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휠체어를 타고 요양원 앞마당에 나왔다. 정원에 꽃이 잔뜩 핀 데다가 햇살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그때였다. 담장 너머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듣기만 해도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아, 나에게도 분명 저런 시절이 있었지. 그래서 너무나도 부러웠다.

지금 내 모습은 초라하기만 하니까.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푸석푸석한 피부는 기본이고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를 않는다. 매일매일 약물에 의존하며 살고 있고 휠체어가 없으면 화장실조차 가기 힘들다.

왜 이렇게 인생이 엉망이 되었을까?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걸까? 행복하거나 즐거웠던 순간도 많았다. 악마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이제는 아름다웠던 옛 추억을 떠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러울 따름이다.

잠시 후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또다시 들리자 눈물이 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분명 나에게도 저 하늘의 태양보다 빛나는 시절이 있었다.

명문가 집안의 핏줄을 이어받은 데다가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정도로 예쁜 용모를 자랑했으니까. 그런데 조금씩 망가졌다. 소중한 것들을 잃기 시작했다. 그러나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늦게 깨달았다. 완벽하게 속았다는 것을 알았을 무렵의 나는 몰골이 엉망이 되어 요양원에 갇힌 뒤였다.

몸도 마음도 망가진 채 요양원에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오늘처럼 멍하니 죽음을 기다리게 전부일 뿐이다.

그럼에도 다시 한번 나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의 나는 무지하였고 어리석었으며 세상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 인간들을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희대의 악녀가 되어도 좋다.

“날 망가뜨린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어.”

“어머, 저기 또 계시네!”

내 바람과는 다르게 건물에서 튀어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요양원 직원이 날 목격하고는 소리쳤다. 다시 한번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대로라면 몇 분 후 나는 감옥이나 다름이 없는 작은 방 안에 갇혀 지내야 한다. 이제 그만 끝내고 싶다. 완벽하게 실패한 이번 인생을 말이다.

그때였다. 시원한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엄마가 날 부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엄마, 보고 싶어.”

나도 모르게 하늘에 있는 태양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내 팔은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그렇지만 저 하늘 위 어딘가에 엄마가 있을 것이다. 오늘처럼 날씨가 화창하면 엄마와 함께 공원에 나와 이런저런 수다를 떨던 그 시절이 너무나도 그립다. 30여 년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쿠웅!

결국 나는 균형을 잃고 휠체어에서 옆으로 넘어져 쓰러지고 말았다. 어제와 오늘 일부러 약을 먹지 않았으니까 당연한 결말인 건지도 모르겠다.

“어머!”

요양원 직원이 소리를 지르며 황급히 내게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제는 상관이 없다. 후회만 가득한 이번 생을 끝내고 싶을 뿐이다.

“이봐요! 뭐야? 죽은 거야?”

힘이 빠져 눈이 감겼다. 날 부르는 목소리가 서서히 작게 들릴 뿐이었다.

‘만약 내게 다시 기회가 찾아온다면 그때는 이렇게 바보처럼 살지 않을 거야…….’

**

“허억, 허어억!”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뜬 나는 잠시 천장을 본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여기는 어디인 걸까? 왜 죽지 않은 거지? 어찌 되었든 무언가 몸 상태가 평소와는 달랐다.

“어?”

몸에 힘이 들어간다. 그것도 아주 잔뜩, 자유자재로. 그래서 오랜만에 편안하게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망가진 내 신체로서는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고 믿기지를 않았다.

그런데 벽지, 가구, 이불, 천장의 조명 등을 보고 나서야 방금 전까지 내가 누워 있던 곳이 어릴 적 내 방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깜짝 놀라 서둘러 화장대에 있는 거울로 향했다. 얼굴이 선명하게 보인다. 시력이 좋아졌다는 뜻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푸석푸석하고 움푹 파여 있던 내 광대에는 살이 가득 차 있었다. 눈 밑도 시커멓지 않았다. 머리카락은 또 어떠한가? 윤기가 좌르르 흘러 손으로 만져도 촉감이 괜찮다.

“아, 이건 18살의 내 모습이 틀림없어.”

하루에도 수백 번 수천 번 그리워하고 떠올리던 내 인생에서의 가장 아름다웠던 모습이기에 단번에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꿈이라도 좋다. 이렇게 과거로 돌아간 것만으로도 내게는 벅차고 감동적인 일이니까.

“엠마! 엠마 밥 먹어라!”

“……!”

분명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긴장도 되고 떨리지만 확인해야만 했다. 이 시기의 우리 가족은 평온한 만큼 엄마도 무사할 것이다.

곧장 나는 계단을 성큼성큼 밟고 내려갔다. 내 의지대로 내 마음대로 다리가 움직여지고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기쁜 상황이었다.

“우리 딸 오늘은 한 번에 잘 일어났네?”

“엄마!”

그렇지만 그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앞치마를 두른 엄마가 날 환히 바라보며 서 있었다는 것이다. 귀부인 소리를 들을 만큼 단정한 용모와 하얀 얼굴, 찰랑거리는 웨이브가 매력적인 금발의 머리카락까지 전부 그대로다. 다행히 엄마는 무사했다. 나는 너무 기쁘고 행복한 나머지 엄마의 품에 얼굴을 묻고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얘가 왜 이래?”

“흐윽, 흐으윽!”

“엠마, 무슨 일 있는 거야? 왜 울어?”

오랜만에 느껴보는 엄마의 따스한 온기, 결국 눈물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그냥 엄마랑 같이 있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아.”

“갑자기 어린애처럼 왜 그래?”

‘그런데 만약 이게 전부 다 꿈이면 어떡하지?’

**

“오, 생선 싫어하더니 오늘은 다 먹었네?”

“하하하, 으응. 맛있어.”

하지만 내 걱정과 달리 지금 이 상황은 꿈이 아닌 모양이다. 꿈이라고 하기엔 무척이나 생생하며 이렇게 시간이 길 리가 없다. 하늘이 내게 그토록 바라던 복수를 하라고 내 죽기 전 마지막 바람을 들어준 게 아닐까? 설사 꿈이라 해도 상관없다. 이곳에서는 반드시 내가 엄마를 지킬 것이다.

“엄마, 미안해.”

“응?”

감옥이나 다름이 없는 작은 방에 10년이 넘게 갇혀 있었다. 그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엄마와 같이 식사를 하던 장면을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는 게 전부였다.

그런 만큼 식사를 하던 중 뭉클한 감정이 다시 또 올라왔다. 내 건강을 생각해 생선과 채식 위주의 식단으로 메뉴를 꾸린 엄마의 진심을 엄마와 헤어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평범해 보이는 식사조차 매일 준비하려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라는 것 역시 나중에야 알았다.

“늦잠, 반찬 투정, 잔소리, 짜증, 어리광, 그냥 다 내가 잘못했어.”

“오늘따라 우리 딸 평소와는 많이 다르네?”

엄마가 보기엔 지금 내 모습이 이상해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 엄마와 다시 만나게 되면 꼭 하고 싶었던 말들이다.

실제로 나는 성인이 될 때까지 반찬 투정을 하고 해가 중천에 떠야 일어나는 바보 같은 인간이었다.

천성이 게으르고 나태했으며 매일매일 지금처럼 살 수 있을 거라 착각의 늪에 빠져 있었으니까. 한 마디로 어리석고 멍청한 여자였다는 뜻이다. 알게 모르게 나 때문에 엄마 혼자 고민하고 속앓이를 많이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엄마는 끝까지 날 포기하지 않았다.

‘엄마, 이제는 내가 엄마를 지킬 거야…….’

똑똑!

“네, 잠시만요.”

엄마는 시종일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다가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자 서둘러 몸을 일으켜 밖으로 향했다. 나는 잠시 시간을 보내다가 조심스럽게 주방 벽 뒤에서 얼굴만 살짝 내밀어 찾아온 손님이 누구인지 확인을 했다. 흰색 콧수염이 특징인 노신사, 그의 이름은 알버트였으며 직업은 부잣집의 집사다.

‘오늘이 그날이구나…….’

“그렇군요. 네, 알겠습니다.”

엄마는 굳은 얼굴로 대화를 마무리한 뒤 문을 닫았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서둘러 식탁 의자에 돌아가 자리를 잡았다.

“엄마, 조금 있다가 밖에 다녀와야 할 거 같아.”

“응, 알겠어.”

나는 엄마가 오늘 어디에 갈지 알고 있다. 애석하게도 우리가 이렇게 평온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뜻이다. 얼마 후면 내게도 많은 일들이 닥쳐올 것이다.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 그토록 바라던 우리 가족을 망가뜨린 인간들에게 복수할 기회가 생긴 셈이니까…….’

#1 비밀이 많은 시험

날이 어두워졌다. 나는 지난번 생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일찍 소등을 하고 잠이 든 척을 했다. 그러자 엄마는 문을 살짝 열어 내가 자는지 확인을 한 다음 다시 문을 닫았다. 내가 자지 않는다는 걸 지금 엄마가 알게 되면 계획이 엉망이 된다. 그래서 잠시 머릿속으로 숫자를 세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대략 1분 정도가 지났다고 느낀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엄마가 보였다. 엄마는 머리부터 신발까지 검은색 옷차림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조금은 걸음이 빨라 보였다. 나 역시 덩달아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서 얼른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이번엔 처음부터 모든 진상을 파악해야 해.’

“하아, 조금 늦었나?”

교회로 보이는 건물에서 어두운색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조금씩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엄마가 간 곳이 장례식장이라는 건 거의 확신하고 있었지만 이미 식이 다 마무리된 건가? 택시가 금방 잡히지 않아 애를 먹을 줄은 몰랐다.

기억을 온전히 지닌 채 과거로 온 만큼 나도 모르게 우쭐하고 자만했던 걸 수도 있다. 조금 더 모든 경우의 수를 따지고 움직여야만 했다. 마음과는 다르게 시작부터 무언가 꼬인 느낌이다. 잠시 후 지난번 삶에서 겪었던 불행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일들이다.

“이러고 있을 시간은 없어.”

더 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후회와 한탄으로 시간을 날리는 것도 내게는 사치이다. 이건 어쩌면 하늘이 내게 준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린 다음 창문을 통해 건물 내부를 살펴보았지만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이미 밖으로 나간 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치마 끝을 손으로 붙잡고는 교회 주변을 한 바퀴 빙 돌아보았다. 건물 주변에도 없다. 그렇다면 남은 곳은 교회 뒤에 있는 숲이다.

“왜 이런 곳에서 따로 이야기를 하자고 한 건가요?”

내 예상이 적중했다. 교회 뒤에 있는 어두컴컴한 숲 속에서 엄마가 어떤 남자와 대화를 하고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얼른 나무 뒤에 숨어 대화 내용을 엿듣기로 마음먹었다.

“엠마 그 아이를 저택으로 데리고 오세요.”

“……!”

어두운 데다가 나무에 가려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이 목소리는 아빠였다. 실제로 나는 18살에 아빠가 사는 저택에 초대를 받은 적이 있다. 그런 만큼 이제부터는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아주 쉽게 예측이 되었다.

‘아, 일이 여기서부터 시작이 된 거였구나…….’

“알겠어요.”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마무리하고는 서둘러 내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내가 잠시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엄마보다 먼저 집에 돌아가 자고 있는 척을 해야 지난번 인생과 똑같은 경험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아빠의 초대를 받아 저택에 들어가는 것부터가 중요하다. 벌써부터 운명이 바뀌는 것은 곤란하다.

**

“엠마, 새벽에 안 자고 있었던 거야?”

“어? 아, 그게 괴물이 나타나는 악몽을 꾼 거 있지? 잠깐 일어났다가 다시 금방 잠들었어.”

“혹시 지난번에 본 책 때문에 그런가? 만화책 너무 많이 보지 마.”

“으응.”

길가까지 미친 듯이 뛰어가 택시를 잡고 엄마보다 간신히 먼저 집에 들어온 것까지는 다행이었다. 하지만 잠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잠시 내 방의 불을 켰었다. 그런데 그걸 밖에서 귀가하던 엄마가 볼 줄이야?

이것은 명백한 실수이고 조심성의 부족이다. 다행히 이내 내 방의 불이 꺼진 만큼 엄마가 크게 의심을 하거나 이상하게 여기는 거 같지는 않지만 앞으로는 더 조심하고 더 세심하게 계획을 짜야 한다. 이제부터 벌어질 일들을 알고 있다고 해도 사소한 실수가 겹쳐진다면 악몽은 금방 날 덮칠 게 뻔하다.

‘나와 엄마의 인생을 망친 인간들은 결코 만만하지 않으니까…….’

내 마음이 안도와 자책으로 뒤섞여 복잡하던 찰나 엄마가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아빠가 널 저택으로 초대했어.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지?”

“진짜? 응, 그럼 괜찮지.”

“그래, 준비하고 있으렴.”

엄마가 보기엔 지금 내 얼굴이 무척이나 기뻐하는 걸로 보일지 모르겠다. 이것조차 연기이며 실제로 1회차 인생에서의 나는 그토록 유명한 아빠의 저택에 초대를 받아 오랜만에 아빠를 만난다는 생각으로 설레고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나라는 인간은 참으로 어리석고 바보 그 자체였다.

저택에 초대를 받아 도착했으나 그곳은 부녀가 오랜만에 만나 식사를 하는 아름다운 자리가 아니었다. 혹독한 시험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번엔 그때와는 많이 다를 거야…….’

엄마의 말대로 해가 지자 알버트가 우리 집까지 차를 몰고 왔다. 기다란 검은색 차, 이런 차를 탈 수 있는 사람은 이 나라에서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을 것이다.

다만 지난번 인생에서 나는 저택으로 가는 동안 알버트에게 이런저런 말을 많이 하며 나에 대한 정보를 많이 노출했었다. 눈치가 전혀 없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알버트는 결코 나에게 우호적인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에 타는 순간부터 누가 선택을 받을지에 대한 시험은 시작된 거라 다름이 없다.

“그나저나 아가씨, 오랜만에 뵈어서 그런지 표정이 많이 다르네요.”

“그런가요?”

알버트가 나보다 더 이 어색한 분위기가 싫은 모양이다. 나에게 먼저 말을 걸 줄은 몰랐다. 아니 어쩌면 아빠에게 보고할 나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 일부러 대화를 유도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때였다. 신호에 걸려 잠시 차가 멈추었다. 저택은 이대로 쭉 직진이었지만 잠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살짝 흘려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라 느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서 좌회전하면 나오는 브리튼 1번가의 그레이트 브리튼 은행이 200년이 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면서요?”

“네, 그렇습니다. 어떻게 아셨어요?”

“신분에서 봤어요. 평범한 은행처럼 보이지만 이 나라 경제에도 미치는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그러던걸요?”

“아마 그럴 겁니다.”

“그럼 아빠도 그곳 은행장과 친분을 쌓으면 좋을 거 같아요. 무슨 일을 하든 자금력이 중요하고 이 동네는 다양한 개발이 필요하니까요.”

원래의 나에게서는 절대 들을 수 없는 고급스러운 이야기가 나온 탓일까? 알버트의 얼굴은 주름이 깊게 파일 정도로 무척이나 굳어져 있었다.

“아가씨, 원래 세상 돌아가는 거에는 관심이 없으시지 않았나요?”

알버트의 말이 딱히 틀리지는 않다. 학교도 대충 다녔고 성적도 그저 그랬다. 미래보다는 오늘의 즐거움이 중요했다. 신문보다는 만화책을 좋아했으며 늦잠을 자거나 편식을 하는 건 일상이었다. 알버트도 수년간 내가 어떤 유형의 인간인지 지켜봐 왔겠지.

“아, 요즘은 곧 성인이 되는 만큼 이런저런 책이나 신문을 많이 읽고 있어요.”

어느새 신호가 초록 불로 바뀌었고 다시 차가 출발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나는 이내 대화를 이어갔다.

“여기는 브리튼 2번가네요. 지금은 다른 곳에 비하면 볼품 없어 보이지만 나중에 개발이 되면 엄청나게 가치가 상승할 동네 아닐까요? 실제로 요즘 신축 건물들이 들어설 거란 소문이 돌고 있더라고요.”

“그런 것까지 아십니까?”

백미러를 통해 날 바라보는 알버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한심하고 멍청한 여자라 생각했던 내가 의외로 해박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으니까. 그동안 아빠에게도 나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전달했을 게 뻔하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야, 어떻게 내가 시험을 통과하는지 보여줄 테니까…….’

**

그렇게 나는 알버트에게 신선한 충격을 몇 차례 더 전달한 후 아빠가 사는 대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학교 운동장과 맞먹는 크기의 정원 사이에는 분수대가 있었고 고풍스러운 대저택이 뽐내는 위용 역시 상당했다.

그때는 이 분위기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에 속아 중요한 본질을 놓쳐서는 안 된다. 나는 대충 알버트 앞에서는 신기하다는 듯이 몇 차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서둘러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의원님, 엠마 아가씨가 왔습니다.”

“엠마, 이쪽이다.”

알버트가 양 손바닥으로 날 가리키며 내가 왔다는 것을 알리자 1층 샹들리에 밑에 있던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아빠가 곧장 날 불렀다. 오랜만에 딸과 만났지만 기뻐하거나 좋아하는 기색은 없었다. 무척이나 딱딱하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그래도 내 생물학적인 아빠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주름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잘생겼고 모발도 풍성하며 배가 나오지도 않아 예전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아빠에 대한 내 감정이 우호적일 리가 없다. 8살 이후로는 1년에 1번 볼까 말까 했다. 그것도 언제나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조용한 곳에서만 만났다. 그러다가 엄마와 날 내버려두고 아빠만 이 저택에서 사는 이유를 13살이 돼서야 알았다.

그렇다. 나는 혼외자다. 엄마는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아빠는 법률적으로 확실한 유부남이었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 나를 낳게 된 건지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 바람에 이제부터 내가 겪어야 할 시련은 상당할 것이다.

“오랜만에 뵙네요. 아빠.”

나는 일부러 아빠에게 가까이 다가가 아빠라는 말을 유독 또박또박 발음했다. 그러자 아빠는 대답 대신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분명 미소와 함께 생긴 팔자주름에는 가문의 주인으로서 느끼는 책임감과 사명감 같은 게 담겨 있을 것이다. 오늘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것도 이 빌어먹을 집안과 관련이 있으니까.

잠시 후 나는 커다란 소파의 정중앙 빈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왼쪽 자리에는 머리카락에 뭔가를 잔뜩 바른 데다가 인상이 무척이나 사나운 남자아이가 보였다. 그다음 오른쪽 자리로 시선을 옮기자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한 가녀린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