차가운 태도가 내심 버거웠던 지안은 묻지도 않은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백 집사가 남자에게 그녀 이름을 알려주긴 했지만, 그는 분명 뒤돌아선 순간 금세 잊어버렸을 것이다.

“관심 없어.”

처음으로 남자가 지안에게 던진 말이었다.

휠체어를 움직여 현관 밖으로 나가는 남자의 근사한 뒤통수를 그녀는 잠시 쏘아보았다.

앞으로 이 집에서 얼음장보다 더 차가운 남자와 함께 지내야 할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갑갑하고, 눈앞이 막막해져 왔다.

**

저녁 준비하는 어머니를 돕기 위해 지안은 주방으로 들어갔다.

“일부러 주방에 안 들어와도 되니까 네 할 일이나 해.”

옆에서 콩나물이라도 다듬으려는 그녀를 고운은 극구 만류했다.

“별로 할 일 없어.”

“그럼, 정원이라도 산책하던가. 꽃들이 활짝 핀 게 정말 예쁘더라.”

넓은 정원은 이미 인간미 제로인 남자가 먼저 차지하고 있었기에 지안은 현관 밖으로 나갈 생각을 아예 접어버렸다.

“근데 엄마, 그 남자 말이야…….”

그녀가 누굴 말하는지 처음엔 짐작 못 했던 고운은 뒤늦게야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려 보였다.

“너보다 열 살이나 많은 오빠야. 이름은 도하준이고.”

“왜 그리 사람이 쌀쌀맞을까?”

“2년 전 교통사고 이후로 성격이 그리 바뀌었대.”

“교통사고?”

지안의 호들갑에 고운이 눈짓으로 목소리 낮추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정 심심하면 책이라도 읽던가.”

나물을 무치고, 찌개를 끓이는 고운의 바쁜 손놀림에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방으로 다시 올라갔다.

창문을 통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정원 한가운데서 하준은 혼자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창 혈기 왕성한 나이에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되어버린 그가 내심 측은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 그를 지안은 절대 용납할 수가 없었다.

요즘은 몸이 불편하더라도 얼마든지 사회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는 자기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도통 어느 누구와도 쉽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자 슬슬 배가 출출해진 지안은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주방으로 내려갔다.

뜻밖에도 하준이 혼자 저녁 식사 중이었다.

“넌 나중에 차려줄게.”

단박에 그녀 배가 홀쭉해진 사실을 눈치챈 고운이 다정히 귓속말로 속삭였다.

그는 밥 먹는 동안 입 한번 떼지 않고 부지런히 밥숟가락만 움직였다. 이따금 달그락거리는 젓가락질 소리만이 쥐 죽은 듯 조용한 주방 안을 울리고 있었다.

“엄마, 우린 나가 있자.”

할 일도 없이 그가 밥 먹는 모습만 멀거니 지켜보고 있자 그녀 자신도 모르게 목구멍 안으로 군침이 넘어가고 있었다.

허기진 뱃속에서 연신 아우성치는 소리를 행여 그가 들을까 싶어 지안은 슬그머니 아랫배를 움켜잡았다.

밥 한 공기를 해치운 하준은 백 집사의 도움으로 다시 휠체어에 옮겨 앉았다.

건장한 그의 몸을 너무도 가볍게 들어 올리는 백 집사의 모습에 그녀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잘 먹었다는 인사 한마디 없이 주방을 나가 버리는 하준의 태도가 또다시 지안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저희도 이젠 식사하지요.”

식탁을 새로 차린 고운이 백 집사에게 말했다.

지안은 백 집사를 포함해 이처럼 셋이서 둘러앉아 저녁을 먹고 있자 마치 단란한 가족이 함께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인자한 할아버지와 다정한 엄마, 그리고 그녀…….

저녁을 먹는 동안 지안은 이 집의 주인인 대표님이 과연 어떻게 생겼는지 머릿속으로 상상해보았다.

‘콧수염을 멋지게 길렀을까? 아니면 구레나룻?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보통의 평범한 얼굴? 설마 대머리는 아니겠지?’

집안엔 대표님의 사진이 걸려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궁금증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아무튼 콧수염을 길러도 좋고, 대머리도 좋으니까 제발 저 사람처럼 성질만 괴팍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드디어 밤 9시를 넘어서자 대표님이 현관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다녀오셨습니까?”

백 집사의 단정한 인사에 맞추어 지안도 어머니와 함께 대표님께 다소곳이 인사했다.

“저녁은 먹었습니까? 여기까지 오느라 많이 피곤하겠군요.”

의외로 대표님은 그녀가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아주 멋지게 생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친절함이 배어있는 모습 또한 아들인 하준과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근데 엄마랑 어릴 적 한동네서 친하게 지내셨다면서 왜 존댓말을 하시는 거지? 너무 오래만이라 어색해서 그런 건가?’

그녀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어렴풋이 느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표님이 흐뭇한 얼굴로 방으로 들어가자 지안은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대표님 되게 멋지신 분 같아.”

“그래?”

그녀의 칭찬에 고운의 입가 위로 수줍은 미소가 번졌다.

“대표님 목욕물을 좀 더 따뜻하게 데워놔야겠다. 미리 받아 놓은 물이 많이 식었을 거야.”

고운은 종종걸음을 치며 급히 안방으로 향했다.

‘엄마 혼자 이 큰 집의 살림을 도맡아 하시려면 꽤 힘드실 텐데? 내가 많이 도와드려야지.’

결국은 자신 때문에 고운이 입주도우미까지 하게 되자 지안은 그런 어머니에게 진심으로 죄송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늦은 밤, 잠자리에 든 그녀는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갑작스레 잠자리가 바뀐 탓도 있었겠지만, 내일 새로 등교할 학교와 학급 친구들에 대한 설렘으로 지안은 밤새 몸을 뒤척거렸다.

예전에 다니던 학교에선 나름 전교생이 알아주는 퀸카였다. 모범생에 미모까지 겸비한 그녀 주위엔 항상 남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물론 그녀의 인기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이들도 여럿 있었지만 그다지 심각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그동안 어머니를 따라 여러 차례 전학을 다니긴 했었지만, 이번처럼 긴장되고 설레는 기분이 드는 건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