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기억을 잃은 그 사람 (합본)


# 01

 

 

 

어제는 온종일 비가 내렸다.

봄을 걷어가는 비라서인지 먼지를 싹 다 걷어가 하늘이 맑게 개었다.

아침부터 열어놓은 문으로 선선한 공기가 들어온다. 그 불어오는 바람을 등지고 재연은 진열해 놓은 오브제의 방향을 바꾸고 있다.

 

별거 아니지만, 되도록 더 잘 보이게 하고 싶다. 맨 처음 카페를 오픈하면서부터 재연의 손으로 놓아둔 오브제들이었다.

고작 방향 하나 바꾸는 거에 열중하는 재연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린다.

 

태호는 재연의 뒷모습을 벌써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못마땅한 숨소리. 가늘어지는 눈으로 그의 손은 테이블을 짚었다가, 이제는 팔짱을 낀 채 턱을 매만진다.

 

결국 태호는 재연을 지나쳐 걸어 나간다.

열어놓은 문을 닫으려 누르는 빨간 버튼, 언젠가 매니저가 얘기해준 그대로인데도 전혀 닫히질 않는다.

어깨가 아플 때까지 누르던 태호는 결국 목소리를 냈다.

 

누가 여기 좀 와줄래요?”

 

. 무슨 일이세요?”

 

손을 내린 그의 곁에 다가선 건 매니저인 재연이 아니었다.

오후 시간을 맡은 직원에게 태호는 짧게 내뱉고는 문을 빠져나가 밖에 섰다.

팔을 뻗어도 닿지 않을 높이, 의자를 가지러 온 직원을 보자 재연이 물었다.

 

?”

 

문 닫으라고 하시는데요?”

 

 

 

태호는 밖을 보며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주 내내 비 소식이 있어서 그런지 오늘은 다른 때 보다 한가하다.

차라리 바쁜 게 낫지.

요즘 들어 더 자꾸만 시선이 재연에게로 간다.

분명 이야기 했던 태호다.

아침 청소 뒤에 문 열어두지 말라고.

그럼 청소한 그 수고가 너무 헛되다고 이미 몇 번을 이야기 했는데도, 전혀.

아니, 그 얘기를 그녀가 기억할까 싶다.

 

 

태호는 어깨를 한 번 돌려본다.

문을 닫으려던 그를 못 본 것도 아니면서 끝까지 재연은 그 옆에 오지 않았다.

아마 매니저의 머릿속엔 며칠 전 문제의 그 소파도 완전히 지워져 있을게 뻔했다.

그렇지 않다면 아직 아픈 어깨를 올려 문을 닫으려 애쓰는 그를 보고 그렇게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문이 닫히자 의자에서 내려가는 재연의 직원에게 웃어 보이는 옆얼굴이 보였다.

그마저도 태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그와 위치가 바뀐 것 같다.

지난주만 해도 그렇다.

처음으로 원두를 정기 배송 받겠다는 사람이 생겼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 태호의 눈에 보인 건, 작은 커튼을 젖히고 재연을 향해 그제야 반갑게 웃던 얼굴.

로스팅이야 매니저가 하고 있으니 나란히 앉았다만 모든 이야기를 재연에게만 하던 그였다.

직원들은 지나칠 정도로 재연을 의지하고 있고 그녀가 자리를 비우면 사람들은 재연을 찾아댔다.

입술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그를 두고, 본격적인 이야기와 사소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결국 앉아있을 필요가 없어진 그는 약속을 더 미룰 이유조차 잃어서 그대로 자리를 비웠고,

돌아왔을 때는 재연이 남겨둔 납품 계약서 한 장만 달랑 올려져 있었다.

 

 

잘 안되네.”

 

재연은 손을 뻗어 자동문을 다시 확인했다.

닫기는 했는데 열리질 않는다. 의자에 다시 올라서는 재연.

그런 그녀의 의자를 잡은 직원은 태호의 시선을 느끼고 손을 꼭 붙들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다시 작동된다.

이제 연 지 겨우 1년도 되지 않은 카페는 방치된 채 인수한 탓인지 하나둘씩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

 

문이 움직이자, 태호는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 전화가 들어온다.

이정훈.

통화를 하며 카페와 조금씩 멀어져 간다.

 

나 도착했어.”

 

하지만 목소리는 밖에서 들렸다. 그것도 꽤 가까운 곳에서.

고개를 들어보니 정훈이 벌써 저 쪽에서 한쪽 팔을 번쩍 들고 온다. 반가운 걸음으로.

 

 

차는? 세차는 끝냈어?”

 

그건 정훈의 핑계다. 무슨 일이 있으면 대다수 하루 이틀 내로 나타나는 그니까.

정훈을 본 태호의 얼굴은 그제야 표정이 풀어져 간다. 그를 보면 안심이 된다.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아니 왜 나와 있어?”

 

얇게 입은 그를 보고 정훈은 다정하게 핀잔을 준다. 그에 손에 든 것을 보고 태호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건 뭔데?”

 

, 이거?”

 

정훈은 빙긋 웃더니 카페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려 끄덕였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연 새 카페.

디저트를 맛보고 싶다는 재연의 말에 정훈이 오늘 기어이 그걸 사 온 모양이다.

태호의 좁아지는 미간을 보던 정훈은 부드럽게 물었다.

 

뭐 좀 먹었어?”

 

아니.”

 

그럼 딱 맞춰 왔네.”

 

정훈은 마음에 든다는 듯 태호를 보고 씩 웃었다.

카페는 1. 복층을 허물어 천장이 엄청나게 무시무시하게 높은 편이라 잘 모르겠다지만 그냥 보기에도 두 사람 다 키가 엄청나게 큰 편이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으면 조금 굳은 얼굴인 태호와 다르게 정훈은 입을 다물고 있어도 웃는 얼굴이다. 사근사근한 성격에 부드러운 인상. 정훈은 외사촌인 태호와 그렇게 정반대로 다른 이미지.

멀뚱히 서 있는 태호의 옆에 와서는 안색을 살핀다.

이마를 짚으려 하자 질색하는 그. 정훈은 웃어버리며 싫다는 태호의 등을 감싸듯이 안고 재연이 닫아놓은 자동문을 통해 다시 카페로 들어간다.

 

실내에 들어가니 커피 향이 가득하다. 정훈은 두리번대며 재연을 제일 먼저 찾는다. 태호를 내버려 두고 그는 카운터 근처로 걸어가서는 재연에게 사 온 것을 자랑스럽게 들어 보인다.

희미하게 미소 짓는 재연의 얼굴. 태호는 자리를 잡고 앉느라 미처 보지 못했다. 다시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는 정훈이 사 온 것을 카운터 안쪽에 대충 내려놓고는 곧바로 다른 일을 하려 안쪽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애써서 사 온 것을.’

 

태호는 보다 못해 그녀에게 한 소리 하려고 일어나려는데 정훈은 오히려 그의 어깨를 잡았다. 표정이 정말 볼만하다. 가면 분명 싸움이 될 게 뻔하다. 태호는 재연이 사사건건 눈에 거슬리는데 정훈 절대로 그녀를 자를 수 없다고 한다.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없는 태호다.

 

무례해. 형이 일부러 사 온걸.”

 

정훈은 그런 그를 보고 말없이 웃을 뿐이다.

 

바쁜 시간대잖아.”

 

그렇지 않아도 삐걱대던 자동문이 스르륵 열리고 닫히며 손님들이 그래도 제법 들어오고 있었다.

원두 갈아지는 소리와 커피 내리는 소리가 계속 들리자, 정훈은 태호의 옆에 나란히 앉아 그를 당기며 바로 물었다.

 

모레 목요일 시간 비어?

 

물론 정훈은 뻔히 알면서 묻는 것이다. 그렇기에 태호는 고개를 싱겁게 끄덕였다.

그날은 그의 정기검진 일이었다.

 

어깨는 많이 아파?”

 

. 아프지.”

 

정훈의 말에 태호는 기억났다는 듯 왼쪽 어깨를 돌려본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 어깨를 고작 몇 분 정도 올리고 있었다고 등 쪽부터 시큰거린다.

 

목요일은 예약 시간이 1130분이니까, 10시쯤에 올게.

 

정훈의 휴대전화에 알람을 집어넣는 동안 그 앞에 음료가 나온다.

재연이 들고 온 것은 말차 라테. 정훈 앞에만 내려놓는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늘 똑같은 것.

라테 위로 예쁘게 그려진 하얀 하트를 보더니 정훈은 가는 재연을 돌아보더니 웃는다.

쫀쫀한 거품 안의 진하고 따듯한 차가 달지 않게 입안에 퍼진다. 곱게 올라간 부드러운 거품을 한 모금 입에 물고 정훈은 기분이 좋아진 듯 웃었다.

 

점심은 뭐 먹을까?”

 

생각 없어.”

 

태호는 입을 다물고 시선을 돌려 문 쪽을 보고 있을 뿐이다.

 

그럼 바로 나갈까?”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어느새 다 마신 정훈의 잔을 보고 태호는 몸을 일으켰다.

 

 

어깨가 아프다는 그를 태워 한의원에 내려두고, 정훈은 서둘러 카페로 돌아왔다.

바쁜 시간은 지난 재연은 기력을 놓고 멍하니 카운터 근처에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문이 열리자 무의식적으로 인사하던 재연은 정훈을 보더니 그제야 한숨을 길게 내쉰다.

카운터 안으로 들어온 정훈이 한쪽 팔을 들어 재연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좀 괜찮아?”

 

아니. 전혀.”

 

그 말에 생각났다는 듯 미뤄둔 종이봉투를 당겨 여는 재연.8

그 안에는 디저트가 아닌 다른 게 들어있었다. 정훈이 챙겨온 알약과 허리 보호대.

재연은 먼저 약을 뜯어 입에 털어놓는다.

 

밥을 먹고 먹지.

 

정훈이 떠온 물을 받아서 들며 재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허리 보호대를 꺼내 두르는 손이 급하다. 그 손을 보던 정훈이 그녀의 등 뒤로 다가가 옷을 정리해 도와주기 시작했다.

 

간식이라도 사다 줄까?”

 

아니야. 정말 됐어.”

 

재연은 이제 살겠다는 듯이 숨을 내쉬었다. 대신 그녀는 돌아서서 커피를 내린다. 정훈은 바로 옆에서 그녀가 내리는 커피를 본다.

원두를 갈아 넣고 딱 샷 두 개를 뽑는다. 기분 좋은 소리가 나더니 추출되는 커피. 두 개의 잔으로 미끄러지며 끈적한 커피가 추출된다.

재연은 에스프레소 커피잔에 한꺼번에 담더니 냉장고에서 정훈이 좋아하는 음료를 꺼내어 내민다.

구석진 자리로 간 정훈은 앉자마자 묻는다.

 

진짜 괜찮은 거야? 허리?

 

그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그녀는 픽 웃는다. 오늘 처음 웃는 그 얼굴이다.

 

그래, 괜찮다니까.

 

그녀는 그렇게 작은 잔에 담긴 시럽을 듬뿍 담은 에스프레소를 들어 보인다.

 

아님, 이것도 못 마셔.”

 

하지만 정훈은 조금 전 눈앞에서 마약성 진통제를 털어놓는 재연을 보고 걱정스러운 눈빛을 거둘 수는 없었다.

늦은 밤 웬만해선 전화하지 않는 재연의 전화는 분명 미루다 미루다 참지 못해 부탁한 것이다.

 

태호 때문에 온 거지?”

 

주말에는 무슨 일이 있던 거야?

 

그 일 때문이구나.

하필 정훈이 석 달 만에 다시 전주에 내려갔다 온다고 한 그 사이였다. 그것도 고작 사흘. 가까운 지인들이 있지만, 태호의 카페의 일을 돕느라 한동안 못 간 그를 말릴 수는 없었다. 정훈은 자신이 없는 동안 사이좋게 지내고 있으라고 재연에게 속삭이고 내려갔었는데 가자마자 일이 터졌다.

 

저거 보여?”

 

못 보던 거네?”

 

. 저거 집어 와서 그래.”

 

고작 저거로 그렇게 볼멘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어깨 치료를 위해서 한의원으로 데려가는 그 짧은 동안에 태호는 입 한 번을 열지 않았었다.

까칠하고 예민한 성격이 무언가로 인해 심하게 자극받은 게 분명했다.

재연이 막 입을 다시 열자, 직원이 다가와 잠시 말을 끼어든다.

 

매니저님, 포스기가 작동이 안 되는데요.

 

, 잠깐만.”

 

재연의 말에 정훈은 그녀가 주었던 음료의 뚜껑을 비틀어 따냈다.

태호가 있을 땐 그를 부르지 않는 재연이다. 아니 오히려 타인처럼 대했다.

그렇게 그 이라는 말도 태호를 자극할까 조심스러워 진 건 최근 들어서였다.

재연의 잠깐이란 말에 시간을 확인한 정훈의 시선이 어느덧 에스프레소 잔으로 닿는다.

그 진한 것을 다 마셔버렸다.

태호를 다시 데려오려면 그는 곧 다시 나가야 했다.

카운터 앞에서 포스기를 만지는 재연을 향해 정훈을 일어서지만 그를 보고 걸어오는 건 재연이 더 빨랐다.

 

방금 뭐라고 했었지?”

 

다시 자리로 돌아온 재연은 정훈에게 되물었다. 그리고는 다 마신 커피잔을 들어 마시려 한다.

다 말라버린 커피, 정신없다는 듯이 웃으며 그것을 내려놓는 재연에게 정훈은 다시 천천히 물었다.

 

지난주에 뭐로 싸운 거냐고.”

 

그런 그를 보던 재연은 손가락을 들어 대각선의 의자를 가리킨다.

 

저거.”

 

블록 끝 그러니까 모퉁이의 오랫동안 휴업 중이던 공방이 결국 문을 닫았다.

안면을 트고 지내던 사장님이 평소 재연이 좋아하던 1인용 소파를 그녀에게 준다고 했다.

어차피 카페 내부의 실내장식들은 통일성이라고는 없었다.

사장님의 호의고 고맙고, 마침 필요할 것 같아서 좋다고 했었는데

 

저기 공방 문 닫고, 받아온 거거든. 근데 태호가 싫었나 봐.”

 

어지간히도 싫었는지, 그의 말투는 평소보다도 더 재수가 없고 아니꼬웠었다.

 

그걸 준다고 받아옵니까? 라고 하더라고.”

 

정훈은 태호의 말투를 완벽하게 따라 하는 재연을 보고 살짝 눈을 찌푸렸다.

 

그래서 알았다고. 그럼 거절하고 온다고 했는데, 그러면 또 자기 입장이 뭐가 되냐고.”

 

정훈이 돌아본 곳에 청록색의 1인용 엔틱 소파가 보인다. 오히려 포토존이 되어버려서 더는 태호가 더 뭐라 할 수 없는. 그 문제의 소파.

 

거절했는데 그날 오후에 혼자 낑낑대며 들고 왔더라고.

 

그래서 결국 또 어깨가 나간 거군.’

 

정훈은 기가 막혀 웃었다.

 

그것도 어쩔 수 없는 거겠지?”

 

두 사람의 눈이 공중에서 마주친다. 어디까지가 그의 진짜 감정인지 이제 재연은 모르겠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 한 번 물어보고 올게.”

 

됐어. 가봐야 맨날 똑같은 소리잖아.”

 

그건 그렇다. 정훈은 고요히 숨만 내쉴 뿐이었다.

 

, 근데 이제 가봐야지.”

 

정훈은 시간을 보고는 깜짝 놀라 일어났다. 나가야 할 시간을 10분이나 지나쳐 있었다. 서둘러 나가는 그에게 재연은 큰 소리로 등 뒤로 소리쳤다.

 

차 조심해!”

 

12분 정도의 거리를 신호의 도움으로 아슬아슬하게 8분 만에 도착했다.

로비에 들어서자 소파에 앉은 태호의 눈빛을 보니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그를 식혀서 데려다주려는 계획이 완벽하게 실패해버렸다.

 

어깨는 좀 시원해 졌어?”

 

정훈은 보조석에 탄 태호에게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뭐 하느라 늦은 건지 얘기나 들어보자.”

 

아직 낯선 곳에서는 극도로 불안해 하는 자신을 아는 그가 사과하니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아침부터의 불쾌한 감정은 정훈 때문도 아니고.

 

아침에 먹은 게 속이 좀 안 좋아서.”

 

정훈은 거기다 대고 재연하고 이야기하다 늦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의 변명에 돌아온 건 한심하다는 듯한 태호의 눈빛이었다.

 

빨리 출발하기나 해.”

 

의외로 싱겁게 풀려버린 그의 말이 끝나자, 곧바로 다시 카페로 차를 돌렸다.

 

, 어깨 다시 아프면 연이에게 얘기해서라도 꼭 다시 치료받아. 알겠지?”

 

태호는 그의 입에서 나온 연이에게라는 말에 별다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긴 하네. 기억하고 있다면, 자주 어깨가 문제를 일으키는 탓에 굳이 소파를 옮겨오는 수고를 하지 않을 텐데.

가끔은 정훈도 이렇게 깜빡한다. 그가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사고 나고 싶어?”

 

태호의 말에 정훈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앞을 봐.”

 

그제야 그를 보고 있던 정훈이 고개를 돌린다.

 

태호를 내려주고, 카페로 걸어 들어가는 그의 등을 한참이나 그는 보고 있었다.

장장 6시간을 달려서 올라오고, 저 두 사람과 고작 두어 시간 같이 있었을 뿐인데 엄청난 피로감이 몰려든다. 좌불안석이지만 어쩌겠는가, 멀어지는 두 사람의 카페를 보고 정훈은 입술만 깨물 뿐이었다.

 

***

 

로스팅하러 가면 매니저는 함흥차사다. 지난주도 그랬다. 한 번쯤은 얘기해야겠다 생각한 태호이지만, 이미 오전부터 극도로 예민해진 뒤라 오늘은 굳이 거기까지 가고 싶지 않았다.

 

아침부터 약간의 소란이 있었다.

어제 나간 원두가 중량이 바뀌었다.

오전 오픈을 준비하던 카페에서의 뒤늦게 알아챈 것 같았다.

화가 난 전화가 오는 건 당연했다. 그나마 가까운 거리이기에 망정이지.

 

매니저는?”

 

출근 안 하셨어요.”

 

재연은 아침 내내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태호가 다시 걸은 전화. 사장은 첫마디부터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목소리가 참 앳되어 보이는 남자인데, 누군지 떠올리려 해도 태호는 도무지 그 사람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사실 그가 무슨 원두를 가져간 건지도 파악이 안 되어, 적어둔 장부를 전화 속부터 들려오는 욕을 꾸역꾸역 다 들으며 겨우 찾아냈다.

 

다시 연락해 볼래요?”

 

태호는 걸어가는 도희에게 손짓을 했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젓는다.

 

 

아예 전화가 꺼져있어요.”

 

결국, 태호는 진땀을 흘리며 사과를 할 뿐 마땅한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결국 통화를 끝냈다. 끝내자마자 머리가 띵 하더니 낯선 통증이 강타했다.

불쾌한 두통에 그는 테이블을 붙들고 통증을 견디고 있을 때였다. 막 재연이 카페 안으로 들어오던 것이.

 

재연은 정면으로 보이는 태호를 보고 서둘러 카운터 앞으로 와서 물었다.

 

괜찮으세요? 머리 아파요?”

 

재연의 목소리가 들리자 태호는 눈을 번쩍 뜨고 그녀를 보았다. 머리만 아프지 않았다면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른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그 낮고 무거운 목소리에 화가 가득했다.

 

전화는 왜 안 받습니까?”

 

재연은 가방 안쪽에 손을 넣었지만 없다. 잃어버린 게 분명하다. 다행히도 열쇠는 가방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죄송해요. 휴대전화가.”

 

그리고 지금 시간이 몇 시인가요?”

 

재연은 태호 뒤의 대각선의 시계를 보았다.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는 태호는 점차 두통이 심해져 가고 있었다.

 

그럴 거면 그만두세요.”

 

카운터로 돌아오는 도희가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는 재연과 태호를 번갈아 보았다.

그는 재연이 오전에 들를 곳이 있어서 늦게 출근한다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한 이야기를 또 잊은 게 분명했다.

 

일단 약부터 드시는 게.”

 

재연은 두 번째 서랍을 열고는 안쪽을 더듬어 그가 먹는 약을 꺼내 내밀었다. 테이블에 덩그러니 알약 두 개가 나오고 태호는 그걸 잡아채듯 들고 물과 함께 마셨다.

그사이 재연은 옷을 갈아입으러 작은 공간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야?”

 

도희는 그녀에게 살며시 다가가서 조금 전의 사고를 간략히 설명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둘러 대처하기 시작했다.

어제의 사고를 낸 직원은 중간 타임을 담당하는 도희가 아닌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마감을 담당하는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오늘 공교롭게도 휴무였다.

원두를 다시 로스팅 해서 가져다주기로 하고, 실수는 무상으로 제공하기로 하는 것으로 재연은 빠르게 사고를 마무리 지었다.

 

태호는 중간에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을 재연이 묵묵하게 정리하는 동안, 자리에 가만히 앉아 눈만 감고 있었다.

도희는 그런 그에게 따듯한 차를 내어주는 재연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는 재연이 건넨 약을 먹고 많이 진정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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