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부하겠습니다.

“거부하겠습니다.”

해강은 단호한 음성으로 그 자리에 앉은 양가 어른들과 앞에 앉은 가방으로 유명한 테사 브랜드 차기 대표인 한태주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해…… 해강아. 이게 무슨 말이야?”

해강의 모친인 진선미는 느닷없는 해강의 말에 기겁하며 옆에 앉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제…… 제게 혹시라도 이 결혼의 거부권이 있다면. 그렇다면 전 이 결혼 거부하고 싶어요.”

다시 한번 해강은 또렷한 목소리로 거부 의사를 표명했다. 오늘을 위해 준비해 둔 크림색 정장 스커트 위로 바들바들 떠는 손을 들키지 않기 위해 주먹을 꼭 말아쥔 채로.

건너편에 앉아 조용히 듣고만 있던 한태주의 눈빛에 이채가 서리기 시작했다.

“서해강! 어른들 앞에서 버릇없이 뭐 하는 짓이냐?”

해강의 부친 서우창은 등으로 식은땀이 또르르 흐르는 게 느껴졌다.

하나, 입술을 앙다문 해강은 도무지 마음을 바꿀 기미가 안 보였다.

“죄송합니다.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해강은 이 자리에 더 있다가는 숨이 막혀 죽을 듯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잖아도 해강에게 몰린 모두의 시선이 또 한 번 경악을 금치 못했다.

행여 누구라도 붙잡아 주저앉히기 전에 그녀는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뒤, 재빨리 빠져나왔다.

인생 2회차 이렇게 또다시 엮일 순 없지. 이번에는 처음부터 아예 발을 들여놓지 말아야 해.

해강은 나중에 집에 가서 부모님께 한 소리 들을 각오를 한 터라 더는 두려울 게 없었다. 다시 또 그 사람과 엮여 힘든 삶을 살 바에야 차라리 부모님 잔소리가 훨씬 나았다. 이도 저도 아니면 부모님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만이라도 일단 짐 싸서 주희네로 가면 되었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한동네에서 같이 자란 친구인 주희는 언제라도 자신을 받아 줄 테니까.

마침 구세주처럼 엘리베이터까지 20층 라운지에 도착했다. 해강은 얼른 올라탔다. 1층을 누른 그녀는 아직도 떨리는 손으로 닫힘 버튼을 마구 눌렀다. 누군가라도 따라 나온다면 그야말로 낭패였다. 이내 문은 다행스럽게 바로 닫혔고 엘리베이터 안에는 그녀 혼자였다.

“휴! 다행이다.”

해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막 닫히려던 엘리베이터의 틈새로 누군가의 손이 들어왔다. 손톱이 말끔하게 잘 다듬어진 커다란 손이었다.

그녀가 익히 잘 알고 있던 손의 주인공은 한태주였다.

해강은 멈칫하며 본능적으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저 남자를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오롯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다행이로군.”

다시 열린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태주는 재킷의 옷깃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윗단추를 잠갔다. 늘 그렇듯 흐트러짐 없이 완벽한 모습으로.

생각지도 못한 태주가 들어서는 걸 보며 일순 해강은 머릿속이 하얘지고 손에는 진땀이 배어났다. 더는 물러설 곳 없는 구석진 자리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며 눈동자를 굴리고 있던 해강은 태주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가 잡아먹기라도 하나? 왜 거기 서 있는 거지?”

엘리베이터에 타고서 내내 지켜보고 있던 모양이었는지 그는 미간을 구겼다.

“…….”

당황한 해강은 선뜻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좀 전의 호기로운 모습은 어딜 가고 겁먹은 사슴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양새가 참 아이러니하네, 서해강?”

거의 180센티는 훌쩍 넘어 보이는 키에 다부진 체격과 쌍꺼풀 없이 살짝 치켜 올라간 차가운 눈매를 가진 태주는 모델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피지컬을 보유한 남자였다.

그다지 크지 않은 키의 해강은 하이힐을 신고 있다고는 하나 태주의 어깨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런 해강을 내려다보는 태주의 베일 듯이 오뚝하게 선 콧대는 끝이 살짝 갈라져 보기 드물 정도로 돋보였다. 거기에다 굳게 다문 입술 선은 마치 물감으로 그려 놓은 것처럼 붉었고, 그 옆으로는 매력적인 보조개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보조개라는 것은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할 정도의 연중행사였다. 그만큼 잘 웃지도 않았을뿐더러 과연 감정이라는 게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남자였다.

아! 아니구나.

감정은 있는 남자였네. 첫사랑을 지독히도 잊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니.

“흐흠……. 누가 바들바들 떤다는 거예요?”

해강은 집요한 그의 시선을 피하며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아직도 그녀는 태주의 질식할 듯한 압도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벗어나야 했다. 그녀가 살려면.

“왜 이미 정해진 결혼을 거부한다는 건가? 이유라도 들어 보자고.”

바들거리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해강을 보며 태주는 피식 웃음을 삼켰다. 그녀의 의도가 무척이나 궁금했기에 그는 양가 어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바로 해강을 따라나섰다.

“제 꿈인 작가로서의 길을 가자면 결혼은 제게 굴레밖에 되질 않아요. 대학원에 진학해 좀 더 공부하고 싶기도 하고 보조 작가로 들어가 제대로 된 실무를 배우고 싶어요. 그게 제가 결혼을 거부한 첫 번째 이유이고요. 두 번째는…….”

해강은 또다시 그에게 넘어가지 않기 위해 될 수 있는 한 그의 시선을 이리저리 피했다.

“대학원? 공부가 더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 잘나가는 작가님의 보조 작가가 되는 것도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 자, 첫 번째는 해결됐고. 두 번째는?”

짙은 한쪽 눈썹을 끌어올리며 태주는 말을 하다가 만 해강의 콧잔등에 자잘하게 흩뿌려진 주근깨에 시선을 주었다.

“유치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사랑 없는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아요.”

‘더는 요.’

터져 나오는 뒷말은 차마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애써 목구멍으로 꾹꾹 눌러 담았다.

“사랑? 조부님들끼리 이미 약조가 되어 있던 결혼을 깰 만큼 중요한 건가?”

잠시 흥미를 보이는가 싶더니 ‘사랑’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태주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네. 제게는요.”

서늘한 그의 표정이 무얼 말하는지 잘 안다. 그렇기에 더욱 그와의 인연은 여기에서 끝내야 했다.

“두 번째는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으니 제안 하나 하지.”

“제안이요?”

무슨 제안을 하려고 이러는 거지?

‘아니야. 거절해야 해. 더는 이 남자와 엮이면 안 돼.’라는 마음과 ‘그래도 무슨 제안인지 들어는 봐야 하지 않겠어?’라는 마음이 해강의 내면에서 치열하게 충돌했다.

“그래. 딱 1년만 살기로. 그 후에는 각자 갈 길로 가는 건 어떤가? 조부님들 약조대로 결혼은 하되 1년 후에 서로 안 맞아서 갈라선다고 하자고. 조부님들 뜻대로 따르기는 해도 약조에는 결혼 후에 관한 조항은 없으니 그 허점을 교묘히 이용하자는 거지. 그리고 위자료는 10억.”

솔깃한 제안이었다. 특히나 팔랑귀인 그녀에게는 더더욱 거부하기가 힘들 정도로.

그의 말에 따르면 양가 어른들께도 얼굴 붉힐 일이 없었고 약조는 약조대로 지키고 서로의 잇속은 잇속대로 챙기는 셈이었다.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일석이조였다.

하지만 그의 제안에 답하는 걸 잊을 만큼 해강은 이 상황이 너무 기이하면서도 낯설었다. 회귀 전 그와 3, 4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에도 태주는 이렇듯 길게 그녀와 대화한 적이 전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음’, ‘아니’, ‘그렇군’, ‘그렇게 해’라는 단답형 말만 떠올랐으므로.

“대답은?”

건조하면서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저음의 목소리에 해강은 잠깐의 회상에서 벗어났다.

“좋아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년만요. 약속 지키겠다는 의미로 계약서 작성해 주세요.”

이번 생에도 유야무야 넘어가면 다시 도루묵이 되니 확실하게 증거를 남겨 놔야 한다. 그가 두 번 말하지 못하게.

“그러지. 월요일에 내 사무실에서 보는 걸로.”

“네.”

해강의 대답을 끝으로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했다.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그럼.”

태주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유유히 빠져나갔다.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던 해강은 그제야 큰 숨을 토해냈다. 태주가 그녀에게 어려운 존재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였다.

***

해강의 돌아가신 조부 서일웅 화백과 혈혈단신이었던 태주의 조부 한무영의 인연은 좀 더 멀리 올라간다.

서일웅은 만석집 귀한 도련님으로, 한무영은 그의 집 일을 봐주는 머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일찍이 서양의 문물과 사상을 접한 서일웅의 부친 덕에 한무영이 서너 살 즈음에 그의 부친은 작은 땅을 얻어 소작농으로 거듭났다.

한무영의 부친은 그 고마움으로 끝끝내 서일웅의 집안일을 마다하지 않고 돌보았으며 착실하고 부지런한 성품으로 땅도 조금씩 넓혀 나갔다.

그 덕분에 서일웅과 한무영은 나란히 좋은 학교에 같이 다니며 수학한 동무가 되었고, 한무영의 부친이 늘 입에 달고 살던 ‘서 대감 어르신의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다’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며 살았다.

둘은 친동기간보다도 더 끈끈한 우정으로 이어져 왔고 종내에는 서로 아들과 딸을 낳으면 사돈을 맺자고 약조했는데 아쉽게도 두 집 모두 아들만을 낳았다. 그래서 사돈 맺자는 말은 다음 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한무영의 큰아들인 한재헌이 아들인 태주를 낳은 뒤 바로 이어 다음 해에는 서일웅의 큰아들 서우창도 아들인 한강을 낳는 바람에 다시 한번 실망감을 맛보았다.

그 후로도 한재헌은 또 아들을 낳아 아들만 둘이 되었지만, 서우창은 한동안 소식이 없었다. 그러나 서우창이 아들을 낳고 5년이 지났을 무렵 그 집에 다시금 아기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번에야말로 양쪽 집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자아이였다.

서해강.

그녀는 양쪽 집안 모두의 귀한 여식이었다. 해강이 태어난 날, 두 집안엔 동네잔치가 벌어졌다.

여섯 살에서 막 일곱 살 되던 태주와 막 태어난 해강은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른들에 의해 혼인을 약조하게 된 셈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두 집안의 불문율이 되었다.

그해, 태주는 갓 태어나 쪼글쪼글한 해강의 얼굴을 보고 엉엉 울었다고 한다. 저렇게 빨갛게 생긴 아기와는 결혼하기 싫다면서. 태주의 그 말에 어른들은 한바탕 웃음으로 넘겼으나 그의 뇌리에는 그때 본 해강의 모습이 강렬하게 잔상으로 남아 버렸다.

결국 여섯 살이라는 나이 차는 극복할 수 없는 그들의 간극이 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게 태주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막 중학교에 입학해 조금 큰 듯한 교복을 입은 해강은 그에게 있어 꼬꼬마였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저 사촌 여동생 같은 느낌이었다. 지켜 줘야 할.

해강은 너무 작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크지도 않은 160센티 정도 될 만한 키에 작고 낮은 콧잔등 위로는 주근깨가 자잘하게 흩뿌려진 귀여운 여자애였다.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 쌍꺼풀로 인해 적당히 큰 눈과 조그만 입술 위에 있는 점이 그나마 시선을 끌 정도였다.

귀한 자식일수록 더 내둘러서 키워야 한다는 말을 제대로 실행했던 서가네 집안에서 엄하게 자라난 해강은 예의 바르고 해맑은 아이였다. 어느 순간에도 도를 넘어서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그의 어린 신부는 결혼 후 3, 4년이 지나도록 그녀에게 손 하나 대지 않는데도 그를 원망한다거나 불만을 토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보통의 여자들처럼 사랑을 갈구한 적도, 보챈 적도 없을 정도였으니까.

설령 그렇다 한들 해강에게 줄 마음 한편조차 태주한테는 남아 있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빠진 첫사랑 권채이에게 모든 마음을 뺏긴 이후로는.

***

해강보다 네 살이 많은 친오빠 한강은 매번 학원에 가느라 바빠서 그녀와 놀아 주지도 못했고 가끔은 어린 해강을 귀찮아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되레 그녀는 두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태주의 동생인 태오와 어려서부터 남매처럼 자랐다. 형인 태주와 네 살 터울인 태오도 해강과 같은 이유로 형과 내외하는 사이였기에.

해강은 태오를 제 오빠인 한강보다 더 잘 따랐다. 하나, 여섯 살 위인 태주는 그녀에게 있어 다 큰 어른이었고 커다란 고목 같았다. 그만큼 말 붙이는 것조차 어려웠다.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내내 ‘넌 태주에게 시집을 가야 한다.’라고 귀에 못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렇기에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어른들의 말을 거스른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아주 가끔 태오와 장난치듯이 한 말이 그녀의 누리던 일탈의 전부였다.

‘해강아! 형 말고 나한테 시집올래?’

‘큭큭, 그럴까?’

태오와 나누었던 실없던 농담 덕에 작게나마 숨통이 트였던 기억의 호출로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대학 졸업 후 당연한 수순으로 태주와 결혼한 해강은 태주의 조부 한무영과 그의 부모님 사랑을 듬뿍 받았으나 정작 남편인 태주로부터의 사랑은 열외였다. 그러나 그는 해강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늘 성심성의껏 예의를 지켜 줬다. 심지어는 해강의 몸에 손끝 하나 대지 않을 정도로 철저할 만큼의 배려였으니까.

아쉬운 마음이 없다면 거짓이겠지만, 해강은 딱히 큰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그런 그를 존경하기까지 했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

대가댁 큰 살림을 관장하던 할머니로부터 일을 배운 해강의 모친 진선미는 손맛이 좋기로 유명했다. 그런 모친 선미는 귀한 딸로 태어난 해강을 아끼지 않고 써먹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해강도 어지간한 나물 반찬이나 찌개 정도는 뚝딱 만들어냈다. 하지만 태주와의 결혼 생활에서는 도통 솜씨 발휘할 틈을 주질 않았다. 그의 아침은 블랙커피 한잔이면 되었고, 저녁 식사마저 밖에서 먹고 들어오기 일쑤였기에 더욱더 그랬다.

그것을 알 턱이 없던 결혼 초, 해강은 새벽부터 일어나 정성 들여 아침을 준비했다. 각종 나물과 조림, 생선구이와 갓 지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잡곡밥과 시원하면서도 아침에 제격인 북엇국을 보며 뿌듯해했다.

“흐음! 이만하면 완벽해. 후후.”

출근 준비를 마치고 나온 태주를 올려다보며 그녀는 기대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저 혼자 오롯이 누군가를 위해 밥상을 차렸다는 데에서 오는 만족감이랄까.

그러나 태주의 한마디에 그 기대감은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앞으로 아침 차리는 데 괜한 수고는 하지 않으면 좋겠군. 난 블랙커피 한잔이면 충분하거든.”

그런 그는 해강을 지나쳐 에스프레소 머신이 있는 곳으로 가 직접 커피를 내렸다. 그러고는 별일 아니란 듯이 탭으로 스케줄을 확인한 뒤 소리 없이 출근해 버렸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만든 괘씸한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한술 뜨면 뭐! 어디가 덧나나? 흥칫뿡! 원님 덕에 나팔 분다더니 잘나신 남편님 덕에 내 배 속이 호강하겠네, 뭐. 내가 모조리 다 먹어 주지.”

거나하게 차려진 아침 식탁을 망연자실하게 보던 해강은 욱하는 마음에 제가 만든 음식들을 꾸역꾸역 입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다가 급체하는 바람에 온종일 소파와 물아일체가 되고 말았다.

더군다나 본가에서는 일주일에 두 번 도우미까지 보내주어 청소까지 도맡아 처리해 주었다. 그러다 보니 해강은 점점 자신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바보가 되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고민을 거듭한 끝에 취미를 하나 만들었다. 아무도 모르게 남몰래.

화백이신 조부 서일웅의 피가 해강의 몸에도 일조한 것인지 어릴 적 미술 시간에 남다른 두각을 나타내곤 했다. 하나, 그녀는 그림보다 글에 더 흥미를 보였었다.

유달리 그림에 일가견이 있던 해강은 솜씨를 발휘해 별그램에 취미 삼아 그림을 그려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신기하게도 그녀의 메일로 웹소설의 표지 작업 커미션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명 ‘캐롯’ 작가로 웹소설 작가들 사이에 알음알음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남자주인공 위주로 그리다가 어느 순간 19금 소설 표지도 맡게 되었다. 반듯하게만 자라 온 해강에게 그 작업은 신세계 그 자체였다.

혼자 있는 집에 누가 올 리도 없건만, 괜히 나쁜 짓이라도 하는 것 같아 심장이 벌렁벌렁하며 쫄깃해졌다. 하지만 끝내고 나면 그 쾌감이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로 짜릿한 게 중독성이 꽤 컸다.

“근데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아니할 말로 뭐 죄짓는 것도 아니고 정정당당한 노동의 현장을 들킬까 봐 왜 조마조마해야 하는 건데? 생각해 보니 어이없네.”

이렇듯 새로이 생긴 해강의 비밀스러운 취미는 본가나 친정의 부름이 없어 온전히 혼자 있을 때나, 태주의 출장으로 긴 밤을 혼자 지내야 하는 그녀에게 그야말로 딱 안성맞춤이었다.

외려 이 작업은 그녀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매개체가 되어 주었다. 하릴없이 전시장에 간다거나 백화점 쇼핑도 지칠 즈음, 그녀를 늪에서 건져 올려 준 구원 투수였다.

건강한 취미를 살려 정직하게 번 돈으로 그녀는 남모르게 계좌를 터서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곳간에 곡식을 쌓아 두듯이 모은 통장에는 어느새 꽤 큰 액수가 만들어졌다.

모든 것은 남편의 주머니에서 나왔고 제 이름으로 된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해강에게 뿌듯한 자부심을 만들어 주었다.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 오롯한 내 것이 생겼다는 자부심은 무언가로부터 해방된 기분을 만끽하게 해주었다.

그렇게 3, 4년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남편의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이던 그녀 권채이가 돌아온 것을 알게 된 것은.

늘 흐트러짐 없이 완벽한 모습만을 보여주었던 태주였다. 그날은 그의 비서인 유건하 실장의 부축을 받은 채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집에 온 태주를 보자 해강은 너무 놀라 펄쩍 뛰었다.

“유 실장님! 대체 이게 무슨……?”

“부사장님이 과음을 좀 하셨습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차가운 냉기의 아우라를 내뿜는 유 실장은 태주의 대학 동기였다.

어려운 집안 형편상 테사 브랜드의 인재 육성 차원으로 장학금과 생활비 일체를 지원받은 유건하는 태주와 같이 아이비리그에서 MBA를 취득했다. 겉으로 드러난 비서실장이라는 직책은 명목상이었고, 알고 보면 태주를 보필해 같이 회사를 이끌어 나가는 테사의 숨은 인재였다.

“저…… 유 실장님. 혹시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요?”

걱정에 앞서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술에 취한 태주의 모습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랍고 색다른 느낌이었다. 그러니 걱정보다는 조크가 먼저 그녀의 입에서 튀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