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part1 : 지안&성준

사랑에는 고통이 따른다고 하니

생각이거나 꿈이거나 한숨이거나

소망도 눈물이라는 것들은

사랑의 동반자들이겠군요.

아무리 멸시할 만한 것이라도

사랑은 훌륭하고 품위 있는 것으로 바꾸어 주지.

사랑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것.

그래서 큐피드를 소경으로 그린 것.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에는 분별심은 전혀 없지.

눈은 없고 날개만 있는 것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런 성급함을 나타내는 것일 뿐.

A Midsummer Night’s Dream(1막 2장 중)

부산. H 호텔.

“켓.”

오래전 지워진 것.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한 이름으로 불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훅, 하고 뜨거운 바람처럼 귓가를 희롱하듯 스치는 것에 흠칫 어깨를 떨었다. 또각또각 로비를 울리며 정문으로 향하던 단정한 걸음을 단숨에 잡아 세웠다.

놀라 움츠러든 어깨가 천천히 뒤틀리며 고개를 돌렸다. 고양이를 닮은 아몬드형의 갈색 눈동자가 둥그렇게 커진 채로 말없이 호텔 로비를 조용히 훑었다.

붙박은 듯 서서 둘러보는 시선에 출렁이는 동요는 무엇이었을까? 한참 동안 그녀는 자리에 붙박은 듯 선 채 걸음을 돌리지 못했다.

찾을 수 없는 답을 찾으려고 집요하게 공간을 살피는 시선은 평상심을 잃지 않는 그녀답지 않게 예민하고 날카로웠다.

그러나 평일 한낮의 호텔 로비 안은 평온하고 한가로웠고 예민하게 세운 촉은 원하는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그때서야 건조하게 굳어졌던 입술 위로 슬쩍 웃음이 흘러나왔다.

피식, 하고 그녀는 웃었다. 이유도 없이 예민했던 자신에 다시 한 번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래, 평일의 한가로운 호텔의 메인 로비는 그저 로비일 뿐이지. 별일 있을 게 없잖아.”

불안해하는 자신 안의 누군가에게 전하듯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맹랑한 퍽이 귀를 잡아당기는 것 같은 느낌은 억지로 떨쳐내려고 해도 쉽게 지워지지 않고 찜찜하게 마음에 남았다.

왜일까? 라고 생각하던 그때 울린 핸드폰 소리에 혼란스러웠던 얼굴은 원래의 단정하고 서늘한 강지안의 모습으로 순식간에 돌아와 전화를 받았다.

“강지안입니다.”

[본부장님, 윤재영입니다.]

“윤 대리. 저는 오늘 입도 예정입니다.”

[이번 주까지 휴가이신 것 알지만 김선형 씨 관련해서 지금 보안 팀에서 연락을 받아서 연락드렸습니다. 제주 리조트 본관 로비에 나타난 것이 CCTV에 포착되었습니다. 어떻게 들어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사무동의 본부장님 사무실 근처에 있던 모습도 나왔습니다.]

윤 대리의 말에 지안은 심각해진 얼굴로 다시 몸을 돌려 로비 중앙의 소파에 앉아 심각한 얼굴로 그녀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난동을 부리더니 제주도로 돌아왔나 보네요. 사무동에는 직원 카드가 있어야 들어올 수 있었을 텐데. 직원 정보 말소된 것 확인해주세요.”

[말소된 것은 확인했습니다. 내부 다른 직원의 카드를 훔친 건 아닐까요? 그건 다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쩌면 내부에 돕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체크해 보라고 하세요.”

[네. 잘 모르는 새로 온 메이드들에게 본부장님이 제주도에 언제 내려오는지 물어보고 다녔다고 합니다. 제주 공항에서부터 조심하세요. 본부장님. 그래서 미리 전화 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심하도록 할게요.”

얼마 전 제주 리조트에서 여행사들과 짜고 커미션과 횡령을 저지른 내부 직원 하나가 해고에 앙심을 품고 서울 호텔에 와서 그녀에게 난동을 부린 적이 있었다.

경호원들이 발 빠르게 잘 대처해 줘서 큰일은 없었지만 경찰 조사도 불응하고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제주도 리조트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해고에 대한 원한을 품고 계속 그녀를 노리고 있는 중이었다.

윤 대리와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서울의 엄마.

그녀는 물끄러미 깜빡거리는 발신 번호를 바라보다가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켠 뒤에 전화를 받았다. 방금 전까지 서늘하고 사무적이던 목소리는 사라지고 소녀처럼 발랄한 음성이 되었다.

“엄마!”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회사에서 온 전화 받고 있었어.”

[그랬구나. 네가 전화 안 받아서 엄마 잠깐 걱정했어.]

어쩔 수 없이 잘 고쳐지지 않는 엄마의 습관이자 버릇. 딸인 지안과 연락이 안 되면 엄마는 딸이 전화를 받을 때까지 전화를 했다. 원래도 그랬지만 크게 아프고 난 뒤로는 딸에 대한 엄마의 집착과 관심은 더 깊어졌다.

[있잖아. 지안아. 엄마가 낮에 꿈자리가 너무 안 좋아서 걱정되어서 전화한 거야. 너 나보고 뭐라 하지 마. 진짜 꿈이 너무 생생했단 말이야. 그리고 엄마 꿈 잘 맞는 거 알지? 꿈에 네가 시퍼런 불구덩이로 들어가면서 웃고 있잖니? 시뻘건 것도 아니고 시퍼런! 그런 바다 같은 파란색 불길 속으로 들어갔다고. 내가 네 손을 잡았는데 네가 내 손을 탁 소리가 나도록 세게 뿌리치더니 불길로 몸을 던지는 거야. 너무 놀라서 비명까지 지르며 깼단다.

그리고 바로 전화한 거야. 하필 또 네가 비행기 탈거니. 아무리 가까워도 바다 건너가는 거니까 엄마 괜히 겁이 나서 전화해봤어. 지안아. 비행기 타고 내릴 때 전화하고. 리조트 들어가서도…… 문자 주고. 서흔이는 언제 입도한다니?]

“지금 부산 호텔에서 공항으로 가고 있어요. 엄마. 나 이제 택시 탈거니까. 제주도 가서 전화할게. 알았어요. 서흔이는 현준 씨와 서울에서 만나 같이 내려온다고 했어.”

걱정이 듬뿍 묻어나는 두서없는 엄마의 말에도 차근차근 안심시킨 뒤 사랑한다 애교스럽게 말한 뒤 지안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가만히 핸드폰을 곁에 내려놓고 잠시 생각에 빠진 얼굴로 창밖을 멀리 내다보았다. 엄마에게 딸 지안은 세상의 전부였다. 엄마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그래서 엄마는 딸을 통제하고 자신의 영역 안에서만 살기를 바랐다. 그런 엄마에게 한때 숨이 막혀서 미국으로 도망갔지만 결국 그녀는 돌아왔다.

그녀가 떠나있던 동안 엄마는 뇌출혈로 쓰러지고 아버지가 오랫동안 준비했던 제주도 리조트 확장 리뉴얼이 늘어지면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작업 현장에서 일어난 사고, 아버지가 제주도 리뉴얼에만 신경 쓰는 사이 엄마의 다른 사촌들은 페이퍼컴퍼니로 회사 돈을 빼돌리며 힘 있는 주주들과 결탁해 아버지의 자리를 흔들었다.

스위스에서 호텔리어로 경험을 쌓은 4년. 그리고 반년 전 그녀는 로열 리조트 본부장이며 후계자가 되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여전히 딸이 회사를 물려받는 일을 싫어했다. 경영자란 힘들고 외로운 길이어서 딸이 그 길을 걷기 원치 않았던 것이다. 엄마처럼 아버지 같은 남자를 좋은 배우자를 만나 여자로서만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

하지만 지안은 결혼보다 호텔 일이 좋았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호텔리어가 되고 싶었다.

엄마의 뜻대로 어릴 적부터 무용을 했지만, 지안은 자신이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학교 때 다행히 부상으로 무용을 끝낼 수 있었지만, 엄마의 뜻에 따라 평범하게 영문과에 진학한 그녀가 엄마 몰래 경영학과로 전공을 바꿨을 때 전쟁이 시작되었다. 한 번도 반항한 적 없는 딸은 엄마에게 대들고 엄마는 모진 말로 딸을 상처 주었다. 그렇게 모녀가 끝없이 상처를 주고 할퀴며 대립했다.

그리고 그때 지안은 모든 것을 버리고 집을 나왔다. 엄마의 딸임을 포기하기로 했다.

평생 머리에 꽂는 헤어밴드 하나까지 엄마가 정한 대로 입고 따르기만 했는데. 혼자서는 아무것도 해본 적 없던 스무 살의 그녀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커피를 내리는 법을 배우고 손님들에게 주문을 받고. 식사가 담긴 접시를 나르고. 월급과 팁을 받아 생활을 꾸려 나가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시절에는 모든 것을 혼자 해야 했다.

힘들었지만 스무 살의 그녀는 그 자유를 사랑했다.

곱실거리는 머리는 더 이상 매일 아침마다 고데기로 눌러 줄 필요 없었고, 처음으로 붉은 갈색으로 염색도 했다. 하고 싶은 대로 화장을 하고 싸구려 액세서리들로 치장을 했다. 집에 놓고 온 명품들과 비교할 수 없는 싸구려 도금 제품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녀는 즐겁고 행복했다.

엄마가 봤으면 까무러칠 짧은 미니스커트와 가슴이 드러나는 탑을 입고 다니기도 했다. 높은 힐. 너덜거리는 부츠. 엄마가 금기했던 그 모든 것에 그녀는 일부러 더 도전했다.

금기를 깨는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이 짜릿했다.

엄마는 아직 모르지만, 그녀의 몸에는 타투도 있었다. 망설임 없이 새겨 넣었던 그것.

그리고 그 자리에 타투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 그 의미를 아는 사람도 단 한 사람뿐.

움찔. 지안의 얼굴이 엄격하게 굳어졌다. 황급하게 방금 전 기억을 지우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이미 감정이 일렁이는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그녀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의 그. 녀. 는. 너무 외롭고 슬퍼 보였다. 라고 생. 각. 했다.

앞서 나서서 위. 로. 해. 주고 싶은 만큼.

서늘하고 우아한 미모와 깍듯하고 정확한 예의범절의 그녀에게 사람들은 로열 그룹의 후계자는 얼음 공주를 닮았다 했다. 그러나 아무도 모른다. 그 얼음 공주가 활짝 웃어 꽃처럼 피어날 때 세상을 녹여 버릴 듯 사랑스럽기만 하다는 것을. 창백한 하얀 뺨 위로 사랑스러운 핑크빛 홍조가 가득 퍼지며 도톰한 입술 위로는 붉은 장미처럼 활짝 만개하는 것도. 붉어진 하얀 뺨 위에 점점이 흩어진 작은 주근깨도 귀엽게 도드라질 때면….

단정하게 묶어 올린 곱슬머리를 풀어 놓으면 우윳빛 하얀 어깨 위로 풍성하게 퍼져 마치 요정 같은지. 반짝반짝 빛나는 눈이 유혹으로 짙게 반짝일 때면 그녀는 언제나 빛으로 가득한 사랑 그 자체였다.

한여름 밤의 꿈의 요정 퍽이 단숨에 반했던 요정의 여왕님이었다.

“응?”

한참 마치 먼 시간을 넘어간 듯 하늘을 바라보며 명하니 바라보다가 돌연 그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주도를 가야 한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놀라 몸을 파르르 떨었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본 뒤 바쁘게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녀답지 않게 걸음을 서두르며 앞서 나가던 지안은 앞에서 성큼성큼 다가오는 남자와 어깨를 강하게 부딪치고 말았다.

비명이 나올 정도로 아픈 접촉에 몸이 앞으로 쏠려 휘청거렸다.

재빨리 균형을 잡지 못했다면 넘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지안은 입술을 깨물며 비명을 참았다. 고개를 치켜들어 화가 난 커다란 눈으로 부딪친 사람을 확인하려고 했으나 상대방은 이미 바람처럼 홀연히 사라진 뒤였다.

누구와 부딪친 건지 흔적도 모르게 너무 빠르게 사라져 버려서 파악이 되지 않을 정도로.

인상을 찡그린 채 얼얼한 어깨만 문지르며 그녀는 호텔 앞에서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하며 가방에서 패드를 꺼내 보다가 점점 공항에 가까워지자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서흔에게 문자를 보내려고 하는데 그제야 핸드폰이 가방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당황해 급히 거칠고 빠른 손놀림으로 가방을 몇 번이나 뒤적거려봤지만, 핸드폰은 없었다.

입술을 깨물며 말없이 미간을 찡그리는 지안.

어디서 떨어트린 거지? 어쩌면 좋지? 호텔에 흘리고 온 것일까? 강지안. 왜 안 하던 짓을 하니. 그렇다고 핸드폰을 두고 제주도로 갈 수가 없었다. 다시 개통한다 해도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사이 엄마가 전화해서 다른 사람이 받거나 하면 크게 놀랄 것이다. 핸드폰으로 연동해 놓은 것들도 걱정되고 포기하고 다시 폰을 사는 것보다 호텔로 돌아가는 게 빠를 것이다.

더 고민하지 않고 그녀는 택시 운전사에게 차를 돌려 달라고 요청했다.

“아저씨 호텔로 돌아가 주세요. 중요한 걸 놓고 왔어요. 요금은 두 배로 드리도록 할게요.”

택시를 다시 되돌려 호텔에 도착해 그녀는 뛰듯이 빠른 걸음으로 메인 로비의 컨시어지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제가 몇 분 전에 핸드폰을 로비 소파에 놓고 간 것 같습니다. 분실물 문의 좀 드릴게요.”

“로비에서 핸드폰을 잃어버리셨다고요? 어느 쪽이신가요?”

“로비 소파이고 폰은 검은색에… 이런 기종입니다.”

지안은 자신의 핸드폰에 대해 설명을 했고 직원은 잠시 다른 직원과 이야기를 나눈 뒤 다시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

“잃어버린 핸드폰 기종이 이 기종이시고 대략 30분 전쯤에 로비에서 잃어버린 폰인가요?”

“네 맞아요. 제 폰입니다.”

“확인했습니다. 그 핸드폰은 저희 호텔 투숙객분이 주워서 직접 가지고 계십니다. 폰을 가지고 계시는데 급히 일이 생겨서 나가다가 폰을 객실에 두고 가셨다고 핸드폰을 찾으러 오시면 객실로 안내하라고 하셨어요. 프런트에 맡기는 걸 깜빡했으니 필요하시면 직접 올라와서 가지고 가도 좋다고 하셨어요.”

“직접 올라와서 가지고 가라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지안이 몇 번이나 되묻었지만, 프런트 직원은 묘하게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프런트에 맡기시려고 했는데 깜빡 잊고 외출하셨다 하네요, 폰 주인이 바로 찾으러 오면 기다리게 할 수 없으니 객실에 올라와서 직접 가져가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맡기신 카드 키입니다.”

아니. 이래도 되는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상황에 그녀는 선뜻 그 카드를 받을 수 없었다.

‘아니 저를 무엇을 믿고요?’라는 말이 나올 뻔 한 것을 지안은 혀를 깨물어 참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얼굴도 모르는 고객의 방에 들어가서 핸드폰을 가지고 나오라니.

“불편하시면 여기서 기다리셔도 되는데 저녁 늦게 들어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중얼거리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컨시어지 매니저가 건네는 카드 키를 일단 받아들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니 일단 받아 들긴 했는데 난감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 폰을 놓고 갈 수는 없고 시간도 없는데.

초조한 마음에 다시 손목시계를 들여다본 뒤 결심한 듯 그녀가 한숨처럼 말했다.

“폰만 가지고 나오겠습니다. 연락 가능한 번호를 남겨 놓겠습니다. 추후 고객이 컴플레인 주시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주인이 없는 방에 들어가야 한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새로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두 눈 딱 감고 폰만 집어 나오면 되는 일이었다. 부주의한 자신을 탓하며 지안은 불편한 얼굴로 그녀는 카드 키만 만지작거리며 내려오는 엘리베이터의 숫자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빠르게 내려오는 숫자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머릿속이 어지럽게 돌았다.

엘베가 도착한 순간에도 올라가야 할지 말지 말아야 할지 그녀는 여전히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저하는 사이 엘리베이터 몇 대를 그냥 보내 버리고 말았다.

왜 폰을 주운 사람은 바로 프런트에 맡기지 않았을까?

모르는 타인을 어떻게 믿고 룸 키를 주고 찾아가라는 것일까?

찜찜한 기분이 가시질 않아 선뜻 엘리베이터를 탈 수 없었다.

그러나 포기하고 가기엔 당장 폰이 없으면 곤란할 일들이 많았다. 누가 폰을 해킹이라도 한다면? 엄마의 전화를 다른 사람이 받는다면?　그 후에 일어날 파장의 아찔함에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도 없는 방이라고 했다. 핸드폰만 재빨리 집어 나오고 감사 인사와 현금을 프런트에 남기고 가자.

그때 ‘딩’ 하는 소리와 함께 초대하듯 열린 문 안으로 지안은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성큼 들어갔다. 카드 키를 대고 12층을 누르자 엘리베이터가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1207호-

룸 앞에서 넘버를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그녀는 카드 키를 천천히 밀어 넣었다.

달칵, 키가 닿아 딱 맞는 경쾌한 소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룸은 더블베드와 소파가 마주 보고 있는 구조의 스탠더드 룸이었다. 하얀 소파는 해안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통 유리창을 등진 채 놓여 있었고 그 앞 티 테이블 위에 검은 핸드폰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마음 졸이며 불안했던 것이 탁 풀리며 그녀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다른 것 볼 것 없었다. 빠르게 테이블에 다가가 폰을 집어 들었다.

폰을 집어 들다가 무심코 눈이 마주친 통 유리창에 비친 음영. 몸을 돌리려던 지안이 휙 하고 고개를 돌려 통 유리창을 다시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버렸고 폰을 꽉 움켜쥔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한껏 커진 다갈색 눈동자는 공포로 어두워졌고, 그 밑으로 파르르 진동하는 속눈썹까지 그녀는 순식간에 동요하고 있었다.

자신이 본 것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 안에 무언가 있. 었. 다. 아무도 없다고 했는데. 무언가 분명히 있었다.

그저 숨을 죽인 채 창에 어른거리는 실루엣만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온몸을 짓누르는 새하얀 공포감이 온몸을 순식간에 타고 올라 그녀의 신경 줄을 팽팽히 잡아끌었다. 그러나 그것은 낯섦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아니라 낯익음에 대한 공포였다.

한 발자국도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머릿속은 하얗게 부서져 버렸다.

작은 룸 안은 기싸움이라도 하듯 긴장된 침묵으로 가득 찼고 그녀는 가면처럼 차갑게 굳은 얼굴로 단단히 팔짱을 낀 채 천천히 몸을 돌렸다.

침대 옆 욕실과 이어지는 드레스 룸 입구 앞에 비딱하게 서 있는 커다란 실루엣을 발견한 다갈색의 눈동자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사람일 리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지금 지독하게 이상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지난 4년간 그렇게 바랐지만 단 한 번도 꿈에 나온 적이 없던 것이. 지금 여기 있을 리가 없었다.

의심과 경악. 복잡한 감정들로 어둡게 짙어진 다갈색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남자는 약이 오를 만큼 무심하고 무표정해 보였다. 미동 없이 차갑고 단정한 시선은 일절 흔들림 없이 평온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지안은 알고 있었다.

그 무심함 뒤에 그가 감추며 참고 있는 것. 그녀의 것만큼이나 진득하게 가라앉은 깊고 진한 무엇을.

그랬다. 그는 정말 여기,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절대로 꿈이 아니었다.

그제야 한발 늦게 서서히 온몸으로 번지는 현실감에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릴까 온 힘을 다해 버티고 서 있어야만 했다.

절대로 저이 앞에서 쓰러지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 떨림을 감추려고 더욱 강하게 힘을 주고 꼿꼿이 등을 세웠다. 최대한 차갑고 단정하게 강지안의 얼굴로 눈에 잔뜩 힘을 준 채 그를 노려보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그의 한쪽 입 꼬리가 실룩, 호기롭게 웃었다. 지안의 허세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아 그녀의 뺨이 움찔 떨렸다.

그가 그렇게 소년처럼 웃자 지난 몇 년간 로열그룹의 후계자 강지안으로 살며 떨쳐내려고 노력했던 모든 것들이 하얗게 부서지듯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렸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발랄했던 22살의 그녀로 돌아가 버린 것 같았다.

22살. 작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만나 첫눈에 반했던 그 남자. 어제처럼 떠올라 흘러들어오는 기억에 심장은 아프도록 세차게 고동쳤고 피는 뜨겁게 떨려 어지러웠다.

벗어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에서 다시 제로. 강렬하게 그녀를 후려치며 되살아 난 또 다른 그녀의 존재감에 떨리던 손끝에서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진 것도 깨닫지 못했다.

강지안, 너의 실수야. 경솔하고 주의력 없는 강지안을 꾸짖는 이성의 소리.

핸드폰은 버렸어야 했다. 이 방에 들어온 것은 그녀의 실수였다. 저 남자의 장난질에 또 놀아나고 말았어.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녀의 ‘퍽’은 언제나 그녀를 놀라게 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지. 발끝을 세우고 숨을 감춘 채 인기척도 없이 살금살금 다가와 비명을 지르게 하는 일. 한 번도 그녀는 그의 장난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일 뿐. 정신 차려, 강지안! 그는 이제 더 이상 그녀의 장난꾸러기 ‘퍽’이 아니잖아. 그는 이제 없어. 아직 남아 있는 이성이 그녀를 다그쳤다. 지안은 그를 부정하듯 고개를 저으며 본능적으로 천천히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지안이 도망치듯 한 걸음 물러서자 그 남자가 여유롭게 기대 서 있던 벽에서 그제야 몸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