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춘향이와 이몽룡

“수고하셨어요, 정 실장님.”

“아유, 무슨 말씀이세요. 김 팀장님이야말로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정 실장님 덕분에 이번에도 한 건 제대로 마쳤네요. 저희 정말 정 실장님 없으면 안 되는 거 아시죠?”

“헤헤헤. 아닙니다. 앞으로도 쭉 잘 부탁드려요.”

호텔은커녕 민가조차 찾아보기 힘든 산골. 이곳에 떡하니 자리 잡은 그 이름도 화려한 ‘다이아몬드 호텔’ 정문 앞에서 나는 참 전통 탁주 김 팀장님과 작별 인사를 주고받고 있다. 참 전통 탁주는 국내에서 가장 규모 있는 주류 회사는 아니지만 오래된 전통 방식을 고수하며 소량이나마 따라올 자가 없을 정도의 고품질 탁주를 내놓고 있어 시장에서 평판이 아주 좋았다. 이름 그대로 진정한 전통이 있는 기업이라 이 말씀.

참 전통 탁주와 일한 지도 벌써 3년이 다 되어 간다. 참 전통 탁주와 똑 닮아 있는, 작지만 고객 맞춤형 서비스를 표방하는 홍보 대행사 이지 PR이 바로 내가 속한 회사다. 한차례 크게 덴 일이 있어 처음에는 외부 홍보 대행사 자체에 대해 영 마뜩잖아하시던 깐깐한 참 전통 탁주 김 대표님도 이제는 조금씩 마음을 열고 계신 덕분에 직원들 사이에서 안도의 한숨이 나오고 있는 터였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내가 부른 택시가 저 멀리서 코너를 돌아오는 걸 발견한 내가 사람 좋은 얼굴로 나를 배웅하던 김 팀장님께 꾸벅 인사했다.

“아, 제가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네요. 살펴 가세요, 정 실장님!”

내가 택시를 타고 나서도 자리를 지키고 서서 순박하게 손을 흔들고 있는 김 팀장님에게 나는 창문 너머로 고개를 끄덕여 다시 한번 인사했다. 소규모라 해도 어엿한 대표의 아들인데 허영기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좋은 사람이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택시 기사의 물음에 나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광한루로 가주세요.”

광한루. 그래 역시 광한루지.

사실 서울 밖으로 나와 본 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까마득한 탓에 이번 출장에는 조금의 흑심이 있었다. 복닥복닥한 도심을 벗어나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느긋하게 힐링을 하고야 말겠다는. 게다가 남원은 처음이란 말이다. 지난 일주일간 업무에 치일 때마다 조용히 핸드폰을 집어 들어 검색창에 ‘남원 가볼 만한 곳’, ‘남원 맛집’, ‘남원 당일치기 여행’을 입력하는 게 낙이었다고!

그런데 출장 당일. 못 부르는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으로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내려온 남원에는 내 마음도 몰라주는 비가 후드득후드득 내리고 있었다. 행사가 끝날 때쯤에는 비가 그치지 않을까 희망을 품어 보기도 했지만, 불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이놈의 비는 온종일 내리겠구먼.”

택시 기사님의 무심한 확인 사살이 마음을 푹 찔렀다.

가보고 싶은 곳은 물론 이미 다 봐 둔 상태였다. 하지만 ‘비’라는 변수가 생긴 탓에 아무래도 몇 군데 들르기는 어렵겠다 싶었다. 게다가 오늘 나는 양손에 짐이 한가득했다. 어깨에는 숄더백, 한 손에는 노트북 가방, 다른 한 손에는 행사를 마치고 김 팀장님이 쥐여 준 선물 봉투, 그리고 남원에 도착해 눈에 보이는 아무 가게에 들어가 부랴부랴 산 민트색 우산까지.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 여기까지 온 이상 최대한 하는 데까지 해보는 거다.

“다 왔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주머니에 넣어 둔 카드를 주섬주섬 꺼내 결제하고 양손 가득 짐을 챙겨 내렸다. 손이 모자란 탓에 우산 하나도 잡고 있기 힘들었다.

“한 명이요.”

입장권을 잡을 손이 없어 검지와 중지 사이에 겨우 끼운 채 나는 그렇게 약간은 불안한 모습으로 광한루에 들어섰다. 평일 오후이기도 했거니와 추적추적 내리는 비 때문인지 내부에 사람이라고는 많지 않았다.

나에게 남원은 낭만의 도시였다. 더구나 춘향이와 이몽룡이 만났다는 광한루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시간을 들여 이곳의 정취를 흠뻑 느끼고 가리라 다짐하며 나는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하이힐에 물이 들어갈까 봐 빗물이 고인 웅덩이를 조심조심 피해 걷는 것도 일이었다.

“와! 좋다.”

비록 둘러보기 좋은 여건은 아니었지만 고즈넉한 분위기에 내리는 빗소리마저 운치를 더해 주었다. 춘향이와 이몽룡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로맨틱하단 말이지.

어느새 춘향이와 이몽룡이 만났다던 그네 터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하늘 높이 뻗어 있는 그네를 보며 나는 다시금 내리는 비를 살짝 원망했다. 비만 아니었으면 그네도 타고, 어쩌면 나도….

‘너의 박문수를 찾아와.’

‘박명수를 왜 찾아?’

‘아, 아니다. 이몽룡. 암행어사라 착각했음.’

출장 오기 전 술잔을 기울이며 친구와 나누던 실없는 대화가 떠올랐다. 겉으로는 남자 따위는 필요 없다며 웃고 넘겼지만, 마음속 한구석에 약간의 기대감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물론 현실은 역시나 기대와는 달라서 지금 내 주변에는 나 말고 저 멀리 단체 관광을 온 중년의 아주머니 아저씨들 뿐이었지만.

이몽룡이라. 친구와의 대화 외에 또 하나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으니 바로 애증의 전 남친이었다. 길다면 긴 5년의 세월을 함께했지만 결국 그놈의 바람으로 우리의 인연은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인과응보에 따르면 바람피운 놈이 벌을 받고 배신당한 나는 잘 먹고 잘살아야 하겠지만 막상 그놈은 바람피운 여자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결혼한 뒤 떡두꺼비 같은 아들까지 낳았다. 그리고 나는 그놈을 마지막으로 연애와는 담을 쌓기로 결심했고, 말이다. 굳이 내가 담을 쌓지 않아도 다가오는 남자 하나 없었다는 게 함정.

씁쓸한 생각은 집어치우고 사진이나 찍을 생각에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겨우겨우 꺼냈다. 양손에 가득 든 짐 때문에 핸드폰 하나 꺼내려면 우산을 똑바로 드는 걸 잠시 포기해야 했다. 머리카락이 젖었지만, 오늘 공식 일정도 끝난 마당에 아무렴 어쩌랴. 나는 그렇게 힘겹게 꺼내 든 핸드폰을 또 힘겹게 잡아 사진 한 장을 건졌다.

이제 다른 쪽으로 가볼까 하고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뒤를 돌아본 그 순간.

무언가 묵직한 것이 내 어깨를 강타해 나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으으으….”

손바닥과 무릎을 바닥에 제대로 부딪힌 모양인지 살갗이 쓰라렸다.

“괜찮으세요?”

한 남자가 다급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얼굴에 검은색 마스크를 쓴 탓에 제대로 분간하기 힘들었지만, 토끼 눈을 한 것만은 분명히 보였다. 그는 척 보기에도 안절부절못하는 손짓, 발짓으로 옆에 떨어진 우산을 급히 주워 내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괜찮으세요?”

“으… 네… 괜찮습니다.”

“일어나실 수 있겠어요?”

그는 한 손으로 우산을 들어 나에게 씌워 준 채로 다른 한 손을 나에게 내밀었다. 엉덩이가 아팠지만, 빗물이 가득 고인 바닥에 앉아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하는 수 없이 그 남자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손바닥의 상처가 빗물에 섞여 더욱 쓰라렸다. 그는 엉거주춤하게 걷는 나를 부축해 바로 옆의 정자로 데려가 조심스럽게 앉혔다.

“잠시만요.”

나는 정자에 걸터앉아 손바닥에 묻은 흙을 살살 털어내며 그 남자가 향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척 보아하니 내 양손에 있던 짐들이 멀리도 날아간 모양이었다. 그는 부리나케 이쪽저쪽으로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며 내 노트북 가방이며 선물 상자, 새로 산 우산을 집어 왔다.

“저… 일단 여기….”

어느새 다가온 그가 내 옆에 짐을 하나하나 내려놓았다. 나는 가장 먼저 선물 상자부터 확인했다. 분명 이미 처참히 깨져 버렸을 술병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상자 안에서 산산이 조각난 술병 사이로 금쪽같은 내 술이 빗물과 함께 흥건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보다 더 긴장하며 바라보던 그가 그 모습을 보고 울 것 같은 눈으로 탄식했다.

“아이고… 이걸 어째….”

이미 내 손을 떠난 술을 어찌하겠는가. 나는 쿨하게 상자를 그에게 내밀었다.

“죄송하지만 이것 좀 저기 뒤 휴지통에 버려 주시겠어요?”

“앗, 네. 물론이죠.”

그는 지령이라도 떨어진 듯 내 손에서 상자를 건네받아 휴지통으로 다다다 뛰어갔다. 사실, 문제는 술병이 아니라 노트북이었다. 내 업무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 노트북이 과연 그 충격과 빗물에서 살아남았을지가 관건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노트북을 꺼내 전원 버튼을 눌렀다. 지령을 마치고 돌아온 남자가 복권 당첨 번호라도 기다리는 사람처럼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내 옆에 서서 노트북 화면을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휴….”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원도 켜졌고 문제 될 것은 일단 없어 보였다. 아마 서비스 센터에 가서 확인을 다시 해보기는 해야겠지만. 초조하게 선고를 기다리던 그를 보며 내가 말했다.

“다행히 크게 문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하아….”

그가 말 그대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 정도 리액션이면 어디 가서 잘못하더라도 욕은 안 먹고 살겠군 싶었다.

“저 일단 병원에 함께 가서 치료받으셔야 할 것 같은데….”

“뭐 이런 걸로 병원까지, 괜찮습니다.”

“하지만 많이 다치신 것 같은데요….”

아닌 게 아니라 스타킹은 찢어져 큼지막한 구멍이 나 있고 손바닥과 무릎에는 생채기에서 난 피와 비에 젖은 흙탕물이 한데 뭉쳐 흉한 몰골이었다.

체념한 나의 표정을 본 그가 핸드폰을 꺼내어 지도 앱을 켠 뒤 병원을 검색하기 시작하다 이내 탄식을 내뱉었다.

“이걸 어쩌죠. 여기 근처에 병원이 없네요. 병원이나 약국이라도 가려면 아무래도 좀 멀리 나가야 할 것 같은데….”

“저 정말로 괜찮습니다.”

물론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튀어나오는 나의 입버릇이었다.

“제가 바로 앞에 차를 세워 놨는데 제 차로 이동하시는 게 어떨까요.”

“……?”

“아, 혹시라도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데 저 정말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이상한 사람이 자기가 이상하다고 하지는 않죠.

“정말로 정말인데….”

“…….”

아무리 그래도 모르는 사람의 차를 탈 수는 없어 뭐라고 대꾸하지 못하고 앉아 있는 나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을 쩔쩔매던 그가 이내 결심했다는 듯 말했다.

“저, 잠시만요.”

말을 하고서도 결심이 확실히 서지 않는지 머뭇거리던 남자는 결국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무언가를 주섬주섬 뽑아 들더니 나에게 내밀었다.

“제 민증입니다! 저,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실 제가….”

자신의 주민등록번호만 검지로 가린 채 내 눈앞에 쓱 내민 그의 민증에는 어디서 많이 본 남자의 사진이 떡하니 붙어 있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어디서 많이 본 이름이 떡하니 적혀 있었다.

최. 연. 상.

최연상? 그 천만 배우 최연상?

나는 순간 민증에서 눈을 떼고 그 남자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는 마스크를 손으로 내린 채 조금은 부끄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은 분명 내가 알고 너도 아는 감초 역할의 대부 그 최연상이 맞았다. 원래부터 미남형과는 거리가 멀기로 유명했지만 실제로 보니 큰 키에 다부진 체격을 보유하고 있어 연예인 티가 제법 나는 것이 어찌어찌 훈남 아저씨라고는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외모였다.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고 동공이 확대되려는 차, 나는 겨우겨우 이성의 끈을 잡았다.

‘아니지, 아니지. 이런 반응은 실례야.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서는. 정신 차리자, 정은수.’

체감으로는 0.01초 만에 본래의 포커페이스로 돌아온 내가 사뭇 고고한 표정으로 아무 일 없는 척 시선을 살짝 내리깔았다. 그러자 그는 입사 면접이라도 보러 온 사람처럼 열정적으로 자기 PR를 시작했다.

“최연상이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제가 신원 하나는 확실합니다. 혹시라도 저랑 계시다가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곧바로 경찰에 신고하세요. 아니지, 아니지. 그냥 제가 자진 출두하겠습니다. 믿어 주세요.”

이렇게까지 된 이상 굳이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정 그러시다면… 저는 약국이든 병원이든 상관없으니 제일 가까운 곳으로 부탁드릴게요.”

내 허락이 떨어지자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넵, 알겠습니다! 가방 이리 주세요.”

이미 내 노트북 가방과 우산을 한 손에 쥔 그가 숄더백까지 들어 줄 태세로 힘차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무거우실 텐데….”

“진짜 괜찮습니다.”

단호한 내 눈빛에 시무룩해진 그가 풀 죽은 강아지 같은 눈을 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감정 표현이 확실하신 분이로구먼.

옷이고 신발이고 잔뜩 젖어 찝찝한 기분으로 나는 광한루 앞에 세워진 그의 차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우산 하나는 잘 드는지 더 이상 내 쪽으로 비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아 걷기가 그나마 수월했다.

결국 남원 여행은 이렇게 안녕이군.

그건 그렇고 천만 배우 최연상과 함께 생경한 남원 땅에서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병원을 찾고 있는 정은수라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

기다리고 기다렸던 남원 여행이 이렇게 좌절되어 마음 한구석은 쓰렸지만 그래도 나름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나는 최연상의 안내대로 운전석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차 안에서는 은은하고 달콤한 바닐라 향기가 가득했다. 보통 아저씨들은 이렇게 달콤한 향 싫어하지 않나? 나는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에 입력된 보통 아저씨들의 차량 방향제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주로 아저씨들이 좋아하는 방향제는… 모과라던가… 또… 모과… 라던가… 그리고 모과 같은데.

노란빛의 큼지막한 모과를 떠올리던 그때, 분주한 몸짓으로 내 짐을 뒷좌석에 싣고 나서도 한참 동안 함흥차사이던 최연상이 운전석 차 문을 달칵 열고 들어왔다.

“저… 나름대로는 열심히 뒤진다고 뒤져 봤는데… 당장 쓸 만한 게 이것밖에 없네요.”

최연상의 손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큼지막한 검은색 후드집업이 들려 있었다. 옷가게에 진열된 것처럼 정사각형 모양으로 반듯이 접힌 상태였다.

“추우실 텐데 일단 이거라도 걸치고 계세요.”

비에 젖은 생쥐 꼴을 한 내가 걱정된 모양이었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옷을 받아 들었다.

“어… 그러니까… 물론! 사람마다 취향이 다를 수 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옷을 입는 건 자신의 취향을 고려했을 때 이번 생에서는 단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옷을 입으니 차라리 얼어 죽는 편이 훨씬 낫겠다. 이렇게 생각하셔도 저는 100% 이해합니다. 이해하고 말고요.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 저는 절대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아요. 우리는 모두… 서로의 취향을 존중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요? 그렇죠?”

잠시 동안 멍하니 옷을 바라보던 내 모습이 괜한 오해를 불러왔나 보다.

“앗. 그런 거 아닙니다.”

정신이 퍼뜩 든 내가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절대로 저는, 미워하지 않아요. 원망도 하지 않아요. 우리는 모두 존중받아야 하니까요. 우리 모두에게는 입기 싫은 옷은 거부할 권리가 있죠. 아무렴 그렇죠.”

“아니요! 감사히 잘 입겠습니다.”

이러다가 끝이 안 나겠군. 그런데 정말 오해예요.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 강한 부정의 뉘앙스를 한껏 표현한 뒤 최연상에게서 받아 든 후드 집업에 팔을 하나씩 쑥 집어넣었다. 누가 봐도 남자 옷임을 숨길 수 없을 만큼 넉넉한 사이즈 덕에 나는 마치 아빠 옷을 입은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옷에서는 라벤더의 섬유 유연제 향기가 났다. 역시 달달한 쪽이 취향인 게 확실하다. 거슬리지 않을 만큼 은은하지만 존재감 있는 라벤더 향기와 거기에 섞인 최연상의 부드러운 체취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최연상은 이런 향이 나는 사람이구나. 뭔가 포근하다.

“저도 이런 상황만 아니었으면 아저씨 옷을 권하지는 않았을 텐데. 비도 오고 바람도 쌀쌀하게 불다 보니 감기 들까 봐 걱정되어서요.”

헉. 아까 내가 속으로 아저씨라고 한 거 들었나?

“아니요, 정말로 저는 아주 맘에 듭니다! 뭐 이게 등산 잠바도 아니고 그냥 후드잖아요? 하하하.”

“엇. 등산 잠바는 안 입으시는구나….”

“네?”

“어휴… 십년감수했네, 십년감수했어.”

내 말을 들은 최연상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연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아니 제가 등산 잠바랑 후드 중에 엄청나게 고민하다가 이걸로 가져왔거든요. 아이고 정말 큰일 날 뻔했네, 하하하. 제가 마지막 순간에 선택을 아주 기막히게 잘했네요.”

“하… 하하하?”

농담이시죠?

“아주 잘했어, 나 자신. 칭찬해.”

최연상이 왼쪽 손을 뻗어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 말은 또 어디서 배우신 거예요….

“하하….”

인위적이기 짝이 없는 웃음소리만 겨우 내며 최연상을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던 나는 순간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러니까… 이 기시감의 근원을 찾아 올라가 보자면… 아무것도 모르던 대학 새내기 시절 재수생 출신 동기 오빠 손에 이끌려 대학로 소극장에서 처음 연극을 보던 날. 맞다. 그때다.

‘오빠는 주로 소극장 연극을 보는 걸 즐겨.”

‘네에….’

‘오빠가 생각하기에 대형 공연은 뭐랄까… 상업성에 찌들어 있다고 할까? 예술의 혼이 담겨 있지 않아. 진정한 예술가의 진면모를 보여주지 못하는 느낌?’

‘…….’

‘텅 빈 소극장에 홀로 앉아 연극을 보다 보면 삶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고찰할 수 있게 되지. 존재의 의미란 뭘까… 사랑의 의미란 또 뭘까….’

‘…….’

‘은수는 사랑의 의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오빠는 가끔 이런 고민을 해. 우리는 왜 이렇게 쉽게 누군가에게 미칠 듯이 빠지고야 마는 걸까….’

그리고 나를 보던 그윽한 눈빛.

‘그… 글쎄요….’

‘오빠가 하는 말, 너무 어렵지? 하하. 은수가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어야 하는데. 미안, 미안. 오빠가 예술에 대해 논할 때는 좀 진지해져서.’

‘…네….’

‘오늘 볼 연극은 은수가 보기에 좀 어려울 수 있는데 괜찮아. 오빠가 다 설명해 줄 테니까. 오빠만 믿고 따라와.’

동기와의 사이가 조금이라도 틀어졌다가는 사달이 나는 줄 알았던 스무 살 시절이었다. 지금이라면 개수작 부리지 말라고 사이다를 날려 줄 수 있겠지만.

어쨌든 기시감을 느끼는 건 이 부분이 아니다.

열 명도 채 되지 않는 관객을 앞에 두고 한껏 집중한 배우들의 모습. 그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캄캄한 무대에서 자신에게 집중된 한 줄기 조명을 홀로 받으며 중얼거리던 배우의 모놀로그… 바로 여기다. 최연상에게서 배우의 향기가 느껴져… 최연상 씨 정말 배우 맞군요.

그렇게 내가 몇 초간 시간 여행에 몰입한 사이 어느새 독백을 마친 최연상이 방금 전 멘트가 꽤나 만족스러웠는지 만면에 함박웃음을 지은 채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자, 그럼 이제 안전띠 매시고!”

최연상의 큼지막한 손이 떡하고 핸들을 감쌌다. 정신이 쏙 빠져 있던 나는 최연상의 말에 잠에서 깬 듯 깜짝 놀라 부랴부랴 안전띠를 맸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내가 안전띠를 맬 때까지 기다린 그가 천천히 시동을 걸었다. 내비게이션에서 나오는 여자 목소리의 경쾌한 기계음과 함께 최연상과 내가 탄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약국보다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셔야 할 것 같아서 가까운 병원으로 제가 신속하고 안전하게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 하하하… 네….”

“많이 아프시죠?”

상처가 쓰라린 건 사실이었다. 본래 생채기란 언제나 생채기치고 지나치게 아픈 경향이 있다.