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문이 헛소문이라는 소문

짧게 깎은 머리카락. 퍼렇게 깎은 뒷머리 사이로 보이는 흉터 한 줄. 사선으로 길게 10센티미터쯤 그어진 흉터로 인해 중학교 때 7대 1로 싸우다가 생긴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오, 리스펙!”

7대 1로 싸워서 이겼다는 소문 때문에 은근 일진을 앙망하는 남학생들에게 그는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그 실력을 가지고도 일진들에게 휘둘리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일부 학생들의 존경 어린 시선을 받는 이유였다.

“무서워!”

태생적으로 싸움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들은 그를 두려워하는 쪽이었다. 그가 주먹을 휘두르거나 쇠파이프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소문을 들은 이상, 태연하기 어려웠다. 그가 근처에 나타나기만 해도 간이 콩알만 해지는 것이었다. 그의 앞을 피해 먼 길로 돌아가면서 그들은 애써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아예 관심 없는 독특한 인물 두어 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여학생들은 그를 좋아했다. 소문이 나빴지만, 실제로 그가 나쁜 짓을 하는 걸 본 사람이 없었다. 그를 앙망하는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그 소문이 헛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는 으레 문제아들이 그런 것처럼 질 나쁜 아이들과 어울리지도 않았다.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생수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로 적어도 1년 반 동안 그는 친구가 없었다.

“학교에서는 맨날 잠만 자는 것 같던데, 공부는 언제 하는 걸까?”

모의고사 성적이 공개되는 날, 학생들은 자신의 석차보다 그의 석차를 먼저 살폈다. 한 번도 10위 밖으로 나간 적이 없는 그의 성적은 늘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는 수업 시간에 먼 산을 보거나 아예 엎드려 자는 때가 많았다. 아무리 혼이 나도 반성하지 않고 제 기분대로 행동하는 그를 교사들도 포기했다. 그런 그였기에 처음엔 그의 성적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 잘못 표기가 됐거나, 무슨 착오가 있었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가 어떤 부정행위를 저질렀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의 성적은 언제나 상위권이었고, 지금은 아무도 그것을 부정하거나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얼굴도 잘생겼는데, 공부도 잘해.”

“거기다 젠틀하기까지!”

“만찢남이 실제로 존재한다니!”

“역시 우리 학교 명물이야!”

그렇게 그를 칭송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던 어느 날, 사건 하나가 터졌다.

“이나무? 네가 나무니?”

2교시와 3교시 사이 쉬는 시간. 3교시가 체육인 모 반의 학생들이 운동장으로 하나둘씩 나오고 있을 때였다. 운동장 쪽 긴 벤치에는 한 팔로 얼굴을 가린 채 나무가 누워있었다. 2교시에 화장실을 간다고 해놓고서 수업이 끝날 때까지 누워있던 참이었다.

그런 그에게 이름을 부르며 다가간 성아연. 뭇 남학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동급생. 그녀의 뛰어난 외모와 이지적인 이미지 때문에 타학교의 시선마저 끌어 모으고 있는 또 한 명의 학교 명물. 수많은 대시 속에서도 만인의 연인으로서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녀가 나무에게 다가갔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이 시간에 여기 누워있는 걸 보니 네가 이나무 맞네.”

체육수업 하러 나와 있는 학생들을 비롯해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목격한 건물 안 학생들의 시선이 호기심을 끼고 집중되고 있었다.

“성아연이 불러도 꿈쩍도 안 하네. 잠든 거 아니야?”

“들었어도 무시하는 거면 어떡하냐? 우리의 성아연이 까이는 거면 어떡하냐고?”

“에이, 그럴 리가! 아무리 이나무라고 해도 성아연인데? 걸어 다니는 여신인데?”

답 없는 나무 앞에서 아연이 그저 서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웅성대는 소리가 더욱 활발했다. 아연이 피식하고 웃은 뒤, 입을 열었다.

“당황한 모양이네. 내가 너에게 먼저 말을 걸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겠지.”

아연은 반응 없는 나무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너무도 당당하게 나무의 옆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앉았다. 그 위치가 나무의 허리 즈음 벤치의 빈 공간. 그녀가 자리한 위치 때문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욱 활발해졌다.

“야, 야, 뭐야? 성아연이 이나무에게 스킨십을…?”

“아냐, 아냐. 그냥 벤치에 앉은 거야. 제대로 좀 봐.”

자세히 본 사람은 아연의 엉덩이와 나무의 허리가 닿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 먼 거리에서 보고 있는 이들은 충분히 오해할 만한 자세였다. 아연의 시선은 끈질기게 나무를 내려다보았다.

“어! 일어났다!”

나무는 누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아연은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커다란 두 눈을 깜빡여 보였다. 셀카를 찍을 때 가장 예쁜 얼굴의 각도가 나무에게 보이게끔, 약간 오른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안녕? 아연이라고 해.”

아연이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학생들의 입에서 ‘캬아!’하는 감탄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아연의 앞에 앉은 이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유니크한 말을 뱉었다.

“비켜.”

표정 없는 나무의 입에서 새어 나온 자그마한 소리는 아연에게만 들렸다. 아연의 얼굴이 급격히 달아올랐다.

“뭐야? 뭐라고 한 거야? 뭐라고 했길래, 성아연이 아연실색한 거야?”

나무가 한 말이 무엇인지 궁금한 남학생들의 몸이 절로 쏠렸다. 아랑곳하지 않은 나무는 그들이 바라보는 곳인 벤치의 반대쪽을 향해 걸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서 성아연도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떨어지려는 자신감을 다시 끌어올렸다.

“너! 나랑 사귀지 않을래?”

아연의 말은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 선명히 들렸다. 체육복을 입은 학생들이 서로 놀란 눈을 바쁘게 교환했다.

“풋.”

짧게 웃음을 흘린 나무가 아연을 돌아보았다. 아연은 저도 모르게 고인 침을 꼴깍하고 삼켰다.

‘올 거야. 너는 나에게 다시 돌아와서 ‘그래, 사귀어 보자’라고 말할 거야. 분명히.’

아연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예쁜 미소를 지으며 나무의 답을 기다렸다.

“너, 나랑 잘 수 있어?”

아연의 얼굴이 다시 달아올랐다. 순식간에 나무의 얼굴에 음흉함이 가득했다.

“……뭐?”

아연의 얼굴은 달아오르다 못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나무는 성큼성큼 걸어서 아연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그리고 코가 맞닿을 만큼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아연은 당황하며 얼굴을 뒤로 당겼다. 그때 나무의 속삭이는 듯한 말이 빠르게 쏟아졌다.

“뭐지?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두 사람 거리가 너무 가까운 거 아니야?”

“설마, 신성한 학교에서 키스라도 하려는 건 아니겠지?”

가까워진 두 사람을 지켜보는 이들이 여기저기서 소란을 떨었다. 아연의 귓가에 나지막이 이야기하는 나무의 눈빛이 불량스럽게 번뜩였다. 나무의 이야기를 듣는 아연의 턱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런 아연을 내려다보며 나무는 재미있다는 듯 연신 웃음을 흘려댔다.

쫘악! 아연은 거침없이 나무의 한쪽 뺨을 세차게 내려쳤다. 나무의 얼굴이 옆으로 젖혀졌다. 이내 나무는 얼얼한 볼을 혀로 만지작거리며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예상하지 못한 가격에 분명 충격이 있었던 것이리라.

“얼굴도 잘생기고 공부도 잘하는데다가 젠틀하기까지 하다는 소문은… 이로써 헛소문이라는 게 밝혀졌네. 하! 이런 개만도 못한 저질 같으니라고. 너 같은 건 인간도 아니야.”

아연의 이를 악문 소리가 떨림을 감추지 못하고서 들렸다.

“그래. 나 인간이길 포기한 종자야.”

나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러니까 함부로 남의 인생에 발 들일 생각하지 마라.”

무서운 얼굴로 그 말을 할 때 아연은 뒷걸음쳤다. 짙은 눈썹을 미간 쪽으로 기울인 그의 얼굴이 정말로 무서웠다. 순간, 그를 둘러싼 싸움에 관한 소문들이 영상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연은 입술을 깨물며 그를 노려본 다음, 돌아서서 달려가 버렸다.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둘이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은 거야?”

지켜보던 이들의 의문은 증폭되었다.

“그러니까… 성아연이, 이나무한테… 까인 거지? 그건 확실한 거지?”

“근데, 이나무가 왜 맞았지? 고백을 안 받아줬다고 뺨까지 때리다니 너무한 거 아냐?”

진실이 무엇이든 소문은 소문을 덧입고 멀리멀리 퍼져갔다.

‘성아연이 이나무에게 공개적으로 고백했다가 차였다.’고.

***

“손님들 오신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러고 있어? 서두르지 못해?”

시어머니의 매서운 목소리가 며느리에게 사정없이 쏟아졌다.

“어머니, 저 컨디션이 좀 안 좋아요. 병원엘 좀….”

며느리는 부른 배를 붙들며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렇잖아도 차가운 얼굴에 더한 냉기가 어렸다.

“요즘 젊은 것들은 꼭 저렇게 나약하게 군다니까. 애 밴 게 무슨 큰 벼슬이라도 되는 줄 알아요. 난 우리 애 낳기 직전까지 밭일했어. 꼼수 부리지 말고 어서 어서 음식이나 내와.”

“어머니….”

며느리가 간절히 불렀지만 시어머니는 매서운 눈총을 한 번 더 쏠 뿐, 며느리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고아로 자라 배운 게 없어서 애가 좀 굼떠요.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가르치려니 한도 끝도 없네요, 쯧.”

손님들에게 하는 시어머니의 말에 며느리의 뒷목이 당겨왔다. 그때였다. 며느리는 한 시간 전부터 당겨오는 배를 움켜쥐고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고통이 극심했다. 그 바람에 들고 있던 쟁반이 떨어졌고 위에 놓인 해파리냉채 접시가 바닥에 떨어졌다.

“어머, 어머! 이 아까운 음식을! 얘, 너 뭐 하는 거니?”

시어머니의 기가 찬 고함이 며느리의 귀에 닿았다. 그러나 며느리는 더 이상 시어머니의 말에 복종할 수가 없었다. 극심한 통증과 함께 정신이 아득해졌다.

“김 여사님, 아무래도 구급차를 부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며느님이 상태가 좀 안 좋은 것 같아요.”

손님 중에 누군가가 말했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분노는 가라앉을 줄 몰랐다.

“참 나, 아주 꼴불견이 따로 없다니까! 임신 초기에는 입덧한다고 손가락 한 번 까딱 안 하더니 이제 좀 안정이 되고 나니 별 쇼를 다 한다니까요, 얘가!”

시어머니의 분노에 찬 고함을 들으며 며느리는 애써 실눈을 떴다. 커다란 날개가 자그마한 영혼을 감싸는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자그마한 영혼은 슬픈 눈으로 며느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튼튼아, 미안해.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며느리의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주연아, 주연아!”

뒤늦게 집에 돌아온 아들이 아내의 누운 모습을 보고서 기겁하며 다가왔다.

“넌 대체 이렇게 생각 없는 애가 뭐가 좋다고 결혼을 한 거니? 부모 없는 하찮은 것한테 내 아들 뺏긴 것도 억울한데, 며느리로 인정해줄까 하고 부른 자리에서 이런 실수나 저지르고, 어유, 내 팔자야!”

주연이 쓰러졌음에도 시어머니의 분노는 아직도 잠잠해지지 않았다.

“주연아, 괜찮아? 일어날 수 있겠어?”

아들은 아내의 상반신을 끌어안으며 차분히 물었다. 며느리는 허공에 머문 눈을 남편에게 옮기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튼튼이가… 튼튼이가…. 떠났어.”

남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내의 임부복을 입은 다리 아래로 선홍빛의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커다란 날개가 있는 천사가 튼튼이를 데리고 갔어. 어떡해, 오빠, 어엉…!”

며느리가 커다랗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시어머니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손님들이 수군대며 불편한 표정들을 지었다.

“오빠, 우리 튼튼이. 지키지 못했어, 어떡해, 어떡해!”

119에 전화를 걸고 구급차를 부른 남편의 품 안에서 며느리는 오열을 터뜨렸다.

아기가 찾아온 것을 처음으로 알던 날, 그때의 감격과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무엇보다도 아기가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에 ‘튼튼이’라는 태명을 지어 주었다. 그러나 튼튼이는 이름처럼 튼튼한 탄생을 하지 못했다. 엄마와 만난 지 7개월. 미숙한 상태에서 그만 밖으로 흘러버리고 말았다.

아기의 자그마한 영혼을 받아든 이가 있었다. 세 쌍의 날개를 펼쳐 내려 온 대천사 라파엘. 스러진 태아의 영혼을 데려가는 것은 또 다른 대천사, 미카엘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마침 치유의 임무를 끝낸 그녀의 눈앞에 데려가야 할 영혼이 보였다. 탄생하지 못한 채 생을 다한 영혼. 그 영혼이 대천사의 눈에 보인다는 것은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신은 선택한 태아의 영혼을 천사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그렇게 탄생한 천사는 ‘씨앗 천사(Seed Angel)’라고 불린다. 씨앗 천사는 천상계에서 천사로서의 삶을 위한 훈련을 받게 되고, 신의 명령을 받고 임무를 수행하는 역할들을 감당하게 된다. 그 선택의 기준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 누구도 반발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었다.

대천사이자 치유의 천사인 라파엘은 주저 없이 미카엘의 역할을 대신해 주었다.

“두려워하지 마렴. 엄마, 아빠는 괜찮을 거야. 너도 괜찮을 거고.”

라파엘은 따스한 음성으로 울고 있는 태아를 달래 주었다.

**

최고의 인기녀인 성아연이 보기 좋게 이나무에게 차였다는 소문이 다른 학교에까지 퍼져갔다. 그래서 나무에게 고백하거나 선물을 건네는 무수한 여학생 무리가 사라졌다. ‘성아연이 차일 정도’라는 기준 때문에 용기를 잃은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무로서 반가운 일이었다. 귀찮은 선물 공세를 더 이상 참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무를 괴롭히는 일이 새롭게 하나 추가되었다. 아연을 추종하는 남학생 중에 주먹 좀 쓴다는 녀석들의 시비가 귀찮을 정도로 나무를 따라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좋은 말로 할 때 N 클럽 뒤 공사장으로 나와라. 내 말을 무시하고 나오지 않는다면 너희 집이 새까만 둥지가 되는 꼴을 보여줄 테니까 알아서 판단해.”

어쭙잖게 성아연의 명성을 지키겠다는 조무래기들은 실력은 형편없으면서 말만 무시무시하게 하는 데 도가 튼 녀석들이었다. 세상에 대한 불만이 가득한 나무는 그런 녀석들이 들이댈 때마다 온갖 불만의 화풀이를 하곤 했다.

나무의 주먹은 강했다. 어릴 때부터 아빠와 많은 시간 운동을 한 덕에 어깨도 강했다. 태권도, 축구, 배드민턴, 탁구, 야구…. 어릴 때부터 단련된 나무의 몸은 단단했고, 어느 누구에게 해를 입을 만큼 약하지 않았다. 녀석들의 얼굴에 강한 주먹을 내리꽂을 때, 나무의 가슴에는 착잡함이 가득 차올랐다.

‘이러려고 단련한 주먹이 아닌데….’

맞고 간 녀석들은 귀찮게도 끈질긴 녀석들이었다. 한 놈이 맞고 가면 두 놈을 데리고 왔고, 두 놈이 막고 가면 세 놈을 데리고 왔다. 그 덕분에 잘생긴 얼굴이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경찰서를 드나드는 문제아들과 비슷한 삶의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나무는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들이대는 녀석들에게 당하고만 있을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강한 주먹을 탐내는 누군가의 뜻대로 살아줄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나무가 항상 싸움에서 이긴 것은 아니었다. 조무래기들이 데리고 온 ‘형님’ 중에는 나무가 이길 수 없을 만큼 강한 자도 있었다. 그런 때면 흠씬 두들겨 맞은 뒤, 바닥에 드러눕게 된다. 오늘도 가쁜 숨을 힘겹게 고르며 나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기억 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나무, 아빠가 언제까지나 지켜줄게.”-

“거짓말…!”

나무의 이를 악문 소리가 새어 나왔다.

-“우리 나무는 누구의 천사일까? 아빠는 나무를 지키고 나무는 엄마를 지킬까?”-

아빠의 환한 얼굴이 떠오르자 나무는 팔로 두 눈을 가려버렸다. 가려진 눈에서 물이 흘러내렸다. 나무는 쇳소리를 내뱉었다.

“젠장! 수호천사 따위 처음부터 없었어. 지키지도 못하고 먼저 가버리는 수호천사가 세상에 어디 있어? 그게 무슨 천사야?”

읊조리던 말을 뱉은 뒤, 나무는 아랫배에 힘을 줬다.

“거짓말쟁이!”

남은 힘을 짜내어 뱉은 고함이었다. 텅 빈 공사장에 그 고함이 메아리쳤다.

*

10년 전.

앙상한 가지 위에 흰 눈이 소복이 쌓였다. 어둠이 찾아왔지만 창에서 비치는 빛 때문에 아직도 눈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한 명씩의 수호천사가 있어요.”

나직하면서도 신뢰가 가는 저음.

“그 천사가 나를 위해 많은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아빠일 수도 있고, 나에게 엄청난 사랑을 부어주는 엄마일 수도 있어요.”

폭신한 침대. 그 위에 나란히 누운 어른과 아이. 어른은 자상한 얼굴과 목소리로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어른의 목소리에 한껏 귀를 기울인 아이의 눈이 초롱초롱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