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2016년 12월 31일.

탁탁탁탁탁.

나는 빠르게 키보드 자판을 두드렸다.

[한민석 주사님. 오늘 저랑 술 한잔해요.]

하지만 엔터키 위에서 닿을 듯 차마 누르지 못해 멈춘 손이 파르르 떨려 왔다.

‘으… 제발 눌러라… 누르라고 김소원….’

하지만 한참의 망설임 뒤에 나의 손은 엔터키가 아닌 책상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책상 위로 툭, 이마를 박았다.

‘바보냐. 술 한잔하자는 말이 뭐가 어렵다고!’

나는 고개를 들어 민원대 너머 행정팀 직원들 사이 찬연히 빛을 발하는 한민석에게 시선을 던졌다.

굴곡 없이 뻗어 내려온 콧날. 긴 속눈썹에 반쯤 가려진 깊은 눈매. 살짝 스치기만 해도 피를 뚝뚝 흘릴 것만 같은 붉은 입술까지. 잘나도 너무 잘난 그였다.

“짜증… 쓸데없이 심하게 잘생겨서. 좀 적당히 생기다가 말지….”

“그렇지. 한 주사님이 좀 심하게 잘생기긴 했지. 어쩌겠어. 그냥 차라리 포기해.”

“싫어!”

옆자리 같은 복지팀 소속 주영의 말에 나의 얼굴과 목소리에 심술이 덕지덕지 묻어났다.

나라고 포기하려고 안 했을까.

하지만 그때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는 그도 나에게 마음이 있지 않을까 하는 아주 미약한 희망 때문이었다.

올해 첫 발령으로 이곳 주민센터 복지팀에 합류하고 나는 하루라도 빨리 일을 숙지하고자 그 누구보다 빠른 출근을 했다.

그런데 항상 나보다 먼저 출근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한민석이었다.

“아메리카노 좋아해요?”

남들이 없는 빈 민원실에서 나에게 커피를 내미는 그의 얼굴엔 늘 조용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함께 했다.

그렇게 오전마다 그가 건네는 커피를 마시며 둘만의 소소한 시간을 보낸 지 딱 1년째. 그러니 한 번쯤 기대를 품어 볼 만도 하지 않을까.

서류를 만지던 그의 손이 멈췄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그의 모습에 나 역시도 빠르게 민원실 벽에 걸린 벽시계로 향해 시선을 던졌다.

17시 55분.

“뭐냐? 왜 벌써 퇴근 시간이냐고?”

나의 작은 외침에 옆자리에서 책상을 정리하던 주영이 힐끔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나의 컴퓨터 모니터 화면에 떠 있는 보내지 못한 쪽지를 발견하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는데 망설일 거 뭐 있어. 그냥 미친 척하고 보내 버려.”

“역시나 답은 정해져 있는 걸까…?”

그렇지 않아도 늘어진 나의 어깨가 더 힘없이 아래로 늘어졌다.

“그래도 단둘이 커피를 마시며 보낸 시간이 자그마치 1년인데 조금은 희망을 품어 봐도 되지 않을까?”

“헛된 희망이지. 한 주사님이 커피를 마시는 그 시간에 네가 있었을 뿐. 그 행동에 어떤 의미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너도 알잖아.”

“알지. 아니까 1년을 그냥 바라보기만 했지.”

“그래도 부럽네. 10대 소녀도 아니고 짝사랑을 1년이나 하다니.”

“짝사랑이 뭐가 부러워. 서글픈 거지.”

“이 나이 돼 봐. 스물 후반만 되어도 결혼에 대한 압박 때문에라도 가능성 없는 남자보다 가능성 있는 다른 남자에게 시선을 돌리게 되니까.”

어느새 책상 정리를 끝낸 주영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역시나 네가 1년이나 짝사랑을 할 수 있는 건 스물넷이라는 나이 덕분이려나?”

“스물넷도 그렇게 여유로운 나이는 아니랍니다. 나도 짝사랑 같은 것보다 제대로 된 연애를 하고 싶다고요.”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컴퓨터 화면에 시선을 던진 채 의미 없이 마우스를 딸깍거렸다.

1년을 거의 매일 민원실에서 함께 커피를 마시며 보냈다고는 하지만 그 오랜 시간 안에 그와의 사적인 대화는 없었다.

그 사실은 어쩔 수 없는 망설임을 만들었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퇴근 시간인데?”

주영이 핸드폰 메신저로 누군가와 바쁘게 대화를 시도하며 다시 말을 던졌다.

나는 빠르게 민원실 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벽시계가 1분 전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서둘러라. 네가 마음을 품은 미남자께선 지금 막 코트를 어깨에 걸치고 계신단다.”

주영의 중계에 나는 몸을 번쩍 일으켰다.

그녀의 말대로 어느새 코트를 다 입은 그가 허리를 숙인 채 마우스를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절대 안 돼!”

다급한 외침과 함께 나는 마우스를 그러잡았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음을 확인하고 이 지겨운 짝사랑을 끝내든 이어 가든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마우스가 화면에서 멈춘 채 움직이지 않고 있다.

나는 빠르게 마우스를 움직이며 왼쪽 오른쪽 타닥타닥 찍어 눌렀다.

“진짜 왜 너까지 말썽이니….”

나의 시선이 조급하게 움직이지 않는 마우스 커서와 컴퓨터 앞에 허리를 숙이고 있는 그의 모습을 번갈아 향했다.

그가 컴퓨터를 끄기 전 나의 쪽지가 꼭 전달돼야 하는데. 마음은 조급해 죽겠는데.

내 마음 따위는 알 길 없는 모래시계는 빙글빙글 잘도 돌아가고 마우스 커서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설마… 뻗은 거냐…?”

나의 눈동자가 어지러이 흔들렸다.

왜 하필이면 이 순간인 걸까.

큭큭큭.

주영의 웃음이 귀를 때렸다.

“뭐가 문제야. 직접 얼굴 보고 오늘 시간 있냐고 물어보면 되는 거지.”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면 1년을 그냥 보내진 않았겠지.”

원망처럼 말을 뱉어내고 나의 이런 마음과 상황은 전혀 알 길 없는 건너편 한민석을 향해 절망적인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코트를 팔에 걸친 그가 행동을 멈추고 가만히 컴퓨터 모니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은 놀란 듯한 표정을 한 그의 시선이 천천히 나를 향했다.

그만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행정팀 다른 직원들 역시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고는 나를 향해 어이없는 표정들을 쏟아냈다.

이유를 알 수 없어 멍하니 주위를 돌아보고 있으려니 파티션 너머 늘 머리카락 끝만 보이던 행정 사무장님이 벌떡 일어나 짝짝짝! 손뼉을 크게 쳤다.

“이야, 김소원. 배짱 하나 두둑하구나!”

그 말을 시작으로 직원들이 하나둘씩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게다가 직원 한 명은 나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고

“김 주사님 파이팅입니다요!”라며 흔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뭐지? 갑자기 다들 왜 그러는 건데?”

“김소원. 너 도대체 뭔 짓을 한 거냐?”

나는 빠르게 주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책상에 바짝 붙어 모니터를 뚫어질 듯 쳐다보던 그녀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왜냐고? 왜 웃는 건데?”

“컴퓨터 좀 봐라.”

찔끔 눈물까지 훔치며 손가락을 흔드는 주영을 보며 나는 불안한 시선을 모니터에 떨구었다.

분명히 멈춰 있던 컴퓨터 화면이었는데. 그 멈춰 있던 화면에 갑자기 노란 쪽지가 화면을 가득 채우며 쏟아져 날아들었다.

[김소원 씨. 나 한민석 씨 아닌데?]

[세상에나 이게 뭔 일?]

[김 주사님. 연말 잘 보내요.]

[술은 한민석 주사님 말고 나랑 마시자.]

“이게 뭐야?”

나는 마우스로 끝없이 열리는 쪽지를 빠르게 닫았다. 하지만 더 빠른 속도로 쪽지가 화면을 장식해 들어왔다.

[데이트 신청은 개인 톡으로 해라.]

[누구십니까? 저 아십니까?]

[좋을 때다.]

[김소원 씨는 아직도 직원용 메신저 사용법을 모르는 겁니까?]

“너 정말 대박이다.”

“도대체 이게 뭐야?”

“뭐긴. 아까 열심히 마우스를 딸깍거리더니 똥 컴과 똥 손이 일낸 거지 뭐.”

“설마 모두에게 그 쪽지가 날아간 거라고?”

“대단하다 김소원. 올 한 해의 마무리를 아주 찬란하게도 하셔. 잠깐 이건 또 뭐야? ‘소원아. 위로주 한잔 사줄까?’”

쪽지를 눈으로 읽어 내려가던 주영이 입술이 빨개지도록 깨물었다.

“다들 너 차이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구나.”

나는 얼른 마우스를 빼앗아 모든 창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망연자실 직원들의 시선을 피해 모니터 아래로 얼굴을 숨겼다.

“하아… 나 제대로 망한 거지?”

“그렇지. 이로써 주사님한테 들이대다 차인 여자 명단에 너의 이름 석 자가 깊이 새겨진 거지. 축하한다.”

“한 주사님은 뭐 하고 계셔?”

“궁금하면 직접 보지.”

그제야 나는 슬며시 그가 있는 자리로 고개를 들었다. 순간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던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으아아아!’

허겁지겁 얼굴을 책상 위로 바짝 내리 묻었다. 그리고 그가 보이지 않게 슬쩍 모니터 아래로 빼꼼히 그의 움직임을 살폈다.

잠시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그가 책상 위 컴퓨터를 향해 허리를 살짝 숙였다.

그런데 피식 그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는 건 나의 착각일까? 나는 빠르게 컴퓨터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행여 그가 어떠한 답을 보낸 것은 아닐까 하는 기대였다.

하지만 모니터를 화면 가득 떠 있는 건 여전히 다른 직원들의 쓸데없는 쪽지들뿐. 그는 그저 컴퓨터 전원을 끄는 동작을 취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 그는 들고 있던 코트를 휘날리며 어깨 위에 걸쳤다.

민원실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오로지 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차 키와 핸드폰을 손에 들고 그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민원실 유리문 앞에서 잠시 멈춰선 그.

잠시의 생각에 빠진 듯한 그의 뒷모습에 긴장으로 심장이 멈춰 버리는 것만 같았다.

아주 찰나의 시간의 흐르고 몸을 돌린 그가 나를 향해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

그의 행동에 생겨난 당연한 기대. 심장이 크게 두근거림을 시작했다.

허공에서 잠시 멈춰진 손을 이내 아래로 떨어뜨리며 그가 옅은 미소를 그렸다.

“연휴 잘 보내요. 소원 씨.”

“…….”

짧은 정적 속에 그가 나가고 이어 직원들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민원실을 가득 채웠다.

“김소원. 연휴 잘 보내란다. 어쩌냐?”

말과 함께 강아지 털 쓰다듬듯 나의 머리털을 한차례 쓸고 지나가는 몹쓸 인간들.

그렇게 나는 한 해의 마지막인 2016년 12월 31일. 마음에 품었던 남자에게 공개적으로 차였다.

***

형형색색 화려한 조명이 내려앉은 한강 물이 연신 일렁거렸다.

연신 들이부은 술 탓인지. 아니면 이미 진작부터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인지 모르겠다.

2016년 12월 31일. 열 시를 넘어가는 이 시각.

눈이라도 오려는 듯 잔뜩 찌푸려진 날씨에도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나온 가족이라든가, 연인이라든가 사람들로 넘치고 또 넘치는 한강 산책로.

롱 패딩 안으로 무릎 사이 얼굴을 구겨 집어넣었건만 엉덩이로 올라오는 시멘트 바닥의 찬 기운에 온몸에 한기가 돋았다.

“추워… 날이 너무 추워… 마음도 너무 추워….”

얼굴은 진작부터 눈물에 얼룩져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술 한잔하자는 쪽지에 어떤 답변도 없이 그저 연휴 잘 보내라는 그의 말이 곧 거절을 말함을 모를 리 없었다.

기대는 안 했기에 거절당할 각오가 되어 있었건만 생각보다 더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당장에 아픈 마음보다 더 끔찍한 건 이틀 후 출근해서 마주할 직원들의 놀림. 어쩌다 그런 실수를 저지른 것일까.

“똥 컴… 똥 손….”

나는 들고 있던 소주병을 입에 물고 벌컥 한 모금 들이마셨다.

“우에엑… 써… 너무 써….”

온몸에 퍼지는 술기운으로 인해 서러움 담긴 눈물이 멈출 줄 모르고 쏟아져 내렸다.

그러다 서러워 우는 것도 잠시 힐끔 나는 바로 옆 얼마 멀지 않는 곳으로 억울한 시선을 던졌다.

조금 전부터 롱패딩을 입고 구겨 앉아 굼벵이처럼 꿈틀거리는 그림자 하나.

깊게 눌러쓴 패딩 모자 사이로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는 수상한 어떤 인물이 영 신경이 쓰여 견딜 수가 없는 이유였다.

우습겠지. 연말인데 이런 곳에서 혼자 소주나 들이켜고 있으니 우스워 보인 탓이겠지.

행여 해코지라도 당하기 전에 집에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처참하게 무너진 심장이 될 대로 되라 하는 자포자기하는 마음과 부딪쳤다.

다시 소주를 한 모금 물었다.

그런데 이놈의 시커먼 굼벵이가 슬금슬금 앉은 상태로 내 옆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얼른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들고 수상한 그 녀석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오지 마요! 더 가까이 오면 확 신고할 거니까!”

움찔. 검은 그림자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소매 안에 감추었던 손을 꺼내 패딩에 매달려 있는 모자를 신경질적으로 벗어 뒤로 넘겼다.

“아 ㅆ. 내가 아까부터 참견을 안 하려고 했는데.”

“뭐… 아 ㅆ…?”

나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모자를 벗기며 찬란히 드러난 얼굴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고작해야 열일곱? 열여덟?

갈색 머리를 바람에 나풀거리며 서릿발 어린 시선을 내리는 녀석의 모습은 분명 어린 티를 벗지 않은 학생의 모습을 하고 있던 것이다.

이래 봬도 나는 곧 스물다섯이 되는데. 그런데 녀석은 세상 하찮은 것을 보듯 나를 보며 싸가지 넘치는 눈빛으로 붉은 입술을 비틀었다.

“신고? 무슨 이유로 신고할 건데. 그리고 아주 제정신이 아니지? 그러니 이 오밤중에 여자 혼자 이런 음침한 곳에서 소주나 마시지?”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녀석이건만 내가 들고 있는 소주병을 보며 쏟아내는 경멸 어린 눈빛과 말투가 정말이지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나의 눈매와 입술도 덩달아 비틀어졌다.

“이 황당한 경우는 뭘까요? 소주를 마시든 말든 내가 왜 처음 본 어린 학생한테 그따위 말을 들어야 하는 건지 친절히 설명해 줄래요?”

그런데 이 어린 녀석은 내 말엔 대답도 하지 않고 스윽 다가오더니 나의 옆에 그대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저기요. 학생? 지금 뭐 하세요?”

“뭐하긴. 정신머리 없는 여자 위험한 것 같아 도와주는 거지.”

“위험은 내 옆에 당연하게 앉은 네가 훨씬 위험해 보이는데요?”

“아까부터 저쪽에서 남자들이 자꾸 쳐다본다고. 하아. 내가 진심 착하지만 않았어도 모른 척하는 건데.”

“누가? 네가? 아무리 봐도 전혀 그렇게… 잠깐 누가 날 본다고?”

정신없이 말을 쏟아내던 나는 그 녀석이 눈빛을 보내는 곳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녀석의 말대로 두 명의 남자가 우리 쪽을 힐끔거리며 속닥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인파를 피해 일부러 외진 곳에 자리를 잡은 탓에 사람 그림자도 없는 어두운 강변 둑. 불안한 마음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나의 침묵에 더욱 꿈틀거리며 내 옆으로 오는 인형같이 생긴 싸가지 밥 말아 먹은 남자애.

아니. 그저 애라고 말하기에는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려나. 미간에 줄을 더욱 깊게 패며 녀석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냥 이러고 있으면 포기하고 가겠지. 당신 그냥 계속 술이나 마셔.”

우습게도 저기 있는 저 두 놈보다는 뻔뻔스럽게 옆에 앉은 이 녀석이 안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왜 드는 건지.

“…….”

나는 잔뜩 부어오른 얼굴로 들고 있던 술병을 입에 대고 기울였다.

계속 시비를 걸 것만 같았던 녀석은 이후 침묵했다.

내가 옆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 빛이 반사되는 검은 한강 물에 시선을 던진 채 녀석은 그렇게 깊은 생각에 빠져 버렸다.

얼마 안 가 힐끔거리던 두 남자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서는 서로의 엉덩이를 발로 차며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연말을 동성끼리 보내는 것이 억울하던 차에 혼자 있는 나를 보고 얼씨구나 작업이라도 걸려 했는지도 모른 일이었다. 뭐 아닐 수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